가을 여자
오정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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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정희 작가의 글은 생활인의 냄새가 물씬 묻어난다. 세월의 더께에 묻혀 깎이고 다듬어진 삶의 질감의 모습을 고스란히 내보여준다. 여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관념과 단상을 예의 부드러운 시선으로 보듬었다. 이 책 또한 전작 <돼지꿈>에 이은 단편 옴니버스 식 우화 모음집이다. 그래서 이즘이면 토설하듯 뱉어내는 작가의 글이 반갑기도 하고 살가움마저 생긴다.




여자의 존재와 정체성을 일상의 모습으로 담아낸다는 것은 오정희 작가의 특유의 붓놀림이다. 그러하기에 오정희 작가의 글은 누구나 공감하고 편안함이 주는 글맛이 강점이다. 무엇보다 한 편 한 편 낯설지 않은 익숙함이 사변으로 치닫는 무거움의 두께를 걷어냈다는 데 있다. 어느 곳, 어느 때에나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우리네 일상의 이야기이기에 그 속에 담긴 감동이 더욱 진한 여운을 남기는지 모른다.




짧은 글담 속에 담긴 패턴은 오욕칠정이 빚어 낸 희로애락이다. 중년으로 접어 든 여인들을 통해 삶의 본질과 현실에 비친 존재 사이의 괴리감을 적절하게 조명하는 이야기가 주류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쏜살같이 내달린 시간의 흐름에 어느 새 변해 버린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바라본다면 얼마나 어색하겠는가. 어찌 보면 이것이 인생이라고 조용히 마침표를 찍는 글이 선명하게 각인되는 느낌마저 기운다. 




인간은 누구나 인생의 고저장단을 홀로 넘는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물음의 기저는 정체성의 경계를 되묻게 된다. 이 땅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수많은 것을 요구받고 척척 해내기를 응당 강요받는다. 관념이라는 보편적 가치는 피할 수 없는 무거움이다. 때가 되면 단계별로 올라서듯 일정한 패턴을 그려나가기를 은연중에 요구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경계를 벗어난다는 것은 사회적 시선을 감내하기로 약속한 무언의 강요다.




따라서 여자라는 신분의 정체성은 시시각각 변한다. 자신이기보다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며느리로 살아감에 신분적 타성에 젖고 내면의 자신은 오롯이 억압당하는 게 대개다. 밍크코트가 로망이라는 어느 시어머니의 바람이 며느리에게 곱지 않게 보이는 것은 상대성이다. 또한 순수했던 시절 펜팔친구의 우연한 만남에 설레었으나 보험외판원으로 변한 현실에서 조우하는 씁쓸함은 철 늦은 사랑노래다.




그래도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랑이라는 작가의 여유로움처럼 허무만 똬리를 틀고 있지는 않는다. 사랑이라는 말랑말랑한 물질이 있기에 분위기에 취하고 흥에 겨워지는 것도 잠시의 이탈이 만들어주는 신선함이다. 나라는 존재감이 그곳에 있기에 흔들림 없는 안정감을 분출해 내는 것도 이와 같은 의미다. 결국은 소녀적 감성이 여자를 채운 내피인지 모른다. 날선 세상에 구르고 닳아도 여자는 여자라는 뜻이다.




제 아무리 여자팔자는 뒤웅박 팔자라고 눙쳐도 금세 현실로 돌아서는 그네들의 모습은 모성이 주는 넉넉함이다. 여자는 관심을 기울여주고 이해해주고 존중해 주길 바란다. 파도처럼 오르내리는 감정의 불규칙성 속에서도 여자는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을 원한다. 비록 삶의 무게로 어느 새 시들어 버렸다 할지라도 꿈꾸는 사랑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일상은 서릿발처럼 차가워도 마음은 청춘이기에 여자는 오늘도 아름다움을 꿈꾼다.




짧지만 강한 임팩트를 주는 글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다시 강조하지만 가을이기에 주는 감성적 변화도 물론 한 몫 하겠거니와 무시하지 못할 이 책의 재미는 더 없는 공감이다. 가난에 치이고 생활에 억눌려도 삶의 화두는 사람 사는 곳에서부터 나오기에 여자의 시각을 통찰하기에 더 없이 좋은 글이다. 한적한 오후 감미로운 커피와 함께 곁들여 본다면 더 없이 만족스러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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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11-04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참 좋아요.


穀雨(곡우) 2009-11-05 08:4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소리꽃 1 - 2009년 제25회 펜문학상 수상작
유익서 지음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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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삶에서 노래를 뺀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삭막할까? 기쁠 때든 슬픈 때든 노랫가락에 녹아든 구성진 한 소절 흥얼거리면 즐거움도 슬픔도 있는 그대로 좋기만 하다. 그래서 노래는 길을 따라 흐르고 우리네 산천을 따라 모양새를 갖추어 피고 지기를 했는지 모른다. 핍박당하고 억눌린 민초들의 삶을 노래에 담고 희로애락과 오욕칠정을 오롯이 담았기에 울림이 공명통처럼 깊고 푸르다.




이 책 <소리꽃>은 우리네 삶에 스며든 진정한 소리를 글로 피어 냈다. 문자로 다듬어진 노래는 소리처럼 향이 솟아난다. 거칠고 투박한 한 많은 서민들의 애환과 풍광이 고스란히 파고들어 절로 감흥하고 애틋해 진다. 문자향처럼 알알이 번지는 심오한 음율은 독자들의 마음을 보듬는다. 장르도 소재도 근간에 보기 드문 전통적인 채색이 물씬 묻어올라 눈이 퍼뜩 뜨이게 하지만 무엇보다 저자가 엮어간 이 책의 전체적인 색깔은 결연한 느낌마저 강하게 든다.




책을 짓기 위해 10여년의 세월을 살을 대고 다듬고 고쳤기에 창작의 고통과 위대함은 말로 형용하기 힘들다 하겠다. 산업화와 근대화에 매몰된 우리네 소리를 찾고 자료를 조사하고 그 속에서 우리의 얼을 솎아 낸다는 것은 여간 해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전통의 파괴와 추락은 소리마저 변화시키고 고루함으로 돌려 세운 현실이 어제 오늘의 일이던가? 그래서 저자의 글과 소리는 어쭙잖은 국적불명의 노래에 열광하고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세태에 경종을 울릴 준엄한 소리처럼 들린다.




그런 맥락과 이유로 저자는 나를 통해 너를 내세운다. 너는 작중주인공 솔이로 분하기도 하며 목판을 읽어 내려가는 나의 의식을 대변하기도 한다. 이미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에서 맛을 보았던 2인칭시점은 흐름을 상당히 부드럽게 몰고 가는 역할을 한다. 독자의 시점이 자연스럽게 나로 변해 관찰하고 분석하는 위치에 서 이야기에 몰입해 나가는 상태를 편안하게 열어 주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목판에 펼쳐진 이야기의 정경이 35㎜ 실사 영상처럼 소리의 음을 타고 물결처럼 퍼져 나간다.




솔이는 여염집 처자로 노래의 천운을 타고 태어났다. 그녀가 받은 신기와 같은 기이한 운명은 불교적 색채와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녹색손님이 등장하고 불경에 나오는 상상의 새의 현신인 가릉빈가와 가루다, 대나무 꽃의 분신 항아리가 출현하는 것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속세의 삶의 표출이며 험난한 미래를 암시하는 메타포로 작용한다. 이러한 기교적 장치와 신화적 요소만을 놓고 보더라도 상당히 공을 들인 작품임이 확고해 진다. 그렇지만 몽환적이고 심미적인 서두의 출발이 난해한 것은 사실이다. 작품을 풀어 가는 매개체로 항아리가 솟은 계기를 풀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구조이겠으나, 익히 듣지 못한 고어체와 잊혀진 말들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야기가 전개되고 솔이의 세상을 향한 도전이 시작될 즈음부터 빠르게 펼쳐지는 이야기의 감칠맛은 시간의 의미를 무색하게 한다. 솔이를 돕고 세상에 불리지 않은 노래를 찾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양한 상념을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때로는 무채색으로 때로는 흙빛에 쌓인 잿빛으로 기쁨에 겨워 넘치는 옥빛으로 태양을 바꾸어 가며 물드는 우리네 삶의 대서사는 자연을 담은 질그릇처럼 투박스럽기도 하며 빛깔고운 색을 은은히 뿜어낸다.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시대 후기를 기반으로 한다. 붕당의 난립과 정쟁으로 얼룩진 시대적 암울함과 노론의 성리학이 지배적 이념으로 작용하던 시절이었다. 성리학은 명분과 대의를 존중하는 중화사상에 빠져 우리의 것을 천박하게 치부하고 엄격히 다루었다. 그래서 더욱 우리의 얼과 전통이 중화에 의해 짓밟히고 어스러졌던 때이기도 하다. 이처럼 소리에 담긴 서정성을 확보하고 시대적 필요를 드러낸 것은 저자의 의지의 반영이기도 하다.




우리 것에 담긴 전통성과 진정성, 현장성이 살아 숨 쉬는 소리로 체화될 때 제대로 된 소리로 탄생한다는 의미다. 더불어 저자는 우리네 정서 중 한(恨)에 대한 정서를 해피엔딩으로 갈무리 짖고자 하는 바람도 드러냈다. 이야기 중 최개동의 억울한 사연과 남사당패에서 줄을 타는 어름사니 도일에게서 전기수(책 읽어 주는 사람) 대우에게서 얻은 각별함과 고강의 절개와 그림을 향한 열정이 겹겹이 쌓여 이 책을 이루어 냈다.




그런 만큼 구성지게 걷어 올리며 터져 나오는 소리는 작위적이고 인위적 것과 거리가 멀다. 소리에 담긴 정서와 감정은 인간 본성의 그것과 같다. 솔이가 오랜 고초와 역경을 이겨내고 얻은 득음의 순간을 통해 걷어 올린 소리는 우리를 투영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사는 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 이토록 구구절절하게 와 닿을 수 있을지 자문하게 된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기에 우리 속에 담긴 그릇의 깊이와 결을 온전히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대로 담아내기란 불가능이다. 길속에 노래가 있고 우리 속에 노래가 있다는 것도 현실을 반영한다는 의미다. 노작가가 신명을 다해 바친 이 글에서 우리는 무엇을 담을 지는 본인의 몫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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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9-10-17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시대 전기수들은 걸어다니는 책이었지요. 책을 통째로 외워야 했으니 암기력도 뛰어나야했고 소설 같은 경우는 변사처럼 대사까지 리얼하게 재현했으니 그 재주가 얼마나 뛰어날까 추측이 안됩니다. 소설의 맛이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인데 2권은 아직 안읽으셨나요?

穀雨(곡우) 2009-10-19 08:56   좋아요 0 | URL
2권도 읽었어요. 각권으로 나뉜 리뷰를 나누어 적긴 그래서....^^
전 이 책 보고 몰랐던 걸 많이 알았어요. 전기수도 그렇고 어름사니도 그렇고
 
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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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너무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면 진저리가 난다고 했던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말은 부작위(不作爲)를 의미한다. 실정법 상 유기죄는 대표적인 부작위범이다. 작위의무가 있음에도 능동적인 구호조치를 취하지 않는 행위를 벌하겠다는 법리다. 이것도 법적 안정성이라는 테두리 내에서만 가능한 일이겠으나 어찌 생각해보면 누구도 자유로울 순 없다.




내가 무진에 사는 자애학원의 천인공노할 일을 목도한 시민이었다면 어찌할 수 있었을까? 진실은 항상 불편하다는 작가의 말처럼 침묵으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알 수 없는 논리로 넘어가야 할까? 아니면 농인들을 대변하던 강인호나 서유진 인권센터직원처럼 불의에 맞서 항거의 몸부림이라도 해야만 할까?




읽을수록 불편한 마음은 더부룩 답답하기만 하다. 명치 언저리 쯤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딱 그 짝이다. 속 시원하게 활명수 한 병 들이킨다고 달라질까마는 그런다고 해결될 수 있음 정말 좋겠다. “잘못했다면 벌을 받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나서야 한다 그러나......“로 돌변하는 그 젊은 목사의 매캐한 말이 ‘진실이 덮이고 눈을 감는 것은 시간문제구나’하는 생각이 비단 이것만은 아니리라.




명백한 범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권력구조를 따져 보고 이권을 재는 것의 밑바탕은 이 사회가 윗대로 물려받은 요상한 대물림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라면 희망도 신념도 얼마쯤 뚝 떼어 나누어 팔 수 있겠다. 진실은 결코 개들에게 던져 줄 수 없다는 작가의 말도 이해 못하는바 아니나 이런 현실이라면 침묵하는 저들을 무엇으로 바꾸겠는가. 




제 아무리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 기본권과 존엄성의 가치가 단 일 그램의 오차범위 없이 모두에게 동일성을 부여한다고 할지라도 달라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저주스런 한국식 온정주의에 물든 메커니즘이지 싶다. 이른바 힘의 불균형에서 오는 구조적 차별이자 모순이다.




작가가 강인호를 통해 보여준 소시민적 모습은 나를 보는 불편함이다. 권력을 향한 소리 없는 외침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공허함이다. 무진에 짙게 깔린 해무(海霧)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보지 못하는 그들과 무엇이 다를까? 신체의 장애가 아니라도 마음의 장애는 그 크기나 형태가 똑같다. 그것을 현상의 다름에서 오는 차별로 인식할 뿐 마음에서 오는 소리는 외면하기 때문이다. 침묵의 카르텔이 생산하는 눅진한 끈적거림은 원래부터라는 논리로 인정해 버린다.




자애학원의 농인들도 보편적 인간의 유전자구조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인면수심의 그들의 짐승만도 못한 행위를 버젓이 보고도 내버려 둔단 말인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인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분개하고 관심을 가지고 그러다 시간이라는 명약(?)이 우리를 서서히 가라앉게 만들고 타협하게 만들 것이니 말이다. ‘적당히’라는 그것으로 말이다.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메커니즘이 이런 것일까? 온정주의로 무장한 적당히 눈 감아 주는 것이 과연 미덕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 드러난 구조적 모순은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치부를 드러내더라도 할퀴고 물어뜯는 야만성은 희망을 얼어붙게 만든다. 야비하다 못해 역겹기까지 하다. 가진 자들의 연대가 이토록 견고한 철옹성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것이라면 깨트리기 힘든 요새나 진배없다.




가진 자가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에너지는, 가지지 못한 자가 그것을 빼앗고 싶어 하는 에너지의 두 배라고 한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의 쾌락과 가지지 못한 것의 공포를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거짓말의 합창은 그러니까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어서 맑은 하늘에 천둥과 번개를 부를 정도의 힘을 충분히 가진 것 이었다.(p-246)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과 인권침해는 명백한 사회적 부작위다. 장애와 비장애를 나누는 기초적인 기준부터 새롭게 바꾸고 개선해야 한다. 그들이 조금 불편한 신체적 특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 하나만으로 지금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방치된다는 것은 ‘더불어 사는 사회’의 참된 의미를 곡해한 처사다. 자연이 가진 놀라운 자정능력을 이제라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시스템의 문제가 아닌 인식의 문제며 포용의 요구다. 왜(Why)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How) 바꿀 것인가의 문제로 직시해야 한다.




높은 도덕적 연대의식은 공공의 선을 만드는 기준이 되며 이러한 작동원리는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순환하고 피돌기를 하게 만드는 버팀목이 된다. 저자의 사상적 맥락 또한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소시민적 변화를 희망한다. 비록 각색에 의해 한 꺼풀 낮춘 이야기로 탈바꿈 되어 아비규환의 세상이 <도가니>로 내려앉았으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공지영작가의 평소 철학 그대로 담고자 한 것은 담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렸기에 그저 독자들의 눈물샘이나 자극하자고 펜을 들진 않았으리라 본다.


분명 어떻게 받아 들일까하는 것은 읽는 사람의 자유의지다. 작가의 엔딩에 담긴 이 사회를 향한 거대한 바람처럼 나는 소망해 본다. 밀알처럼 키위 일궈낸 희망의 싹이 갈아엎은 대지 사이로 다시금 잎을 틔웠다는 바람처럼, 홀로 더불어 꿋꿋하게 살아가겠다는 홀더의 바람처럼 그렇게 모두 행복해지기를 말이다. 비록 세파에 시달리고 가난이라는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현실에 치이고 멍이 들더라도 희망만은 사라지지지 않는 그것으로 남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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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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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는 일견 섬뜩한 말이다. 지극히 은유적 표현임에도 드러난 상태는 두렵기 그지없다. 자유롭지 못하다면 죽음보다 못하다는 감추어진 의미를 차치하고라도 직설적이고 자극적이기까지 하다. 읽는 내내 편하질 못하다. 야릇하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이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마음 한편 애써 누른 저릿한 동통이 동반해 온다. 낯익지 않은 정경으로부터 오는 혼동일까? 아니면 단단한 껍질에 갇힌 불편한 진실일까?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다양한 상념에 물들게 한다. 무엇을 그리고 어떤 것을 담았기에 이토록 절절할까하는 의구심부터 성큼성큼 내지르게 만든다. 두 남자, 이수명과 류승민의 기막힌 삶. 그들은 인간으로부터 절절히 미치고 붙들려 갇혀서 제대로 미쳐 버렸다. 양극단을 오고 가는 곡예단과 같은 삶에 피멍든 20대 끊어 넘치는 열정의 영혼이다. 그런데 그들은 존재감이 상실된 무형의 인간이자 잉여인간이다. 인간이 인간을 가둘 작위적인 명분에 의해 분류된 수리희망병원 인내반 아무개에 지나지 않았다.


저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그들을 통해 자유를 향한 원초적인 오랜 물음에 답을 구하고자 하였다. 익숙지 않은 배경을 무대로 도두라진 상호대비감을 극대화하였으며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효과를 기대하였다. 이야기는 씨줄과 날줄이 맞물려 돌아가 듯 치밀한 구성과 전개로 진하게 우려 낸 감동을 자아낸다. 한 번에 몰아치는 호흡이 아닌 여러 번에 나누어 걸친 호흡과 템포는 절정으로 향할수록 거침없이 달뜬다. 그들에게 자유의 본질을 구하는 순간부터 예견된 신념을 향한 여정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다. 아니 어쩌면 여유를 잃어 버렸는지 모른다. 이미 승민과 수명의 만남 그 순간부터 운명처럼 드리워진 삶의 무게였는지 모른다.


더욱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들이 선 곳은 정신병원이다. 그들을 둘러 싼 군상들 또한 정상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나눈 편견에 불과했다. 오히려 위선도 가식도 없는 순수함에 더 가까운지 모른다. 단지 마음이 아플 뿐이지 다른 것은 어떤 것도 없다. 우리는 살기 위해 자유를 조금씩 양보하고 내어 준다. 그 속에서 정체성의 현기증에 타협하고 순응하며 언제 있을지 모를 미래의 그날을 갈구하며 그렇게 영혼을 갉아 먹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이른바 정신병자다. 심각한 공황장애와 적응장애로 진단된 부적응자다. 그들은 정상의 삶을 살지 않았음에도 너무도 정상에 가깝다. 타자로부터 빼앗긴 자유의 항거는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행복추구를 위한 몸부림이며 처절함이다. 수명과 승민을 이렇게 만든 현실은 진정한 애정과 교감이 결핍된 소통과 공존의 부재에서부터다. 이해와 신뢰가 절실하였음에도 그들에게는 사치이며 벼랑 끝으로 밀려 나기에 급했다.


극단의 우울증을 앓던 어머니를 유기하여 죽음으로 던진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명의 삶에 사생아로 태어나 이복형제들과의 유산다툼에 휘말린 승민의 기구한 운명은 자신을 지배하던 통제된 삶의 전형이다. 사실 정신병원은 눅진하고 괴기스러운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제 아무리 좋게 봐 주려해도 꺼림칙한 것이 사실이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상이 단조롭지 못하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인간이 만든 전체를 가르는 구분에 우리는 편견의 벽을 쌓고 사는지 모른다. 그들에게 단순히 장애는 정신질환이다. 몸이 아파 병원에서 치료를 받듯 정신이 병들고 힘든 상태다. 하지만 엄청난 충격에 의해 입은 내상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묻히기 쉬우며 다름을 식별할 수 없다. 편견이 생산한 착각이자 오만이다. 오만은 구속을 합리화하고 폭력에 무뎌지게 한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그들도 인간임을 뒤늦은 깨우침을 얻는다. 정신지체를 가진 한이와 지은이를 통해 인간의 기본권마저 철저히 유린당한 영혼에 분개하고 생니를 송두리째 뽑아 내 버리는 것으로 울분을 토로하는 한이의 절규에 인간을 혐오하게 한다. 누군가에게 군림한다는 것은 영혼마저 앗아 오는 것으로 인간을 오염시키는 오랜 망령이다. 이처럼 수리정신병원에 수감된 영혼들은 구구절절한 사연을 하나쯤은 간직한 힘없는 영혼들이다.


저자의 경험칙에서 불러 온 그들을 통해 차별을 목도하고 수명과 승민을 통해 자유를 보았다. 청춘에게 받치는 거창한 헌사가 아니라도 당당히 나설 명분을 얻는다. 인간의 내밀한 본성을 치밀하게 소환해 낸 저자의 필력이 대단하다. 비열, 외면, 위선, 두려움의 원형은 껍질에 불과하며 세상과 맞서기 위한 수단에 불과함을 이토록 멋지게 담아 낸 그녀의 역량에 차재의 행보가 기대된다.


말랑말랑 굳어 버린 그것은 바로 자유를 향한 치열한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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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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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아 가비, 커피를 아우르다.




노서아 가비. 러시안 커피란다. 커피를 지독히 사랑하면서도 러시아산 커피는 생소하다. 대개 에티오피아, 콜롬비아, 동티모르 産 커피는 익어도 여태껏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제목에서부터 풍기는 궁금증의 유발은 커피처럼 짙고 그윽하기만 하다. 게다가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이야기라.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다. 김탁환 작가의 상상력은 기발하다 못해 시쳇말로 죽인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세상과 엮어 뭉개는 이야기는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자신을 스스로 스토리 디자이너로 명명한 정체성과 글발의 화수분은 부럽기 그지없다. 무엇보다 시시콜콜하게 풀어 쓰지도 나열하지도 않고도 자유자재로 상황을 지배하는 필력은 압권이다. 그래서 예의 어색함도 없으며 자연스럽게 사건을 따라 움직이는 이야기의 행방에 어지러움도 없다. 그런데도 이야기의 정점은 첨예하게 얽히고 대립한다. 식상할 법한 이야기도 그의 손을 거치면 새롭게 보이게 하는 마이다스의 손처럼 희한한 능력을 가진 것일까 하는 착각마저 인다. 지나친 과찬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흠모할 능력임에는 틀림없다.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 따냐.




이야기는 구한말을 배경으로 거침없이 내달린다. 신문물이 홍수처럼 쏟아지던 그 시절, 새로운 세상과의 조우는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에 충분하다. 열강의 틈바구니에 끼어 자주성을 상실한 조선의 암울한 운명을 담보로 뽑아 낸 추출물은 커피가 품은 본래의 그것, 검은 색과 동색일지 모른다. 그래도 커피와 조선은 좀처럼 어울리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것도 뻬쩨르부르크에서 날아 온 생경한 커피이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저자는 단숨에 들이키듯 조금의 음미할 여유도 허락지 않고 커피로부터 걷어 올린 진한 향을 쏘아 올리기에 정열을 다한다. 자유를 갈구한 보헤미안처럼.

이 책의 두 주인공 따냐와 이안은 노마드적인 삶을 산다. 조선이 가진 보수적 이미지와는 파격적인 변신이다. 우선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가 여자라는 것도 그렇고 신분의 벽을 파괴한 것에서부터의 출발도 그렇고 세계를 무대로 영혼을 내맡기는 스케일이 웅장함이 그렇다. 기존의 역사소설과는 그 궤를 견주려도 견줄 수가 없다. 실제와 상상이 혼합된 거침없는 배합은 새로운 농도로 재탄생하여 유혹적인 맛을 생산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방커피도, 카페라떼도, 에스프레소도 아닌 전혀 색다른 커피 맛이 난다. 바로 사랑으로 녹여진 자유를 닮은 강렬한 맛이리라.

역사를 뒤흔든 유쾌한 사기극

구한말 조선의 왕, 고종은 우유부단함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는다. 외세의 억압에 굴복당하고 치욕의 대표적인 왕으로 그려지기 십상이다. 이런 고종을 중심으로 이 책의 주인공과 얽히고설킨다는 설정은 일종의 나약함을 씻는 정화로부터의 소망이다. 당시 열강이었던 러시아를 무대로 호쾌한 사기극이 통하고 대륙을 호령하는 그들을 통해 전달되는 생생함은 짜릿함마저 배어나게 한다. 어찌 봉이 김 선달을 모를 수 있겠는가? 세련되고 통 커진 19세기 판 신 김 선달이 바로 그들이다.

그래서 일까? 미장센이 화려했던 김지운 감독의 영화 <놈, 놈, 놈>의 그것과 닮았다. 시대적 배경도 엇비슷해서 상상의 밭이 그쪽으로 기우는 것도 한 몫 하겠다. 만주 벌판을 휘젓던 그들과 동토의 자작나무 숲을 무대를 가로지르던 주인공들과 오버랩 되는 것은 자연스러움이 주는 현상이 아닐까? 이 책이 독자들에게 빛을 보기도 전에 영화화 되었다는 것도 그런 방증이겠다. 여기에 돈에 얽힌 기상천외함이 감칠맛을 더하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또한 치밀한 고증과 수집을 통해 파헤친 역사의 흔적과 상식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이 가진 강점이다.

사랑, 자유에 담긴 커피의 매혹적인 유혹

작가 김탁환은 타냐를 통해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현란한 모습을 펼쳤다. 거짓과 진실 사이를 교묘하게 오고가는 질펀한 심리묘사를 통해 인간 본성의 이면을 내밀하게 보듬었다. 타냐는 신세대 여성이며 개화된 인물이다. 압제와 억압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로 어디에고 속박당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유를 찾아 떠나는 저공비행을 끊임없이 재촉한 캐릭터다. 그러나 타냐가 욕망과 탐욕으로부터 오는 유혹에 철저하게 냉정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은 사랑이다.

사랑이 위대함을 다시 일러 무엇하랴마는 작가가 보여 준 속내는 페미니즘적인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이러한 관점은 양비론적인 새로움이다. 타냐의 캐릭터가 계급, 신분, 지위를 뛰어 넘는 초월적 탄생도 시대가 낳았다는 설정보다 작가의 상상이 만든 산물에 가깝다. 희망이 되었든 소망이 되었든 수평적 시선처리를 통해 우리는 모종의 쾌감을 동시에 받기 때문이다. 마치 갓 볶은 커피의 그윽함에서 바리스타의 농염한 기교와 자연이 만든 매혹적인 그 순수한 매혹적인 맛처럼 말이다.

이래저래 이 책은 단숨에 마셔진다. 뜨거움을 느낄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다. 혼란한 압록강 국경지대가 펼쳐지다가도 러시아공사관으로, 뻬쩨르부르크로, 뉴욕으로 막힘없이 날아오른다. 살아 내기를 위선으로부터 경계하는 사기꾼의 삶일지라도 타냐와 이안의 숨 막히는 사랑은 정열적이다. 아울러 고종의 보일 듯 말 듯 내비친 타냐와의 연정이 은밀한 삼각관계의 줄타기를 보는 즐거움도 있다. 이처럼 노서아 가비는 시대를 잊게 만드는 어울리지 않는 세계를 제법 어울리게 만든 잘 만든 이야기다. 어느새 끝나 버린 이야기에 언제 있을지 모를 시즌2라도 기대하게 만드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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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1 2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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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2 09: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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