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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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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셜 네트워크 전문가들은 지금의 시대를 인간중심의 세계라고 일컫는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인간이 이룩한 문명의 시간 중 가장 번영한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는 중이다. 전 세계를 하나로 묶고 발생 가능한 정보의 획득과정이 만천하에 오픈된 사회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문화적 변화를 추동하는 동인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정치적 지각 판까지 흔들어 바꾸기는 계기가 되었다. 바야흐로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뉴욕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지구 반대편에서 생생하게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사건에 대한 각양각색의 반응이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세상이다. 대개 팩트에 대한 평가는 가치판단의 문제다. 가치를 구성하는 요인은 목적의식을 설정하고 자아의 기준점을 관념이라는 거름망을 통해 개별화된다. 이러한 가치판단의 문제는 철학과 깊은 연관이 있다. 철학은 인간이 집단화되고 사회를 구성하며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게 될 무렵부터 긴밀한 상관관계를 맺어 왔다. 그것은 가치관으로, 삶의 준거점으로 인간을 보다 나은 세상으로 인도하는 시금석이 되어 왔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 즉 관념의 틀은 기술의 발달과는 별개로 변화의 속도에 둔감하다. 사회의 분화적 발달의 속도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며 근래에 와서야 개인의 권리와 자유, 행복, 평등에 대한 가치판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상대적 차별과 권리 상호간의 충돌에 대한 내재화된 문제를 잉태하고 있다. 토마스 홉스는 자연 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판단하고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야지 시민사회로 이행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반면 존 로크는 인간은 모두 평등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정은 자유이며 이러한 상태에 대한 타자와의 충돌, 즉 불편한 상태 혹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정부에게 권리를 양도하여 국가를 창설하였다는 사회계약론으로 요약되는 그의 사상은 중세철학의 위대한 업적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가 다분화되고 가치충돌에 대한 문제가 다양화되면서 일차적인 기준점으로 모든 문제를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산업혁명을 거치고 인쇄술의 발달로 교육의 평준화로 인해 지식의 보편화는 그 자신의 권리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음도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철학적인 접근, 미시적인 윤리의 보편화에 대한 판단은 유동적인 상황을 보편타당한 가치로 바꾸는 터전이 됨은 당연한 이치겠다. 마이클 샌던이 정의를 논하고 다시 도덕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문제의 출발선이 바로 개별화된 판단의 문제를 인식가능하고 공감할 수 있는 그것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이다. 그는 이미 정의에 대해 불편한 환부를 드러내며 우리를 향해 핏대를 세웠다.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는 옳은 일은 하는 것이라고 했다. 옳은 일은 좋은 일에 선행하며 무연고적 자아, 즉 자율의지의 주체만이 인간을 감각적 존재보다 더 높은 존재로 격상시켜 준다고 했다.

 

마이클 샌던의 확고한 믿음의 원천은 옳은 일에 있다. 그의 논점은 임마뉴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의 핵심가치인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지향한다. 공리주의자들의 쾌락에 근거한 행복에 대한 오류를 수정하고 점검하는 방향틀로 그는 칸트를 택했다. 목적에 대한 견고한 신념, 그것은 윤리를 일으켜 세우고 이 시대의 딜레마를 무찌르는 힘이 된다. 기실 자유주의에 대한 접근은 앞서 언급한 존 로크의 사회계약론의 이념처럼 정부에 대한 역할의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다. 정부는 모든 권리를 이양 받아 개개인의 권리형평에 맞게 적용하여야 한다. 하지만 마이클 샌던이 이 책 <왜 도덕인가?>의 1부에서 언급한 동성애자, 낙태에 대한 가치충돌의 문제에서 볼 수 있듯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옳다는 관념의 총합은 인간의 도덕적 판단의 튼실한 자원이 되며 나아가 보편타당한 정치의 틀을 이루는 요소가 된다는 믿음이다.

 

그가 자본주의에 점령당한 인간 본성의 문제를 푸는 키워드로 철학과 윤리의 카드를 꺼내든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의 창이기 때문이다. 속임수가 횡행하고 무관용이 판을 치는 이기적인 행동을 치환하는 방편이 될 것이다.  마이클 샌던이 주장하는 철학의 문제는 비단 미국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미 글로벌화되고 웹 2.0시대를 사는 우리 사회에 그의 명징한 통념은 화두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의 전작 <정의란 무엇인가>의 문제와 연결되는 도덕성 결여의 시대를 사는 우리의 현재 위치를 제대로 보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물론 철학은 고민과 고민의 시간이 응집된 가치의 총체다. 공감의 문제와 밀접하다. 공감은 역차별이나 상대적 반사이익을 옳은 것으로 유지하는 근거가 된다.

 

이처럼 마이클 샌던이 던지는 이 시대의 화두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자신의 권익과 자유의 근원적인 뿌리가 되는 윤리에 대한 진중한 문제다. 우리 사회가 정의와 윤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 또한 불편한 상태가 지속되기 때문인지 모른다. 누구에게나 인식 타당한 가치의 얼개를 구축하는 사회적 합의의 출발점에 바로 정의와 윤리가 존재한다. 이것은 완전한 상태의 이상理想, 그 너머가 아닌 현실의 내재된 이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치열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시도가 될 것이며 다원주의를 극복하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는 존재의 판단이 아닌 현상을 이해하는 목적이 될 것이며 인간을 한 차원 높은 상태로 이끄는 정신적 진화의 도화선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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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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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은 옹색하고 투박스럽다. 또한 불편은 익숙해지면 무기력해진다. 우리 사회에서 불편의 자리는 지천으로 널렸다. 그런데도 불편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매우 상대적이다. 불편에 대한 시선이 불협화음을 퍼트리는 불잉걸처럼 홧홧한 뜨거움이기도 하지만 무섭도록 시리고 차갑기도 하다. 이러한 불편의 이중성은 사회문화적 현상과 밀접하다. 불편을 조장하고 당위성을 부여하는 내밀한 속내는 권위, 계급, 신분, 지배의 메커니즘을 구성하는 부속물과 같다. 불편이 곧 차이라는 등가공식이 성립하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엄청난 괴리감을 발견하곤 한다. 관계로부터 오는 차이의 존재적 필연성을 의식하되 엄연한 경계는 구분짓겠다는 논리다. 시쳇말로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는 편중된 논리처럼 바꿀 수 없는 차이 또한 불편의 범주로 내몬다.

 

이러한 불편의 이중성에 대해 나는 가식과 허위가 조장한 비뚤어진 관계망이라고 본다.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의 근원적인 차이를 고려할 때 불편의 개념은  지배와 피지배, 즉 종속관계에서 기인한다. 이 책 <불편해도 괜찮아>의 김두식 교수의 생각의 거름망도 엇비슷하다.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뭔가 다른 요소들이 개입되면 어김없이 되돌아오는 용수철처럼 불편의 완고함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실제 우리 사회의 곳곳에 스민 갈등과 알력의 문제 또한 불편을 예고하는 전주에 다름 아니다. 김두식 교수가 불편의 패러다임을 비추는 도구로 우리 사회를 가장 밀접하게 투영하는 영화를 소재로 다루며 이 책을 이끌어 가는 방법도 실상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익숙해져 묻혀 버린 색다른 시선의 세상을 탐색하고 활로를 찾아 드려다 보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기까지 하다.

 

기실 이 책에서도 언급이 되지만 영화에 대한 일차적인 정보는 미디어가 생산해 내는 정보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다 보면 제작자의 방향성과 배급자의 실리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병합되어 왜곡되는 정보를 재상산해 내게 된다. 영화를 고르고 선택하는 권리는 소비자에게 있지만 여론의 조장, 정보의 독점성, 제작자의 상업성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상당한 정보의 어그러짐에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책의 기본 얼개가 된 영화를 통한 인권의 실상을 드려다 보는 도구로서의 그것과 같은 맥락이다. 소위 검열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문제다. 단지 김두식 교수가 통념의 잣대를 버리고 색다른 시각의 틀을 부여하는 시도와 노력이 읽는 이에게 더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김두식 교수가 이 책을 통해 공감대를 발화시키는 힘의 원천은 말로 꺼내기에는 불편하고 오염될 것 같은 미적거림의 경계에서 오는 과감한 용기와 도전이 아닐까 한다. 인권의 사각지대를 헤아리고 우리 사회에 소외된 삶을 보듬는 사회 통합적인 의식의 무장은 때론 좌파나 이념의 희생양으로 지목될 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은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인간의 심리는 집단의식에 의해 쉽게 고무되고 휩쓸리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나 또한 그러한 심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김두식 교수가 이 책에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금세 이해된다. 영화 "밀양"은 기독교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포장하고 왜곡하는 과정을 사실적인 묘사와 미장센이 돋보이는 유명짜한 영화다. 인물 한명 한명이 마치 어느 곳에서나 흔히 대할 수 있는 종교인의 행동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주인공으로 분한 전도연의 신들린 연기가 완벽하게 일치하여 짜임새있게 돌아 가는 잘 만들어진 영화다.  

 

 

그런데도 인권의 왜곡문제는 이곳에도 예외일수는 없다. 이 영화가 광주학살사건을 소재로 영화화한 것이라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이 책에서는 불편의 존재를 인정하는 비현실적인 시선에 머문다. 기독교의 교리와 인권을 유린당한 이해관계는 합리적인 시선을 요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되려 무리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이치와 대동소이하다는 것은 기정 화된 사실로 이해된다. 이와 같이 인간적인 권리를 포기하게 하고 굴복시키는 차이를 생산해 내는 우리의 고착된 시선을 향해 이 책은 진중한 물음을 던진다. 이미 타성의 틀에 구겨져 불편의 범주에 포섭되지 않는 불편의 불인식 내지는 비현실성에 대해 김두식 교수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통찰한 흔적과 마주친다.

 

이렇듯 왜곡된 시선의 향방을 김두식 교수는 우리 사회의 전 방위적인 공간에서 찾았다. 그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통해 편안한 어조의 높임체로 유쾌하게 포문을 연다. 사춘기를 통과하는 아이들의 질풍노도의 시기에 대해 살가운 묘사로 점화하여 제도권 교육의 인권차별에 대한 문제를 예리한 시선의 칼날로 어둡고 음습한 문제의 치부를 곧잘 드러내 보인다.  책은 교육문제, 성소수자차별문제, 여성폭력문제, 장애인인권문제, 노동자문제, 종교와 양심의 자유문제, 검열과 표현의 자유문제, 인종차별의 문제를 대중성 짙은 영화 혹은 실험영화나 드라마를 연계해서 여태껏 인식하지 못했던 가려진 문제의 진실에 대해 인도한다. 끝으로 인권의 종착역, 제노사이드(대량학살)의 문제를 밀도 있게 다룬다.

 

인권의 문제를 이해하는 방법에는 인식의 전환 또한 중요하겠으나 행동의 문제가 우선이다. 이성적인 사고와 길들여진 관습의 타성과의 간극이 멀고 높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양극화문제에 대해 미디어의 웅변적인 호소도 실제는 부러움이 유발하는 욕망에 뒤쳐지고 만다. 물질만능주의의 세상에서 인권의 문제를 해결하기란 어렵고 또 어렵다. 그러므로 인권을 대하는 상대성에 대해 태도가 변해야 한다. 기존의 문제를 푸는 해결책으로 다양하고 개성있는 목소리들을 하나의 틀에 가두어 일원화시키려는 획일성이 문제였는지 모른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인권의 보장을 위한 핵심은 자유와 책임의 조율이 관건이다. 자유가 지나치면 방종이 되고 책임이 지나치면 구속이 된다. 그러므로 이 책에 소개된 인권이야기는 마른 땅에 단비처럼 달게 느껴지며 부끄럽게 만든다.  김두식 교수의 인권감수성에 대한 올바른 시선이 행동의 중심을 곧추 세워 줄 다양한 채널이 될 것이기에 더 반갑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인권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한다는 명제를 떠올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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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1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1 1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10-22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뜻 불편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몸의 불편함을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리뷰를 읽다보니 마음의 불편함이 더한 문제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구석에서 옳다는 것을 알지만,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왜면하고,
왜면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더 왜면하고.... 그런거겠지요?

지난번 타서재에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봤었는데, 오늘 다시 보니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穀雨(곡우) 2010-10-22 17:13   좋아요 0 | URL
마음의 불편을 잊고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을 책을 통해 보았습니다.
다름에 따른 차별을 나누는 시선의 편견이 거만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진실도 함께 보았구요. 좋은 책입니다.

2010-10-22 1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2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생태혁명 - 지구와 평화롭게 지내기
존 벨라미 포스터 지음, 박종일 옮김 / 인간사랑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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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는 새로운 터전 위에서 일어서리라.

이전에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었으나

이제는 우리가 모든 것이 되리라.

 

-P.319 인터내셔날가의 한 소절-

 

 

흔히 환경오염의 원인에 대해 무분별한 화석연료의 사용, 울창한 산림남벌, 도시의 광역화, 화학배합물질의 사용 등을 꼽는 것이 정설이다. 이에 따른 결과는 생태계의 교란으로 이어지고 지구는 점점 더 따뜻해지는 온난화로 이행된다. 마크 라이너스가 지은 <6도의 악몽>은 살벌하고도 무섭게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날린다. 최악의 환경대재앙에 대한 실현가능성은 마치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인 공포로 다가선다. 하지만 지구는 그 예전 원시생태와는 엄청나게 달라졌으며 변화의 유속 또한 증폭된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환경에 대한 인식의 패러다임은 재고되고 바뀌어야 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의 부연설명은 필요치 않는다. 물론 지구 온난화의 허점을 파고들어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는 지구의 순환이라는 반대론자의 주장도 있기는 하지만 너무 더워져 버린 지구라는 인식은 이미 깊숙이 각인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껏 지구 온난화와 생태변화에 대해 접근한 방식은 과학적인 사고에 의한 예측적 기후모델에 의한 결과의 산물이다. 유한한 자원에 대한 활용과 분배에 대한 헤게모니는 지속적으로 논의되어왔지만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오류를 극복할 해결책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이익에 대한 분배의 과정을 경제적이고 이성적인 합리성을 요구한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이성적 합리성은 냉철한 가슴을 지닌 정온(定溫)적 인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윤의 창출과정은 지속가능한 범주의 개념을 모두 경제적인 시스템으로 해석하며, 자본주의는 과실의 분배보다 이익의 창출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는 얼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분배의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할 시스템을 애초에 포기하였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고 분배의 평등의 해결수단으로 정부의 역할과 비중을 더욱 싣게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와 반대로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고유한 창조력, 즉 노동에 핵심적 가치를 심는다. 노동은 유한계급의 구별을 철폐하고 자본소외에 대한 이상향이 바로 유토피아라는 사상을 내세웠다. 마르크스는 물질에 대한 의존이 불가피하다는 관념인 유물론에 입각하였으며 단계별 상호작용에 의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 따른 변증법적 역사관을 지녔다. 마르크스는 이상향에 가까운 이데올로기를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레닌에 의하여 노동자계급의 자발적 수행능력을 철저하게 부인하는 등 혁명가에 의한 체계적인 지배를 역설하며 심각하게 변질되는 수모를 겪었다.

 

앞서의 두 가지의 이데올로기는 태동부터 다르며 사물을 대하는 관념의 틀조차 상이하게 다르다. 자본주의가 자연을 지배적이고 정복 내지는 수복 가능한 개념으로 이해했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자연과의 조화, 나아가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인정하였다. 실제 과학의 발전 또한 자본주의에 편승하였음은 주지한 사실과 같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저자 존 벨라미 포스터의 <생태혁명>은 기존의 범람하는 이론과 학설과는 판이 다른 거시적인 안목의 보고서에 다름 아니다.

 

총3부로 나뉘어 지구의 실상과 환경개혁실패에 대한 사례를 소개하고 마르크스의 이념과 시스템을 통해 모순의 본질을 파헤친다. 끝으로 생태혁명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며 지속가능성, 공동체, 그리고 평등에 대하여 의미심장한 주장을 펼친다. 

 

책은 저자의 통렬한 함의와 주장의 산물인 본질적 가치에 비해 난해하다. 학술적인 내용이 곳곳에 배치되어 일반 독자가 읽어 내기에는 쉽지 않다. 생태의 문제에 더 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념을 알지 못하고는 가독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조밀조밀하게 얽힌 내용을 보다 넓은 시각으로 커다란 줄기를 잡아채듯 나아간다면 전혀 다른 새로움이 기다린다. 매몰된 가치에 대한 반향에서 탁 튕겨 나와 내려다보는 원경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핵심적 가치는 관점의 변화에 있다. 새로운 환경주의의 패러다임과 인간면제주의의 패러다임(캐튼과 던랩의 관점, P.268)에 근거한 이분법적인 오류를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와 자연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의 질(지속가능성)에 관하여 인간과 자연과의 신진대사균열이론에 의해 접근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자본주의에 대한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주의로 이행하여야 하며 이행의 본질은 인간 자체를 혁명하는 혁명적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설파한다. 실제 이와 같은 실험적 하회주의는 볼리비아의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에 의해 열렬히 환영받았다. 이는 <빼앗긴 대지의 꿈>의 저자 장 지글러의 책에서도 언급이 되었으며 새로운 공동체의 출현가능성을 엿보는 대목이다.

 

이렇듯 존 벨라미 포스터의 생각의 총체는 혁신적이고 신선하다. 자본주의의 결핍과 모순에 좌초된 생태혁명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을 새롭게 구성했다는 성공이다. 다채로운 사고와 대립된 이념이 충돌하는 혼돈의 중심이라 할지라도 풀어 헤쳐 보면 의외로 단순한 결과가 도출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접근의 통념을 걷어내고 단순한 도식으로 풀어보면 인간과 자연은 공생의 관계, 즉 지속가능성의 범주의 한 묶음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진실과 조우하게 된다. 결국 이념을 넘어 생태혁명을 위한 성공적인 수단은 탐욕을 경계하고 분배와 평등의 관계로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을 대할 때 가능한 일이 아니겠냐는 저자의 주장은 곱씹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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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수첩 - 진실의 목격자들
PD수첩 제작진.지승호 지음 / 북폴리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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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오늘도 안녕하신가?




        PD수첩이 올해로 20년째란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탐사보도프로그램으로 명성이 높다. PD수첩이 현재의 모습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지난한 역사의 현장과 동행했다. 권력의 치부, 소외된 이들의 아픔, 부조리한 현실, 왜곡된 사회구조적 모순 등 전 방위로 넘나드는 PD수첩의 아이템은 공론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가려지고 버려진 것들에 고민하고 자성하는 시간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PD수첩의 오늘이 순탄치 않았다는 사실은 아픔으로 남는다.




        권력은 언제나 균형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 균형이라는 것이 조화를 이룬 상태가 아닌 편중된 힘의 집중을 의미한다. 따라서 권력에 도취된 광기는 이성적 판단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제도적 폭력으로 돌변하기도 했다. 제도적 폭력은 어느 정권이고를 가리지 않았다. 우리 사회를 형성하는 수직적 계급사회의 틈을 파고드는 권력을 향한 비열한 생리구조이자 기득권 사회의 엄혹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권력에 맞서고 비위를 파헤치는 언론의 역할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매우 중요한 함의를 담는다.




        <PD수첩>, 20주년의 발자취를 되돌려 보며 엮은 이 책은 드러난 PD수첩의 만들어진 모습 외에도 숨겨진 속내를 보여준다. PD수첩을 만든 핵심PD9명의 소회를 전문인터뷰어 지승호의 날카로운 시선과 통찰력으로 그 뜨거웠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PD수첩은 우리나라 방송사에 획기적인 탐사보도프로그램으로 기억될 재료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PD수첩이 있었기에 우리의 삐뚤어지고 왜곡된 시선이 어느 정도 교정되고 유연성을 장착할 수 있는 계가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하기에 우여곡절 많고 바람 잘 날 없던 PD수첩의 거침없는 질주의 순간을 토해내며 제작자로서의 그들의 생각과 이야기를 반추하는 현장을 기억해 두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PD수첩이 처음 방영되었을 때만해도 전문방송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어색했다. 읽어 내리는 말투와 경직된 표정은 생소하기도 하였고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한 회 한 회 쌓이면서 그들의 긴장은 금세 소멸하였으며 위험한 순간을 구르고 내던지는 동안 단련되고 무장된 강인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아무도 가지 않던, 아니 갈 수 없었던 성역 없는 언론의 본분에 충실했기에 생생한 현장의 열기를 생산하고 전달하기에 분주했다. 그 열기는 고스란히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이슈가 되었던 문제가 터지며 불거지는 동안 우리는 이 땅의 인권이 자라는 것을 목도했다. 그러므로 PD수첩의 탄생은 희망을 생산해 내는 우리 사회의 영원한 파수꾼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며 광우병 문제를 다층적인 시각으로 분석하였으며 황우석 박사의 허위 줄기세포문제에도 부침과 치우침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지금껏 PD수첩의 소신과 명분을 지켜냈다. 솔직히 PD수첩에 출연하고 제작한 PD들의 실명을 오롯이 기억하고 떠올릴 만큼 기억력이 좋지를 못하다. 하지만 황우석 사태와 쇠고기수입문제를 대하면서 최승호PD, 송일준PD, 한학수PD의 이름 석 자는 분명하게 각인되었다. 95%의 적과 제도화된 폭력을 앞세운 서슬 퍼런 공권력 앞에 흔들리지 않고 국민의 알권리와 진실을 수호하는 언론의 소임을 다 했다는 것은 절대적인 두려움을 넘어서야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이 PD수첩의 지난 역사를 통해 자축하는 자리로서의 의미만을 담지는 않는다. PD들의 공통된 생각과 제작되는 순간의 시선들을 통해 신뢰라는 건강한 항체를 수혈 받는다는 사실이다. 권력의 주구 노릇을 자청하는 언론기관의 작금의 행태와는 체급이 다르고 성질이 다르다.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PD저널리즘의 재정립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열망하는 희망을 담는다. <생각의 좌표>를 쓴 홍세화 선생은 물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이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자기성찰의 끊임없는 주문처럼 PD수첩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도리와 위치를 깨우치게 해 주는 분명한 자극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나는 우리 사회의 건강성의 항체를 자신할 수 없다. 현재처럼 후퇴된 언론자유의 상황에서라면 더 더욱 불온하다. 좌와 우를 나누는 대립의 편제는 이 나라만의 특성이라고 돌려 세우고는 하지만 진보와 보수를 이념의 스펙트럼으로 구분하는 권력층의 횡포에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그래서 PD수첩의 지난 발자취를 회고해 보면 철옹성으로 둘러 쳐진 그들의 베일을 벗기고 또 벗기는 탈피의 과정으로 불러도 좋지 싶다. 치부를 드러내고 까발려지는 부조리의 주인공들을 보며 나는 무너진 사회의 복원을 향한 일말의 전율을 느끼고는 하였으나 이내 냉소적인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언론을 틀어막고 국민의 귀와 눈을 가두는 오늘날 권력의 작태를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혹자는 PD수첩이 좌빨에 물든 긴장의 진원지라고도 한다. 아니면 PD수첩은 이념에 물든 삼류시사프로그램이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PD수첩이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으며 세련되고 구미에 맞는 나긋나긋한 외형은 없다고 일축하는 반대론자들도 있으나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진실이 함께 했다.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정제되지 못한 거친 표현이 생채기를 내는 빌미는 될 수 있으나 실체를 바꾸는 원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랬다. 백번을 잘 해도 한 번을 잘 못하면 이제까지의 공은 물거품이 된다. 이 책의 PD들도 입을 모아 말하는 사실의 정확성, 보도의 명확성은 언론의 생명이다. 기실 따지고 보면 PD수첩의 깎아 내림 현상은 이런 사소한 오류에서 출발했다.




        이처럼 오류의 정화는 PD수첩의 롱런을 보장하는 필요조건이다. 200회 특집 PD수첩 콘서트에서 진중권 교수는 취재과정의 정확성과 균형을 강조했다. 결국 탐사보도프로그램으로 살아남는다는 존재성보다 우리 사회의 건강한 파수꾼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주문이다. 나 또한 이 책을 통해 PD수첩을 만들고 제작하는 그들의 프로정신에 희망을 건다. 그들이 바라는 사회처럼 PD수첩이 더 이상 존치할 필요 없는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가 구현된다면 좋으련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이제껏 PD수첩이 다루어 왔던 우리 사회의 왜곡되고 구부러진 현실을 바로 잡는 교정의 작업이 계속되어야 한다. PD수첩은 인권, 불평등, 교육, 경제, 소외, 정치, 종교 등의 스펙트럼을 통해 다양한 문제와 부정부패의 현장을 파헤쳐 왔다. 이러한 모든 아이템들은 시청률에 연연해서는 제대로 소화할 수 없는 긴장과 알력이 유발되는 문제들이기에 보다 더 냉철하고 분명한 눈과 귀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러기에 앞서 일반의 의식이 깨어나고 확고한 자기성찰을 통해 다양성을 인정하며 여유와 관용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PD수첩의 어제와 현재, 내일을 바라보는 그들의 생각의 총체가 반갑고 읽혀져야 할 가치의 도량이라 할 만 하다. PD수첩의 건승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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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눕 - 상대를 꿰뚫어보는 힘
샘 고슬링 지음, 김선아 옮김, 황상민 감수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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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적. 모든 것은 반드시 궤적을 남긴다. 그것은 우리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사소한 하나의 흔적이 모든 것을 밝히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은 비단 CSI과학수사대에서나 연출된 상황만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반경 모든 곳에는 불가피하게도 자신이 지나온 모습이 반드시 투영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사회 속에 묻혀 살아가는 일원으로서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이끌어 나가고  상대방의 상태를 꿰뚫어 본다는 것은 상당한 우위에 서는 포지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 그것들을 유추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영향력 범위 내에 놓여 있는 사소한 단초, 즉 옷차림새, 머리스타일, 행태 등을 통해 그 사람이 어떤 습관과 행동을 통해 어떠한 성격의 소유자로 형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짜릿하고 매혹적이겠는가.




        스눕은 상대방이 남긴 흔적을 통해 그 사람을 꿰뚫는 과정을 의미한다. 스눕이라는 생소한 심리분석을 통해 우리는 묵살하고 무시한 것들에 담긴 통찰의 묘미를 엿보게 된다. 이 책 <스눕>은 젊은 심리학자 샘 고슬링의 기발한 착상을 통해 연구되고 발전시킨 행동심리의 한 분야다. 인간이 행동하는 파장범위를 일정한 프레임을 통해 담고 그 틀을 해체하고 뒤집어 봄으로써 그것이 하나의 영역을 만든다는 가정에서 시도된 것이 이 실험을 기획하고 연구하게 된 시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유형의 심리분석을 숱하게 접해 왔다. 범죄인들의 심리를 분석한 프러파일러, 행동특성을 조사하고 유형을 분류하는 행동심리학 등은 스눕과 동일한 선상에서 서 있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스눕은 독심술사의 초능력처럼 스누퍼들의 상황적 이해와 알고리즘을 통해 혜안을 만들어 간다는 것에서 차원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스누퍼의 세계는 단서와 수수께끼사이의 연결고리를 통해 짜릿한 쾌감을 맛 볼 수 있는 호기심이 가득한 곳이다.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설득력 있는 논거로 맥 애덤스는 정체성의 확립을 말한다. 저자의 모든 사상의 근저를 관통하는 맥 애덤스의 정체성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정체성은 재구성된 과거 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예상을 통합해 삶의 일관된 통일성과 목적, 의미를 제공하는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뜻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정체성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경험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주는 끈이라고도 했다. 결국 각자의 삶에 기록된 흔적의 구성요소들은 용해되고 산화되고 남은 일정한 화학작용에 의해 분출된 공통분모를 갖게 된다는 의미다. 그것이 한 사람의 인성을 형성하고 정체성이라는 포섭된 틀로 묶인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스눕은 인간 본성을 지향한다. 이것이야말로 스눕의 영역을 또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 주는 핵심이다.




        이 책에서는 스눕을 통해 밝힌 인간의 유형을 아울러 기록하고 통찰한다. 그렇게 인간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을 거쳐 남긴 흔적이 바로 인간의 본성을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그가 단서들의 향연을 추적해서 밝힌 인간의 성격은 개방성, 성실성, 외향성, 동조성, 신경성, 자기애적 성향의 인자를 불러 모았음을 밝혀냈다. 그는 한 사람이 머물다 간 침실이나 욕실의 은밀한 공간들이 주는 단서들을 따라 규칙적인 틀을 창조해 낸 것과 같다. 아마도 우리는 이것을 직관의 영역으로 간주해왔는지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관찰력이 좋은 사람이거나 예리한 사람으로 인식했든지 말이다. 되짚어 생각해보면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애거시 크리스티가 창조해 낸 명탐정 에르큘 포와르처럼 말이다.




        스눕이 막연히 은밀한 단서를 통해 그 사람의 성격적 특성을 밝히는 것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스누핑을 통해 추적하고 흩어진 단서들을 조합해서 퍼즐의 해법을 찾아가는 외형적 카테고리 외에도 예견 가능한 행동범주를 가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관을 넘은 통찰력의 영향력은 놀랍도록 정교해진다. 하지만 장애는 언제나 산재한다. 누군가가 맡긴 두드러진 물건의 존재가 오히려 그 사람의 특성을 밝히는 데 방해요인이 된다. 그러므로 흔적이 남긴 실질적 가치를 파악하는 것이 주요함을 간과할 수 없다. 샘 고슬링은 이러한 장애물에 대해 미시적인 관점에서의 접근보다는 거시적인 관점을 선호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으로 무의미한 요소를 제거하고 장애를 극복하는 방편을 만드는 셈이다.




        스눕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보다 넓은 차원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연결점에서 타자를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스눕의 메커니즘을 통해 상대방에게 나를 원하는 방향으로 주입하고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상대방의 특성에 따라 나를 그들에게 구미가 당기는 호감형 인간으로 바꾸는 것이 진정한 스눕의 세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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