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가만 읽지 않고 쟁여 둔다는 건 마치 포만감을 앞당겨 온 기분이다. 굴곡처럼 퍼덕이는 변명이라도 내 곁에 선 그것은 가야 할 곳이 있다는 또 다른 표식이다. 닮은 듯 다른 일상이 매일 이어지지만 나는 침잠할 수 없다. 존재와 당위의 사이를 오고 가는 나에게 책은 더욱 그렇다. 풋풋한 설익은 향과 진득하고 노련한 향이 교차하는 오묘함이다.
한 동안 밀어 내고 또 밀어 냈다 했음에도 돌아 와 보니 거기더라. 토해 내지 못한 문장들과 찰박찰박 파문을 일으키며 퍼지는 행간들 사이로 쓰러지는 익숙함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가뭇없어 현기증이 일어도 실체없는 불확실함은 아니다. 때론 덴고와 아오마메의 몽환적인 세계를 걷기도, 기억할 수 없는 곳에서 삼킬 듯 불어 오는 바람이 현실처럼 앞서는 것도 그 때문이다.
" 아이야, 오늘을 기억하렴,
네가 만들어 낸 그 웃음,
너의 뇌를 헤집고 나온 순간의 문장,
감각의 중추가 작동한 그 모든 감정선...
다시 새길 수 없는 시간의 은혜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