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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제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중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소설을 읽어 낸다는 것은,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상태와 맞설 때가 있다. 그것의 원인이 무엇이든 나로서는 대략 가늠하기 힘든 감정과의 낯선 대면에서 연유한다. 소설은 허구라는 외피로 단단히 무장하였음에도 그 치밀한 메트로놈의 정형성을 따라 실재의 경계를 무시로 넘는다. 허구는 더 이상 그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로 바뀌는 데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치 않는다. 그것은 이미 잰 걸음으로 빠르게 온몸으로 전이되고 나의 삶에 올라탄다. 한 치의 오차도 흐트러짐도 없다.
소설은 이렇게 나를 지배한다. 소설은 서사를 비켜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잿빛으로 물든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비집고 솟은 무한한 감정들의 총체이자 가면이 수시로 바뀌는 복마 술인지 모른다. 현실과 상상이 용해될 수 없는 성질임에도 이미 감정을 송두리째 빼앗기기 일쑤다. 어디에선가 있을 법한 일이 아닌 그것은 있었거나 있음을 예정한 일로 흐려진다. 그러므로 나에게 소설은 숨겨둔 감정을 허락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힘이 되기도 하는 만화경처럼 신기하다. 그것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엇비슷한 세대의 눈에 비친 이야기라면 연대감은 더욱 공고해 진다.
2010년 제1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타이틀이 거창하다. 역량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신선한 피를 지속적으로 펌프질하겠다는 사뭇 진중한 취지다. 물론 읽는 자의 특권을 오롯이 거머쥔 독자인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나 고답적임은 피할 수 없다. 나에게는 작가를 괴롭히는 쥐어짜는 창작의 고통과 솎아 내야 하는 인생의 카테고리도 필요치 않는다. 읽고 받아들일 최소한의 시간만 있으면 언제든 접속이 가능하다. 접속이 고르지 못하면 쉽게 끊기고 아웃당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과 검증의 단계를 거친 묶음 형태의 책을 쥘 때면 선입견이나 가벼움도 동시에 따라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어찌 보면 기대에 못 미치는 당혹감을 추스르기 위해 경험했던 축적의 관성이 만든 결과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잘 빠진 글은, 어수룩한 나로서는,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데자뷰를 보듯 기시감에 빠지기도 혹은 모종의 동질감에 연민하며 글은 마음껏 나의 마음을 유영한다. 밀고 당기는 사이 울림은 커지고 정서적 유대는 소통으로 번진다. 어느 새 수상작으로 뽑힌 7명의 글이 문장과 문장을 넘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다다르게 한다. 삶에 지쳐 고독의 숲으로 뒤엉켜 음습해진 나의 마음을 청량한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다. 나는 갓 구워 낸 책의 채취가 이와 같다고 믿는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묻고 정체성에 대해 끝없이 반문하는 피할 수 없는 불안한 자아를 위무하기에 소설은 더 없이 적합하다. 고독과 번민은 불안에서 유발되었으나 타자의 이해와 인정을 바라는 사회적 욕망의 한 형태다. 그러므로 소설은 범위 내의 현실이 된다.
김중혁 작가의 <1F/B1>은 기발함이 조합한 퍼즐처럼 기묘하다. 어떤 형태나 현상이 상태를 지배한다는 음모이론의 지배적 의사(疑似)의 심리적 표출장치가 신선하다. 숱해 보고 지나치는 층과 층을 나누는 슬래시를 기점으로 표류한 현상은 단락을 지나 우리 사회가 안은 치명적이고 소외된 문제에 정박한다. 실제 집단공동체 생활의 한 형태인 아파트나 주상복합에 거주하는 현대인의 취약함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부실하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건물관리자연합, 일명 슬래시메니저(SM)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다룬다. 자본에 매수되고 문명의 이기와 편리에만 철저하게 희생당하는 부패하기 쉬운 재물처럼 공간은 쉽게 변질되고 오염된다. 매수당한 통제는 이미 제어력을 상실한 무방비 상태다. 하지만 김중혁 작가의 상상력은 무방비에 대처하는 현란한 내러티브다. 최첨단 시설을 자랑하는 시스템을 구비한 신식건물이라도 관리자의 익숙한 손놀림이 없이는 무용지물이라는 사실과 연결된다. 거미줄처럼 꼼꼼히 얽히고 지하통로로 이어진 관리자연합의 탄생은 소멸할 수 없는 몸부림의 표현이다. 그 속에서 관리자인 그는 세상을 꿈꾸고 현실을 다독이는 갈망의 표현인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한다. 선과 선이 만나는 소실점 위에서 <1F/B1>은 트위터처럼 너의 일을 실어 나른다. 값비싼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고 한 자리를 차지한 우리는 모두 비합리적이라고.
구애(求愛)의 사전적 의미는 이성의 마음을 얻는 행위다. 문장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열망하는 마음이 기본이다. 이와는 반대의 대척점에 선 상태는 실연이다. 구애는 위험을 내포한 갈등의 경합상태를 뜻한다. 순조롭거나 험난하다.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는 불안한 감정이 유발하는 긴장의 순간을 매끄럽게 포착해 냈다. 고립된 상태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마음은 본성인지 모른다. 이 책에서 등장한 김은 애도와 축하를 전달하는 화환을 배달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편혜영은 그를 통해 죽음을 분해하고 구애를 해체한다. 구애의 완성은 서로의 결핍된 순간이 충만해 진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죽음 또한 누군가로부터 잊히는 상태를 뭉개 버리고자 하는 욕망을 의미한다. 그래서 편혜영은 어색한 감정 선이 충돌하는 순간을 긴장의 대립과 표출로 끄집어냈다. 어찌 보면 인생은 미완성의 연속이다. <저녁의 구애>를 덮은 후 나는 갓 우려낸 우동의 개운함보다 통조림의 텁텁함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을 나를 속이고 살아갈까?
변희봉은 입 언저리 어느 부위에서 맴돌기만 할 뿐 낯설기만 하다. 뱉어 내지 못한 말이 날것처럼 울대를 자극한다. 물론 존재감만으로 묵직한 실존배우다. 윤인호 감독의 <더 게임>에서 변희봉의 연기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으며 관객을 장악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그런데 변희봉이 이장욱에 노출되어 포위당한 것은 우연일까? 변희봉이 삶에 구속당한 연극배우의 눈에 비치게 된 순간부터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한편으로는 그 상황이 익살스럽기도 하고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다. 변희봉이라는 상징적인 인물을 통해 이장욱은 모험을 감행하였는지 모른다. 이야기 속 배우는 삶의 극단까지 밀려난 위태로운 상태다. 아내는 오사카로 공예를 배운다는 명분으로 이혼을 감행하며 아버지는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아들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고달프기만 하다. 삶은 이처럼 지독하고 부조리하다. 하지만 상황은 역전을 꿈꾸듯 아버지로부터의 가냘픈 동조는 삶의 활력으로 작용한다. 고단한 세월을 닦아 내는 보상이다. 희망은 절망에서 핀 우아한 꽃처럼 말이다.
배명훈 작가의 <안녕, 인공존재>는 외계에서 기록되었다는 신경숙 작가의 표현은 적확하다. 실존하는 물질에 대한 관념을 가볍게 드라이브하며 부드럽게 존재를 녹여 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기지가 번득이며 아이디어가 빛난다. 데카르트가 규명한 존재의 근원을 조약이라는 돌멩이에 얹어 이렇게 잘 빚어 낼 수 있다니 그의 상상력이 부럽다. 난해한 소재를 이끈다는 것은 작가의 변辯처럼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한다. 작가는 더듬을 수 없는 위치를 감정의 혼합물을 통해 적절하게 배합하고 첨가하여 순도의 완성체로 만들어 낸다.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추출해 낸 결과물이다. 존재의 대폭발처럼 몰입은 한 템포 빠르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내가 배명훈 작가의 다음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 또한 몰입의 완급이 주는 현상에 노출되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배명훈 작가의 이 글은 괴물의 탄생을 알리는 전조가 아닐까?
다문화 가정과 불법체류문제는 더 이상 우리 사회가 감출 수 없는 문제다. 특히 지리적인 거리가 인접해 있는 중국인들의 불법체류는 대립과 갈등이 뒤엉킨 채 웅크린 상태다. 매번 불거 터지는 문제의 출현에 나는 정의(正義)에 의문을 갖는다. 규범과 현실을 매조지는 문제의 대처방법은 살벌하다. 분명 명분을 위시하여 처리되었음에도 나의 눈은 불신으로 물든다. 냉혹한 소외의 그림자는 더욱 맹위를 떨치고 위세는 연민을 쓰러트린다. 김미월 작가의 <중국어 수업>은 심란한 무대를 짧은 단문으로 밀어냈다. 짜임이나 틀이 빈틈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중국어 “짜이젠(다시 만나요) “의 은유적 비유를 통해 희망을 쏘아 올렸다. 희망은 곧 동기가 될 터이며, 동기는 움직임을 바꾸는 행위가 될 것이다. 눈물샘을 자극하게 만드는 준비되어 분출된 정소현 작가의 글에 설익은 응원, 한 자락을 날려 보낸다.
가족은 이따금 내게 평안한지를 묻는다. 범주에서 벗어난 위태로움을 토로하기도 하며 맞설 수 없는 아픔을 토해내기도 한다. 그래도 내게 가족은 -유치한 발상인지 모르겠으나- 언제고 내 편이 될 것 같은 그런 존재다. 나는 그 중심에 집을 연상한다. 집은 회귀할 생물적 본능처럼 돌아갈 보루다. 기약 없는 소식이 제비처럼 넘나들기를 소망하며 봄꽃처럼 따뜻하기를 기대한다. 정소현 작가의 <돌아오다>는 내게 그렇게 읽힌다. 비록 해체되고 부서진 가족이지만 정상의 기능을 염원하였는지 모른다. 페이소스를 자극하는 이야기의 실체는 헛것 또는 유령이 되어 방황하다 가슴을 이내 후벼 판다. 하지만 정교하게 설계된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반전의 순간을 통해 침전된 마음을 위무한다. 단절되고 소외된 가족을 용서와 사랑으로 채워 나가는 이 글은, 강한 임팩트를 남기는 인상 깊은 이야기다.
나는 개그맨을 볼 때면 감정을 조절하는 기술에 감복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직업적으로 웃겨야 하는 강박관념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하는 현실을 떠 올린다면 웃긴다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 깊이를 당최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김성중 작가의 <개그맨>을 처음 대한 나의 인상은 진부한 역설보다는 아픔이 먼저 전해져 왔다. 세상이 변하는 속도의 편차만큼 사회는 빠르고 간결한 즉각적인 배출을 요구한다. 웃기지 못하면 철저히 외면당하고 존재감은 사라진다. 하지만 이야기는 스무 살 젊음이 어우러져 풋풋함 가득한 시절 만나 결합되지 못한 사랑의 궤적을 뒤쫓는다. 다소 실험적인 뉘앙스를 흩뿌리는 김성중 작가의 <개그맨>은 쉽게 산화되어 소멸될 성질이 아니다. 곰삭혀 묵힐수록 풍부해지는 홍어처럼 글맛이 강하다. 보트피플을 희망한다는 이 작가,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