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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그 시절 주말의 명화는 건조한 일상에 나에겐 소금처럼 위안이 되곤 했다. 할리우드식 꿈을 꾸고 희망에 달 떠 어디론가 하염없이 부유하곤 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해 내고 언제나 정의는 굴복하지 않고 승리한다는 방정식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한 동안은 그 속에 도취되어 빠져 들었지 싶다. 지금 생각해보면 늘어 나 헤어진 티셔츠처럼 유치하기 짝이 없는 희석된 감동이지만 나는 크리스토퍼 리브의 강인한 체력과 시공을 초월하는 초능력을 흠모했다. 그것만 있으면 모든 게 이루어질 것 같고 우주 끝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한 손에 잡힐 것 같은 무모한 공상, 아니 몽상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는 슈퍼맨을 사랑했다. 슈퍼맨은 악당을 때려잡는 영웅중의 영웅이다. 다른 모든 영웅들을 일거에 제압하고도 남을 우월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가 말도 안 되는 비교에, "슈퍼맨과 배트맨이 싸우면 누가 이겨요?"라는, 허덕일 때도 나는 슈퍼맨이 좋았다. 사람 좋은 서글서글한 눈빛으로 우리의 여주인공 마고 키더가 분한 로이스 레인에게 보내는 강렬한 신호, 애간장을 녹였다. 로키산맥이 달리고 바람을 잠재우던 슈퍼맨의 비행은 황홀했다. 엔딩의 허무함을 위무할 만큼. 

슈퍼맨이 아니었더라도 인간은 한계를 참지 못하는 유별난 종족이다. 구병모가 쓴 <아가미>와 굳이 아무런 역학관계가 없는 슈퍼맨을 끌어 온 것은 인간이 가진 한계, 그 속에 녹아 든 다양한 감각의 흐름이 맞물렸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인간이 진화를 거듭하고 변신을 또 다시 거듭한다면 아가미가 솟아나고 눈부신 무지갯빛 지느러미가 생기지 말란 법이 없으니 말이다. 어차피 인간의 기원은 물에서 나왔으니 부인할 수는 없다. 횡격막을 사이로 나란히 한 쌍의 폐포에 덮인 공기호흡을 위한 유일한 장치에 더 해 모세혈관을 통해 용해된 산소를 채집하는 아가미가 함께 공존한다면 포세이돈의 축복일까 아니면 저주일까.

상상은 의외로 가까운 거리에서 퍼져 나간다. 구병모의 <아가미>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모든 연결고리를 가동하면 일파만파로 퍼지는 감각은 동심원처럼 끝도 없지 싶다. 그미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무엇이 되었든 단련되고 고착된 시각의 거름망을 통해 자극은 시작된다. 하지만 결국 잃어버린 것, 상실의 순간을 회고하게 되리라는 공통점에 정박한다. 곤의 날렵하고 세련된 유영을 따라 물살의 저항에 감정을 끼어 맞추다 보면 매몰된 감정의 결락된 순간과 조우한다는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무언가를 버리고 또 버리기 위해서 산다. 갖기 위해 버리는 것인지 버리기 위해 갖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감정도 과소비되어 빈곤에 허덕이는지 모른다. 아픔도 슬픔도 기쁨도 모두 제 것 그대로의 그 날것의 상태를 상실했다. 날 선 세상에 치이고 넘어지다 보니 무엇이 진실인지 안다는 것이 오히려 두렵고 현실을 담보 잡힌 비현실이 판치는 세상이다. 그러니 아가미쯤 있다고 대수겠는가. 그 아가미를 통해 저 푸른 대양으로 부여잡지 못한 진실과 마주한다면 그 시절 내가 꿈꾸었던 슈퍼맨에 대한 환상과 무엇이 다를까.

애석하게도 현실은 냉혹하다. 짝이 맞지 않는 의자를 가운데 두고 춤을 추다 앉지 못하면 기회는 박탈당하고 추락으로 점철되는 세상의 이면에 도사린 날카롭게 뻗은 아픔의 촉수를 너무도 잘 안다. 실제 곤의 아픔은 처절한 빈곤의 상처가 발화한 그 시점에서라는 설정도 모두가 수긍할 감정의 고리를 낚아챘음 이다. 그러므로 곤의 수중생물로의 변신 내지는 회귀도 충격에 따른 현상을 극복할 소망이다. 그와 매개된 모든 이들이 또 다른 아픔과 상실을 반복하는 동안 응집된 감정의 편린은 애환이었다. 공유하는 자의 맹목적인 질투는 어색하지 않다. 그것이 사랑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가르쳐 주어서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하도, 노인도, 강하의 어머니 이녕도 모두 물결이 쓸려간 뒤틀린 삶 속에서 아파했다. 그들의 아픔은 곧 곤을 향한 바람이었다. 던적스럽고 비루한 삶에 대한 실낱같은 바람.

곤이 품은 아픔의 지도를 관찰하는 역할을 자청하고 나선 숙달된 안내자 해류의 간결하고 건조한 태도가 없었다면 그저 그런 아가미를 단 한 남자의 망상에 지나지 않았을 테다. 해류가 가진 물속처럼 템포가 느려지고 굴절된 세상을 곤의 비현실적인 신비로움이 더해져 현실의 바람으로 변신할 추동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해류의 글자 그대로의 뜻처럼 시간도 공간도 모두 흐른다. 저항의 순간을 극복하는 것은 개별화된 몫이고 원죄에 가깝다. 그렇지만 나약한 현실을 거꾸로 돌려 세우는 힘은 스스로에게 내재된 능력이다.

아가미를 통해 숨을 쉬고 미끈거리도록 유영하는 공상의 시간을 선물한 구병모의 글은 기발하다. 식어 빠진 사랑이야기도 무미건조해 지루하기만한 불륜이야기도 <아가미>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는 이유는 행간과 행간에 숨은 희망이 오롯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강렬한 에너지다. 전작 <위저드 베이커리>로 활자의 마술을 부리던 그녀의 언어가 다시 <아가미>를 통해 폐부 깊숙이 찔러 오는 심해의 아득한 물결처럼 그 맛은, 알싸함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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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4-26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주드님의 서재에서 바다 밑을 걷겠다는 문구를 읽었어요.
아가미에 대한 페이퍼를, 푸른 대양으로 뻗어나가려는 이야기를, 그리고 너무나 순수했던 슈퍼맨을 다시 회상하니
바다 밑에서 자신을 날것 그대로 마주치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정녕 함께하며 그러면서도 '나'를 바라볼 수는 없는걸까요?
아..... 저두 이 책 읽구 싶어요!

穀雨(곡우) 2011-04-27 08:54   좋아요 0 | URL
금방 읽히는 책입니다. 문고판으로 200페이지가 조금 넘으니 금세 바닥이 드러날거예요.
너무 빨리 도착한 끝자락만큼 밀려 오는 것도 많을 듯......^^

양철나무꾼 2011-04-27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위저드베이커리가 참 좋았어요.
아가미는 뭐 읽지 않았지만, 아들의 필독서여서 언젠간 곁다리로 읽게 되겠지만요.
님의 리뷰만으로도 영화 '그랑블루'가 생각나는 것이 알싸하고 짭쪼름한걸요~^^

穀雨(곡우) 2011-04-28 14:11   좋아요 0 | URL
맞네요. 그랑블루가 어찌 그렇게 안 떠오르던지...^^
그 영화...포스터만으로도 멋졌어요.
 
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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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쌍성(雙星)의 밀고 당기는 힘처럼 자연의 법칙이다. 음과 양, 사물의 겉과 속, 어디든 존재한다. 듀플렉스처럼 상호 독립하여 병존하지만 불가분이다. 인식이 스치는 모든 곳, 더블이 지배한다. 획득가능한 모든 것에 더블의 관념이 기운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인간에게 실현가능한 변수의 조합은 더블의 관념에서 발현하는지 모른다. 박민규 작가의 더블에 담긴 그 의미, 행과 불의 경계이다. 상상과 현실의 테두리를 넘나들며 마치 우주의 언어나 미래의 언어로 기록된 그의 문학세계는 자연법칙을 담고 있다. 자연은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를 말한다. 이는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를 가리킨다. 때론 섭리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섭리는 인간의 관념을 고착화하기도 한다. 당연한 인과율의 법칙, 그 속에 지배된 인간의 불완전한 의식은 새롭거나 기이한 상태를 두려워한다. 따라서 박민규의 이 책 <더블>의 단편은 연역적 관계를 차단하는 존재의 반항을 오롯이 천명한다. 그의 생각의 틀 속에서 짜여 나온 이야기의 실재는 기존 관념의 존재를 포섭과 파괴의 양립된 현상으로 병존하며 평행선을 내달리는 가히 더블의 연속이다. 그의 이러한 시각은 중어의 반복을 통해 공고히 다져지고 흡입된 관념의 거름망 속으로 박민규式의 언어로 재해석된다. 그의 이야기는 그로테스크한 상상의 변주다. 현실이 존재한다면 상상이 존재한다는 실체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21세기를 사는 동시대의 인류에게 전하는 공감의 또 다른 코드라고 할만하다.

 

<더블>은 총18편의 단편 선으로 두 권의 양장본으로 묶였다. 형태는 디스크자켓처럼 작품의 본질을 적확하게 제시하는 일러스트와 작가의 소회로 구성되었다. 박민규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생각, 흔적 등을 특정의 누군가에게 헌정하는 방식으로 틀과 형태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의 시도는 규격의 틀에 재단된 눈과 마음을 유연하게 해 준다. 기실 18편의 단편에 담긴 각양각색의 에피소드를 구성한 그의 방대한 창작력에 경의를 표하게 되지만 겉과 속에 담긴 각기의 본질을 은연중에 시각화시켜 주는 그의 배려가 더욱 도탑게 다가선다. 생각이 곧 문화가 된다는 사실처럼 그의 이야기 속에는 범 글로벌문화를 표방한다. 지역과 우주를 가르는 광활한 무대배경, 도시인의 고독한 삶, 인간의 존재의미를 다루는 그의 이야기 속에서 펼쳐지는 반전과 허무의 일상 등이 고스란히 차오른다.

 

트렌드나 문화의 일종이라면 <더블>은 지구의 언어가 해석가능한 모든 언어로 표현되고 공감할만한 소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견고한 상황을 가볍게 무너트리는 공력, 그의 필력이다. 인류가 탐욕에 의해 멸망하는 절체절명의 암흑의 상황을 층간소음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일상과 포개는 그의 상상력의 빚어낸 이야기 <끝까지 이럴래?>. 인간에게 더 시급한 문제는 사소한 불편의 해결일지도 모른다는 불변의 진리인지 모른다. 이러한 사실은 BC1700년전 한반도를 무대로 한 <슬>을 관통하는 관념과 일맥상통한다.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욕망의 해갈의 근원적인 물음도 사소하거나 단순한 지점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박민규의 이야기에 걸려든 관념의 거름망은 인간의 의식을 양분하는 갈래의 커다란 경계를 해체하고 분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관념은 18편의 전편을 지배하는 공통의 메타포이다.

 

그래서 더블의 중첩적인 시선으로 이 책에 담긴 이야기 지도를 따라가다 보면 박민규의 관념에 포위당하고 공감의 마법에 어김없이 걸려들게 된다. 치명적인 유혹이거나 감미로운 선율이든 시나브로 젖어드는 그의 이야기의 깊이에 지구의 해저 끝까지 압력의 밀도가 차오르는 <깊>에 주억거리게 되고 <아치>에 올라선 현대인의 불일치에 동조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더블>의 안에 담은 이야기를 동일한 패턴으로 구동시키지는 않는다. 생각의 엔진을 가동하고 가열되고 분사된 에너지로 가속의 변속을 폭발하듯 그는 우주로 날아가고 시공을 넘나든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크로만, 운>이다. 묵시록적인 소설인 이야기는 뉴질랜드의 작가 버나드 베켓이 쓴 <2058 제너시스>와 궤를 같이 한다. 박민규의 이야기가 인간의 존재의미를 고찰한다면 버나드 베켓의 이야기는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를 철학적인 시선으로 묻는다. 이러한 박민규식 해학은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에 보다 정확하게 드러난다. 스나이프, 동성애, 무차별 처단, 배설, 섭취의 일련의 행위들에 따라 전혀 어울리지 않을법한 조합의 인자를 상대로 엉뚱한 곳에 불시착한 느낌처럼 낯선 감각을 토해낸다.

 

때로는 이렇게 낯설고 거친 부자연스러운 상황이 더 자연스러운지 모른다. 그가  생뚱맞은 상황을 현란하게 주무르고 고정된 퍼즐조합을 이것과 저것의 지칭을 혼합하는 작업을 선행한 것처럼 뒤따르는 결과물 또한 자연과 부자연의 경계를 구획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독자의 예상을 빗나가는 반전이나 재미의 요소를 가미하기 위해 조합의 재구성을 시도하였다는 결론은 성급하다. <루디>의 냉혹하고 인과관계가 단절된 행위를 보면 미루어 짐작이 가능해 진다. 절벽의 끝, 폭풍 같은 질주로 마감하는 장면은 인간의 욕망이 브레이크 없는 전차와도 같다는 무지한 현실에 다다른다.  따라서 박민규가 그의 단편 하나에 실은 의미의 총합은 여지 혹은 공백을 통한 공감의 유도나 해석으로 가능케 한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보이는 세계, 보지 못한 세계, 다다르지 못한 세계, 정복하였으나 오류로 점철된 세계를 무시로 경험한다.

 

과연 인간이 가 닿을 수 있는 경험의 거리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박민규의 이 책에서 하나의 답을 보았다. 우문현답이 아닌 현문우답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상상력의 뭉치에서 무엇을 만들지는 개별의 몫이다.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에 등장하는 잘 나가던 세일즈맨의 비극적인 현실처럼 붙들 곳 없는 현실에 매달려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기운다. 화성으로 자동차를 팔러 가고 그 곳에서 만난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 흑인 세일즈맨과의 동질의 교감, 황망한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하기에 나는 <더블>의 세상에서 희로애락의 4중주를 만끽했다. 진실과 거짓의 양면 외투처럼 세상은 그렇게 움직인다. 스테파니 아가씨가 보았던 그 <별>이 곱디 고왔다면 박민규식 <별>에 쏟아진 풍광은 현실이다. 결국 세계는 양면, 듀플렉스의 반영이며 더블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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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1-17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민규 다른 책 주문했더니,소책자가 왔더라구요.
다른 분 서재 글 보고 망설이고 있었는데,이 리뷰 보니 읽고도 싶어지는 걸요~
별의 해석도 재밌구요~
요즘은 양면,더블이 대세인가 봐요,하루키의 1q84도 그렇담서요~^^

마녀고양이 2010-11-17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리뷰 보면서 입 벌리고 감탄 중입니다.

곡우님께서 별 다섯개를 주셨다니, 어쩐지 믿음이 갑니다. 최근 들어
국내 작가에게 너무 많은 실망을 했던터라, 망설이고 있었습니다만...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저도 리뷰를 보면서 1Q84를 연상했는데, 나무꾼님두 그렇게 보셨나보네요.
세상의 양면, 또는 현실과 이상, 선과 악,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 곳들, 데미안도 생각나구요.

좋은 하루되셔요.

穀雨(곡우) 2010-11-1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철나무꾼님..더블이란 제목이 주는 인상, 전 양면성으로 보았어요.
자웅동체처럼 늘 붙어 다니는 자연적인 법칙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1Q84의 구조와 비슷하게 나아간 모양입니다.

마녀고양이님...박민규의 책을 드문드문 접했지만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구조가 흡족하더군요. 이야기에 따라 달리 해석가능하겠지만
제게 그 네러티브가 맞았던 모양입니다.^^

비로그인 2010-11-18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쯤되면 본 책보다 리뷰의 심도가 더 깊다고 봐도...^^
곡우님의 넓고 깊은 감상이 더블과 함께 따따블로 버무려진 감동 그 자체입니다.
얼른 읽어야 하는데, 어흑~~밀린 책들이...^^

穀雨(곡우) 2010-11-19 13:19   좋아요 0 | URL
아~~박민규 작가님이 읽으면 웃겠습니다.^^
그래도 기분 좋은데요..ㅋㅋ
 
라이팅 클럽
강영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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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2.0 시대를 사는 요즘, 글은 생활이다. 때로는 말보다 글이 편할 때가 있다. 글은 음절과 음절을 이어 단어를 만들고 다시 문장을 형성하는 동안 생각은 다듬어진다.  비록 상황에 따라 글은 퇴색되고 왜곡되는 경향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이에 반해 글이 가진 파급력은 무차별적이리만큼 크고 넓다. 그러므로 어디서든 글을 잘 쓰는 재능 혹은 자질을 가진 이를 부러워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동일한 상황을 해석하는 힘, 능력이 남다르다면 그 또한 축복이겠다. 계절이 피고 짐에 따라 감정의 중추가 미묘하게 반응하는 상태를 문장으로 복기하듯 옮겨 내는 능력은 부럽고 또 부럽다. 정수리로 떨어지는 햇살의 양태를 마치 감촉이 손끝으로 전달되어 짜르르 퍼지게 하는 감각의 전이는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의 드넓은 세계로 안내하는 훌륭한 길라잡이가 된다는 사실이다.

 

글은 누구나 쓰지만 마음을 요동치게 하기는 어렵다. 그러하기에 창작을 뜯어 먹고 사는 작가의 고통과 독자의 즐거움은 반비례한다고 했다. 읽거나 보거나 듣거나 그 결과는 냉혹하다. 진심으로 짓겠다는 흔해 빠진 광고처럼 간결한 진심은 궁즉통이다. 이 책 <라이팅클럽>의 저자 강영숙 또한 그런 동질의 감정에서 출발한다. 작가가 되기 위해 어마 무시한 시간을 인내하고 마치 소믈리에가 최적의 와인을 선별해 내 듯 문장을 끄집어낸다. 그렇게 선택된 문장은 감정의 틀 속에 숙성을 해야 비로소 글이 된다. 그러므로 잘 된 글은 진심이다. 진심이 결여된 글은 형식에 불과하다. 유행에 휘둘리듯 흘러가는 부유물이다. 누에로부터 실을 추출해 내는 그 사소하고 반복적인 행위들이 모여 윤기 나는 비단이 되는 것처럼 잘 된 글에서는 윤이 난다. 읽는 자는 귀신처럼 알아본다. 무엇이 잘 된 글인지에 대해.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강영숙의 문장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한 조각에 불과한 미묘한 상황 변화에 자신의 언어로 재해석하는 힘이 탁월하다. 그래서 같은 문장으로 쓰인 글이라도 상황의 가변성에 적확하게 어울린다. 보기에 따라 기교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겠으나 그것은 강영숙의 색깔임에 분명하다. 이 책의 소주제인 설명하기와 묘사하기의 형식처럼 작가는 이 책의 중심 배경인 계동의 모습과 인물의 상호 연관성에 대해 온기를 불어 넣어 준다. 실제 이 글을 읽는 동안 창작을 한다는 것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구하게 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절묘하게 버무려 내는 작가의 글에 감탄하고 또 공감한다.

 

라이팅클럽과 계동 글짓기 모임, 양극단의 문장이나 같은 내용이지만 질감은 다르다. 작가를 자칭하는 엄마를 둔 사생아 딸과의 이야기다. 둘은 견원지간처럼 사이가 벌어져 있지만 동일한 지점을 지향한다. 바로 글쓰기다. 글을 쓰기 위한 몸부림을 토해 내기 위해 그들이 고안해 낸 것이 라이팅클럽과 글짓기 모임이다. 그래서 책은, 두 여자의 글쓰기를 추적하며 글을 잉태해 내는 과정을 뒤쫓는다. 구르고 뒹구는 삶의 파란만장한 편린들에 대해 작가는 글쓰기로 묘사하며 집중한다. 간결함 속에 강렬한 색감이 뒤섞여 튀어 나오는 느낌이다. 무덤덤해지기 쉬운 혹자의 인생을 호기심으로 뒤채는 능력이 결부되었기에 있을 법한 이야기가 된다. 또한 강영숙의 이 글 속에는 다양한 시각들이 혼재한다. 무기력하고 나른한 인생을 살아가던 주인공 영인과 관계를 맺는 인물들의 다양성은 광각의 확장처럼 파노라마로 꿈틀댄다.  정체성의 혼란, 질풍노도의 시기와 같이 누구에게나 지나쳐 가는 통과의례처럼 인생의 그렇고 그럼에 대해 작가는 관조적인 언어로 대응해 준다. 음각과 양각처럼 감정의 기복이 심한 어머니는 대척점에 가 선다. 수평의 균형을 맞추듯 이야기는 내용의 독특함에 반해 안정감이 느껴진다.

 

돈키호테의 무모함이 때로는 자신의 꿈을 향해 걸어 나가는 커다란 견인차가 되기도 한다는 과정을 용기라는 의미로 교차시키며 시몬느 베이유의 <노동일기>와 잭 플로베르의 <통상 관념 사전>의 문장들을 슬쩍 슬쩍 삽입하며 글쓰기의 고통을 노동의 직접적인 대가, 진정성에 비유한 전개는 인생을 조망하는 관점의 일치감을 형성하는 모티브가 된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어제와 오늘의 생활이 달라진다 할지라도 여전히 글은 간결하다. 영인이 엄마의 히스테리를 혐오하며 닮기를 거부하지만 어느새 닮아 있는 두 여자의 모습이 오히려 능청스럽다. 결국 둘은 의도하고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자신만의 언어와 시선으로 세상을 향해 소리쳤던 셈이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처럼 맴돌기만 하던 이야기의 끝이 하나의 합일을 이루어 내며 계동을 감싸주던 햇살처럼 공감을 이룬다.

 

공감의 언어는 글쓰기의 존재의미다.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간절히 바라는지에 대한 밀접한 관계다. 누구에게나 2박3일을 꼬박 지새울 사연 하나쯤은 있듯 개별적인 삶은 다르나 본질은 같다. 그 속에서 스며든 사연의 흔적은 우여곡절이 만든 삶의 침전물이다. 토해내지 못하고 삼킬 수밖에 없었던 각자의 사연을 글은 갈무리하고 단정하게 변화시켜 준다. 강영숙의 글쓰기, 라이팅 클럽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농밀한 언어로 정제된 문장을 선보인다. 글을 단순히 관계를 매개하는 수단이 아닌 자신을 투영하는 하나의 성숙한 감각의 무엇으로 활용하는 길을 보여준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라이팅클럽>에 모인 그들 모두는 사실 우리 각자의 모습이다. 글은 그렇게 읽히고 퍼져 나가며 공감하게 되며 관계를 묶는다. 만약 글쓰기에 목말랐다면 망설이지 말고 이 책을 보시라. 울고 웃는 사이 묘사와 설명이 절로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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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1-17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 몰라서 망설였는데...이 책 조용히 회자되더군요~^^

穀雨(곡우) 2010-11-18 13:14   좋아요 0 | URL
여성 특유의 감각이 착 감기는 책이지요.
촉감의 시각화라고나 할까요?^^
 
빈집
김주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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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恨과 울분은 화병의 근원이다. 우리네 민족 정서에 담긴 소재 중 한恨에 대한 집착은 병적일 만큼 삶을 무섭도록 지배한다. 상실과 결핍에서 오는 아픔, 구조적 모순에서 오는 기능적 아픔. 그 모습은 각양각색이지만 하나의 구심점, 한으로 이어진다. 한에 대한 모습을 형상화한다면 채울 수 없는 비움이 떠오른다. 상호작용이 단절된 일방적 형태의 껍데기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가뭇없다. 이러한 현상의 주효한 원인으로 나는 봉건적 구조와 계층적 갈등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한이 쌓이고 또 쌓여 중첩된 아픔이 되는 이유의 외형적 원인은 사뭇 그러하다. 하지만 한의 내면적 갈등은 해갈할 수없는 욕망에서부터다. 욕망의 다채로운 현상 가운데 하나인 정서적 교류의 단절은 한을 유발하는 시초가 된다.

 

그래서 한을 형성하는 원인을 찾는 것은 때로는 다면적인 상황의 이해와 면밀한 접근으로 결속되고 엉킨 실타래를 풀어 나가는 추적의 과정이 필요하다. 제 아무리 뒤엉키고 꼬여 든 문제라도 실마리는 있기 마련이다. 따지고 보면 티끌 같은 실마리의 단초는 관계의 부조화다. 나와 관계를 맺고 연결된 일차적인 친밀집단 즉, 가족이다. 가족의 해체는 기능적 갈등요소들을 한으로 응집하고 끌어 모으는 원인제공의 요소라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사회 문화적 시스템 내에서 가족문제는 은밀하고 사적인 공간의 문제로 치부되어 보듬어 안고 치유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매듭을 묶은 당사자의 손으로 풀어야한다는 결자해지의 영역인지 모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김주영 작가의 <빈집>을 조망해 본다면 상당 부분 그로테스크한 상황의 연출이 지속됨을 알 수 있다. 부자연스럽게 흐르는 인물들 간의 개성 넘치는 캐릭터의 조합은 상황을 지배하는 힘이 된다. 모이고 퍼지는 파동처럼 각 각의 한이 얽히고설키고 포개지지만 결국 채울 수없는 비움의 기형적 출현으로 공감하기 힘든 현실을 껴안는다. 하지만 이러한 역설적 상황으로 내모는 내러티브는 단단함에서 비롯된다. 의도하고 설정된 조합이 조밀하게 계획된 대로 치밀하게 구동하는 힘, 김주영 작가의 역량이다. 진부한 소재도 조탁되고 주무르면 세제되어 정화될 것 같은 필력이다. 나는 이 작품으로 그를 처음 만났다. 소개해 준 지인의 선물이 없었다면 깊이 있는 그의 글을 놓칠 뻔 했다. 흔하디흔한 가난과 상처를 소재로 이렇게도 한 많은 인간 군상들을 정렬시켜 놓는 그의 필력에 흠뻑 젖었다.

 

소설 속 주인공 어진과 한량의 피를 이어받은 근본 없는 도박꾼 아버지와 억척같이 살길을 도모하는 어머니의 기묘한 줄다리기를 통해 삶의 끈이 어디로 이어지고 나아가는지 드려다 보는 장면은 잿빛 여운처럼 진득하게 퍼진다. 이 작품에서 도드라져 보이는 소재는 바다와 은행나무의 은유적 감성이다. 채울 수없는 마음의 위안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인간의 고독한 행위의 분투가 애틋하다. 어진은 아름드리 오동나무에 메어 놓은 하늘침대를 통해 살얼음판처럼 아슬아슬한 자신의 처지를 투영하고 위무하며 그에 반해 배 다른 언니 수진의 해체된 가족의 아픔은 바다로 이끌어 상호대비 시켜주는 구조는 작가의 한에 대한 통찰이 깃든 메타포다.

 

실제 이 작품의 얼개는 다양한 가족 내 갈등의 원인을 현란하게 보여준다. 아버지의 잇따른 부재와 쫓김으로부터 발생한 불안의 극복과 해소를 위해 어머니는 어진에게 무자비하고 냉혹하게 대한다. 애정결핍은 이렇듯 지근거리에 있으며 인물마다 각기 처해 있는 상황의 변주가 다르며 받아들이는 태도 또한 다름을 적확하게 보여준다. 일그러져 구부러진 관계는 때로는 극단의 모습으로 때로는 실체 없는 두려움으로 변질될 때가 있다. 그래서 한동 설한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어진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 무작정 험한 길을 휘적휘적 걷고 낯선 곳으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만용을 부리며 기이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댈 곳 없는 마음의 유기된 행동의 연장선이다. 정해진 것 없이 찾고 숨는 술래 없는 숨바꼭질을 계속 자행하며 기필코 찾아내고 마는 괴상한 행동은 불안한 마음을 고스란히 투영시켜 놓는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삶에 대해 결여된 아픔을 갖는다. 어진의 눈을 통해 아픔이 재해석되고 변형되는 모습은 관계의 모순과 결핍의 순간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고독의 섬에 갇히게 된 어진의 방황하는 마음과 삶에 배신당한 상처는 모두 구조적 모순에서부터라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한에 대한 섬세한 분석과 해체작업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공감으로 다가선다. 수진이 남편의 바람과 폭식으로 인해 우울의 그늘 속으로 숨어드는 과정과 어진이 시댁으로부터 버림받고 비정한 어머니와 무능력한 아버지로부터 애정이 결핍된 과정 또한 닮은꼴로 변한다. 결국 이야기의 절정은 비움의 채움에 대한 욕망의 분출로 이어지는 것을 예정할 수 있다.  외롭게 홀로 선 섬처럼 끊어진 연결고리를 찾아 헤매는 아픔의 배출하지 못하는 허무한 생산이다. 수진이 바다를 사막의 신기루마냥 내딛고 유영하는 모습과 어진의 냉혹한 삶의 모습은 한으로 승화된다.

 

이렇듯 어진의 성장의 파노라마를 통해 작가는 선예도가 높은 망원렌즈를 사용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무시로 흡입한다. 그 속에서 거머쥔 아픔, 한을 끌어안은 여인의 애환은 시리도록 아픔이 퍼진다. 변화무쌍한 시간의 속도에 현기증을 겪는 현대인들에게 이 작품은 자근자근 타자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는 시간을 제공한다. 또한 아무도 머물지 않는 빈집에 대한 정체성을 통해 상념의 시간을 선사한다. 비움의 마음을 우리는 무엇으로  채우는가에 대한 진중한 물음, 탐욕과 욕망의 고삐를 어떻게 쥐고 나갈 것인지를 되묻는다. 아울러 인간은 관계와 관계의 촘촘한 망에 얽혀 산다는 변하지 않는 진실에 한 발짝 다가섬을 느낀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비움과 채움의 끊임없는 반복 작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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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9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30 0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0-09-29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움과 채움도 멋진 대구,멋진 제목인걸요~

제목도 좋지만,리뷰도 좋아요.
전 요즘 자꾸 비워내는 쪽으로 생각해요.

穀雨(곡우) 2010-09-30 09:22   좋아요 0 | URL
비움에 대해 늘 고민하지만 잘 안되네요...^^
제가 욕심이 많나봐요...ㅎㅎ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에게 소설이란 있을 법한 이야기로 이해된다. 소설은 상상이라는 재료를 주원료로 삼고 작가의 오감(五感)이라는 부재료를 투입해서 잘 버무려 숙성시켜 부풀린 빵과 같다. 그러므로 소설에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사실적인 무대가 펼쳐지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소설이 촉수를 가진 생물체처럼 감각적이라는 사실도 비슷한 논리다. 이렇게 소설은 인간을 닮는다. 더 자세히 말하면 인간관계를 투영한다. 인간관계는, 삶이라는 보편적이고 개별적인 요소의 총합이다. 삶의 속성은 대체로 불가해성의 영역이다. 복잡 미묘하며 예측하거나 속단할 수 없다. 누구나 삶은 불완전하며 완벽하지 못하다. 이와 같이 삶과 소설은 동일한 범주에 있으나 소설은 보다 더 자유롭다. 따라서 소설의 무대는 가변적이며 전지전능한 실험의 대상이 된다. 그 속에서 나는 세상을 본다. 그러하기에 소설은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고 오르가즘을 재촉하는 해방구가 된다.

 

 

김영하. 나는 그를 우연한 기회에 만났다. 그가 한국문단에 센세이션의 돌풍을 몰고 다니며 엄청난 인기몰이를 할 동안 나는 그를 몰랐다. 그와 맞닥뜨리게 된 기회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의 한 부분이다. 동사무소에 들렀다 주민 편의를 위해 대여문고를 운영하던 책꽂이와 근접한 거리에 있었고 그날따라 민원을 해결하기 위한 사람들로 붐볐다. 시간은 정지된 듯 지루했으며 고압적인 흐름은 불편했다. 상황은 내가 원하는 방향의 궤적으로부터 비켜 나가기 시작했으며 어느새 손끝은 그를 만났다. <퀴즈쇼>. 빠르게 눈은 흘렀으며 마음은 뒤쫓기에 분주했다. 인생은 퀴즈다. 이 소설을 쓰는 내내 이십대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가장 아름다운 자들이 가장 불행하다는 역설. 그들은 비극을 살면서도 희극인 줄 알고 희극을 연기하면서도 비극이라고 믿는다.(퀴즈쇼. 작가의 말 중에서) 그의 문장은 사실적이었으며 상상력은 기발했다. 그의 오감에 걸려든 인생은 나를 위로했으며 인생은 퀴즈처럼 선택의 순간이라는 역설을 이해했다. 나는 그렇게 그의 책을 섭렵했다. <빛의 제국>,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검은 꽃>, <오빠가 돌아왔다>.

 

 

그렇게 그가 돌아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를 여유롭게 들고 특유의 마술로 세상을 홀렸다. 그의 이번 작품은 전작의 속성은 닮고 있으나 전에 비해 짧은 단편으로 묶였다. 단편소설의 특성상 템포와 강약의 완급조절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번 작품은 그의 실험적 본령을 이어가는 또 다른 결과물인 셈이다. 나는 그의 이번 작품에서 안톤 체호프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를 연상했다. 러시아의 대작가 안톤 체호프는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현상을 바탕으로 소설을 써 내려 갔다. 그의 글은 특별히 놀라운 사건을 도입하기보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설정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 사건이 있더라도 그 자체의 외부적인 측면보다는 사건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다양하고 모순된 반응에 주목한다는 점, 대체로 매우 느슨한 플롯인데다가 그 결말이 미결정의 상태로 끝나고 주인공들도 이에 대해 어리둥절하고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는 점, 등장인물들 간의 의사소통의 단절 등 현대 단편소설의 기틀을 확립한 천부적인 자질을 갖춘 문호였다.(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p-191~192 인용) 이 책의 총 13편의 단편은 체호프의 토질을 자양분 삼아 성장한 열매로 인식된다.

 

 

실제 이 소설의 플롯들의 다양성, 소재의 기발함, 삶의 보편적 편린 등은 그 차별적 시도가 매혹적이다. 사실(寫實)이라 할지라도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삶의 보편적 특성은 어느 순간 존재의 가치 앞에 무력해진다. 이 작품의 명제(命題)가 대변하여 주 듯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르거나 알 수도 있다는 가정적 현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작품의 알고리즘을 분해해 본다면 모노레일의 궤적과는 달리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무공처럼 비정형적이며 일정하지 못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삶은 때때로 자신을 속이고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이른바 삶의 불가해성이다. 앞서 전술한 바와 같이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나 관찰없이는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의 이번 작품은 차후 작품의 패턴을 넓히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로봇의 삼원칙을 세운 아이작 아시모프는 <아이로봇>의 저자다. 그의 소설은 윌 스미스가 주연한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며 흥행 또한 크게 성공했다. 아시모프는 칼 세이건과 더불어 천재과학자이자 작가다. 김영하가 아시모프의 로봇을 빌려 온 것은 모방이 창작의 주춧돌이 된다는 경험적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김영하의 <로봇>은 아시모프의 그것과는 닮은 점이 없다. 로봇은 더 인간적이며 인간의 마음을 시종일관 뒤흔든다. 섹스를 하고 사랑을 나누지만 로봇의 3원칙에 복종하는 딜레마에 빠진 로봇. 그래서 사랑하지만 떠나야 하는 로봇. 김영하는 이에 더해 ‘라고 치고 게임’을 주 무기로 공략하며 패를 유리하게 이끈다. 이 작품에서 나는 딜레마에 갇혔으며 험난한 암초에 좌초되었다. 로봇의 존재이유를 묻게 되었고 그 로봇이 인간에게 쾌락을 안겨주었으며 그 쾌락의 종말이 로봇의 파괴로 이어진다면 로봇이 인간을 제거의 대상으로 판단하게 될 것인가라는 구조적 모순에 이르렀다. 따지고 보면 모순된 현실은 어디서든 비일비재하다. 비이성적인 해답이 차지하는 경우는 허다하며 이성은 상실된 지 오래인지 모른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는 아직 로봇을 모른다.

 

 

<여행>은 현대인의 고독을 해체하고 재구성했다. 결혼을 앞 둔 수진과 과거 애인이었던 한선과의 어색한 만남과 무모한 여행이 발단이 되어 불편한 진심을 토해내며 가식의 가면을 벗는 인간의 위선적 행위를 관찰한 작품이다. 사랑과 현실은 다르다는 차이를 우리는 진리처럼 되새긴다. 현실 앞에서 사랑은 허무하고 냉소적이다. 한선의 그 무모한 만용도 짧은 쾌감을 유발하지만 영화에서나 볼 법한 상황은 낙관적이지 못하다. 배를 태워주겠다는 험상궂은 사내의 시비와 폭력으로 이어지는 낭자한 현장은 수진의 마음을 흔들지만 현실은 그녀의 미래 앞에 비굴해졌다. 포스트잇같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뒤끝 없는 관계라고 믿던 그녀에게 미래가 불투명한 시간강사의 그는 이미 거세당한 만남이었다. 아이러니한 이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너무도 흔하게 일어난다. 외면 권하는 세상, 사랑을 위한 납치도 이제는 관용의 자리는 없다. 인생은 사막보다 더 삭막하기 때문에.

 

 

<악어>는 포식자의 매정한 눈물이 떠오른다. 한 남자에게 우연히 찾아든 천상의 목소리. 그를 성공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로 이끌던 목소리가 어느 날 갑자기 없어졌다면. 남자는 우연히 들른 클럽에서 무명의 보컬에게 끌리고 그의 노래를 듣는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거대한 파충류 악어, 목소리는 꿀꺽. 그는 악어가 되었다. 박제가 되어 동물원에 전시된 후 그의 노래는 전설이 되었다. 모든 동물들이 우는 비현실적인 상황. 박제된 악어의 노래는 위선처럼 슬픔을 지배하였고 악어는 위선에 능욕당하지 않았다. 결국 세상은 악어의 위선처럼 거짓에 취약하며 보이는 것에 집착한다. 신기루처럼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면 그만인 것을.

 

 

<밀회>는 작품 속 나를 따라가며 관찰하는 시선이 인상적이다. 그 시선 속에 숨어든 반전은 이 작품의 주제가 숨은 최고의 걸작이다. 시간의 흐름을 유영하고 타국의 일상을 탐구하며 때로는 나른하게 때로는 흥미롭게 서술하는 경어체는 고백처럼 들린다. 소설 속 나는 세심하게 사물을 더듬고 그녀를 만나는 동안 펼쳐지는 정경을 하나라도 빠트리면 큰일이라도 날것처럼 고백한다. 그 고백은 자성의 소리로 이어지고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 사물의 구체성에 대해 논하며 윤회를 들먹인다. 그는 해파리를 꿈꾸고 그녀와의 부적절한 만남을 회의(懷疑)한다. 아주 가까운 사람을 낯선 사람처럼 느끼는 그녀의 남편과 그로 인해 복잡한 죄책감과 증오, 친밀감에 대한 희구가 뒤섞인 그녀는 소설 속 나의 예상 밖의 죽음에 현실로 빠르게 빨려 들어간다. 김영하는 이 작품에서 그가 면밀하게 관찰하고 느낀 사유의 총아를 모두 집결해 놓았다는 느낌을 나는 강하게 받는다. 삶은 불가해한, 알 수 없는 현상의 연속이며 정형과 비정형의 경계를 무시로 넘나든다. 이처럼 이 작품은 아무도 모른다는 미지의 영역의 경계에서 실존적인 물음을 구체적으로 던짐으로써 인간의 내밀한 본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사유하게 하는 내용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삶의 근원이 믿음에서 비롯되고 나아간다는 본질에 보다 더 가깝게 접근하는 계기가 된다. 마치 밀회하듯 스릴 넘치게.

 

 

<아이스크림>은 누구나 한번쯤은 해 봤을 법한 상황을 표현한다. 아이스크림이라는 자동화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일정한 질량과 성분으로 조합하여 만들어진 기성품, 그 속에 산입된 불순물은 신뢰의 영역이다. 나는 만들어진 음식을 먹을 때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정말 안전한 지, 믿을 수 있는 지.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암묵적 합의에 의한 결과다. 내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은 제 값을 치르고 갈증을 해갈시켜 주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불순물이 첨가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불순물은 제조자와 고객을 불편한 관계로 만들고 기선을 잡기위한 모종의 심리게임은 시작된다. 상황은 어지럽게 번진다. 소설 속 부부의 상황처럼 고객책임자의 비일상적인 만남의 기록은 낯설지만 눈에 익는다. 손해배상금이라도 한 몫 챙기겠다는 윤리적 경계에서의 유혹은 오히려 인간적이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 또한 인생이다. 고객책임자의 너무도 성실한 태도에 압도당하고 패스트푸드로 넘쳐나는 현실 속으로 되돌아온다. 이 작품은 세속적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오는 간극을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통해 극명하게 대비시켜 보여준다. 반드시 신문에서나 보는 거액의 손해배상금을 받는 행운(?)처럼 같은 결과는 이루어 질 수 없는 법이라고.

 

 

<조>는 타락한 형사다. 백화점을 드나드는 뜨내기 잡범을 잡아 장물을 빼돌리며 이익을 챙긴다. 그에게 있어 백화점은 경계와 보호의 대상이 아닌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공간이다. 조는 포식자의 인내를 가지고 먹이를 좁혀 가 듯 표적을 유린한다. 반면 백화점 시계코너 정은 살기 위한 몸짓으로 육신을 타락시킨다. 타락은 공공연화되고 일상화된다. 어쩌면 우리에게 타락은 허용된 제스쳐이다. 경계를 조금 넘었다고 해서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경계를 탐하는 타락은 변하는 것에 대한 무감각이 지배하고 우리는 그렇게 타락한다. 조가 정으로 인해 타락하는 과정은 흡사 중독성 강한 마약성분처럼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우리 삶에서 타락은 바람처럼 가깝고도 은밀하다. 언제든 유혹할 태세를 갖춘 팜므파탈의 유혹처럼.

 

 

<마코토>는 현대 여성의 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했다. 훈남의 일본인 유학생을 사이에 두고 새침떼기 후배와의 줄당기기는 읽는 이의 애간장을 태운다. 상황이 역전되고 후배의 교활한 속임수에 마코토가 넘어가 버리는 가련한 현실은 애틋하다. 하지만 인생은 역전이 가능하다. 일본 도쿄에서 우연히 만난 마코토와 후배와의 이별을 듣고 지난날을 회상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바람은 믿는 그대로 일어나지 않는 법. 머피의 법칙처럼 민망한 상황, 허무개그처럼 뻘쭘함이 밀려온다. 유쾌한 암전, 읽는 이는 즐겁다.

 

 

<퀴즈쇼>는 그의 장편과 얼개가 유사하다. 하지만 또 다른 맛이 난다. 소설 속 주인공 정동국과 조은이의 만남 그리고 관계를 적절히 배합하고 섬뜩하기도 한 장면을 삽입하여 몰입을 유도한다. 기능적 결손가정, 성공일변도의 가치관, 물질만능주의사회에 대한 다양한 문제에 대하여 경쾌하게 탁탁 끊기는 스타카토처럼, 시원하고 차가운 맥주처럼 텁텁함을 깔끔하게 잡아주는 바삭한 맛이 일품이다. 인생은 퀴즈처럼 선택의 순간이다. 선택은 홍수통제소에 날아든 긴박한 상황이 파도를 타고 이어진다. 그 물결이 어디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른다. 예측은 빗나가고 상황은 암울하다. 하지만 인생은 정동국의 헛물처럼 잡념을 남긴다. 내가 그때 그랬다면.

 

 

<명예살인>, <바다이야기 1, 2>, <오늘의 커피>, <약속>은 짧지만 임팩트가 강한 소설이다.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절단하여 벌려진 채로 속살을 그대로 드려 낸 실체를 비틀어 보고 매달아 보고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꼼꼼하게 분석한 뒤, 콘트라스트 강한 흑백사진처럼 직설적으로 직관적인 서술이 인상적이다. 어디서든 부딪히는 상황, 사회면 한 곳을 오롯이 장식하는 사건·사고, 불행은 이어진다는 속설, 어이없는 만남 등 이러한 단면들은 확률의 법칙을 무시하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이렇듯 김영하의 이번 작품은 상상력이라는 펜으로 현실을 섬세하게 스케치한 마스터피스masterpiece다. 그의 문장은 모던함 속에 감춘 마력이 강한 자성을 발산한다. 한번 붙으면 떨어질 줄 모르는 쇠붙이처럼 생각을 흡수당하고 관성을 상실한다. 나는 소설이 현실을 떠나서는 공상에 그친다고 믿는다. 소설은 현실에 충실해야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온전히 작가의 몫이다. 그러하기에 소설은 작가의 밀어내고 내어 쓴 사유의 흔적을 따라 독자는 그들의 언어로 이해하고 흡수하며 상호작용을 통해 정화작용을 일으킨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김영하는 오래도록 간직할 삶의 도피처이며 위안이 되는 소통의 장이다. 그러하기에 그의 이번 작품, 반갑고 또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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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8-31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추천만해야지 어려워서 원~~ㅋㅋ
소설을 읽을 땐 뭐 나의 인생도 같이 읽혀지니까요...도피하고 싶어도 자꾸 현실이 곱씹어지곤 해요.
멋진 리뷰...즐감합니다^^

穀雨(곡우) 2010-09-01 08:59   좋아요 0 | URL
어렵다는 생각, 제 글의 최대의 약점입니다.
보다 더 쉽게 쉽게 써야 할텐데 말이지요. 글쓰기 어렵습니다.^^

yamoo 2010-09-02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김영하 작가 좋아해요..최근 나온 신간을 제외하고는 다 읽었습니다..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김영하의 신작은 천천히 구입해야 겠습니다^^

穀雨(곡우) 2010-09-03 09:28   좋아요 0 | URL
이번책은 단편선 모음집이라 생각보다 분량이 작습니다.
한나절이면 충분한 분량, 하지만 김영하의 스타일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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