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잡상인 - 2009 제3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우승미 지음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언젠가부터 불행을 소외의 다른 이름으로 이해한다. 경쟁을 공공의 선으로, 인간이 만든 작위적이고 시니컬한 현실에 동화되지 못하고 굴복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이상의 관계에서 오는 간극은 채우기조차 요원하다. 경쟁에 내몰리고 속임수와 비겁함으로 무장한 각박한 현실은 삶의 희망마저 감춘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과 타협의 다양성을 구사하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다. 불행의 순간에도 사랑과 믿음으로 타오른 희망의 빛을 감출 수 없다.

 


불안과 희망은 한 배에서 나온 운명공동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엎치락뒤치락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네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기준점이 된다. 이 책의 캐릭터들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 소위 잘 나가는 주류사회에 가려진 별 볼일 없는 3류 인생이자 잉여의 산물로 투영된다. 이들을 이어주는 공감의 틀은 그들에게 개껍찔처럼 달라붙은 핸디캡이 생산한 사회적 약자에게 내어 준 지위의 소산이다.

 


저자는 막장인생이나 다름없는 그들을 통해 줄지어 늘어 선 선형의 동질감을 발견하고 블링 블링한 희망을 품는다. 웹에 익숙한 문체와 사실감 있는 간접경험의 소묘는 적절하게 익은 김장김치와 같은 알싸함이 배어난다. 여류작가라고는 믿기 힘든 남성중심세계의 현실감 있는 반영에 절로 주억거리게 만든다. 철저한 사전작업과 고증을 거쳤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낭중지추처럼 날카롭고 예리하기까지 하며 저자의 깜냥이 대단하다.

 


이야기의 전개과정은 깨알 같은 글씨로 잘 정리된 노트를 보는 것처럼 산만함이 없는 개운함이 주는 특유의 매력이다. 인물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성을 자연스럽게 창조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의도를 집중과 선택의 황금율로 건져 올린 아이템은 군더더기 없이 뻗어 나아가는 필력까지 엿보인다. 이러한 책은 단숨에 읽기에는 아까움마저 들게 만들지만 어김없이 끝장을 뒤적이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밀고 당기기와 웃겨야 할 때 여지없이 웃음코드를 자극하는 한편의 슬랩스틱의 진수라고나 할까.

 


맛깔스럽게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조합하여 이끌어 나가는 글을 볼 때면 시크하다는 표현이 제격이다. 매끄럽게 넘어가는 표현과 단락의 호환을 통해 작가의 관념, 철학과 삶의 경험과 통찰을 오롯이 엿 볼 기회를 잡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런 면에서 본다면 독자와의 직접적인 교감을 쟁취하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다. 전체를 감싸고도는 가상의 공간을 통해 타자와 소통하는 창구의 중요한 매개체로서, 또한 탁월한 생명력과 공감의 힘을 아울러 가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불행을 구원할 매개체로 빛과 희망을 동질화 시키는 작업을 은연중에 깔고 간다. 번번이 고배의 쓴잔을 마시는 별 볼일 없는 개그맨 지망생 철이에게서, 지하철 잡상인의 전설적 존재로 분한 미스터 리 사부에게서, 장애로 인해 앞을 볼 수 없는 수지에게서, 수지의 아픔을 나누는 다중장애인 동생 효철과 그의 약혼녀 지효에게서 불행을 끊는 도구로 작용한다. 순수한 빛의 원형이, 희망의 다른 이름임을 선연하게 의미한다.

 


이처럼 일정한 알고리즘으로 연결된 밀접한 관계를 통해 연민과 사랑으로 이어지고 확대재생산 되는 상황은 불가의 연기설(緣起說)의 큰 중심축과 맞닿아 있다. 아울러 저자가 이 책의 모티브로 추출한 지하철은 비유적 의미가 무엇보다 크다. 덜 가진 계층을 대변하는 상징물을 통해 개선하기 힘든 희망발전소가 사라진 탐욕으로 점철된 뒤틀린 사회를 적나라하게 꼬집는다. 아울러 현대적 의미의  해학과 유머로부터 결락된 사랑의 형질에 성큼 다가선다. 어떻게 본다면 실험적일수도 비현실적일수도 있는 세계를 현실로 만든 것은 공감의 힘이다.

 


인간은 고립된 섬과 같아서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이해와 타협으로부터 공존의 가치를 배운다. 불행의 힘겨움은 골짜기를 넘어서기 위한 잠시의 고통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소외된 그들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 질시와 반목, 선입견의 색안경은 마음의 장애다. 신체의 장애보다 마음의 장애는 우리 모두를 병들게 한다.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인간의 이중성의 거대담론을 웃음으로 승화시켜 재가공한 이 책, 근간에 보기 드문 수작이라 할만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하철역 이정표 도난사건
이세벽 지음 / 굿북(GoodBook)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이 소설은 자본주의 폐해로부터 발생하는 암울한 우리의 일상과 자화상을 오롯이 담고 있다. 인간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 인간 본성에 숨어 있는 야만성과 탐욕, 야비함, 비열함을 알레고리로 연결시켜 하나의 원형질로 묶어 표현해 내었다. 사라져 버린 인간 본연의 순수한 감정인 꿈, 행복, 희망이 무엇인지 다시금 일깨우게 만드는 이야기로 저자의 필력이 묻어나는 글이다.


이 책 <지하철역 이정표 도난사건>은 화법이나 이야기가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그려진다. 은유적 표현과 몽환적 서사구조를 통해 작가가 의도한 바람을 신선하게 담아내었다. 저자를 통해 그려지는 인간사회의 단상은 소통하지 못하는 뒤틀린 열망의 발현과 피폐한 정신세계의 복원으로부터 시작된다. 진정한 행복과 자아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이 절대 절명의 시대적 과제임을 인식할 때 이 작품의 의미는 더욱 큰 가치를 발휘하리라.


이야기는 거대자본그룹의 총수인 황금쥐와 엄마를 잃어버린 거지소년 철수, 정의와 부조리에서 갈등하는 부장판사의 관계 속에 얽히고 얽힌 갈등구조를 이룬다. 어두운 지하철 내부역사와 연결된 비현실적 판타지 세계는 시공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이야기의 중심을 이룬다.


빠른 공간이동과 이정표를 탐하는 황금쥐의 기괴한 행위는 세상을 들여다보는 열쇠가 숨어 있다. 이정표는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가늠좌로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이정표가 사라진 세상은 이정표를 통해 제시된 삶의 좌표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 것에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원칙과 정의, 배려가 실종된 부조리한 현실세계의 반영이다.  





일반적으로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이미지로 각인된 쥐와 어둠의 권력을 묘사하는 고양이를 차용하여 의인화한 것은 자본주의사회의 고착화된 단면을 그대로 투영하는 역할을 한다. 이른바 탐욕과 부정부패가 판을 치는 미덕과 관용, 겸손의 부재가 가져다주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과 일치한다. 꿈과 희망의 어머니가 백 년 동안 산고를 지속하면서도 출산하지 못하는 의미는 희망을 상실한 인간 본성의 열망이자 분연한 외침이다.

이 책을 꿰뚫고 지나가는 핵심은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고 정체성을 찾는 것에 있다. 철수가 꿈과 희망을 대변한다면 부장판사는 정의를 대변한다. 금권에 휘둘려 만인을 위한 행복과 인간 기본권을 보장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특정 권력을 비호하고 야합과 부조리로 점철된 권력구조의 상층부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겨냥한 의미심장한 일침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일종의 시대 고발적 내용을 다분히 담고 있는 내용이라 하겠다.


자본주의의 이상은 자유와 공정한 경쟁을 통해 배분의 정의가 골고루 실현되는 것에 있다. 우리 사회가 건전한 상식이 통용되고 올바른 가치관이 자리 잡을 때 비로써 실현된다. 더불어 매몰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상호간의 자리를 인정하고 겸양과 배려가 확립된다면 분명 실천가능한 일이다. 애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경제의 통제가 가능하다고 역설한 것의 이면에는 도덕적 인간의 완성이 필요하였음은 분명한 진실이다.

이처럼 이 책은 생각거리를 제공하게 하는 의식이 분명한 책이다. 하지만 엉성한 이야기 설정과 일관성 없는 판타지 설정은 소재의 흥미를 반감케 하는 것으로 아쉬움으로 남는다. 창작의 노고와 수고스러움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식상한 플롯의 전개는 창발성을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한다. 하지만 작가가 담고자 한 의도가 분명하기에 어색함을 극복할 동인될 것으로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잘가요 언덕
차인표 지음, 김재홍 그림 / 살림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용서하세요.

       그러면 엄마별이

       당신의 슬픔을

       따뜻이 감쌀 거예요    

차인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배우이며 공인이라는 외부적 지위를 안고 산다. 그런 그가 책을 펴냈다. 그것도 단순한 에세이나 신변잡기 위주의 흥미본위 글이 아닌 장편소설을 써 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그의 글을 접하기 전에 편견이라는 시선을 보낼지 모르겠다. 그가 쌓아 온 명성과 후광을 통한 유명세를 등에 업고 펴낸 마치 상업주의의 가치와 결탁한 그렇고 그런 소설로 치부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이처럼 사회의 인식과 편견의 골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끝을 알기 어렵다. 기존의 고정관념이 뿌리내린 현실에서 한 사람으로서의 그것도 배우가 아닌 작가로서의 역량과 자질을 검증받기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색안경을 쓰고 사물을 구별하는 것과 같다. 편견의 인식은 일종의 일반적이고 보편화된 것으로 쉽사리 떨쳐 버리기 싶지 않은 부정적 시각이다. 더구나 유명세까지 타고 있는 공인의 경우에는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하지만 장벽을 허무는 주요 동인은 진솔함이 묻어나며 삶을 대하는 인격적 완성에서 비롯된다. 그러하기에 그의 금번 도전과 인식 있는 태도는 의미 있는 일이다. 그도 배우이기 이전에 자연인이며 뜨거운 피 끊어 넘치는 우리네 민족의 후손이기에 더욱 그러하리라.


이 책 <잘가요, 언덕>의 작가 차인표는 반듯한 심성과 올곧은 겸손의 자세로 대중들의 선망과 선한 이미지로 각인된 배우다. 이런 그가 10여년의 세월을 각고의 노력과 창작의 고통을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신산한 삶을 이야기로 승화시켰다. 이처럼 우리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의 아픔과 상흔을 남긴 제국주의망령의 흔적을 동화 체의 형식을 빌려 구전하듯 녹여냈다.


이야기는 절대선도 절대 악도 양립할 수 없다는 작가의 진중한 의도를 통해 엇갈린 시간에 뿌려진 갈등을 통합하고 보듬어 주며 치환을 통한 용서의 작업을 시도하였다. 전형적인 대결구도를 통해 주인공 용이와 순이의 갈등구조를 감성어린 이야기로 이어가고 일본제국 장교 가즈오의 연적과의 갈등을 통해 평범한 테마로 전이를 막아 읽는 이로 하여금 부담 없이 몰입할 수 있게 하는 소재로 채웠다. 또한 어디에나 등장하는 주인공을 돋보이고 부각시키는 도구로 주변 인물들의 개성 있고 적절한 조합은 마치 한편의 작가주의를 표방한 그의 연기 인생이 묻어난다. 이것이 그의 글의 강점이자 감성의 교차점이다. 비록 거칠고 정제되지 못한 표현에서 오는 어색함이 다소 걸리기는 하나 더불어 소통할 수 있는 묘한 매력이 흐르는 우리네 글이라 하겠다.




저자는 용이와 순이를 통해 많은 것을 담고자 시도하였다. 용이의 영웅적인 행위를 통해 짓눌린 과거의 아픔의 상처를 대리만족을 통한 심적 갈증의 해갈과 순이를 통한 포용과 자애로움의 의미를 동시에 전하여 대승적인 용서의 무대를 만들고자 하였다. 더불어 악인이면서도 이념과 행위에서 갈등하고 번뇌하는 일본장교 가즈오의 참회의 과정을 소묘함으로써 용서의 대상을 특정화하고 구체화하여 진정한 용서의 행위에 다르지 않는 것으로 승화하였다. 또한 엄마별을 통한 어미의 넉넉한 자비로운 끌어안기를 통해 모두를 보듬는 정화작용이 이 글의 백미로 작용하였다. 이렇듯 용서는 과거의 앙금을 제거하고 표출하며 드러냄으로써 가해자와 피해자의 갈등을 해소할 때 비로소 용서의 과정이 성립하고 과거의 행위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과거는 용서하고 현재는 사랑으로 미래는 희망을 되살리는 통합의 과정이 전개된다. 아마도 저자는 “잘가요, 언덕”에 깃든 상징적 의미를 용서의 매개체로 설정하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이야기를 관통하는 플롯은 우리 민족의 오랜 정서의 한恨과 정情의 분연한 표출이다. 저자가 위안부할머니를 통해 오랜 세월 각인된 통한의 감정을 글로나마 대신하여 뿜어 낸 진정한 의미는 정화와 포용의 의미이다. 이미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 더 이상 기억할 대상도 객체도 주체도 사라지는 상태다. 우리가 당신들의 신산한 삶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에 또 다시 그들이 야만스럽고 천인공노한 행위를 되풀이한들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향 사진관
김정현 지음 / 은행나무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읽는 내내 가슴 한켠이 저릿하고 무겁기만 하더니 종내에는 눈 자락을 붉게 물들어 버렸다. 너도 나도 제 몸 살피기에 급급한 시절에 당체 이런 사람이 있다니? 마음으로 보고도 머리로는 온전히 믿기 힘든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이야기에 절로 숙연해 지게 한다.

무엇으로 그의 삶을 논 할 수 있을까? 놓아 버리고 싶을 만큼 힘들었을 세월이 글로나마 이렇듯 아리고 시린데 어찌 무엇으로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몇 번을 들었다 놓았다 했는지 모르겠다. 사실적인 묘사와 섬세한 표현으로 살아 움직이듯 담담히 뿜어내는 이야기에 온몸을 내맡기게 되니 말이다.  


이 책 「고향 사진관」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저자 김정현의 절친한 벗 故서용준씨의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 져 17년을 몸소 병수발을 해 내며 그로 인해 자신의 꿈을 접고 아버지의 곁을 지킨 채 평생을 바친 친구의 한 많은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저자의 감성을 울리는 필력에 더 해 애절한 이야기가 포개지니 어지간해 서는 눈시울을 붉히지 않고는 못 배겨 나게 한다.  

  

곁에 있어 그 소중함을 잊고 살아가는 산소와 같이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는 것이 가족이라는 존재, 그런 존재이지 싶다. 허나 그가 걸어 온 삶처럼 이 땅의 아들로 장남으로 태어 나 운명처럼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살 수 있을 런지는 자신할 수 없다. 이미 그 자체로서 감당해야 할 커다란 현실이 두렵기만 하고 옹송그러지게 하는 것은 애써 숨기기조차 힘든 비열함의 발로이다. 이러하기에 그의 삶을 존경과 위대함이라는 상투적 의미로 표현하기에는 한참을 못 미치게 하는 진정한 이유에 다르지 않다.  


이야기는 용준의 대학입학을 즈음을 시작으로 아버지가 갑작스런 뇌출혈로 뇌사상태로 맞은 현실로부터 정지한다. 충격과도 같은 젊은 용준에게 현실은 무겁고 힘겹기만 하다. 다른 형제들이 있건만 장남이라는 허울로 홀로 감내하려 한다. 그러기를 17년. 그 사이 중매를 통해 천사와 같은 희순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 셋을 낳아 키우지만 언제나 그의 중심에는 아버지만 자리 잡고 있다. 신혼여행에서도, 모임에서도, 그의 삶의 나침반은 아버지를 기준으로 회전한다. 이런 모든 과정을 함께 감내하며 아무런 불평 없이 벗이 되어 준 희순 또한 그 대단함을 금할 길이 없다.  


믿기지 않을 만큼 지극한 효심을 외부로 내색조차하지 않은 채 아버지가 깨어 날 것이라는 한줄기 희망의 끈을 붙들어 매고 당신이 남긴 모든 것을 끝끝내 지키며 당신이 멈췄던 17년전의 모습 그대로 간직한다. 그런 실오라기 같은 희망도 부질없이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던 날, 그의 가슴 속 깊이 막혀 버린 답답함은 꼬여 풀리지 못하고 텅 빈 아버지의 빈자리에 맥없이 주저앉아 버리게 한다. 하지만 그는 당신의 채취가 깃든 낡은 사진관속 암실을 위안삼아 오랜 세월 숨겨 두었던 회한의 심정을 날것으로 마음껏 토해낸다.

이렇게 끝이 날지라도 그의 삶이 대단해 보일 진데, 그를 짓눌러 오던 뼈 속 깊이 파묻힌 채 멈춰 서 버린 현실의 무게가 다른 몹쓸 병으로 그에게 찾아온다. 결국 아무것도 자신을 위해서 어떠한 열정도 희망의 꿈도 펼쳐 보이지 못한 채 남겨 진 빈껍데기를 가슴에 끌어안고 그렇게 흙으로 돌아간다. 참으로 눈물 나는 삶이다.

시간을 멈춘 것 같은 옛것을 그대로 간직한 「고향 사진관」의 낡은 사진기를 통해 훈훈한 사진이 바람을 타고 전해온다. 사진 속 비워 둔 아버지의 자리에 굵은 눈물로 목이 메게 하고 더 잘 해 주지 못한 불효의 심정에 가슴 져 미게 하는 가족이라는 사진이 뜨겁게 전해 온다. 그가 보인 가족애의 우직하고 선 굵은 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시대를 초월한 아가페적인 사랑의 남다른 표현이리라.

용준과 그의 아이들이 허름한 사진관 옥상 밤하늘을 보며 별을 헤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밟힌다. 비록 인생의 참맛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바람에 묻혀 사라져 갔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이제 더 큰 바람을 타고 사람들의 가슴속을 찾아 메마른 영혼을 달래 줄 것이다. 아마도 그의 마음은 따스한 미풍이 되어 또 어디에선가 그의 이야기를 읽고 목메어 눈물짓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싸 줄 런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엄마, 이 세상에서 글이나 말로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또 다른 의미가 아닐까? 엄마는 그저 떠올려 부르고 듣기만 해도 포근히 스며드는 따스함에 절로 겨워 그 존재감을 잊게 하는 익숙함에 있다. 이처럼 머리가 굵어지면서 어미가 보인 내리사랑의 고마움에 뒤늦은 후회로부터 목이 메게 하는 것은 당연함으로 무장한 이기적인 발로이지 싶다.  


이 책 「엄마를 부탁해」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먹먹함이 오롯이 스며든 가슴 저린 이야기다. 초반부터 시종일관 내비치는 익숙한 어미의 내음에 종내에는 말라버린 눈물샘을 자극하고 그칠 줄 모르게 한다. 저자는 그런 일을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인칭의 바라보기를 ‘너’로 돌려 세워 애써 감춘 부담감의 무게를 온전히 감내하기를 요구한다.  


이야기는 늙은 어미의 행방불명으로부터 시작된다. 완고하고 가부장적인 아비와의 우연하고 예견된 단절로 영원히 사라지고 마는 엄마의 모습에 품었던 가슴 속 착각의 환상으로부터 철저하게 깨트려 지는 결계의 가녀림에 결별을 예고하게 한다.  


엄마가 사라지고 난 후 바라보기는 아들의 마음속으로 들어 와 어미의 모든 것을 뒤바꾼 삶의 일면이 그려진다. 이야기 속 엄마가 가진 박소녀의 이름처럼 아이러니하게도 아내로서의 삶을 걷기 시작한 순간부터 여성으로서의 백합 같은 순수함은 봄날 꽃망울과 같이 시들어 버린 지 오래지 싶다. 체념적 순간이 다시금 인내와 희망을 열망하여 노래하는 것은 오로지 당신의 살 내음 가득 사랑을 품어 기른 아들에게로 전이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들은 제 어미가 가슴으로 품어 기른 사랑의 눈물겨움에 사회적 편견과 인습에 물들어 잊고 지낸 나날들에 반추하며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나에게만은 변절하지 않을 것 만 같은 지독스러운 이기심이 이제는 부끄러움을 넘어 회한의 눈물로 어미를 가슴에 묻게 한다.  


다시 바라보기는 어미의 삶을 닮아 가는 딸들을 지켜보는 시선으로 옮겨 온다. 뒤옹박 같이 뒤틀린 어미의 인생을 딸에게만은 되물림 하지 않기 위해 아들과는 또 다른 어미의 넉넉한 젖가슴과 같이 사랑을 풍긴다. 시대가 변해 평등한 삶을 살기 위해 드세어진 밤을 사는 막내딸의 모습에서 애잔함을 보여 주고 인텔리로 무탈하게 자라 결국 누군가의 아내로서의당신과 너무도 닮아가는 삶을 살아 내는 큰딸의 모습에서 애처로운 어미의 심정을 보여 주는 것은 모든 어미의 마음을 날 것으로 대변하고 있다.  

 

또한 엄마는 얼굴도 모른 채 지긋지긋한 가난의 허울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 당한 지아비를 그윽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말랑말랑하고 생기발랄함을 품어 간직한 18세 소녀의 마음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하여 세월의 풍파에 딱딱하게 굳어 버리게 만들어 버린 일방적인 남편의 모습에서, 한恨이 승화하여 또 다른 정情의 모습으로 분출되여 녹아내고 있다.  


이에 더 나아가 저자는 기교적 장치의 일환으로 엄마의 여성으로서의 굳은 마음을 뜨겁게 달구어 주고 친구와 같은 존재를 인위적으로 설정하여 엄마의 본성이 중성이 아닌 온전한 여성으로서의 기억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일깨우게 하는 이성적 대상을 의도적 삽입을 시도한다. 이를 통해 엄마에게 한순간 지나쳐  설레이게 하였던 감정들의 편린들을 끌어 모아 여성으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것에 동조하게 한다.  


이야기는 엄마를 찾을 것이라는 희망적 바람은 끝끝내 들어 주지 않을 모양이다. 당신의 몸 건사하기를 사치처럼 치부하며 자식들과 지아비를 돌보기 위한 삶이 숙명인 듯 묵묵히 받아 들여 낡아 해어져 무릎이 나온 펑퍼짐한 몸 빼옷과 세월에 닳아 버린 파란슬리퍼의 수고스러움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오도카니 커다란 눈망울을 끔뻑이는 어미 소의 모습과 뒤엉키게 한다.   

 

이렇듯 저자가 이야기하는 엄마의 상실로부터 오는 당신의 존재감에 대한 대중적 접근은 치열한 긴장관계를 대비시키지 않고도 세대를 아우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엄마라는 대상이 가져다주는 심리적 이완작용이 복잡다단한 일상에 우리네 엄마가 가진 자애롭고 넉넉한 미소와 한없는 사랑에 저절로 주억거리게 하는 것은 위대함을 넘어 선 엄마의 단어가 내포한 의미 그 이상이라 하겠다.  


골똘하게 그러모아 생각할 필요도 없이 치밀어 삼킬 듯 끊어 오르는 어미의 모습에 지나간 과거로의 기억 속으로 스며든 사랑의 손길에 다시금 감동받게 되고 어미의 가슴 속 굵어진 주름만큼 못난 빠진 아픔의 자화상을 아로 새기게 한다. 이처럼 저자 신경숙이 자근자근 들려주는 엄마의 부탁은 더 이상 타자의 삶이 아닌 우리의 삶의 엄마에 대한 희망적 부탁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