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인류 - 인류학의 퓰리처상 ‘마거릿 미드상’ 수상작
마이클 크롤리 지음, 정아영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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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는 삶을 긍정에너지로 바꾸는 지름길입니다. 타고 난 신체적 특성, 환경 그리고 열정은 달라도 달리기가 그 만한 가치가 있는 일 임을 알려 준 책입니다.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에디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 모인 선수들의 달리기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를 엿볼 수 있어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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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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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화되고 보편적 정의가 지배적인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비이성적이거나 몰상식적인 일들에 경악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원초적인 아픔의 형태가 아닐지라도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배려하는 것은 사람 사는 세상에서 자라나는 연대된 믿음이다. 어떻게 보면 봉건제 사회에서든 민주제 사회에서든 보편적 선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때로 잔인하고 더할 나위 없이 추악스럽다. 아픔의 형태가 원초적일수록 더 크게 잔혹함의 형태는 무뎌지고 아픔에 대한 고통척도의 비례가 비정상적으로 재단된다. 더욱이 제도화된 기관의 이면 속에 감춰진 폭력은 때로는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이 책은 아일랜드의 참혹한 역사의 어두운 사실에 기반한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아일랜드 가톨릭교회가 세운 미혼모를 위한 보호소이며 입양시설이었다. 구휼시설의 타락은 더 철저하게 무너졌고 파장효과는 매우 강력했다. 보호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인권유린의 실상은 가닿지 못한 현실처럼 아련하기만 하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화자를 통해 바라 본 세상은 불편했고 차가운 고통은 사뭇 낯설기만 한다. 하루하루 오늘을 버티게 한 노동의 대가에 실로 감사하며 가족의 행복이 최우선으로 여기는 중년의 필부를 통해 바라 본 타인의 고통은 많은 물음을 제시한다. 작가의 의도가 천착한 바가 여과없이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책은 가벼웠고 흘러가는 강물처럼 시나브로 스며들지만 암초에 걸려 소용돌이치는 물결처럼 파문은 오래도록 자리 잡는다. 불의와 타협한 시간을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선을 통해 현실속의 자아를 선의로 이끄는 과정은 매우 감동스럽다. 이미 이야기는 영상화되어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지만 그 전에 활자를 통해 바라 본 감동을 느끼길 권한다.

 

이야기가 추동하는 힘은 간결하지만 빠르게 퍼져 오래도록 여운을 새기는 힘을 가진 책임에 틀림없다. 어느 시대에 살았건 어느 곳에 터를 내렸건 역사의 층위에 기억된 아픔과 야만의 폭력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타락하고 오염되며 취약한 구조의 결과물인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역사의 시간 곳곳에 나타난다. 그럼에도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 즉 공공의 선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희망처럼 다가온다.

 

이렇듯 작가의 책은 처음이지만 단숨에 읽혔다. 이야기의 얼개가 단단한 것은 사실에 기반을 해서 그러하겠으나 종교적 위선의 충격이 관념의 거짓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신은 죽었다는 니체를 통해 공허한 허무성에 실존적 물음까지 다양한 생각의 지평이 펼쳐진다. 연민의 한계와 양심의 명령 사이의 절묘한 대립은 이 책이 보여줄 원초적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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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이 하루 이틀일도 아니건만 이번엔 꽤나 심각하다. 마치 메르스 사태처럼...그녀가 한국문단에 차지하는 비중이 어마무시한 것도 있겠거니와 문제는 권위있는 출판사의 태도가 더 화근이다. 나는 창작과 비평의 계간지를 꾸준히 읽지도 않으면서 구독해 왔다. 계간지가 배달되어 와 책장 한켠에 고스란히 꼽혀 장식을 할지언정 그래도 마음만은 뿌듯했다. 지적 허영감의 표출이었고 현재도 그 생각에는 변함없다.

 

그런데 믿었던 창비가 무너졌다. 권력의 카르텔이 담합해 내는 손쉬운 유혹에 경도된 것인지 너무도 가벼이 눙치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별 볼 일 없는 내가 재차를 다시 읽어 봐도 표절인데 그 표절이 인용도 아니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고 감춘다고 될 일인지 모르겠다.

 

 

문장을 단련하고 제련하는 과정에 필사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롤모델링을 삼고 그 작가의 글을 연장삼아 자기 것으로 화하라는 것이지 그대로 몇 줄 바꿔 가져오라는 뜻이 아님은 무지랑이 나도 안다. 나는 문학으로부터 불확실한 삶을 위로 받는다고 믿는다. 그것이 문학의 본령이고 공감이다. 제 아무리 틀이 든든해도 쏟아 부은 알갱이가 부실하면 부실하기 마련이다. 신경숙 작가가 이렇게 무너지는 걸 원치 않는다. 아울러 창비가 가려지질 못할 명분을 가지고 소방수 역할을 자처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글을 읽고 위안 받는 사람으로써 썩어 빠진 이 시대와 다름을 보여 주길 간절히 바란다. 역병이 창궐하고 민심이 이반된 지금, 용기 있는 커밍아웃만이 살 길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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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5-06-18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용기 없이 아무 것도 아니죠..

穀雨(곡우) 2015-06-18 14:36   좋아요 0 | URL
용기내는 게 어려운 세상이죠. 누구든...
 
포구를 걷다 - 나를 지우고, 나를 세우는 힐링 여행 산문집
동길산 지음, 조강제 사진 / 예린원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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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경하다는 말처럼 포구는 기실 드러나지 않는 존재감이 크다. 뭍에 살든 바다를 맞대고 살든 세월에 빗겨간 시간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좋은 것만 좋은 것이 된 지금에서 포구는 부동의 실체다. 해서 그 내연이 선연하게 밝혀 주는 속내와는 다르게 뿜어내는 외향은 그저 그렇게 읽혔다. 익숙함이 생산하는 왜곡의 소치고 편견의 민망함이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이 책 [포구를 걷다]는 적확한 문장과 풍미 가득한 시구로 길어 올린 산문집이다. 현대화되고 도시화된 부산의 존재 이전의 가치를 느릿느릿 완만하고 관조적인 시선으로 또박또박 눌러 낸 글이다. 저자 동길산의 글과 조강제의 사진이 절묘하게 합일하는 소실점은 문장 하나하나에 고뇌를 담고 투영한 겸손의 손놀림이 역력하다. 정 붙이고 터 내리고 사는 곳 어디라도 아니 좋겠냐마는 부산을 소개한 색다른 글이라 반갑다.

   

책은 부산의 서쪽에 위치한 강서 명지포구를 기점으로 동해의 끝단 월내로 흐른다. 저자는 포구를 통해 지나 온 삶을 반추하고 지천명에 이른 소회를 등대에 빗대기도 포말에 부서진 파도에 실어 낸다. 동 시대를 살아가는 부산 토박이 시인의 글맛이 제대로 베여 있어 시나브로 읽힌다. 비린내가 주는 거리감도 시인은 경험의 거름망을 통해 고스란히 녹여 냈다. 때론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온 양치기 산티아고처럼, 때론 자유를 갈망하는 히치하이커처럼 읽는 이를 위무한다. 훌쩍 찾은 여행지의 도타운 풍광에 놀란 초심자의 행운이랄까?

 

   할퀴고 싶도록 내가 미울 땐 되도록 나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게 상책, 저 멀리 수평선 위에 뜬 달 보듯 나를 바라보는 건 상책중의 상책이다.” p-257

 

 

시인은 포구를 곧 뭍과 물의 경계이며 세상의 중심이라고 했다. 변방과 중심의 경계에서 시인은 포구를 딛고 맞닿은 등대를 길라잡이삼아 마음을 여몄다. 변변한 글재주 한 자락 없어도 절로 심상이 포개지고 울림에 공명한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는 누구랄 것 없이 고즈넉한 손길 하나에 아득해진다. 그 속에 포구가 존재했고 함께 힘겨운 시대를 살아 간 해풍의 주름에 깊게 팬 부산 토박이가 공생한다. 비록 변모하는 포구의 운명처럼 소멸될지라도.

 

항상 곁에 있고 싶은 사람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 그런 시절은 물같이 흘러가고 기억의 등대만 오롯하다. 항상 곁에 있고 싶은 사람 그대는 누구인가.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p-126

 

더불어 시인의 맛깔난 지명에 담긴 부산의 포구풀이는 의외의 재미가 있다. 지명은 자연에 순응한 인간이 만든 존재의 기록이다. 지명을 통해 그 땅의 쓰임이나 생김을 담아 내 듯 부산의 포구는 각기 다른 존재를 각인했다. 포구의 꼬리와 같다 해 미포라고 쓰이지만 시인은 돌아보면 새로운 출발점이라 읽어 냈다. 모래톱이 움푹 패여 오목하게 들어간 홍티 포구, 달을 품에 안을 듯 잔잔하게 떠오르는 월내 포구.

 

여행의 교훈은 내가 보는 세상이 상대성의 원리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2곳을 한데 놓고 비교하는 어리석음을 피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래야 여행이 가능하다.”라고 한 작가 김연수의 글처럼 여행은 상대적이다. 해서 이 책을 통해 시인은 부산의 포구를 재조명하고 도식화된 특정 행로를 뒤틀었다. 이전에 읽히던 자갈치가 색다르고 해운대가 달리 보이는 이유, 상대성이다. 포구는 차례차례 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흘러가듯 존재를 거듭하는 이유가 그런지 모른다. 그저 묵묵히 붉음과 초록의 빛을 생산해 내고 그곳에 곧 순응해 나가는 등대의 숙명처럼 사람의 인생과 매한가지다.

 

이렇듯 동길산 시인의 글과 더불어 조강제 사진가의 순간을 담아 낸 찰나는 공허한 마음을 메꾼다. 부산을 찾은 여행자든 부산에 뿌리 내린 토박이든 읽히는 순간 너르게 뻗어 내린 포구 위를 함께 유영한다. 현장의 기록을 통해 시대를 아우르는 포구의 생명력은 연민이 샘솟고 밥벌이의 지겨움을 조금이나마 내려놓게 한다. 매몰되고 억압된 감정의 틀 속에 메여 사는 현대인의 마음을 치유하고 그래그래 다독여 주는 둥그스름한 손길이 정답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책은 부산을 중심에 놓았다. 숱해 봐 온 부산이 가진 다이내믹한 매력과 달리 포구를 통해 본 여행은 관조적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에 서 선택을 강요당하는 현대인의 삶을 희석시키고 중화시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달라지는 동안에도 포구는 존재를 거듭했다. 여기가 저기로 스며들고 사람이 사람에게로 스며들길 바란 작가의 마음은 누군가의 소망과 다르지 않다.

 

공수 포구는 겉을 보고 속을 비웃은 나를 나무라는 포구고 겉과 속이 같지 않다고 빈정댄 나를 나무라는 포구다, 포구에 부는 바람 소리가 공수레공수거공수레공수거 무슨 염불 같다.”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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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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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이는 결코 길들여 지지 않는다.



알랭드 보통은 불안을 욕망의 하녀에 비유한다. 즉, 불안을 생산하는 요체는 마음의 반응이라는 뜻이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막연함, 선택에서 오는 불확실함, 이 모든 것은 인간을 불안하게 하는 중심이다. 그러나 불안은 필연적으로 희망이라는 물질을 잉태한다. 희망은 곧 에너지를 모으고 삶을 고무하는 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손쉬운 방법은 꿈꾸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꿈을 소망의 충족이라고 했다. 원하고 바라는 것에 대한 무의식의 반응이다. 이처럼 꿈은 인생을 헤쳐 나가는 에너지원이다. 파울로 코엘류가 자신의 생이 담긴 이 책에서 간절히 소망한 그 것, 진정한 자아自我를 이끌어 주는 표지標識가 바로 이다.

 

나는 코엘류의 마음을 강물처럼 사랑한다. 안토니오를 통해 자아를 찾아 순항하던 그 위대한 여정의 순간의 연금술에서부터 인간의 순수함에 공명하던 포르토벨로의 마녀의 매혹적인 무희를 잊을 수 없다. 그가 내 마음에 아로새긴 삶을 대하는 지침은 시대를 아우르고 시간을 초월한다. 굳이 알레프 신심으로 온전하게 흡수하지 못할지라도 그의 이야기는 내 마음에 주는 등대처럼 반짝인다.

 

이 책 <알레프>는 치유의 소설이다. 읽는 내내 먹먹함에 가슴 벅차 오르고 매몰된 꿈의 원형과 마주하게 된다. 그 시작은 코엘류의 손으로부터였으나 끝은 자신이 된다. 비록 빛의 고리를 마주 대 할 용기는 없을지라도 내 인생에 펼쳐진 표지를 식별하는 혜안을 얻게 되리라. 누구에게나 주어진 인생의 여정을 헤쳐 나갈 초심자의 그 마음처럼.

 

실제 알레프 실존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평행한 차원이다. 알레프 기의 운행으로 그 기저에는 윤회의 큰 틀이 담긴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알 수 없는 공간과 시간을 오고 가며 존재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수 없이 많은 나를 발견하고 결국 나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동시성을 갖는다. 이러한 모습은 기억의 세상에 사는 우리로서는 시간의 모래밭에서 또 다른 나를 찾는 것과 같다. 그러나 코엘류는 알레프 차원을 통해 전생의, 아니 다른 차원의 자아를 발견하고 용서 받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을 사랑의 이름으로 힐랄을 통해 치유한다. 분명 코엘류의 갈등의 극복은 생경하며 이질감을 반영한다.

 

하지만 이성으로 합리화된 야만의 본성과 그것을 타파하는 용기를 엿본다. 타자가 형상화한 우상의 실체는 자신을 얼마나 옭죄며결박의 사슬을 끊어 내기가 힘든지에 대해 코엘류는 수도사의 눈으로 투영했다. 몽매의 억압은 지금도 풀어야 할 운명의 사슬이다. 과거는 현재를 노래하는 투영의 시간이듯 실체 없는 야만은 두려움이다. 나는 코엘류가 애써 시공을 넘나들며 그 광활한 러시아의 강철의 레일을 덜컹이는 공간을 달리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속내가 인간의 어리석음을 꾸짖고자 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극중 자아인 '나'불리지 않는 대상을 구체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대입 가능한 '나'이기 때문이다.

 

알레프 경험하기 위해 코엘류는 힐랄이 피워 올린 우정의 불을 매개 삼아 불쏘시개로 이용한다. 활활 타오른 불은 위대한 자아를 낳고 자신의 왕국을 건설한다. 용서와 사랑으로 승화된 왕국은 우주의 중심이 된다. 그 우주가 모여 우리가 될 테고 산다는 것의 정당성을 획득하리라. 영혼을 정화한다는 그 가치명제가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그러하기에 믿음은 거룩하고 고귀하다.

 

산다는 것은 때론 아프고 때론 막막함에 아득할 때가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막막함인지 까닭을 알 수 없으나 그것이 보편적인 삶의 모습임은 안다. 누구나 그러하다는 불안의 동질감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인간일 테다. 이쯤 되면 나의 전생은 무엇일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묶는 끈은 무엇일까? 나는 해답을 알 수 없다. 오직 불어오는 불안함을 극복할 방법은 나 자신을 믿고 인생의 시간 위에 흩어진 표지를 따라가는 것, 그것이 최선이자, 이 또한 꿈꾸는 자의 몫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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