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이 하루 이틀일도 아니건만 이번엔 꽤나 심각하다. 마치 메르스 사태처럼...그녀가 한국문단에 차지하는 비중이 어마무시한 것도 있겠거니와 문제는 권위있는 출판사의 태도가 더 화근이다. 나는 창작과 비평의 계간지를 꾸준히 읽지도 않으면서 구독해 왔다. 계간지가 배달되어 와 책장 한켠에 고스란히 꼽혀 장식을 할지언정 그래도 마음만은 뿌듯했다. 지적 허영감의 표출이었고 현재도 그 생각에는 변함없다.

 

그런데 믿었던 창비가 무너졌다. 권력의 카르텔이 담합해 내는 손쉬운 유혹에 경도된 것인지 너무도 가벼이 눙치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별 볼 일 없는 내가 재차를 다시 읽어 봐도 표절인데 그 표절이 인용도 아니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고 감춘다고 될 일인지 모르겠다.

 

 

문장을 단련하고 제련하는 과정에 필사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롤모델링을 삼고 그 작가의 글을 연장삼아 자기 것으로 화하라는 것이지 그대로 몇 줄 바꿔 가져오라는 뜻이 아님은 무지랑이 나도 안다. 나는 문학으로부터 불확실한 삶을 위로 받는다고 믿는다. 그것이 문학의 본령이고 공감이다. 제 아무리 틀이 든든해도 쏟아 부은 알갱이가 부실하면 부실하기 마련이다. 신경숙 작가가 이렇게 무너지는 걸 원치 않는다. 아울러 창비가 가려지질 못할 명분을 가지고 소방수 역할을 자처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글을 읽고 위안 받는 사람으로써 썩어 빠진 이 시대와 다름을 보여 주길 간절히 바란다. 역병이 창궐하고 민심이 이반된 지금, 용기 있는 커밍아웃만이 살 길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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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5-06-18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용기 없이 아무 것도 아니죠..

穀雨(곡우) 2015-06-18 14:36   좋아요 0 | URL
용기내는 게 어려운 세상이죠. 누구든...
 
포구를 걷다 - 나를 지우고, 나를 세우는 힐링 여행 산문집
동길산 지음, 조강제 사진 / 예린원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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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경하다는 말처럼 포구는 기실 드러나지 않는 존재감이 크다. 뭍에 살든 바다를 맞대고 살든 세월에 빗겨간 시간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좋은 것만 좋은 것이 된 지금에서 포구는 부동의 실체다. 해서 그 내연이 선연하게 밝혀 주는 속내와는 다르게 뿜어내는 외향은 그저 그렇게 읽혔다. 익숙함이 생산하는 왜곡의 소치고 편견의 민망함이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이 책 [포구를 걷다]는 적확한 문장과 풍미 가득한 시구로 길어 올린 산문집이다. 현대화되고 도시화된 부산의 존재 이전의 가치를 느릿느릿 완만하고 관조적인 시선으로 또박또박 눌러 낸 글이다. 저자 동길산의 글과 조강제의 사진이 절묘하게 합일하는 소실점은 문장 하나하나에 고뇌를 담고 투영한 겸손의 손놀림이 역력하다. 정 붙이고 터 내리고 사는 곳 어디라도 아니 좋겠냐마는 부산을 소개한 색다른 글이라 반갑다.

   

책은 부산의 서쪽에 위치한 강서 명지포구를 기점으로 동해의 끝단 월내로 흐른다. 저자는 포구를 통해 지나 온 삶을 반추하고 지천명에 이른 소회를 등대에 빗대기도 포말에 부서진 파도에 실어 낸다. 동 시대를 살아가는 부산 토박이 시인의 글맛이 제대로 베여 있어 시나브로 읽힌다. 비린내가 주는 거리감도 시인은 경험의 거름망을 통해 고스란히 녹여 냈다. 때론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온 양치기 산티아고처럼, 때론 자유를 갈망하는 히치하이커처럼 읽는 이를 위무한다. 훌쩍 찾은 여행지의 도타운 풍광에 놀란 초심자의 행운이랄까?

 

   할퀴고 싶도록 내가 미울 땐 되도록 나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게 상책, 저 멀리 수평선 위에 뜬 달 보듯 나를 바라보는 건 상책중의 상책이다.” p-257

 

 

시인은 포구를 곧 뭍과 물의 경계이며 세상의 중심이라고 했다. 변방과 중심의 경계에서 시인은 포구를 딛고 맞닿은 등대를 길라잡이삼아 마음을 여몄다. 변변한 글재주 한 자락 없어도 절로 심상이 포개지고 울림에 공명한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는 누구랄 것 없이 고즈넉한 손길 하나에 아득해진다. 그 속에 포구가 존재했고 함께 힘겨운 시대를 살아 간 해풍의 주름에 깊게 팬 부산 토박이가 공생한다. 비록 변모하는 포구의 운명처럼 소멸될지라도.

 

항상 곁에 있고 싶은 사람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 그런 시절은 물같이 흘러가고 기억의 등대만 오롯하다. 항상 곁에 있고 싶은 사람 그대는 누구인가.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p-126

 

더불어 시인의 맛깔난 지명에 담긴 부산의 포구풀이는 의외의 재미가 있다. 지명은 자연에 순응한 인간이 만든 존재의 기록이다. 지명을 통해 그 땅의 쓰임이나 생김을 담아 내 듯 부산의 포구는 각기 다른 존재를 각인했다. 포구의 꼬리와 같다 해 미포라고 쓰이지만 시인은 돌아보면 새로운 출발점이라 읽어 냈다. 모래톱이 움푹 패여 오목하게 들어간 홍티 포구, 달을 품에 안을 듯 잔잔하게 떠오르는 월내 포구.

 

여행의 교훈은 내가 보는 세상이 상대성의 원리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2곳을 한데 놓고 비교하는 어리석음을 피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래야 여행이 가능하다.”라고 한 작가 김연수의 글처럼 여행은 상대적이다. 해서 이 책을 통해 시인은 부산의 포구를 재조명하고 도식화된 특정 행로를 뒤틀었다. 이전에 읽히던 자갈치가 색다르고 해운대가 달리 보이는 이유, 상대성이다. 포구는 차례차례 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흘러가듯 존재를 거듭하는 이유가 그런지 모른다. 그저 묵묵히 붉음과 초록의 빛을 생산해 내고 그곳에 곧 순응해 나가는 등대의 숙명처럼 사람의 인생과 매한가지다.

 

이렇듯 동길산 시인의 글과 더불어 조강제 사진가의 순간을 담아 낸 찰나는 공허한 마음을 메꾼다. 부산을 찾은 여행자든 부산에 뿌리 내린 토박이든 읽히는 순간 너르게 뻗어 내린 포구 위를 함께 유영한다. 현장의 기록을 통해 시대를 아우르는 포구의 생명력은 연민이 샘솟고 밥벌이의 지겨움을 조금이나마 내려놓게 한다. 매몰되고 억압된 감정의 틀 속에 메여 사는 현대인의 마음을 치유하고 그래그래 다독여 주는 둥그스름한 손길이 정답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책은 부산을 중심에 놓았다. 숱해 봐 온 부산이 가진 다이내믹한 매력과 달리 포구를 통해 본 여행은 관조적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에 서 선택을 강요당하는 현대인의 삶을 희석시키고 중화시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달라지는 동안에도 포구는 존재를 거듭했다. 여기가 저기로 스며들고 사람이 사람에게로 스며들길 바란 작가의 마음은 누군가의 소망과 다르지 않다.

 

공수 포구는 겉을 보고 속을 비웃은 나를 나무라는 포구고 겉과 속이 같지 않다고 빈정댄 나를 나무라는 포구다, 포구에 부는 바람 소리가 공수레공수거공수레공수거 무슨 염불 같다.”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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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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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이는 결코 길들여 지지 않는다.



알랭드 보통은 불안을 욕망의 하녀에 비유한다. 즉, 불안을 생산하는 요체는 마음의 반응이라는 뜻이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막연함, 선택에서 오는 불확실함, 이 모든 것은 인간을 불안하게 하는 중심이다. 그러나 불안은 필연적으로 희망이라는 물질을 잉태한다. 희망은 곧 에너지를 모으고 삶을 고무하는 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손쉬운 방법은 꿈꾸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꿈을 소망의 충족이라고 했다. 원하고 바라는 것에 대한 무의식의 반응이다. 이처럼 꿈은 인생을 헤쳐 나가는 에너지원이다. 파울로 코엘류가 자신의 생이 담긴 이 책에서 간절히 소망한 그 것, 진정한 자아自我를 이끌어 주는 표지標識가 바로 이다.

 

나는 코엘류의 마음을 강물처럼 사랑한다. 안토니오를 통해 자아를 찾아 순항하던 그 위대한 여정의 순간의 연금술에서부터 인간의 순수함에 공명하던 포르토벨로의 마녀의 매혹적인 무희를 잊을 수 없다. 그가 내 마음에 아로새긴 삶을 대하는 지침은 시대를 아우르고 시간을 초월한다. 굳이 알레프 신심으로 온전하게 흡수하지 못할지라도 그의 이야기는 내 마음에 주는 등대처럼 반짝인다.

 

이 책 <알레프>는 치유의 소설이다. 읽는 내내 먹먹함에 가슴 벅차 오르고 매몰된 꿈의 원형과 마주하게 된다. 그 시작은 코엘류의 손으로부터였으나 끝은 자신이 된다. 비록 빛의 고리를 마주 대 할 용기는 없을지라도 내 인생에 펼쳐진 표지를 식별하는 혜안을 얻게 되리라. 누구에게나 주어진 인생의 여정을 헤쳐 나갈 초심자의 그 마음처럼.

 

실제 알레프 실존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평행한 차원이다. 알레프 기의 운행으로 그 기저에는 윤회의 큰 틀이 담긴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알 수 없는 공간과 시간을 오고 가며 존재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수 없이 많은 나를 발견하고 결국 나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동시성을 갖는다. 이러한 모습은 기억의 세상에 사는 우리로서는 시간의 모래밭에서 또 다른 나를 찾는 것과 같다. 그러나 코엘류는 알레프 차원을 통해 전생의, 아니 다른 차원의 자아를 발견하고 용서 받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을 사랑의 이름으로 힐랄을 통해 치유한다. 분명 코엘류의 갈등의 극복은 생경하며 이질감을 반영한다.

 

하지만 이성으로 합리화된 야만의 본성과 그것을 타파하는 용기를 엿본다. 타자가 형상화한 우상의 실체는 자신을 얼마나 옭죄며결박의 사슬을 끊어 내기가 힘든지에 대해 코엘류는 수도사의 눈으로 투영했다. 몽매의 억압은 지금도 풀어야 할 운명의 사슬이다. 과거는 현재를 노래하는 투영의 시간이듯 실체 없는 야만은 두려움이다. 나는 코엘류가 애써 시공을 넘나들며 그 광활한 러시아의 강철의 레일을 덜컹이는 공간을 달리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속내가 인간의 어리석음을 꾸짖고자 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극중 자아인 '나'불리지 않는 대상을 구체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대입 가능한 '나'이기 때문이다.

 

알레프 경험하기 위해 코엘류는 힐랄이 피워 올린 우정의 불을 매개 삼아 불쏘시개로 이용한다. 활활 타오른 불은 위대한 자아를 낳고 자신의 왕국을 건설한다. 용서와 사랑으로 승화된 왕국은 우주의 중심이 된다. 그 우주가 모여 우리가 될 테고 산다는 것의 정당성을 획득하리라. 영혼을 정화한다는 그 가치명제가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그러하기에 믿음은 거룩하고 고귀하다.

 

산다는 것은 때론 아프고 때론 막막함에 아득할 때가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막막함인지 까닭을 알 수 없으나 그것이 보편적인 삶의 모습임은 안다. 누구나 그러하다는 불안의 동질감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인간일 테다. 이쯤 되면 나의 전생은 무엇일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묶는 끈은 무엇일까? 나는 해답을 알 수 없다. 오직 불어오는 불안함을 극복할 방법은 나 자신을 믿고 인생의 시간 위에 흩어진 표지를 따라가는 것, 그것이 최선이자, 이 또한 꿈꾸는 자의 몫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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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 - 다윈의 자연선택론과 적자생존의 비밀
프란츠 M. 부케티츠 지음, 이덕임 옮김 / 이가서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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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쟁이, 우리는 루저라고도 부른다. 이와 같은 믿음은 인간의 오랜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그것은 불확실한 현실에 대한 그림자와 같다. 누구나 신념으로부터 오는 용기의 순간을 겪는다. 그 과정을 어떻게 수용하고 극복하느냐에 따라 선택의 방향은 바뀐다. 비열할 것인가 아니면 용감할 것인가의 선택이다. 이러한 믿음은 관념이 되었고 부동의 가치로 작용한다.



비겁함의 그 수치스러움이 세상을 지배한다면? 쉽게 와 닿지 않는 거리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생경한 주장을 하는 프린츠 M. 부케티츠의 <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호기심의 촉수를 자극한다. 그는 빈 대학교의 생물과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진화ㆍ인지생물과학의 전문가다. 그가 펴낸 이 책의 골자가 제목에서 드러나듯 소위 겁쟁이예찬론 정도 되지 않을까. 겁쟁이에 대한 새로운 시선, 그 패러다임을 풀어 나가는 이 책은 의구로 시작해 동감으로 변한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진화의 웅장한 프레임을 거스르지는 못한다. 자연계의 험난한 투쟁의 과정을 뚫고 반복과 학습의 쳇바퀴를 진화라는 물결을 흐르고 또 흐른다. 이러한 과정에서 살아 남은 진화의 법칙, 적자생존이라고 한다. 환경에 친밀하고 빠르게 적응하고 뒤쳐진 종은 자연도태된다는 H. 스펜서의 이론이다. 때로는 돌연변이라고 하지만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경제적 효용성의 결과다.



그런데,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더 정확하게 따져 보면 판을 보는 관점의 차이다. 적자適者로 비유되는 종은 강하고 빠르다는 현상에만 치우쳤지 평균적인 수명이 긴것과는 대체로 무관하다.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라는 혁신적인 관념의 시작이다. 살아남은 동물은 어떤 의미에서 생존에 유리한 특별한 재능을 획득했다는 논거다. 실제 동물의 세계에 거짓말과 속임수, 기만과 조작이 만연한다는 사실은 새로울 것이 없다. 이는 윤리적 잣대나 감정의 기준으로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세계로 국한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인간은 윤리적이고 감정의 지배를 받는 호모 사피엔스다. 윤리는 도덕적 관념을 낳고 기만과 거짓을 배척한다. 이러한 잣대는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과 진화의 상관관계는 더 복잡하고 미묘해진다. 인간의 유전자에 기록된 그 틀은 고정된 부동의 역사인지 모른다.



문제는 윤리의 벽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에 있다. 저자가 밝혔듯 회의적인 시각을 멈출 수 없는 이유 또한 비겁함의 옹호를 차치하고라도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이 스스로 고립된 섬처럼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오늘날의 사회진화의 영향도 물론있겠거니와 감정의 기준점이 허락하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비겁한 겁쟁이가 어떻게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개인적 이기주의자는 정치적 조직 또는 이기적인 단체의 이합 형태와 자기 사이에 놓인 분명한 선을 구분짓고 다양한 자유주의를 사랑하고 추상적인 개념에 자신을 구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논거의 핵심이다.(P-228)



분명한 것은 자아우선주의와 배타적 감정의 충돌에서 오는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것이다. 때로는 자아우선이 사회문화적 동력이 될 것이고 혁신을 구동하는 매개가 된다는 의미겠다. 그러나 이기적 행태와의 구분은 중요하다. 현재 우리 사회의 문화적 병리현상은 심각하다. 대중매체와 매개된 광고의 힘은 자기중심적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자텔베르거의 이념처럼 '신봉건주의의 범람' 또는 '신병리학적 자본주의 현상'의 욕망의 뒤틀린 깨달음 현상을 맛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도덕적 개인주의자에 대한 패러다임을 달리 쓰고자 한다. 그들이 개인적 이익을 중요시하는 반면 다른 사람도 그 자신의 이익을 따른다는 상호연관성을 수용한다. 또한 그들은 자신만의 개인적 삶의 방식을 선호하며 '자아발전'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사회에 통용되는 법을 따른다. 그 속에는 타인을 배려하고 통념의 가치를 이끄는 행동규범으로서의 선이 존재한다. 그들에게서 삶은 목적에 충실한 작은 물결에 미동하지 않는 의연함을 작은 모욕을 물리치는 안정된 삶을 견지한다.



이와 같이 저자의 겁쟁이예찬은 오랜 통찰과 고민의 흔적이 빗은 결과물이다. 그가 이론이 생경하고 낯선 변방의 목소리를 대변하지만 그 발상의 전환은 신선한 자극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새로운 방식이나 견해를 학계에 보고한다는 것은 오히려 보수의 고착화된 사고를 허무는 계기가 된다. 그의 도덕적 근본바탕에 버무려진 진화의 패러다임, 곱씹어 볼 주제다.



비겁자란 여러 상황 속에서 숨거나 도망쳐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들이며 용기를 증명하려 들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가능한 한 오래 살아남으려 하며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며 자신이 방해받거나 위협받지 않는 한 타인에게 적대감을 품는 일이 없으며 국가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그에 대한 보복조차 묵묵히 감수하며 그 결과 세속에서 물러난 삶을 사는 사람이다.(p-239)



물론 도덕적 이념이 바탕이 되지 못하다면 한낱 겁쟁이를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선택의 순간을 지배하던 이념의 허구 앞에서 애써 외면한 숨겨진 가치를 발견한 것과 같다. 쉽게 동요하지 않고 생물학적 생존경쟁의 불가피성을 떠올린다면 도덕적 개인주의와 윤리적 이기주의의 이상은 진화의 경계에서 중심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대안이 되지 않을까? 미덕이란 지속적인 실천이 모여 구축된 삶의 태도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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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1 0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1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무처럼 자라는 집 - 임형남.노은주의 건축 진경
임형남.노은주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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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자기 자신의 실현이다. 집은 자기 손으로 지어야 한다. 건축가는 집주인의 이야기를 정리해 주는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p-285)




집은 목적에 따라 그 모양이 변한다. 공간에 담긴 관념은 거주보다는 소유의 양립에 우선한다. 그것은 경제적 메커니즘에 따라 대차대조표상 이해득실이 갈린다는 의미다. 투자라는 가치는 거주의 만족한계선마저 행복의 질감마저 왜곡한다. 틀에 박힌 공동주택, 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행복을 끌어 올리는 일일까? 자산을 소유하고 가치를 불리는 일이 자유를 희생시키는 기회비용보다 높을까?




우리는 해답을 안다. 대안이 없다는 현실적인 명분에 의해 합리화라는 포장재로 휘감고 있는지 모른다. 땅을 밟고 햇살이 가득 퍼지는 초라한 슬래브 지붕집일지라도 정서적 안정이 가득 고여 행복으로 발했다. 그 시절, 누구나 그랬고 딱히 나을 것 없던 그런 풍경이었다. 하지만 풍요는 왜곡된 가치변형을 촉발하였으며 그것은 개인에 대한 울타리를 켜켜이 세우는 출발점이 되었다. 가난과의 결별, 편리한 공간적 자유는 수요를 달구는 구심점이 되기에 충분했음이다.




이러한 가치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공동주거형태가 발달한 나라, 대한민국은 부동산에 미쳤다. 마음속 노스탤지어가 자라는 공간의 개념은 이상향에서만 존재하는 한낱 꿈으로 전락했다. 도태를 부르는 냉혹한 현실을 무시하기에는 상실감이 너무 무겁다. 나 또한 그 대열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욕망의 바보로 산다. 이 책의 저자 임형남, 노은주 부부가 직시하는 도시공간의 산유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저 꿈으로만 지었다 허물기를 반복하는 공상가에 불과하다.




실제 집에 대한 피로감은 상당하다. 엇비슷한 출발선상에서 취업을 하고 돈을 모으고 청약저축에 가입해서 어마 무시한 경쟁률을 뚫고 분양에 성공하면 편리에 결부된 이 시대가 희망하는 공간으로 입성하는 기회를 부여받는 그 왜곡된 순환과정에서 오는 피로감. 집이 주거로서의 가치보다 투자로서의 가치가 우선시되는 현상에서 집을 조망한다는 것은 암실에 들어 앉아 사물을 보는 것과 같음이다. 여기에는 경쟁이라는 성장의 미덕이 작용했음은 분명하다. 경쟁은 앞 서 나가야 하기에 고독은 그림자처럼 늘어진다. 악순환의 고리는 집의 패러다임을 왜곡하는 요인이 된 현실, 원인 없는 결과 없음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발산하는 저자의 생각이 빚어 만든 청량감은 상쾌한 전망대에 올라 세상을 품는 그것과 같다. 밀어내기에 급급했던 집에 대한 바른 생각, 회복과 치유의 힘이 그득하다. 이 땅 위에 집을 짓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외양이 바뀌었을지라도 집은 사람을 닮고 자연을 품었다. 이 땅 곳곳의 살림집이든 절집이든 인간과 융합되고 조화를 이룬다. 그것으로 인해 집은 나무처럼 사람과 함께 더불어 자라고 추억의 부산물로 정서의 층위를 단단하게 붙드는 주춧돌이 되었을 테다.




가벼운 산문으로 시작해 집을 설계하고 다듬는 동안 스며든 관념의 실체를 맛깔난 언어로 풀어내는 글맛은 단정한 고택처럼 살갑다. 시간의 속도에 비례해 집이 사람을 향한다는 부부의 생각은 빛과 공간이 만나 잘 배합된 묵향처럼 은은하게 피어오른다. 관계와 관계 속에서 마찰된 삶의 불확실한 순간의 화학작용을 희석하고 또 순화한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물결의 흐름을 헤아리는 자정의 시간처럼 피로는 소멸된다.




고민과 명상의 기록이 부부의 생각으로 시작했으나 끝은 함께 맺어가는 개별의 시간을 제공한다. 시간과 존재, 성장의 맞물려 돌아가는 얼개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들, 아니 그 자리에 있었으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막연하게 비롯된 불안감의 정체를 위안 받고 매몰되어 희미해진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작가가 굳이 상산마을 김 선생의 집짓기의 흐름을 보여 준 것도 같은 경계에서 와 닿는다. 집을 설계하고 조율하고 소통하는 동안 우리네 정서에 담긴 소중한 삶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작가는 집을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체로 조망한다. 그 속에 시간의 윤활제가 날 서고 각진 부분을 다듬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상생의 의미를 부여한다.




최근 땅콩주택이 입소문을 바람처럼 타고 번진다고 한다. 땅콩주택은 말 그대로 한 필지의 땅 위에 두 채의 집을 지어 나누어 생활하는 신개념주택이다. 마당이 있고 같은 공간 속에 가족 구성원 각자의 삶이 융화되고 매개하는 휴식의 개념이 우선인 인간다운 집을 표방한다. 비록 굴절된 가치판단으로 인해 그 진정한 의미를 훼손당하고 폄훼하는 시선이 있기는 하지만 집 본연의 가치를 복원하는 의미 있는 일이다. 이렇게 모여 마을을 이루고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세포분열처럼 건강한 신호이며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갈등의 문제를 푸는 하나의 대안점이 되리라 본다.




이들 부부가 제시하는 잘 지은 집은 나무처럼 자라고 들꽃처럼 피어나는 집이란다.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헛된 욕망이 절로 소멸되는 자연스럽고 맵시 있고 건강한 그런 집이다. 부부가 들려주는 집이야기에 홀릭처럼 빠져든다. 집은 집다워야 한다는 그 다움에 희망을 기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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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6-15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어제 신랑이 땅콩 주택 아느냐고 묻더군요.
모른다 하니까 얼마나 잘난체를 하면서 설명해주는지... ^^

예전에 정말 집은 돈벌이 수단이다 라는 생각에 쫒겨 살았어요. 지금 사는 집도
그렇게 구입했죠. 지금 살기 시작한지 6년 되었는데, 돈을 생각한다면 지금 이사하는게 맞겠죠.
하지만 한 곳에서 정착한다는게 이렇게 좋은지 몰랐어요. 그리고 내 집이라는 생각으로
베란다를 정글로 만든데다 엄청난 책 때문에, 평생 살아야할 거 같아요. ㅎㅎ

穀雨(곡우) 2011-06-17 09:15   좋아요 0 | URL
베란다가 정글일정도라면 집이 푸름으로 상큼하겠습니다. 전 정성이 부족해서인지
금세 시들시들해져 남아 나는 식물이 없답니다.ㅠ.ㅠ
해서 잘 키운 화초가 많은 집은 늘 선망의 대상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