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 - 다윈의 자연선택론과 적자생존의 비밀
프란츠 M. 부케티츠 지음, 이덕임 옮김 / 이가서 / 2011년 7월
평점 :
겁쟁이, 우리는 루저라고도 부른다. 이와 같은 믿음은 인간의 오랜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그것은 불확실한 현실에 대한 그림자와 같다. 누구나 신념으로부터 오는 용기의 순간을 겪는다. 그 과정을 어떻게 수용하고 극복하느냐에 따라 선택의 방향은 바뀐다. 비열할 것인가 아니면 용감할 것인가의 선택이다. 이러한 믿음은 관념이 되었고 부동의 가치로 작용한다.
비겁함의 그 수치스러움이 세상을 지배한다면? 쉽게 와 닿지 않는 거리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생경한 주장을 하는 프린츠 M. 부케티츠의 <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호기심의 촉수를 자극한다. 그는 빈 대학교의 생물과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진화ㆍ인지생물과학의 전문가다. 그가 펴낸 이 책의 골자가 제목에서 드러나듯 소위 겁쟁이예찬론 정도 되지 않을까. 겁쟁이에 대한 새로운 시선, 그 패러다임을 풀어 나가는 이 책은 의구로 시작해 동감으로 변한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진화의 웅장한 프레임을 거스르지는 못한다. 자연계의 험난한 투쟁의 과정을 뚫고 반복과 학습의 쳇바퀴를 진화라는 물결을 흐르고 또 흐른다. 이러한 과정에서 살아 남은 진화의 법칙, 적자생존이라고 한다. 환경에 친밀하고 빠르게 적응하고 뒤쳐진 종은 자연도태된다는 H. 스펜서의 이론이다. 때로는 돌연변이라고 하지만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경제적 효용성의 결과다.
그런데,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더 정확하게 따져 보면 판을 보는 관점의 차이다. 적자適者로 비유되는 종은 강하고 빠르다는 현상에만 치우쳤지 평균적인 수명이 긴것과는 대체로 무관하다.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라는 혁신적인 관념의 시작이다. 살아남은 동물은 어떤 의미에서 생존에 유리한 특별한 재능을 획득했다는 논거다. 실제 동물의 세계에 거짓말과 속임수, 기만과 조작이 만연한다는 사실은 새로울 것이 없다. 이는 윤리적 잣대나 감정의 기준으로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세계로 국한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인간은 윤리적이고 감정의 지배를 받는 호모 사피엔스다. 윤리는 도덕적 관념을 낳고 기만과 거짓을 배척한다. 이러한 잣대는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과 진화의 상관관계는 더 복잡하고 미묘해진다. 인간의 유전자에 기록된 그 틀은 고정된 부동의 역사인지 모른다.
문제는 윤리의 벽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에 있다. 저자가 밝혔듯 회의적인 시각을 멈출 수 없는 이유 또한 비겁함의 옹호를 차치하고라도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이 스스로 고립된 섬처럼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오늘날의 사회진화의 영향도 물론있겠거니와 감정의 기준점이 허락하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비겁한 겁쟁이가 어떻게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개인적 이기주의자는 정치적 조직 또는 이기적인 단체의 이합 형태와 자기 사이에 놓인 분명한 선을 구분짓고 다양한 자유주의를 사랑하고 추상적인 개념에 자신을 구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논거의 핵심이다.(P-228)
분명한 것은 자아우선주의와 배타적 감정의 충돌에서 오는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것이다. 때로는 자아우선이 사회문화적 동력이 될 것이고 혁신을 구동하는 매개가 된다는 의미겠다. 그러나 이기적 행태와의 구분은 중요하다. 현재 우리 사회의 문화적 병리현상은 심각하다. 대중매체와 매개된 광고의 힘은 자기중심적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자텔베르거의 이념처럼 '신봉건주의의 범람' 또는 '신병리학적 자본주의 현상'의 욕망의 뒤틀린 깨달음 현상을 맛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도덕적 개인주의자에 대한 패러다임을 달리 쓰고자 한다. 그들이 개인적 이익을 중요시하는 반면 다른 사람도 그 자신의 이익을 따른다는 상호연관성을 수용한다. 또한 그들은 자신만의 개인적 삶의 방식을 선호하며 '자아발전'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사회에 통용되는 법을 따른다. 그 속에는 타인을 배려하고 통념의 가치를 이끄는 행동규범으로서의 선이 존재한다. 그들에게서 삶은 목적에 충실한 작은 물결에 미동하지 않는 의연함을 작은 모욕을 물리치는 안정된 삶을 견지한다.
이와 같이 저자의 겁쟁이예찬은 오랜 통찰과 고민의 흔적이 빗은 결과물이다. 그가 이론이 생경하고 낯선 변방의 목소리를 대변하지만 그 발상의 전환은 신선한 자극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새로운 방식이나 견해를 학계에 보고한다는 것은 오히려 보수의 고착화된 사고를 허무는 계기가 된다. 그의 도덕적 근본바탕에 버무려진 진화의 패러다임, 곱씹어 볼 주제다.
비겁자란 여러 상황 속에서 숨거나 도망쳐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들이며 용기를 증명하려 들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가능한 한 오래 살아남으려 하며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며 자신이 방해받거나 위협받지 않는 한 타인에게 적대감을 품는 일이 없으며 국가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그에 대한 보복조차 묵묵히 감수하며 그 결과 세속에서 물러난 삶을 사는 사람이다.(p-239)
물론 도덕적 이념이 바탕이 되지 못하다면 한낱 겁쟁이를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선택의 순간을 지배하던 이념의 허구 앞에서 애써 외면한 숨겨진 가치를 발견한 것과 같다. 쉽게 동요하지 않고 생물학적 생존경쟁의 불가피성을 떠올린다면 도덕적 개인주의와 윤리적 이기주의의 이상은 진화의 경계에서 중심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대안이 되지 않을까? 미덕이란 지속적인 실천이 모여 구축된 삶의 태도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