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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리커버, 양장)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평점 :
절판


관계를 형성하는 기저에는 결국 ‘나’로부터 비롯된 무엇이 있다. 느슨하든 밀접하든 관계는 우리를 아우른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칭하는 것도 결국 그 때문이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가진다. 나다움으로, 혹은 나라는 인간으로. 그런 관점에서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는 다양성을 가장한 나다움에 눈길을 머물게 한다.


7개의 짧은 호흡으로 써 내려간 단편들은 기존의 생각의 틀을 허문다.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예측하기 어려운 열린 결말은 익숙한 판단을 유예하게 한다. 선인과 악인의 구분 또한 모호하다. 평범을 가장한 우리의 익숙한 서사를 차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길티 클럽 : 호랑이 만지기」에서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소실되어 가는 환상에 열광하는 팬클럽의 모습을, 「혼모노」에서는 약발이 다한 무당의 마지막 발악에 경악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마주한다. 기이함과 불편함이 뒤섞인 그 풍경은 오래도록 시선을 붙잡았다.


중반으로 치달을수록 이야기는 민감한 소재를 아무렇지 않게 주무른다. 「구의 집」을 읽는 내내 뱉어낼 수 없는 불쾌함이 맴돌았던 것도 남영동 고문실을 떠올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잉태기」에서 일제 치하 부역으로 쌓아 올린 자산을 무기로 손녀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시부와 며느리의 손녀 쟁탈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 모든 메타포를 가르는 불편함은 작가가 일으킨 힘이다. 의도되었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군상들이 감추고 있던 이면을 내밀하게 드러낸다.


혼모노. 진짜인 듯 가짜이고, 가짜인 듯 진짜인 사람들.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어느 한쪽으로 쉽게 가를 수 없는 회색지대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작가가 바라본 현대인의 모습이며, 우리가 흔히 ‘나다움’이라 부르는 것의 실체인지도 모르겠다.


이민 3세대로 분해되어 기술된 「스무드」 속 듀이와 광화문 태극기부대의 어색하지만 불편한 환영은 신선한 충격으로 읽힌다. 분명한 것은 조밀한 관찰의 파장이 불러낸 상상이 전혀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라면 그 어색함 속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끼지 않을까.


「우호적 감정」에서는 기존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자율적 규칙을 만들고, 서로 다른 것들을 한데 섞어보려 하지만 결국 보이지 않는 차별은 존재한다. 의도하지 않은 시선과 말 한마디, 익숙한 관습의 틈 사이로 차별은 부지불식간에 스며든다. 기실 이런 불편함은 우리 안에도 이미 스며들어 있는지 모른다. 「메탈」은 헤비메탈을 사랑하고 관습을 부정하며 노마드적 삶을 꿈꾸지만, 현실의 냉혹함 앞에서 그 꿈은 처절하게 사라지는 신기루가 된다. 자유롭고 싶다는 욕망조차 결국 관계와 사회라는 보이지 않는 그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이렇듯 성해나 작가의 글은 방향이 좋다. 읽는 내내 불편함이 한몫하겠거니와, 그 불편함 뒤에 남겨진 몫 또한 온전히 독자의 것이다. 그 속에서 관계 속의 나를 찾고, 나다움이 무엇인지, 진짜와 가짜를 분별할 힘이 솟아나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보이지 않는 차별 속에서 우리는 분투하고 좌절하며, 때로는 타협하면서 오늘을 살아낸다. 이 또한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나는 관계를 만들지만, 그 관계가 다시 나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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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그 시절 주말의 명화는 건조한 일상에 나에겐 소금처럼 위안이 되곤 했다. 할리우드식 꿈을 꾸고 희망에 달 떠 어디론가 하염없이 부유하곤 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해 내고 언제나 정의는 굴복하지 않고 승리한다는 방정식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한 동안은 그 속에 도취되어 빠져 들었지 싶다. 지금 생각해보면 늘어 나 헤어진 티셔츠처럼 유치하기 짝이 없는 희석된 감동이지만 나는 크리스토퍼 리브의 강인한 체력과 시공을 초월하는 초능력을 흠모했다. 그것만 있으면 모든 게 이루어질 것 같고 우주 끝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한 손에 잡힐 것 같은 무모한 공상, 아니 몽상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는 슈퍼맨을 사랑했다. 슈퍼맨은 악당을 때려잡는 영웅중의 영웅이다. 다른 모든 영웅들을 일거에 제압하고도 남을 우월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가 말도 안 되는 비교에, "슈퍼맨과 배트맨이 싸우면 누가 이겨요?"라는, 허덕일 때도 나는 슈퍼맨이 좋았다. 사람 좋은 서글서글한 눈빛으로 우리의 여주인공 마고 키더가 분한 로이스 레인에게 보내는 강렬한 신호, 애간장을 녹였다. 로키산맥이 달리고 바람을 잠재우던 슈퍼맨의 비행은 황홀했다. 엔딩의 허무함을 위무할 만큼. 

슈퍼맨이 아니었더라도 인간은 한계를 참지 못하는 유별난 종족이다. 구병모가 쓴 <아가미>와 굳이 아무런 역학관계가 없는 슈퍼맨을 끌어 온 것은 인간이 가진 한계, 그 속에 녹아 든 다양한 감각의 흐름이 맞물렸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인간이 진화를 거듭하고 변신을 또 다시 거듭한다면 아가미가 솟아나고 눈부신 무지갯빛 지느러미가 생기지 말란 법이 없으니 말이다. 어차피 인간의 기원은 물에서 나왔으니 부인할 수는 없다. 횡격막을 사이로 나란히 한 쌍의 폐포에 덮인 공기호흡을 위한 유일한 장치에 더 해 모세혈관을 통해 용해된 산소를 채집하는 아가미가 함께 공존한다면 포세이돈의 축복일까 아니면 저주일까.

상상은 의외로 가까운 거리에서 퍼져 나간다. 구병모의 <아가미>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모든 연결고리를 가동하면 일파만파로 퍼지는 감각은 동심원처럼 끝도 없지 싶다. 그미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무엇이 되었든 단련되고 고착된 시각의 거름망을 통해 자극은 시작된다. 하지만 결국 잃어버린 것, 상실의 순간을 회고하게 되리라는 공통점에 정박한다. 곤의 날렵하고 세련된 유영을 따라 물살의 저항에 감정을 끼어 맞추다 보면 매몰된 감정의 결락된 순간과 조우한다는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무언가를 버리고 또 버리기 위해서 산다. 갖기 위해 버리는 것인지 버리기 위해 갖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감정도 과소비되어 빈곤에 허덕이는지 모른다. 아픔도 슬픔도 기쁨도 모두 제 것 그대로의 그 날것의 상태를 상실했다. 날 선 세상에 치이고 넘어지다 보니 무엇이 진실인지 안다는 것이 오히려 두렵고 현실을 담보 잡힌 비현실이 판치는 세상이다. 그러니 아가미쯤 있다고 대수겠는가. 그 아가미를 통해 저 푸른 대양으로 부여잡지 못한 진실과 마주한다면 그 시절 내가 꿈꾸었던 슈퍼맨에 대한 환상과 무엇이 다를까.

애석하게도 현실은 냉혹하다. 짝이 맞지 않는 의자를 가운데 두고 춤을 추다 앉지 못하면 기회는 박탈당하고 추락으로 점철되는 세상의 이면에 도사린 날카롭게 뻗은 아픔의 촉수를 너무도 잘 안다. 실제 곤의 아픔은 처절한 빈곤의 상처가 발화한 그 시점에서라는 설정도 모두가 수긍할 감정의 고리를 낚아챘음 이다. 그러므로 곤의 수중생물로의 변신 내지는 회귀도 충격에 따른 현상을 극복할 소망이다. 그와 매개된 모든 이들이 또 다른 아픔과 상실을 반복하는 동안 응집된 감정의 편린은 애환이었다. 공유하는 자의 맹목적인 질투는 어색하지 않다. 그것이 사랑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가르쳐 주어서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하도, 노인도, 강하의 어머니 이녕도 모두 물결이 쓸려간 뒤틀린 삶 속에서 아파했다. 그들의 아픔은 곧 곤을 향한 바람이었다. 던적스럽고 비루한 삶에 대한 실낱같은 바람.

곤이 품은 아픔의 지도를 관찰하는 역할을 자청하고 나선 숙달된 안내자 해류의 간결하고 건조한 태도가 없었다면 그저 그런 아가미를 단 한 남자의 망상에 지나지 않았을 테다. 해류가 가진 물속처럼 템포가 느려지고 굴절된 세상을 곤의 비현실적인 신비로움이 더해져 현실의 바람으로 변신할 추동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해류의 글자 그대로의 뜻처럼 시간도 공간도 모두 흐른다. 저항의 순간을 극복하는 것은 개별화된 몫이고 원죄에 가깝다. 그렇지만 나약한 현실을 거꾸로 돌려 세우는 힘은 스스로에게 내재된 능력이다.

아가미를 통해 숨을 쉬고 미끈거리도록 유영하는 공상의 시간을 선물한 구병모의 글은 기발하다. 식어 빠진 사랑이야기도 무미건조해 지루하기만한 불륜이야기도 <아가미>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는 이유는 행간과 행간에 숨은 희망이 오롯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강렬한 에너지다. 전작 <위저드 베이커리>로 활자의 마술을 부리던 그녀의 언어가 다시 <아가미>를 통해 폐부 깊숙이 찔러 오는 심해의 아득한 물결처럼 그 맛은, 알싸함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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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4-26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주드님의 서재에서 바다 밑을 걷겠다는 문구를 읽었어요.
아가미에 대한 페이퍼를, 푸른 대양으로 뻗어나가려는 이야기를, 그리고 너무나 순수했던 슈퍼맨을 다시 회상하니
바다 밑에서 자신을 날것 그대로 마주치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정녕 함께하며 그러면서도 '나'를 바라볼 수는 없는걸까요?
아..... 저두 이 책 읽구 싶어요!

穀雨(곡우) 2011-04-27 08:54   좋아요 0 | URL
금방 읽히는 책입니다. 문고판으로 200페이지가 조금 넘으니 금세 바닥이 드러날거예요.
너무 빨리 도착한 끝자락만큼 밀려 오는 것도 많을 듯......^^

sslmo 2011-04-27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위저드베이커리가 참 좋았어요.
아가미는 뭐 읽지 않았지만, 아들의 필독서여서 언젠간 곁다리로 읽게 되겠지만요.
님의 리뷰만으로도 영화 '그랑블루'가 생각나는 것이 알싸하고 짭쪼름한걸요~^^

穀雨(곡우) 2011-04-28 14:11   좋아요 0 | URL
맞네요. 그랑블루가 어찌 그렇게 안 떠오르던지...^^
그 영화...포스터만으로도 멋졌어요.
 
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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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쌍성(雙星)의 밀고 당기는 힘처럼 자연의 법칙이다. 음과 양, 사물의 겉과 속, 어디든 존재한다. 듀플렉스처럼 상호 독립하여 병존하지만 불가분이다. 인식이 스치는 모든 곳, 더블이 지배한다. 획득가능한 모든 것에 더블의 관념이 기운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인간에게 실현가능한 변수의 조합은 더블의 관념에서 발현하는지 모른다. 박민규 작가의 더블에 담긴 그 의미, 행과 불의 경계이다. 상상과 현실의 테두리를 넘나들며 마치 우주의 언어나 미래의 언어로 기록된 그의 문학세계는 자연법칙을 담고 있다. 자연은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를 말한다. 이는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를 가리킨다. 때론 섭리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섭리는 인간의 관념을 고착화하기도 한다. 당연한 인과율의 법칙, 그 속에 지배된 인간의 불완전한 의식은 새롭거나 기이한 상태를 두려워한다. 따라서 박민규의 이 책 <더블>의 단편은 연역적 관계를 차단하는 존재의 반항을 오롯이 천명한다. 그의 생각의 틀 속에서 짜여 나온 이야기의 실재는 기존 관념의 존재를 포섭과 파괴의 양립된 현상으로 병존하며 평행선을 내달리는 가히 더블의 연속이다. 그의 이러한 시각은 중어의 반복을 통해 공고히 다져지고 흡입된 관념의 거름망 속으로 박민규式의 언어로 재해석된다. 그의 이야기는 그로테스크한 상상의 변주다. 현실이 존재한다면 상상이 존재한다는 실체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21세기를 사는 동시대의 인류에게 전하는 공감의 또 다른 코드라고 할만하다.

 

<더블>은 총18편의 단편 선으로 두 권의 양장본으로 묶였다. 형태는 디스크자켓처럼 작품의 본질을 적확하게 제시하는 일러스트와 작가의 소회로 구성되었다. 박민규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생각, 흔적 등을 특정의 누군가에게 헌정하는 방식으로 틀과 형태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의 시도는 규격의 틀에 재단된 눈과 마음을 유연하게 해 준다. 기실 18편의 단편에 담긴 각양각색의 에피소드를 구성한 그의 방대한 창작력에 경의를 표하게 되지만 겉과 속에 담긴 각기의 본질을 은연중에 시각화시켜 주는 그의 배려가 더욱 도탑게 다가선다. 생각이 곧 문화가 된다는 사실처럼 그의 이야기 속에는 범 글로벌문화를 표방한다. 지역과 우주를 가르는 광활한 무대배경, 도시인의 고독한 삶, 인간의 존재의미를 다루는 그의 이야기 속에서 펼쳐지는 반전과 허무의 일상 등이 고스란히 차오른다.

 

트렌드나 문화의 일종이라면 <더블>은 지구의 언어가 해석가능한 모든 언어로 표현되고 공감할만한 소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견고한 상황을 가볍게 무너트리는 공력, 그의 필력이다. 인류가 탐욕에 의해 멸망하는 절체절명의 암흑의 상황을 층간소음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일상과 포개는 그의 상상력의 빚어낸 이야기 <끝까지 이럴래?>. 인간에게 더 시급한 문제는 사소한 불편의 해결일지도 모른다는 불변의 진리인지 모른다. 이러한 사실은 BC1700년전 한반도를 무대로 한 <슬>을 관통하는 관념과 일맥상통한다.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욕망의 해갈의 근원적인 물음도 사소하거나 단순한 지점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박민규의 이야기에 걸려든 관념의 거름망은 인간의 의식을 양분하는 갈래의 커다란 경계를 해체하고 분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관념은 18편의 전편을 지배하는 공통의 메타포이다.

 

그래서 더블의 중첩적인 시선으로 이 책에 담긴 이야기 지도를 따라가다 보면 박민규의 관념에 포위당하고 공감의 마법에 어김없이 걸려들게 된다. 치명적인 유혹이거나 감미로운 선율이든 시나브로 젖어드는 그의 이야기의 깊이에 지구의 해저 끝까지 압력의 밀도가 차오르는 <깊>에 주억거리게 되고 <아치>에 올라선 현대인의 불일치에 동조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더블>의 안에 담은 이야기를 동일한 패턴으로 구동시키지는 않는다. 생각의 엔진을 가동하고 가열되고 분사된 에너지로 가속의 변속을 폭발하듯 그는 우주로 날아가고 시공을 넘나든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크로만, 운>이다. 묵시록적인 소설인 이야기는 뉴질랜드의 작가 버나드 베켓이 쓴 <2058 제너시스>와 궤를 같이 한다. 박민규의 이야기가 인간의 존재의미를 고찰한다면 버나드 베켓의 이야기는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를 철학적인 시선으로 묻는다. 이러한 박민규식 해학은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에 보다 정확하게 드러난다. 스나이프, 동성애, 무차별 처단, 배설, 섭취의 일련의 행위들에 따라 전혀 어울리지 않을법한 조합의 인자를 상대로 엉뚱한 곳에 불시착한 느낌처럼 낯선 감각을 토해낸다.

 

때로는 이렇게 낯설고 거친 부자연스러운 상황이 더 자연스러운지 모른다. 그가  생뚱맞은 상황을 현란하게 주무르고 고정된 퍼즐조합을 이것과 저것의 지칭을 혼합하는 작업을 선행한 것처럼 뒤따르는 결과물 또한 자연과 부자연의 경계를 구획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독자의 예상을 빗나가는 반전이나 재미의 요소를 가미하기 위해 조합의 재구성을 시도하였다는 결론은 성급하다. <루디>의 냉혹하고 인과관계가 단절된 행위를 보면 미루어 짐작이 가능해 진다. 절벽의 끝, 폭풍 같은 질주로 마감하는 장면은 인간의 욕망이 브레이크 없는 전차와도 같다는 무지한 현실에 다다른다.  따라서 박민규가 그의 단편 하나에 실은 의미의 총합은 여지 혹은 공백을 통한 공감의 유도나 해석으로 가능케 한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보이는 세계, 보지 못한 세계, 다다르지 못한 세계, 정복하였으나 오류로 점철된 세계를 무시로 경험한다.

 

과연 인간이 가 닿을 수 있는 경험의 거리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박민규의 이 책에서 하나의 답을 보았다. 우문현답이 아닌 현문우답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상상력의 뭉치에서 무엇을 만들지는 개별의 몫이다.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에 등장하는 잘 나가던 세일즈맨의 비극적인 현실처럼 붙들 곳 없는 현실에 매달려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기운다. 화성으로 자동차를 팔러 가고 그 곳에서 만난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 흑인 세일즈맨과의 동질의 교감, 황망한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하기에 나는 <더블>의 세상에서 희로애락의 4중주를 만끽했다. 진실과 거짓의 양면 외투처럼 세상은 그렇게 움직인다. 스테파니 아가씨가 보았던 그 <별>이 곱디 고왔다면 박민규식 <별>에 쏟아진 풍광은 현실이다. 결국 세계는 양면, 듀플렉스의 반영이며 더블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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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0-11-17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민규 다른 책 주문했더니,소책자가 왔더라구요.
다른 분 서재 글 보고 망설이고 있었는데,이 리뷰 보니 읽고도 싶어지는 걸요~
별의 해석도 재밌구요~
요즘은 양면,더블이 대세인가 봐요,하루키의 1q84도 그렇담서요~^^

마녀고양이 2010-11-17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리뷰 보면서 입 벌리고 감탄 중입니다.

곡우님께서 별 다섯개를 주셨다니, 어쩐지 믿음이 갑니다. 최근 들어
국내 작가에게 너무 많은 실망을 했던터라, 망설이고 있었습니다만...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저도 리뷰를 보면서 1Q84를 연상했는데, 나무꾼님두 그렇게 보셨나보네요.
세상의 양면, 또는 현실과 이상, 선과 악,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 곳들, 데미안도 생각나구요.

좋은 하루되셔요.

穀雨(곡우) 2010-11-1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철나무꾼님..더블이란 제목이 주는 인상, 전 양면성으로 보았어요.
자웅동체처럼 늘 붙어 다니는 자연적인 법칙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1Q84의 구조와 비슷하게 나아간 모양입니다.

마녀고양이님...박민규의 책을 드문드문 접했지만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구조가 흡족하더군요. 이야기에 따라 달리 해석가능하겠지만
제게 그 네러티브가 맞았던 모양입니다.^^

비로그인 2010-11-18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쯤되면 본 책보다 리뷰의 심도가 더 깊다고 봐도...^^
곡우님의 넓고 깊은 감상이 더블과 함께 따따블로 버무려진 감동 그 자체입니다.
얼른 읽어야 하는데, 어흑~~밀린 책들이...^^

穀雨(곡우) 2010-11-19 13:19   좋아요 0 | URL
아~~박민규 작가님이 읽으면 웃겠습니다.^^
그래도 기분 좋은데요..ㅋㅋ
 
라이팅 클럽
강영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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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웹 2.0 시대를 사는 요즘, 글은 생활이다. 때로는 말보다 글이 편할 때가 있다. 글은 음절과 음절을 이어 단어를 만들고 다시 문장을 형성하는 동안 생각은 다듬어진다.  비록 상황에 따라 글은 퇴색되고 왜곡되는 경향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이에 반해 글이 가진 파급력은 무차별적이리만큼 크고 넓다. 그러므로 어디서든 글을 잘 쓰는 재능 혹은 자질을 가진 이를 부러워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동일한 상황을 해석하는 힘, 능력이 남다르다면 그 또한 축복이겠다. 계절이 피고 짐에 따라 감정의 중추가 미묘하게 반응하는 상태를 문장으로 복기하듯 옮겨 내는 능력은 부럽고 또 부럽다. 정수리로 떨어지는 햇살의 양태를 마치 감촉이 손끝으로 전달되어 짜르르 퍼지게 하는 감각의 전이는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의 드넓은 세계로 안내하는 훌륭한 길라잡이가 된다는 사실이다.

 

글은 누구나 쓰지만 마음을 요동치게 하기는 어렵다. 그러하기에 창작을 뜯어 먹고 사는 작가의 고통과 독자의 즐거움은 반비례한다고 했다. 읽거나 보거나 듣거나 그 결과는 냉혹하다. 진심으로 짓겠다는 흔해 빠진 광고처럼 간결한 진심은 궁즉통이다. 이 책 <라이팅클럽>의 저자 강영숙 또한 그런 동질의 감정에서 출발한다. 작가가 되기 위해 어마 무시한 시간을 인내하고 마치 소믈리에가 최적의 와인을 선별해 내 듯 문장을 끄집어낸다. 그렇게 선택된 문장은 감정의 틀 속에 숙성을 해야 비로소 글이 된다. 그러므로 잘 된 글은 진심이다. 진심이 결여된 글은 형식에 불과하다. 유행에 휘둘리듯 흘러가는 부유물이다. 누에로부터 실을 추출해 내는 그 사소하고 반복적인 행위들이 모여 윤기 나는 비단이 되는 것처럼 잘 된 글에서는 윤이 난다. 읽는 자는 귀신처럼 알아본다. 무엇이 잘 된 글인지에 대해.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강영숙의 문장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한 조각에 불과한 미묘한 상황 변화에 자신의 언어로 재해석하는 힘이 탁월하다. 그래서 같은 문장으로 쓰인 글이라도 상황의 가변성에 적확하게 어울린다. 보기에 따라 기교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겠으나 그것은 강영숙의 색깔임에 분명하다. 이 책의 소주제인 설명하기와 묘사하기의 형식처럼 작가는 이 책의 중심 배경인 계동의 모습과 인물의 상호 연관성에 대해 온기를 불어 넣어 준다. 실제 이 글을 읽는 동안 창작을 한다는 것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구하게 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절묘하게 버무려 내는 작가의 글에 감탄하고 또 공감한다.

 

라이팅클럽과 계동 글짓기 모임, 양극단의 문장이나 같은 내용이지만 질감은 다르다. 작가를 자칭하는 엄마를 둔 사생아 딸과의 이야기다. 둘은 견원지간처럼 사이가 벌어져 있지만 동일한 지점을 지향한다. 바로 글쓰기다. 글을 쓰기 위한 몸부림을 토해 내기 위해 그들이 고안해 낸 것이 라이팅클럽과 글짓기 모임이다. 그래서 책은, 두 여자의 글쓰기를 추적하며 글을 잉태해 내는 과정을 뒤쫓는다. 구르고 뒹구는 삶의 파란만장한 편린들에 대해 작가는 글쓰기로 묘사하며 집중한다. 간결함 속에 강렬한 색감이 뒤섞여 튀어 나오는 느낌이다. 무덤덤해지기 쉬운 혹자의 인생을 호기심으로 뒤채는 능력이 결부되었기에 있을 법한 이야기가 된다. 또한 강영숙의 이 글 속에는 다양한 시각들이 혼재한다. 무기력하고 나른한 인생을 살아가던 주인공 영인과 관계를 맺는 인물들의 다양성은 광각의 확장처럼 파노라마로 꿈틀댄다.  정체성의 혼란, 질풍노도의 시기와 같이 누구에게나 지나쳐 가는 통과의례처럼 인생의 그렇고 그럼에 대해 작가는 관조적인 언어로 대응해 준다. 음각과 양각처럼 감정의 기복이 심한 어머니는 대척점에 가 선다. 수평의 균형을 맞추듯 이야기는 내용의 독특함에 반해 안정감이 느껴진다.

 

돈키호테의 무모함이 때로는 자신의 꿈을 향해 걸어 나가는 커다란 견인차가 되기도 한다는 과정을 용기라는 의미로 교차시키며 시몬느 베이유의 <노동일기>와 잭 플로베르의 <통상 관념 사전>의 문장들을 슬쩍 슬쩍 삽입하며 글쓰기의 고통을 노동의 직접적인 대가, 진정성에 비유한 전개는 인생을 조망하는 관점의 일치감을 형성하는 모티브가 된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어제와 오늘의 생활이 달라진다 할지라도 여전히 글은 간결하다. 영인이 엄마의 히스테리를 혐오하며 닮기를 거부하지만 어느새 닮아 있는 두 여자의 모습이 오히려 능청스럽다. 결국 둘은 의도하고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자신만의 언어와 시선으로 세상을 향해 소리쳤던 셈이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처럼 맴돌기만 하던 이야기의 끝이 하나의 합일을 이루어 내며 계동을 감싸주던 햇살처럼 공감을 이룬다.

 

공감의 언어는 글쓰기의 존재의미다.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간절히 바라는지에 대한 밀접한 관계다. 누구에게나 2박3일을 꼬박 지새울 사연 하나쯤은 있듯 개별적인 삶은 다르나 본질은 같다. 그 속에서 스며든 사연의 흔적은 우여곡절이 만든 삶의 침전물이다. 토해내지 못하고 삼킬 수밖에 없었던 각자의 사연을 글은 갈무리하고 단정하게 변화시켜 준다. 강영숙의 글쓰기, 라이팅 클럽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농밀한 언어로 정제된 문장을 선보인다. 글을 단순히 관계를 매개하는 수단이 아닌 자신을 투영하는 하나의 성숙한 감각의 무엇으로 활용하는 길을 보여준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라이팅클럽>에 모인 그들 모두는 사실 우리 각자의 모습이다. 글은 그렇게 읽히고 퍼져 나가며 공감하게 되며 관계를 묶는다. 만약 글쓰기에 목말랐다면 망설이지 말고 이 책을 보시라. 울고 웃는 사이 묘사와 설명이 절로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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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0-11-17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 몰라서 망설였는데...이 책 조용히 회자되더군요~^^

穀雨(곡우) 2010-11-18 13:14   좋아요 0 | URL
여성 특유의 감각이 착 감기는 책이지요.
촉감의 시각화라고나 할까요?^^
 
빈집
김주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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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恨과 울분은 화병의 근원이다. 우리네 민족 정서에 담긴 소재 중 한恨에 대한 집착은 병적일 만큼 삶을 무섭도록 지배한다. 상실과 결핍에서 오는 아픔, 구조적 모순에서 오는 기능적 아픔. 그 모습은 각양각색이지만 하나의 구심점, 한으로 이어진다. 한에 대한 모습을 형상화한다면 채울 수 없는 비움이 떠오른다. 상호작용이 단절된 일방적 형태의 껍데기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가뭇없다. 이러한 현상의 주효한 원인으로 나는 봉건적 구조와 계층적 갈등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한이 쌓이고 또 쌓여 중첩된 아픔이 되는 이유의 외형적 원인은 사뭇 그러하다. 하지만 한의 내면적 갈등은 해갈할 수없는 욕망에서부터다. 욕망의 다채로운 현상 가운데 하나인 정서적 교류의 단절은 한을 유발하는 시초가 된다.

 

그래서 한을 형성하는 원인을 찾는 것은 때로는 다면적인 상황의 이해와 면밀한 접근으로 결속되고 엉킨 실타래를 풀어 나가는 추적의 과정이 필요하다. 제 아무리 뒤엉키고 꼬여 든 문제라도 실마리는 있기 마련이다. 따지고 보면 티끌 같은 실마리의 단초는 관계의 부조화다. 나와 관계를 맺고 연결된 일차적인 친밀집단 즉, 가족이다. 가족의 해체는 기능적 갈등요소들을 한으로 응집하고 끌어 모으는 원인제공의 요소라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사회 문화적 시스템 내에서 가족문제는 은밀하고 사적인 공간의 문제로 치부되어 보듬어 안고 치유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매듭을 묶은 당사자의 손으로 풀어야한다는 결자해지의 영역인지 모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김주영 작가의 <빈집>을 조망해 본다면 상당 부분 그로테스크한 상황의 연출이 지속됨을 알 수 있다. 부자연스럽게 흐르는 인물들 간의 개성 넘치는 캐릭터의 조합은 상황을 지배하는 힘이 된다. 모이고 퍼지는 파동처럼 각 각의 한이 얽히고설키고 포개지지만 결국 채울 수없는 비움의 기형적 출현으로 공감하기 힘든 현실을 껴안는다. 하지만 이러한 역설적 상황으로 내모는 내러티브는 단단함에서 비롯된다. 의도하고 설정된 조합이 조밀하게 계획된 대로 치밀하게 구동하는 힘, 김주영 작가의 역량이다. 진부한 소재도 조탁되고 주무르면 세제되어 정화될 것 같은 필력이다. 나는 이 작품으로 그를 처음 만났다. 소개해 준 지인의 선물이 없었다면 깊이 있는 그의 글을 놓칠 뻔 했다. 흔하디흔한 가난과 상처를 소재로 이렇게도 한 많은 인간 군상들을 정렬시켜 놓는 그의 필력에 흠뻑 젖었다.

 

소설 속 주인공 어진과 한량의 피를 이어받은 근본 없는 도박꾼 아버지와 억척같이 살길을 도모하는 어머니의 기묘한 줄다리기를 통해 삶의 끈이 어디로 이어지고 나아가는지 드려다 보는 장면은 잿빛 여운처럼 진득하게 퍼진다. 이 작품에서 도드라져 보이는 소재는 바다와 은행나무의 은유적 감성이다. 채울 수없는 마음의 위안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인간의 고독한 행위의 분투가 애틋하다. 어진은 아름드리 오동나무에 메어 놓은 하늘침대를 통해 살얼음판처럼 아슬아슬한 자신의 처지를 투영하고 위무하며 그에 반해 배 다른 언니 수진의 해체된 가족의 아픔은 바다로 이끌어 상호대비 시켜주는 구조는 작가의 한에 대한 통찰이 깃든 메타포다.

 

실제 이 작품의 얼개는 다양한 가족 내 갈등의 원인을 현란하게 보여준다. 아버지의 잇따른 부재와 쫓김으로부터 발생한 불안의 극복과 해소를 위해 어머니는 어진에게 무자비하고 냉혹하게 대한다. 애정결핍은 이렇듯 지근거리에 있으며 인물마다 각기 처해 있는 상황의 변주가 다르며 받아들이는 태도 또한 다름을 적확하게 보여준다. 일그러져 구부러진 관계는 때로는 극단의 모습으로 때로는 실체 없는 두려움으로 변질될 때가 있다. 그래서 한동 설한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어진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 무작정 험한 길을 휘적휘적 걷고 낯선 곳으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만용을 부리며 기이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댈 곳 없는 마음의 유기된 행동의 연장선이다. 정해진 것 없이 찾고 숨는 술래 없는 숨바꼭질을 계속 자행하며 기필코 찾아내고 마는 괴상한 행동은 불안한 마음을 고스란히 투영시켜 놓는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삶에 대해 결여된 아픔을 갖는다. 어진의 눈을 통해 아픔이 재해석되고 변형되는 모습은 관계의 모순과 결핍의 순간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고독의 섬에 갇히게 된 어진의 방황하는 마음과 삶에 배신당한 상처는 모두 구조적 모순에서부터라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한에 대한 섬세한 분석과 해체작업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공감으로 다가선다. 수진이 남편의 바람과 폭식으로 인해 우울의 그늘 속으로 숨어드는 과정과 어진이 시댁으로부터 버림받고 비정한 어머니와 무능력한 아버지로부터 애정이 결핍된 과정 또한 닮은꼴로 변한다. 결국 이야기의 절정은 비움의 채움에 대한 욕망의 분출로 이어지는 것을 예정할 수 있다.  외롭게 홀로 선 섬처럼 끊어진 연결고리를 찾아 헤매는 아픔의 배출하지 못하는 허무한 생산이다. 수진이 바다를 사막의 신기루마냥 내딛고 유영하는 모습과 어진의 냉혹한 삶의 모습은 한으로 승화된다.

 

이렇듯 어진의 성장의 파노라마를 통해 작가는 선예도가 높은 망원렌즈를 사용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무시로 흡입한다. 그 속에서 거머쥔 아픔, 한을 끌어안은 여인의 애환은 시리도록 아픔이 퍼진다. 변화무쌍한 시간의 속도에 현기증을 겪는 현대인들에게 이 작품은 자근자근 타자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는 시간을 제공한다. 또한 아무도 머물지 않는 빈집에 대한 정체성을 통해 상념의 시간을 선사한다. 비움의 마음을 우리는 무엇으로  채우는가에 대한 진중한 물음, 탐욕과 욕망의 고삐를 어떻게 쥐고 나갈 것인지를 되묻는다. 아울러 인간은 관계와 관계의 촘촘한 망에 얽혀 산다는 변하지 않는 진실에 한 발짝 다가섬을 느낀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비움과 채움의 끊임없는 반복 작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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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9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30 0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0-09-29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움과 채움도 멋진 대구,멋진 제목인걸요~

제목도 좋지만,리뷰도 좋아요.
전 요즘 자꾸 비워내는 쪽으로 생각해요.

穀雨(곡우) 2010-09-30 09:22   좋아요 0 | URL
비움에 대해 늘 고민하지만 잘 안되네요...^^
제가 욕심이 많나봐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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