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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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이는 결코 길들여 지지 않는다.



알랭드 보통은 불안을 욕망의 하녀에 비유한다. 즉, 불안을 생산하는 요체는 마음의 반응이라는 뜻이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막연함, 선택에서 오는 불확실함, 이 모든 것은 인간을 불안하게 하는 중심이다. 그러나 불안은 필연적으로 희망이라는 물질을 잉태한다. 희망은 곧 에너지를 모으고 삶을 고무하는 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손쉬운 방법은 꿈꾸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꿈을 소망의 충족이라고 했다. 원하고 바라는 것에 대한 무의식의 반응이다. 이처럼 꿈은 인생을 헤쳐 나가는 에너지원이다. 파울로 코엘류가 자신의 생이 담긴 이 책에서 간절히 소망한 그 것, 진정한 자아自我를 이끌어 주는 표지標識가 바로 이다.

 

나는 코엘류의 마음을 강물처럼 사랑한다. 안토니오를 통해 자아를 찾아 순항하던 그 위대한 여정의 순간의 연금술에서부터 인간의 순수함에 공명하던 포르토벨로의 마녀의 매혹적인 무희를 잊을 수 없다. 그가 내 마음에 아로새긴 삶을 대하는 지침은 시대를 아우르고 시간을 초월한다. 굳이 알레프 신심으로 온전하게 흡수하지 못할지라도 그의 이야기는 내 마음에 주는 등대처럼 반짝인다.

 

이 책 <알레프>는 치유의 소설이다. 읽는 내내 먹먹함에 가슴 벅차 오르고 매몰된 꿈의 원형과 마주하게 된다. 그 시작은 코엘류의 손으로부터였으나 끝은 자신이 된다. 비록 빛의 고리를 마주 대 할 용기는 없을지라도 내 인생에 펼쳐진 표지를 식별하는 혜안을 얻게 되리라. 누구에게나 주어진 인생의 여정을 헤쳐 나갈 초심자의 그 마음처럼.

 

실제 알레프 실존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평행한 차원이다. 알레프 기의 운행으로 그 기저에는 윤회의 큰 틀이 담긴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알 수 없는 공간과 시간을 오고 가며 존재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수 없이 많은 나를 발견하고 결국 나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동시성을 갖는다. 이러한 모습은 기억의 세상에 사는 우리로서는 시간의 모래밭에서 또 다른 나를 찾는 것과 같다. 그러나 코엘류는 알레프 차원을 통해 전생의, 아니 다른 차원의 자아를 발견하고 용서 받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을 사랑의 이름으로 힐랄을 통해 치유한다. 분명 코엘류의 갈등의 극복은 생경하며 이질감을 반영한다.

 

하지만 이성으로 합리화된 야만의 본성과 그것을 타파하는 용기를 엿본다. 타자가 형상화한 우상의 실체는 자신을 얼마나 옭죄며결박의 사슬을 끊어 내기가 힘든지에 대해 코엘류는 수도사의 눈으로 투영했다. 몽매의 억압은 지금도 풀어야 할 운명의 사슬이다. 과거는 현재를 노래하는 투영의 시간이듯 실체 없는 야만은 두려움이다. 나는 코엘류가 애써 시공을 넘나들며 그 광활한 러시아의 강철의 레일을 덜컹이는 공간을 달리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속내가 인간의 어리석음을 꾸짖고자 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극중 자아인 '나'불리지 않는 대상을 구체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대입 가능한 '나'이기 때문이다.

 

알레프 경험하기 위해 코엘류는 힐랄이 피워 올린 우정의 불을 매개 삼아 불쏘시개로 이용한다. 활활 타오른 불은 위대한 자아를 낳고 자신의 왕국을 건설한다. 용서와 사랑으로 승화된 왕국은 우주의 중심이 된다. 그 우주가 모여 우리가 될 테고 산다는 것의 정당성을 획득하리라. 영혼을 정화한다는 그 가치명제가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그러하기에 믿음은 거룩하고 고귀하다.

 

산다는 것은 때론 아프고 때론 막막함에 아득할 때가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막막함인지 까닭을 알 수 없으나 그것이 보편적인 삶의 모습임은 안다. 누구나 그러하다는 불안의 동질감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인간일 테다. 이쯤 되면 나의 전생은 무엇일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묶는 끈은 무엇일까? 나는 해답을 알 수 없다. 오직 불어오는 불안함을 극복할 방법은 나 자신을 믿고 인생의 시간 위에 흩어진 표지를 따라가는 것, 그것이 최선이자, 이 또한 꿈꾸는 자의 몫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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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게 - 제144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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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탄생과 더불어 모든 것은 성장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는 헤르만 헤세의 명징한 사유처럼 고통은 성장의 다른 이름이다. 웃자라 버린 마음은 현실에 동요하고 저항할수록 감각은 더욱 시려지고 커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성장은 분절되고 쪼개어진 낯선 감각의 실체를 찾아가는 과정인지 모른다. 막연함에서 오는 감각의 통점痛點은, 곧 성장통의 내부적 저항이 아닐까? 치열하게 발효된 감정의 분화를 따라 때론 아프기도, 때론 무섭기도, 때론 즐겁기도 하는 희열 속을 유영하는 히치 하이커가 될 테니.      

     <달과 게>는 추리소설을 표방한 완벽한 성장소설이다. 마치오 슈스케가 쓴 이 책은 내적성장의 변이를 겪는 주인공들의 심리를 탐색하고 추적하는 과정의 전개를 세밀한 농담으로 그려낸 흡입력이 탁월한 이야기다. 미묘하게 펼쳐지는 감정의 연결고리를 따라 노련하게 조여 오는 완급의 조련은 이 책의 백미다. 세 아이를 둘러싼 반전과 반전의 대구를 통해 인간의 이중성과 선과 악의 대립과 갈등의 정황을 절묘하게 포개고 융합한다.   

        소설의 운명이 통속적인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 위한 작업이라면 저자가 소환해 낸 역량의 터전인 이야기는 그 껍질이 견고하고 단단하기 이를 때 없다. 그것은 이 작품의 전체를 지배하는 풍격과 내면의 심리변화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추출된 공감의 물질은 감정이입을 도모하고 동일시된 내적자아를 끄집어내는 고리가 된다. 저자가 퍼즐처럼 구성한 비현실적인 바람내지는 기원의 사유를 통해 착시효과를 일으키듯 공명의 물결은 바람처럼 커지고 흡수된다. 이러한 전이에 대한 공감은 누구나 그 곳을 통과했거나 힘겨운 고독의 시간을 끌어안는 과정을 겪었음과 부합한다.

 

[사진출처 : 일본문학번역가 민경욱님의 네이버블로그]  

        이처럼 소설이 주는 가치를 보다 완벽하게 구현해 내기 위해서는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적합하거나 안전하다. 그 속에 구전된 허구의 이야기가 양념처럼 스며들어 갈등의 전조를 일으키는 키메이커 역할을 한다면 든든한 지지대를 형성할 것이다. 나아가 인물간의 내적인 변화의 과정을 심리적인 관점에 결부하여 관찰한다면 작가의 기록은 창작의 행위를 넘어 새로운 세상의 건설,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이상향의 창조의 신기원에 미치게 된다. 그것은 곧 익숙하기에 거부감의 낯섦이 없다. 때문에 <달과 게>는 밀착된 탐사를 통한 탄탄한 짜임새를 구성하는 보기 드문 수작이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춘기에 접어든 신이치, 하루야, 나루미의 미묘하게 얽히고설킨 내면의 심리변화와 의식세계를 보여주는 과정은 진지하고도 매혹적이다.  

        이야기는 기성세대, 어른들에 의해 인위로 만들어 낸 이해할 수 없는 굴곡진 삶의 현실이 어떠한 안전판도 없이 고스란히 내적 충격을 견뎌내야 하는 아이들의 공통분모가 그들을 끌어당기는 견인차가 되며 개별화된 트라우마로 작용한다. 신이치는 아버지를 암으로 잃은 슬픔을, 하루야는 사업실패로 인해 돌변한 아버지에 의한 폭력의 아픔을, 나루미는 사고로 인해 엄마를 잃은 상실의 고통을 통해 그들만의 세상을 연대하고 공유한다. 연대된 아픔은 확대 재생산되고 세상을 향한 도전이 되지만 이렇게 기반 되어 형성된 아픔의 연대는 논리가 취약한 아이들의 눈높이에서는 비현실의 강화된 모습, 즉 초자연적인 힘에 기대 자신을 합리화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아이들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으며 극복하거나 제압할 수 없는 나약한 본성의 출현이며 현실에 부딪힌 성장의 장벽이다.  

        실제 신이치의 엄마와 나루미의 아빠의 사이가 미묘한 관계를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소외된 신이치와 나루미의 표출방법은 사뭇 다르다. 공유할 수 없는 대상을 빼앗긴다는 감정의 자극은 저자의 표현처럼 낚시 바늘에 손끝을 찔려 뽑아내는 날카로운 단말마의 고통이다. 그래서 신이치는 하루야의 소외된 현실에 공감하고 나루미를 포섭함으로써 동조된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그들에게 발생된 사건의 개별화는 이 책을 움직이는 구동점이자 동력으로 작동한다. 취약한 자아를 자극하는 내밀한 감정의 변화를 통해 성숙하고 한 걸음 성장의 발판으로 나아가는 아이의 내면세계를 투영한다. 이 과정에서 저자의 흐름에 대한 속도감은 상황을 지배하고 몰입하게 만드는 심리적 프리즘에 조리개를 맞추어 숨 가쁘게 구동한다. 이러한 서정적 감정선의 자극과 표현은 마치오 슈스케가 얼마나 탄탄한 스토리라인을 구성하고 있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마치오 슈스케의 프리즘을 통해 아이들은 누구나의 삶 속, 보편성의 틈입으로 침투하게 되며 그로 인해 야기된 긴장의 순간을 적시에 붙드는 마력을 발산한다. 이것은 마치 거장 무라카미 하루키가 펼쳐 내는 공성진과는 또 다른 세밀한 지배적 관찰이 빚은 황홀한 오케스트라와 같은 변주다. 저자는 신이치의 눈을 통해 질투, 연민, 공포, 당혹, 애증, 복수, 번민의 감정들이 제 각각 뻗어나가 모여들어 화음을 이루어 내는 심포니의 향연을 만끽하는 것과 같다.   

        향연의 순간은 ‘달’과 ‘게’라는 이원적인 상징물을 통해 은유된 핍진성을 되살리며 감각점을 고무시킨다. 상징성은 필시 관습적 소재에 기반을 둔 관념적 대상을 통해 현실과 자연스럽게 매개하는 구실을 한다. 아이들이 게를 채취하고 그 게를 그들만의 공간으로 이동시켜 사육하는 과정을 통해 다시 게 껍질을 방화하여 소실시킴으로써 억눌린 소망을 기원하는 원초적 토테미즘의 의지를 엿보게 되며, 내재된 복선의 암시는 갈등을 견인하는 구심점이 된다. 신이치와 하루야의 관계, 하루야와 나루미의 관계, 신이치와 나루미의 관계. 그 삼각의 관계를 통해 아이들은 내적 자아를 표출하는 치밀한 얼개의 형태를 공고화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의 파노라마는 전편에 걸쳐 은유적 설정을 통한 비유를 통해 펼쳐진다. 신이치의 마음을 추적하며 따라가는 일련의 현상을 물결처럼 펼쳐지는 상황의 긴박감은 박진감 넘친다. 주변인물인 할아버지 요조의 갈등상황이 대물림 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그 충격을 더욱 증폭시켜 발화하는 기폭제가 된 어머니와의 나루미 아버지와의 은밀한 관계는 박탈감을 심어 주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작가의 인물에 대한 장악은 거침없다. 위력적인 지배의 흔적이 곧 필력의 힘이리라. 또한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모티브를 추동하는 근원적인 요소라는 사실이다. 감정의 순간에 대한 기록은 휘발성이 강해 저장시켜 재생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치 작가의 역량을 구분 짓는 바로미터에 다름 아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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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작가 미치오 슈스케의 <달과 게>는 단락적인 사건을 통해 아이의 내면이 변화하고 낯선 감각의 세계로 흘러가는 모습을 한 톨의 거부감 없이 보여준다. 인간의 잔혹성이라는 성마른 물질이 부화하는 과정을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구현했다. 또한 달과 게가 암시하는 알고리즘의 상승된 관계를 통해 인간의 모든 행위가 인과율의 법칙에 지배를 받아 순회하듯 일정한 틀 속에서 윤회함을 상기시킨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이유라는 것이 있다. 세상일 전부에 분명히 이유가 있어. 결국은 자기한테 되돌아오는 법이야. “(p.189)  

        작가의 이 작품이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심리적 완성도에만 머물지 않는다.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기능적, 형태적 결손가정에 대한 문제를 사건의 본질 속 깊숙이 침투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가족의 기능적 해체에 따른 구성원의 갈등은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일차적인 모습이다. 지지기반이 연약한 청소년의 자존감은 애정결핍과 집착의 형태를 일으킨다. 실제 신이치가 어머니의 사생활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 또한 타자에 의해 형성된 상황을 수용하지 못하는 경계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행위이다.  

       따라서 민감한 사회적 문제를 소재로 허구의 세계와 적절하게 버무려 공감의 큰 틀을 만들어 내는 작가의 노련함이 예사롭지 않다. 경험이 밑거름이 되었든 치밀한 계산에 의해 완성되었든지 간에 진실함은 작품을 더욱 빛내는 요체다. 이렇듯 이 책은 불편하고 어둡게 그려질 낯선 시간의 기록을 진실함을 터전삼아 각자의 또 다른 세상으로 이끈다. 결국 그것은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는 믿음의 기록이자 내적 자아를 탐구하는 자신을 향한 외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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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4-14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호,불호가 너무 명백한걸요.
전 '기발한 발상'이후로 한동안 일본것은 멀리하려고 했지만,
님의 이 리뷰를 보니 또 '혹'하는 걸요~^^

穀雨(곡우) 2011-04-15 10:18   좋아요 0 | URL
대개 일본소설이 호불호가 확연한 것 같아요.
저 또한 그닥 즐겨 읽지는 않지만 어느 님의 리뷰에 훅해서....^^
 
49일의 레시피 키친앤소울 시리즈 Kitchen & Soul series 1
이부키 유키 지음, 김윤수 옮김 / 예담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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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엄마는 고유명사다. 그러나 엄마의 속은 모든 것을 품는다. 엄마를 떠올리면 엇비슷한 관념이 떠오르는 것은 엄마가 가진 공통점이자 속성이다. 엄마는 여자보다 강하고 모성은 세상 그 어느 것보다 강하다. 엄마는 그렇다. 엄마가 가진 본성은 시나브로 밝고 따스하다. 그래서 엄마를 연상하면 대개 정성이 담긴 음식과 매개된다. 엄마의 손맛으로 빚어낸 음식은 특별한 레시피나 식재료가 아니어도 최고가 된다. 왜? 엄마가 만들었으니까.




        <49일의 레시피>는 오토미, 엄마를 다룬 이야기다. 그것도 가슴으로 낳은 엄마의 이야기다. 일본작가 이부키 유키의 정갈한 이야기는 NHK드라마로 각색되어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엄마라는 상징성을 통해 해체된 가족구성원이 응집하며 구심점을 찾아가는 감성적인 이야기다. 그 속에 담긴 엄마는 당신보다 나를 더 잘 아는 햇살 같은 어머니로 그려진다. 닳아도 다시 샘솟는 화수분처럼 ‘엄마‘에 관한 레시피는 뭉클하기만 하다. 




        실제 이야기 속 가족구성원들은 현대인들의 이미지와 절묘하게 겹쳐진다. 가족이 결합하고 해체되고 다시 결집되는 그 과정을 주인공들의 심리변화를 타고 매끄럽게 흐른다. 그 속에서 찾은 믿음과 사랑, 만남과 헤어짐에 관한 정리는 경쾌하다. 게다가 일본 특유의 정갈하고 깔끔한 배려가 곳곳에 드러난 설정은 순조롭다. 하지만 칼칼하지 못한 것은 정서적 차이일까? 남겨진 가족들을 위해 레시피를 준비하고 49일의 기간 동안 일어나는 해프닝을 통해 사랑의 참의미를 되새긴다는 발상은 참신하나 어색한 상황설정이 거슬린다.




        밑도 끝도 없이 출연하는 주변 인물들을 도려내고 정돈하면 결국 엄마를 향한 가족구성원들의 본질은 “엄마의 재발견”으로 해석된다. 엄마와 매개된 그들은 편협한 시선을 교정하고 매몰된 사랑의 의미를 체득하게 된다는 시나리오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얼개의 탄탄함에 비해 조금은 지나치게 밀고 나간 상황적 설정에 반감된 느낌이다. 엄마의 사적 영역에서 풀려난 파랑새처럼 다소 비현실적이며 몽환적인 구조다. 분명 문화적, 기질적 차이에서 오는 정서적 간극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취약한 약점을 지니고도 울 샘을 자극하는 이유는 엄마라는 이유다. 가슴으로 낳았다지만 엄마 오토미는 먹먹해지는 그런 존재다. 당신의 부재가 주는 공백을 메워주기 위해 꼼꼼하게 레시피를 만들고 그림동화를 만든 이유는 가족을 견인하는 엄마의 위대한 사랑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49일 동안 삶과 죽음의 경계를 매개하는 레시피의 효능은 놀랍다. 꺼져 가는 불씨를 지피고 해체된 가족을 끌어안는 모습은 아름답다.




        아마 작가 이부키 유키는 엄마를 통해 가족이 주는 역할을 되새기고 싶었던 모양이다. 만남과 헤어짐이 자유분방한 시대상황 속에서 진정한 사랑만이 가치 있다는 명제를 진하게 우려낸다. 하지만 상처받은 감정을 치유하기 위해 외도를 합리화하는 모습은 거슬린다. 설령 명분이 있다 해도 다시 용서를 구하고 사랑을 회복한다는 소재는 설득력이 희박해 보인다. 오히려 갈등을 해소하고 각자의 삶과 자리를 만들어간다는 이야기였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렇듯 엄마가 남겨둔 유산을 통해 잊힌 과거의 시간들이 현재와 이어지고 끊어진 연결고리가 다시 매듭지어 지는 이야기가 따사롭다. 누구에게나 엄마가 있지만 엄마를 알지 못한다. 엄마는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무모한 믿음이 우리를 붙들고 있는지 모른다. 이 책에서 엄마라는 관념을 잊힌 감성의 우듬지에서 들춰 내 엄마를 정의하게 하는 소중한 시간을 제공한다. 엄마이기 이전에 한 여자라는 사실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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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3-23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요리책, 진짜 요리책이 아니고 요리에 관한 책에 관심이 좀 많아서...
이 책 장바구니에 있어요~

새엄마가 남겨준 레시피에 관한 내용이라죠~^^

穀雨(곡우) 2011-03-23 13:49   좋아요 0 | URL
전 요리는 잘 하지 못하지만 관심은 무척 많거든요.
언젠가는 잘 하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아, 일본작가의 책은 하루키외에는 그닥 정서상 맞지를
않는 건, 양철댁님이랑 비슷해요. 그나마 이 책은 따뜻한
감성이 느껴져 무난했답니다.
 
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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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보이는 것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비롯된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불확실, 그것은 규명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의 경계는 비현상계의 미지의 존재로 각인된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닿은 적 없는 곳, 그곳은 존재에 대한 현상을 묻고 따질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은 상상한다. 시간 너머의 세계, 또 다른 차원의 세계에 대해서. 평행한 시공간의 틈 어디에서, 보이는 현상계와 흡사하게 닮은, 다차원의 세계가 존재하리라는 믿음은 의외로 강고하다. 그곳을 연결해 줄 커넥터로 기능할 무엇인가를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을 뿐 인간의 마음 속 한 구석을 견고하게 채우고 있는 믿음인 "외계의 생명체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당위처럼 같은 맥락의 차원이다. 어쩌면 확증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인간의 믿음이 단단한 이유 또한 인간이 가진 의식 중 직관에서 동인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직관의 힘을 광대한 에너지라 믿는다. 직관은 때론 둥글둥글한 호기심으로 때론 예리하고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문제를 푸는 키워드로 작용한다.

 

또한 직관에 대한 의식은 모든 사물을 끌어당기는 힘의 원천이라고 본다. 직관에 귀 기울일 때 세상이 열리고 진실에 보다 밀접해진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의 세상을 직관이 만든 패러럴 월드의 구현이라 정의하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모든 의식의 흐름을 정제하고 통제하여 걸러 낸 정수가 바로 이 책에 담겼다 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창조해 낸 세상은 인간의 의식의 기저 어딘가에 가 닿아 상호작용하고 공감하게 하는 방편이 되는 재료가 되는 것을 보면 우연을 넘은 정확성의 산물이다. 따라서 그가 빚은 생각의 총체가 탄생하기까지는 다채로운 직 간접적인 영향이 있었을 테고 행운의 바퀴처럼 우연성을 가장해서 나온 것은 결코 아닐 테다.  기실 하루키에 대한 직관이 빚은 영향력은 의식이 퇴적되고 쌓이고 다져진 조각들의 조합의 과정이다.  그 속에서 하루키는 자신의 성을 드라마틱하게 구축한다.

 

실제 무라카미 하루키는 다채로운 영향의 흔적을 책 전편에  흩뿌려 놓는다. 그것은 외따로이 혹은 뭉쳐져 가상된 세계를 교묘하게 위장하고 은폐하며 정교하게 짜인 세계를 창조하는 자양분이 된다. 따지고 보면 하루키는 대단한 관찰력과 창의력의 소유자라는 놀라움에 이른다. 전편을 장악하는 신포니에타의 협주곡을 위시하여 체호프, 프루스트의 편린들이 적절하게 배합되고 두개의 달과 공기번데기, 고양이마을, 리틀피플이 어우러져 혼합되는 변주를 매혹적이게 경청하게 된다. 여기에 하루키는 그의 간결하고 인상적인 문체로 감정의 속도를  빠르게 변속하며 몰입의 속도를 높인다. 그래서 하루키의 책은 붙드는 순간 세계는 멈추고 그 속에 침투하는 몰입의 늪에 중독된다. 아울러 그는 방대한 분량의 서사 구조에서 오는 위압감을 경쾌한 흐름과 드라이브로 쾌속질주를 유도하는 힘은 가히 압권이다. 이러한 그의 문장력과 기교가 더해지고 합체되면 막강한 화력으로 엄청난 감정의 폭발력을 불러일으킨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Q84에 자신의 경험과 사색을 통해 통찰하고 부여잡은 의식의 흐름과 세계에 대해 구현한다.  의식의 흐름을 관통하며 지나가는 연결고리를 통해 설정인물들의 심리를 장악하고 지배하는 과정을 통해 타자의 심리적 변화요소에 어떤 방법으로 영향을 미치는지를 섬세한 필치로 보여준다. 이것은 마치 심리의 이면에 숨은 감각의 고리를 정교한 메스로 해부하듯 드려다 보고 절개해 생생한 이미지를 숨 막힐 듯 잡아내는 것과 같다. 이처럼 하루키에게 시간을 설정하고 각자의 역할을 부여하며 설계된 세계가 구동하는 장면은 한편의 자연이 빚어낸 황홀한 완경을 감상하듯 바라보게 되는 영겁의 순간으로 상승하게 만든다. 이것은 대가의 혼이 담긴 필력의 완성이라 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1Q84의 세계는 카오스다. 질서를 무력화시키는 혼돈의 세상이다. 질서와 혼동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아오마메가 고속도로출구를 통해 1Q84의 세계로 진입하였듯 질서는 정연하게 각자의 역할대로 움직이며 수평의 세계를 지향한다.  무방비 상태의 의표를 찌르는 일격, 카오스는 혼돈 속의 질서다. 덴고와 아오마메가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에서 직관에 이끌려 결합하게 되는 과정 또한 그러하다. 결국 예정된 질서는 마방진의 수처럼 적확한 수치다. 이렇듯 균열한 틈바구니를 밀고 나오는 미세한 시간의 흐름은 하루키가 지향한 1Q84의 세상에서 재창조된다.  몽환적이고 판타지적인 요소가 가미된 1Q84의 10월에서 12월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외침과도 같다. 아오마메가 선구의 리더를 제거하고 공기번데기를 통해 반대편 세상의 후카에리의 몸을 빌려 덴고의 아이를 품는 과정은 결합의 산물인 생명의 잉태와 또 다른 세상의 출현을 맺어주는 의미로 부각된다.

 

또한 하루키는  아오마메와 덴고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로 우시카와를 전면에 배치한다. 우시카와는 선구의 아웃사이더 해결사로 타락한 변호사이며 동물적인 감각과 기괴한 모습이 야누스의 형상처럼 대조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1Q84의 세상이 1Q85의 또 다른 통로가 열려있음을 은연중에 암시하며 하루키의 다음 행보를 내비친다.  리틀피플이 날뛰고 경계가 허물어지며 또 다른 문이 열리는 혼돈의 과정을 하루키는 우시카와를 통해 암시하고 보여준다. 여기서 하루키는 대칭적 구조에 대한 강한 조화를 맞추며 이중적 나선구조를 이어주는 끈을 조화롭게 설정한다. 선구의 핵심일원인 포니테일과 스킨헤드, 타이거오일의 왼쪽과 오른쪽, 리틀피플과 빅브라더, 껍데기와 알맹이처럼 흑과 백의 부조화 속의 대칭구조를 통해 현상계와 비현상계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정교함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하루키는 의식의 흐름을 지배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1Q84의 세계에서 살아 숨 쉬게 하였다. 덴고의 아버지가 현상계의 껍데기를 벗어 나 NHK수금원으로 아오마메와 덴고, 우시카와를 차례로 방문하여 수금독촉을 하는 난해한 장면은 데자뷰에서 오는 기시감처럼 생경하지도 낯설지도 않다. 아마도 하루키는 의식의 중추가 인간의 지배를 벗어나 어디에선가 재생되고 스며들 것이라고 믿었는지 모른다. 동시대를 사는 세상 저 편의 낯선 공간에 나와 같은 인간이 살아 움직인다는 상상, 섬뜩함이 몰고 오는 서늘한 상상이다. 풀리지 않는 미제와 같은 하루키가 던진 난제는 이야기가 계속 뻗어 나갈 것이라는 가정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인지한다.

 

이렇듯 무라카미 하루키, 그에 대한 열광은 이제 전설이다. 세상을 온통 1Q84의 세계에 홀리게 만든 그의 이야기에 마비되었다. 플롯 곳곳에 깃든 완벽한 장치들을 통해 실제 두 개의 달이 뜨고 공기번데기가 생산되는 세상에 서 있는 착각이 든다.  그가 설정한 모든 장치들을 풀어 나열하면 일정한 알고리즘의 틀 속에 모이는 이유 또한 하루키의 아우라가 유발한 엄청난 에너지다. 아오마메의 푸름에서 이끼 긴 푸른 달이 연결되고 존재감을 상실한 달에서 덴고의 강인함을 유추케 하는 음양의 완벽한 대칭적 조화. 하루키의 이 소설은 완전한 세상의 경계에 머무는 불완전한 세상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그 속에서 나는 구부러진 시간을 마주한다. 1Q84의 생소한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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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1 1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2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10-05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 굉장히 좋은데요....

1Q84를 읽고 리뷰를 쓰면서, 얼마나 정리가 안 된채 헤매었던지 결국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터뷰를 긁어다 올리고 끝냈답니다.
그만큼 제게 난해한 작품이었고, 그만큼 제게 매력적인 작품이었습니다.

곡우님의 리뷰를 읽으니, 머리 속의 혼돈 상태가 훨씬 가라앉고 있습니다. 기억을 다듬으면서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굉장히 공감이 가는 리뷰입니다.

穀雨(곡우) 2010-10-05 22:19   좋아요 0 | URL
쓰고 지우기를 숱해 반복했어요. 하루키를 단박에 정의한다는 게 쉽지 않더군요.
아직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마고님의 공감의 표시, 위로가 됩니다...^^
 
신 1~6권 세트 - 전6권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외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죽음 너머의 세상은 불확실의 영역이다. 하나의 유기체로 숨을 쉬고 오감을 사용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지금 이 시점에도 나는 불안하다. 그 불안은 두려움이라는 피할 수 없는 외피처럼 막연하기만 하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 존재의 상실에 대한 불안, 알 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 불안의 요소들은 어디에든 산재한다. 인간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초월적인 신을 영접하고 기대었는지 모른다. 신과의 만남. 그것은 불안의 제거를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불안의 정체가 신과의 소통으로 모든 것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신의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 그것은 우주의 존재에 대한 원초적 질문으로 되돌아  온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인간이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규명작업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불안의 제거는 인간을 이해하는 첫 번째 시도인지 모른다. 죽음에 맞서는 타나타노트의 순항처럼 말이다. 인간에게 죽음과 신은 밀접한 관계다. 죽음을 관장하는 섬뜩한 세계는 불안을 두려움으로 바꾸고 두려움은 다시 털어낼 수 없는 공포로 만든다. 그러나 종교는 말한다. 신을 받아들이고 사후세계에 대한 존재를 믿는다면 그 또한 인간을 움직이고 이끄는 동인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한다. 때로는 토템의 형식으로 때로는 정신으로 인간을 지배하고 의식을 고양시키는 방편으로서 존재한다. 이것은 종교에 대한 짧은 나의 단견에 불과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의미도 없다. 단지 신의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에 앞서는 서투른 끼적임에 불과하다. 나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규명할 방법이 현재로서는 없다고 본다. 기실 그 합리성이라는 잣대도 인간이 만든 기준에 불과하다는 오류를 생각한다면 어디에도 존재에 대한 마땅한 근거를 찾을 수는 없다.




        그래서 신은 이 땅의 모든 이를 관장하고 의식을 이루는 모든 유기체를 지배한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뒤따른다. “신, 그 이전에는 무엇이었는가?” 바로 이 물음에 대답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생경한 해답이 대신한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개미>를 통찰하던 그의 놀라운 사유의 흔적과 비범한 능력을 보았을 무렵부터다. 그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며 상대적인 이야기를 한다. 그러므로 이 책 <신>에 담긴 이야기의 줄기와 근간은 그가 이전에 써내려간 모든 것의 총합이다. 지옥을 탐사하고 죽음에 대한 본질을 파헤치던 <타나타노트>, 천사의 세계를 장엄하게 연출해 낸 <천사들의 제국>, <개미>에서 덮쳐 오던 숨 막히듯 개미세계를 열어젖힌 그의 모든 지식의 총아가 이 책에 담겼다.




        베르나르의 이전 작품인 <파피용>은 인간의 본질, 즉 협력하고 대립하고 무시하는 것에 대해서 본질적인 연구를 하였다면 <신>은 그것의 존재적 완성이라 할 만 하다. 베르나르는 인간이 무리를 이루면 반드시 협력하는 이, 대립하는 이, 무시(중립)하는 이로 나뉜다는 분열의 D, 중성의 N, 협력의 A의 인간의 본성에 렌즈를 맞추었다. 그것은 DNA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이해하였으며 이와 같은 단순한 체계로 모든 복잡한 것에 대한 기초를 이룬다는 의미다. 기실 <신>의 곳곳에 포함하고 지탱하는 지지대는 이것으로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인간을 추동하는 핵심요소인 것처럼 더 나아가 모든 것은 DNA의 과정을 답습한다. 단순함이다. 단순함은 허무로 싸여 있지만 확고하다. 베르나르가 천재적 영감을 마음껏 이용하며 신선한 발상을 뱉어 내는 주요한 이유 또한 단순함에서다. 단순함은 분명, 모든 것을 명료하게 만든다.




        그래서 베르나르의 주파수는 항상 열려있다. 닫힌 편견의 시선을 기존의 사고를 딛고 올라선다. <신>에서 드러난 모든 신들의 역사는 이미 인간의 의식세계에 깊숙이 침투한 모든 것이다. 올림피아의 12신들을 비롯해서 유명 짜한 신들의 일화를 모두 녹여냈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밝혀진 신들을 재료로 새로운 행성을 건설하고 다시 그 모든 것들을 담아내는 발상의 신기원을 이루었으니 창의적이라 할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무지의 이전의 세계에서 피어 올린 작은 호기심의 열망이 과학의 세계로 다시 가상의 세계를 달리는 동안 베르나르는 한데 뭉치고 버무렸다. 수직, 수평의 세계, 시공간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 곳에 동시에 분출하는 새로운 존재의 중심. 평행세계에 대한 체계적이고 진보한 생각의 창출이다.




        <신>은 천사들의 제국에서 상승한 미카엘 팽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모험 가득한 이야기다. 신후보생으로 아에덴(Aeden)에 오른 미카엘과 다른 143명의 후보들과 겨루는 인간 사회의 운명적 만남은 여태껏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상상력이 뿜어내는 아우라다. 현재 지구 위에서 펼쳐지는 모든 역사의 기록들이 순환되고 영향을 받아 나가는 모습을 그린 그의 내러티브는 치밀한 기록의 재해석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역사적 진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이 책을 이어가는 스토리텔링의 산실이며 그의 방대한 지식의 분출에 놀랍기만 하다. 마치 마인드맵의 얼개를 짜 나가듯 넓혀 가는 경우의 가지가 모두 망라된다. 그리스신화를 중심으로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토속종교에 이르기까지 신화적 존재는 거의 터치되고 드러난다. 베르나르가 더욱 천재적인 작가라는 표상은 이러한 종교적 패러다임을 통해 하나의 조합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조합의 중심은 인간은 순회하고 내세는 존재하며 선과 악으로 나뉘는 본성의 접근에 부합한다는 윤회설에 가 닿는다.




        결국 <신>은 신을 통해 인간을 보는 이야기다. 진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진실의 순간은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모든 것은 순간처럼 돌고 도는 수레바퀴라는 의미다. 베르나르가 3부작으로 총6권에 걸친 방대한 서사구조를 이어가기 위해 스토리의 지지대를 점검하고 흐트러진 알고리즘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곳곳에 보인다. 결과는 완벽할 수 없다. 완벽하지 않기에 베르나르가 독자에게 던지는 화두 또한 그곳에 있는지 모른다. 다소 황당무계한 결말에 이르는 베르나르의 종착역이 그의 끝없이 다다랐을 고민을 감내하는 구실이 되었으니 말이다. 기지와 재치가 넘치는 그의 핵심적 가치는 편견의 무덤 속에서 피어난 투명한 결정체다.




        아울러 <신>에 등장하는 신들의 배경을 기록된 사실과 가미되고 조정된 의견을 함께 고민해 보는 것도 이 책을 보는 묘미다. 신들의 전쟁을 통해 제우스와 그의 형제들이 세상을 나누고 구획하는 배경,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강박적인 결핍증상, 하데스의 악마적 본질은 인간이 빚은 허상 등은 이전의 지식체계를 흔들어주는 고무적인 장치들이다. 또한 베르나르는 인간 심리에 관한 본질적 접근을 통해 인간을 추동하는 가치들이 무엇인지를 미카엘과 에드몽, 라울 등을 통해 현란하고 다채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베르나르는 이를 위해 신후보생으로 명명된 인물들을 역사에 존재했던 철학자, 과학자, 수학자, 정치인, 아나키스트, 배우 등으로 채워 보완해 나간다. 이렇게 집결된 그들의 생각은 하나의 빛이 되고 그 빛은 더 높은 차원의 세계를 드려다 보는 프리즘으로 작용하는 결과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신>에 갈마드는 생각의 총아들은 인간이 밝힌 결과물과도 부합한다. 다층적인 심리세계를 기반으로 평행세계를 넘나드는 기반을 제공한 “초끈이론“에 이르기까지 건강하고 다양한 생각들로 붐빈다. 베르나르는 미카엘을 통해 끊임없이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란 의문을 지속적으로 던지며 현자의 돌을 찾아 나서는 연금술사처럼 비존재를 존재로 바꾼다. 마치 과거에 일어난 시간적 배경을 밝히는 학문인 크로노스(연대학)를 대하는 기분이다. 시간의 학문을 이용해 자아를 찾는 또 다른 여정의 산물인 셈이다.




        코스모스로 유명한 유작 <에필로그>에서 칼 세이건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는 순간 다시 살아나 나의 일부를 기억하고 생각하고 느끼면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라 믿고 싶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이 강렬한 만큼 나는 그것이 헛된 바람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 사후 세계가 있다면 내가 언제 죽음을 맞이하든(…)나의 호기심과 갈망은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이 세계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우며, 크고 깊은 사랑과 선으로 가득한 곳이기 때문에, 증거도 없이 예쁘게 포장된 사후 세계의 이야기로 자신을 속일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약자 편에서 죽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생이 제공하는 짧지만 강렬한 기회에 매일 감사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칼 세이건의 생의 도정道程과 베르나르의 그것과 사뭇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미지의 세계를 알아 가고 깨달음으로서 궁극에는 우리 자신을 알아간다는 필연의 작업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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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8-05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유신론자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곡우님 글을 읽으니 더 와닿습니다. 존재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베르나르의 책은 접해 보지 못했는데 칼 세이건의 얘기와 더불어 곡우님의 리뷰만으로 그저 호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 수많은 종교와 신에 대하여 다 고민해 보고 이야기에 녹여낸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더운데 이런 좋은 공들인 리뷰를 읽고 가니 절로 시원해집니다.

穀雨(곡우) 2010-08-05 17:03   좋아요 0 | URL
제가 보기엔 베르나르는 천재입니다. 공통된 코드를 골라 붙이는 상상력도 대단하지만 방대한 분량을 하나의 줄기로 이어가는 그 치밀함이 더욱 대단합니다. 블랑카님께 조금이나마 청량감을 들였다니 기분 좋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