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청춘을 규정짓는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청춘은 이미 훌쩍 자라버린 어색해진 제 껍데기를 끌어안은 채 붙박여 멈춰 서 버린 낯선 느낌이며, 갈피를 잃은 정신을 가다듬는 혼란의 숨 가쁜 상태로 그려지곤 한다. 누구나 청춘의 뜨거움에 질식하고 때론 그 청춘이 죽을 만큼 힘겹게 덮쳐 오는 불편한 정경에 목말라 한다. 그런데도 지나고 보면 그때 그 시절만큼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때도 없다. 이처럼 청춘의 열병은 젊음을 시샘하는 삶의 통과의례처럼 빗나간 육신과 마음을 다듬고 깎아 제자리에 맞추는 조탁의 과정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청춘은 홧홧한 열정의 에너지를 쉼 없이 발산하고 방황도 때로는 동경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래서 일까? 세상을 향한 청춘의 몸짓은 서툴고 어색하기는 하지만 끊임없이 삶에서 결락된 무언가를 찾는 여정이 지상과제인양 삶의 이상理想이 되기도 하는 것을 빈번하게 목격한다.




        그렇기에 청춘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꽃처럼 화려하기도 눈꽃처럼 시리기도 하다. 세상은 무언가 정체모를 이물감이 어딘가에 탁 걸려 그 답답함으로 인해 온몸으로 번지는 막연한 불안처럼 냉소적이고 허무하다. 어쩌면 청춘이 이방인의 고독에 어울리는 멜랑콜리의 입맞춤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청춘은 푸르른 몸짓만큼 회복도 생기도 충만하다. 태어나 처음으로 겪는 이별, 사랑, 연민, 상처는 새살이 돋고 아물기를 반복하다 보면 그 젊음에 후회가 될지언정 습관처럼 회고하고 읊조리는 시절이 찾아든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과 타협이 될 수도 포옹이 될 수도 있겠으나 누구나 거쳐 야 할, 건너야 할 통과제의가 아니겠는가.




        신경숙 작가의 이 책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내게 그렇게 읽힌다. 존재의 상실을 통한 아픔과 부재에 대한 허망한 교태가 합작한 청춘의 출발선에 선 가녀린 영혼들의 절규와 같이 살처럼 콕콕 날아 와 박힌다. 오염된 세상의 파편에 쓰러지고 울부짖는 청춘의 뜨거운 몸부림은 위태롭다. 세대의 접경지대에 선 청춘은 오르페우스적 욕망에 사로잡히고 교차된 혼돈의 무게에 힘겨워한다. 성장의 순간은 아픔을 딛고 일어선다고는 하지만 산화되지 못한 슬픔은 미래의 시간마저 과거의 자리에 포위당하고 말 것처럼 고통스럽다. 그러므로 설계된 대로 흐르지 못하는 삶의 불가해성으로부터 이어지는 정체성의 혼란은 현기증이 난다. 그것이 누구나 짊어진 원죄에 대한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처럼 처참하고 가혹하다면 청춘은 또한 아련해진다.




        신경숙 작가는 사랑을 통해 청춘을 위무했다. 긴장이 도처에 떠돌고 아픔이 곳곳에 지뢰밭처럼 묻혀 있던 그 독재의 시절, 청춘을 노래했다. 작가의 눈을 통해 재단된 청춘은 문장의 행간을 이어주고 공감을 유도한다. 이미 전작 <엄마를 부탁해>로 눈물샘을 말려 버린 그녀의 필력이기에 달리 썰을 풀어낸다는 것은 중언부언처럼 민망하다. 그래서 온전히 나는 그녀의 시선을 쫓아 생각이 머무는 곳에 안주하기로 했다. 그녀가 설정한 젊은 영혼들의 외침에 동참하고 세파의 부침에 맞서고 싶은 충동이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2000. 민음사. 헤르만 헤세, 데미안 中에서)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껍질을 벗어야 한다. 청춘은, 누구에게나 겪고 방황하고 또 상처받는 시기가 있다. 청춘의 기록은 그래서 치열하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신경숙 작가의 글은 페이소스처럼 정열적이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p.291)




        소설은 화두를 던진다. 청춘에 대해. 신경숙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던진 화두는 크리스토프의 명제에 오롯이 담겼다. 소설 속 인물인 윤, 단, 명서, 미루를 가로지르며 관통해 나가며 깃든 삶의 무게는 크리스토프를 통해 인식된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짊어진 어깨 위 아이의 무게를 홀로 감내하는 우리의 모습이자 고독의 항체처럼 질긴 운명인지 모른다. 오늘을 잊지 말자는 자조 섞인 희망에서 슬픔을 극복해 낸 순간의 떨리는 윤의 바람처럼 나는 그들과 연대감으로 묶였다. 이따금 삶은 날 선 세상에 아프고 뜨겁다. 고통은 삶을 무두질하며 신열이 열꽃처럼 번져 오르기도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흡수되고 소실된다. 역설적이게도 고통은 삶의 좌절과 절망을 구분 짓는 힘이 되기도 한다. 힘은 아름다움으로 승화되고 희망이 된다. 타성에 젖지 않은 순수의 청춘이 사무치게 아름다운 것은 이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크리스토프의 메타포는 세상에 맞서는 자세이며 자아를 찾는 과정의 일환이다. 




        소설 속 윤은 어머니를 잃었다. 아픔이 오래도록 침전되어 빛을 상실했다. 존재의 상실에 대한 아픔은 윤에게 트라우마다. 도시에 나와 옥탑 방에 기거하면서부터 걷기 시작한 행위는 어머니를 잃은 상실의 그림자를 뒤쫓는 과정을 통해 번민하고 슬퍼함으로써 결국에는 그것을 끌어안는 행위로 새겨진다. 걷는다는 것은 목적지를 염두에 두고 가늠하게 된다. 누군가를 만나든 어딘가로 이어지든 길은 걷기를 동행하는 벗이다. 윤에게 걷기는 씻김과 떠나보내기의 과정쯤으로 보아진다. 그러므로 명서가 윤에게 이어지는 과정은 자연스럽다. 인간은 감정이 침잠하고 가라앉을 때 방심한다. 방심은 긴장을 놓고 의지하려는 마음이 앞서며 아픔을 나누고픈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렇게 윤에게는 명서와 아픔을 연대하고 서로의 틈입 사이로 밀어 넣는 관계로 발전한다. 반면 미루는 언니를 잃었다. 미루에게 언니는 세상이었고 존재 그 자체였다. 그 옛날 외할머니 댁을 찾았다 닥쳐든 뜻밖의 사고로 인해 무릎을 다친 언니의 추락을 지켜보는 것은 미루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 일로 인해 빛을 잃어 버린 별처럼 침몰하기만 하던 언니는 어느 남자를 만나고 서야 안정과 행복을 되찾게 된다. 그런데 행복은 길지 않았다. 남자의 실종, 사회적 타살 소식에 언니는 분신자살로 맞서고 미루의 손에 지울 수 없는 상실의 기억을 아로 새기게 된다.




        윤에게 단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이어주는 길목에서 만난 풋풋한 관계다. 윤이 어머니를 잃은 아픔으로 방황할 때 단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단은 먼발치에서 윤을 지지하고 윤의 앞에 나서 길을 가는 방해물을 제거하고 등불이 되어주는 역할을 자청했다. 하지만 윤과 단은 친구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단이 불합리한 제도에 맞서 방황할 때 윤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단은 내성적이었지만 굳건했고 순수했다. 그러나 단의 순수는 오염된 현실에 내 버려진 가녀린 존재에 불과했으며 이방인으로 내모는 구실이 되었다. 단의 내몰림은 그렇게 총기자살을 가장한 도피로 이어지며 청춘의 흔적을 지워 버렸다. 이렇게 단과 윤의 관계는 비이성적인 영역에 머문다. 기다리는 사랑은 피를 말리고 허파를 타들어가게 하는 아픔이다. 나는 단과 윤이 맺어지기를 은연중에 바랬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가 던진 화두를 푸는 키워드는 아님을 또한 일찌감치 알아챘다. 이 또한 삶의 단면임을 말이다.




        다시 돌아가서 명서와 윤의 관계가 낙관적이지 못했음은 그 시대의 비릿한 울분과 상황이 만든 아픔임을 비로써 인식하게 된다. 또한 윤에게 미루는 거울과 같은 존재였다. 미루가 언니의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 실종된 언니의 남자를 찾아 헤매는 것도, 윤이 걷는 것도 닮았다. 그들의 이동은 회피의 수단이라기보다 맞서서 찾는 본성의 감정에 충실한 흔적이다. 작가의 의도적인 설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아픔을 연대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사랑의 오묘한 진실을 찾는 여정은 어딘지 모르게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그 마음과 닿아있다. 그래서 윤과 명서는 서로에게 다가가기를 바랐으며 명서가 미루를 잃은 절박한 심정을 위로하고 제 것인 양 끌어안고 싶었는지 모른다. 내가 그쪽으로 갈게. 건너간다는 의미는 피안과 차안의 경계를 연상케 한다. 따라서 그쪽으로 간다는 말은 고독 속에 뒹구는 영혼을 끌어안겠다는 포용의 시도처럼 들린다. 더불어 희망 섞인 바람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크리스토프를 언급한 윤 교수의 존재는 젊음을 인도하는 길잡이처럼 그려진다. 나의 크리스토프들, 함께해주어 고마웠네. 슬퍼하지 말게. 모든 것엔 끝이 찾아오지. 젊음도 고통도 열정도 공허도 전쟁도 폭력도. 꽃이 피면 지지 않나. 나도 발생했으니 소멸하는 것이네. 하늘을 올려다보게. 거기엔 별이 있어. 별은 우리가 바라볼 때도 잊고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을 걸세.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의 단 하나의 별빛들이 되게."(p-354)  원망도 미움도 열정도 시간 앞에서는 허무하고 부질없다. 윤 교수를 통해 작가는 내면의 변화를 관찰하고 보다 깊이 있게 삶을 이해하기를 바랐다. 마치 한 순간 암전 후 찾아드는 광명처럼 윤 교수의 말은 새록새록 마음으로 새겨진다. 이러한 가르침은 참된 자아를 찾는 탈출구가 되며 충실한 삶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삶은 어디서든 계속된다는 말처럼 별빛처럼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경숙 작가의 이 소설은 성장소설을 표방한 세태소설이다. 어두운 시절을 통과한 젊음 이들의 사랑을 간결하게 빗어 낸 문장들은 읽는 이의 마음을 공명하게 한다. 윤과 단, 명서와 미루를 통해 세상이 할퀴고 간 트라우마의 흔적과 극복의 과정을 공감하게 되고 하나의 지향점을 만들며 성장해 간다는 이치를 배우게 된다.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벨처럼 희망이 울려 퍼지고 기쁨과 환희가 커져가기를 작가의 프리즘을 통해 드려다 보았다. 슬픔보다는 기쁨에 저울추가 기울어지기를 바랐다는 신경숙 작가의 바람은 이 책을 통해 충실한 성공작이 되지 않을까 한다. 누구나 쓰리고 아픈 기억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안고 살기 마련이므로 세상과 용서하는 계기가 되지 않겠는가? 소망해 본다. 작가의 여명의 바람처럼 모두 뜨겁게 달궈 굳어진 손 위의 돌을 내려놓고 낙관의 희열을 만끽하게 되기를 말이다. 용서는 자신과 하는 약속이며 삶을 바로 세우는 균형추에 다름 아니므로.



댓글(5)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0-08-30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민과 용서를 지나야 성장이 오는걸거예요.^^

穀雨(곡우) 2010-08-30 09:54   좋아요 0 | URL
마기님, 오랜만이네요.
이제 수면위로 나오신건가요...^^

연민과 용서를 지나야 성장이 온다는 말씀, 공감합니다.^^

yamoo 2010-08-30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신경숙 작가의 작품은 읽지 않습니다만...이 리뷰는 추천을 안하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네요~
넘 잘 봤습니다~

穀雨(곡우) 2010-08-31 00:01   좋아요 0 | URL
야무님, 추천 감사합니다.
소설은 안 읽으시나 봅니다.^^

yamoo 2010-09-02 10:12   좋아요 0 | URL
소설은 그리 자주 읽는 편은 아니지만 꽂히는 작가 위주로 읽습니다.. 신경숙 작가 작품은 멀리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