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인공존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글에도 도락이 있다는 것을 새삼 절감한다. 기지가 번뜩이고 시류에 적확하게 들어맞는 이야기를 접할 때면 매번 알 수 없는 즐거움에 빠진다. 판에 박혔다거나 식상한 이야기가 진부해서 싫다는 것이 아니라 매력이 없다는 것이 이유다. 바야흐로 구매자가 판매자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가지는 시장, 즉 바이 마켓Buy's market시대가 아닌가. 문학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눈에 확 띄지 않으면 변변한 기회도 없이 아웃당하는 게 대세다. 물론 독점자본에 의해 왜곡된 공급현상과 여론몰이에 의해 수요를 창출하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문학을 담보하는 주된 동인은 감동과 재미다. 하지만 문학은 이것으로 설명할 수 없다.




        문학은 진리와 가치를 추구하며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본질이다. 또한 문학은 자본주의의 논리로 포섭하기 이전에 그 시대의 창을 대변하는 가늠좌다. 그러므로 문학이 인류의 역사에 당당하게 굳건한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이유도 책이 없다면 곧 죽은 사회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문학적 본질의 심오한 패러다임을 떠나서 기존의 관습으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대면하면 인간의 상상력의 끝은 어디인가 하는 근원적인 의구심에 휩싸이게 한다.  




        배명훈 작가는 괜한 엄살을 부리지만 떠오르는 플레이메이커 감이다. 이야기의 소재를 끄집어내는 능력도 그렇고 펼쳐 보이는 재주 또한 절묘하다. 생활인의 채취를 풍기다가도 이내 우주로 날아가고 신을 영접하는 극단을 오고가는 서커스단처럼 현란하다. 그는 상상력이라 추켜세우는 신형철 평론가의 극찬은 괜한 공치사가 아니다. 그를 퍼뜩 알아채지 못한 한국문단을 나무라고 신소리를 뱉어도 이제라도 배명훈 작가를 발굴해 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할 일이겠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10년 문학 동네 젊은 작가상 모음에서다. 이 책의 타이틀인 <안녕, 인공존재!>로 접했더랬다. 그때 기록한 리뷰를 발췌하여 인용한다.







        배명훈 작가의 <안녕, 인공존재>는 외계에서 기록되었다는 신경숙 작가의 표현은 적확하다. 실존하는 물질에 대한 관념을 가볍게 드라이브하며 부드럽게 존재를 녹여 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기지가 번득이며 아이디어가 빛난다. 데카르트가 규명한 존재의 근원을 조약이라는 돌멩이에 얹어 이렇게 잘 빚어 낼 수 있다니 그의 상상력이 부럽다. 난해한 소재를 이끈다는 것은 작가의 변辯처럼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한다. 작가는 더듬을 수 없는 위치를 감정의 혼합물을 통해 적절하게 배합하고 첨가하여 순도의 완성체로 만들어 낸다.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추출해 낸 결과물이다. 존재의 대폭발처럼 몰입은 한 템포 빠르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내가 배명훈 작가의 다음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 또한 몰입의 완급이 주는 현상에 노출되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배명훈 작가의 이 글은 괴물의 탄생을 알리는 전조가 아닐까?




        당시의 감동처럼 배명훈 작가의 다른 글에서도 유사한 맥락을 더듬었다. <크레인, 크레인>에서는 인간의 나약함과 존재의 출현에 대한 독특한 시선을 맛보았다. 크레인이 당최 신이라니 누가 할 수 있을까. 가벼움 속에 천착한 심오한 물음은 돌발적이다. <누군가를 만났어>는 판타지장르를 보는 긴장감을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을 통찰한다. 고고심령학회라는 비현실적인 연구와 공룡발굴단, 폭발물제거반의 기형적인 만남을 적절하게 배합해고 어울리게 만드는 것은 배명훈 작가의 알싸한 필력이리라. 이러한 신묘한 이야기는 <매뉴얼>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사고로 부모를 잃은 어린 조카의 눈에만 펼쳐지는 휴대폰설명서에 기록된 비서秘書같은 상상력은 보이는 것을 부정케 의심케 만드는 힘이 깃들어 있다. 두 작품에서 배명훈 작가는 규명되지 못한 이전의 세상을 보았는지 모른다.




<코스모스>의 칼 세이건은 과학을 이해하느냐 못하느냐가 우리의 생존여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고 했다. 아마 배명훈 작가의 모든 글은 이에 부합하며 일맥상통한 의미를 갖는다. <엄마의 설명력>이나 <안녕, 인공존재!>는 천문학과 과학의 프리즘을 통해 펼쳐진 화려한 영상을 들여다보는 심정이다. 지동설과 천동설의 대립, 존재에 대한 물질현상 등은 날카로운 지식이 자양분이 되었다는 반증이겠다. 논리 정연하고 개념이 반듯한 배명훈 작가의 이야기가 쉬운 구어체를 기폭제로 날아오른데 장애는 없다. 가볍게 날아 오른 이야기는 어느새 나의 감정과 뒤엉키고 고스란히 내려앉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믿기 힘든 것이든 밝혀지지 않은 것이든 허무맹랑하든 상관없다. 상상은 곧 현실이 된다는 명제처럼 그 속에서는 모두 가능하지 않겠는가.




<얼굴이 커졌다>는 킬러의 불협화음 같은 현실의 에피소드는 짧지만 임팩트가 강한 이야기다. 반대로 <변신합체 리바이어던>은 뉴질랜드 작가 버나드 베켓의 <2058 제너시스>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다.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본질에 대해서는 묻는 두 책의 공통점은 뉴웨이브하며 철학적이다. 리바이어던은 철학자인 괴물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진다. 또한 제너시스에도 그리스철학을 빗대어 진화를 이해하는 척도로 사용되는 것은 상당부분 닮았다. 또한 대화체로 이어가는 기교마저 비슷하다. 하지만 풀어내는 방식과 이해하는 폭도 각자의 개성을 마음껏 살린 실험적인 이야기다. 52만 명의 조종사가 로봇을 움직이고 합체하지만 실제 299명의 주조종사만 지배한다는 가상의 현실이 그냥 나오지는 않았지 싶다. 299명은 우리나라 국회의원 수를 의미한다는 사실.




이 밖에도 <마리오의 침대>는 우화를 통한 사랑의 해석을 엿 볼 수 있다. 사랑을 위해서는 불편도 감수하며 아내의 코골이를 참기 위해 침대를 넓히고 우주로 이주한다는 내용이다. 다소 엉뚱한 발상이지만 참신한 이야기는 상식을 허무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한다. 동전의 앞과 뒤처럼 보편적인 생각을 뒤집다보면 전혀 뜻밖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논리다. 요즘 시류가 그런 것도 이유가 되겠으나, 배명훈 작가의 글은 올레, 생각을 뒤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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