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은 사소함으로부터 온다. 기대를 잔뜩 머금은 감동은 부피만큼 확장된 몸짓 탓에 되레 허무해진다. 부지불식간에 찾아드는 감동의 순간, 존재 위에서 피어나는 말간 꽃처럼 향기롭다. 때로는 그것이 미미한 몸짓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그것이 행복을 향한 신호임을 안다. 감동의 자장을 일으키는 신호는 삶의 모든 곳에 퍼져 있다. 그 크기나 밀도는 다르지만 전해 오는 떨림은 엇비슷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감동을 어떻게 낚아채느냐의 문제, 마음을 다루는 자세에 있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 물질임에도 그 모양이나 질감이 천양지차로 변한다.
나는 마음이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소프트웨어라고 본다. 마음이 공명하지 않으면 감동은 사치에 불과하다. 아이의 맑게 갠 틈 사이로 피어나는 웃음 언저리에서도 대하는 마음은 다르다. 그곳에 삶의 던적스러움이 포개져 덧칠을 한다면 마음은 절로 암울해질 테고 때로는 그것이 삶을 추동하고 일으키는 커다란 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어떤 상태에 있느냐의 문제 이전, 어떻게 마음을 다루느냐의 문제겠다.
올 봄 우리 가족에게는 새 아이가 찾아 왔다. 연년생으로 키워 내 초등학교에 입학한 큰 아이와 이제 태어 난 아이와의 터울은 기다면 길다. 아이와 함께 한 살가운 시간 동안 경험이 부족해서 혹은 낯설어서 넘겨 버렸던 그 아쉬웠던 감동의 편린들이 지금 다시금 새록새록 하다. 나는 행복 위를 걷는다. 행복이 사소한 감동에서 나와 모여 이루어 진 것임을 안다. 그 감동의 시발점은 배려와 믿음, 사랑에서 기인한다. 세 아이가 쏟아 내는 믿음의 목소리는 맑고 고운 청음처럼 순결하다. 끊임없이 발산하는 감동 에너지의 고갱이인 셈이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이자 감동을 유인하는 행복의 전령이다. 이것은 모든 보편적인 믿음에 근접하는 명제에 가깝다.
이처럼 감동을 조련하는 방식은 피크 앤 밸리, 굴곡의 협곡을 걸어가는 다리와 같다. 삶의 길 위에 매달린 그 아슬아슬한 다리 위에서 맛 볼 수 있는 달콤한 부표는 바로 감동의 열매다. 그래서 힘들고 지칠 때 퍼져 오는 위로의 열매는 단단한 힘이 되는 충전재가 된다. 하지만 마음을 조련하기란 매우 까다롭다. 감동이 추상적인 언어로 기록되듯 마음 또한 형태를 알 수 없다. 부단히 마음을 수련하는 이유 또한 그것이다. 나는 마음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탐욕이라 본다. 탐욕은 있는 상태를 넘어 선 욕망이 잉태한 부산물이다. 나는 아이를 위해 더 나은 환경, 조건을 바란다. 결국 아이를 위한 수고는 뭉개지고 얄팍한 상술에 뒤엉킨 물욕만 남는다. 이것과 저것의 재고 견주는 시간을 비교 속에 흘려보내고 나면 돌아오는 것은 실망뿐이다. 더 갖지 못 한 것에 대한 불만, 더 누릴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나는 마음이 빚어 낸 이러한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목적이야 어떻든 그 과정을 위해 수단을 구실화해서는 안 된다. 이럴 때, 나는 사소한 감동의 순간을 소환해 내어 마음을 치환하는 길라잡이로 삼는다. 준비 없이 셔터를 누르고 띄워 본 미소가 숨 쉬는 가족사진, 꼬물거리는 손으로 비뚤비뚤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 오는 정성이 가득한 편지, 어디론가 사라진 셔츠의 단추를 어느새 달아 놓은 아내의 손길에서 감동은 춤을 춘다. 비록 나는 감동의 순간을 자주 잊는 망각의 덫에 씌어 있지만 그 순간은 추억이라는 앨범을 통해 퇴색되지 않는 불멸함이 있다. 만약 이러한 모든 사소한 것들이 소멸되어 사라진다면 삶은 의미 없는 순간의 연속이리라.
감동은 마음을 움직이는 그 행위를 위한 선행조건인 배려가 토양이 된다. 배려는 믿음과 사랑을 자양분 삼아 무럭무럭 기쁨과 환희의 순간을, 깊은 감동을 자아 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나를 위해 의심 없이 믿어 줄 가족이 있는 그 자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