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반도의 북쪽 요동땅의 압록강( 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 유역에서 살던 여진족(女眞族)과 조선의 대외관계를 연구한 책입니다.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출판한 책으로 260쪽에 이르는 작은 책입니다.
한국사람들은 아직도 소중화(小中華)의식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만주땅이나 요동지방, 연해주 지방을 포함하는 한반도 북부 스텝지역의 유목민족들에 대해 인종적 편견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중세, 근세사는 물론이고 일제 강점기 당시 만주국에 대한 연구서도 손에 꼽을정도로 적습니다.
하지만 만주땅의 경제개발계획이 이 땅에서 거의 그대로 재현되었고, 구한말에 청나라는 일본과 조선에서 이권다툼을하고 조선의 주권을 유린한 당사자였습니다.
한석정교수님의 ‘만주모던(문학과지성사,2016)’이 박정희 정권에 미친 만주국의 영향을 고찰한 책이라면, 정영숙교수가 쓰신 ‘고종44년의 비원(너머북스,2010)’은 구한말 고종 재위시의 정치사를 총체적으로 개괄한 책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지 못해 청국을 끌어들인 고종의 결정은 결국 당시 청의 북양대신 (北洋大臣)이던 이홍장(李鴻章)과 사실상 중국의 대사자격으로 조선에 주재했던 원세개 (袁世凱)의 노골적인 내정간섭을 초래했고 결국 청일전쟁으로 귀결되는 비극을 맞이합니다.
청을 세운 누르하치(努爾哈赤)는 이책의 마지막 6장에서 소개되는데 압록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건주여진(建州女眞)출신의 정치지도자입니다.
한국학자가 한국어로 저술한 누르하치의 평전은 아직 없습니다. 다만 중국학자가 저술하고 번역된 누르하치의 평전으로 이 책은 대청제국(大淸帝國,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다이칭 구룬) 건국과정을 중심으로 서술된 책입니다.
과문한 지라, 첸제센의 ‘누르하치(돌베개,2015)’이외 다른 누르하치 평전을 본 적은 없네요.
특정 주제보다 통사적으로 청나라의 역사를 서술한 책은 꽤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병자호란 당시 청과 조선에 관련된 저서는 꽤 많아 근세 청과 조선의 정치사, 외교사를 어는데 도움이 됩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내조(來朝)라는 말의 의미부터 되짚어 봅니다. 이말은 외국의 사신(使臣)이 찿아온다는 뜻과 지방에서 신하가 임금을 알현(謁見)하려 조정(朝廷)에 찿아온다는 말도 됩니다.
즉 ‘여진인 내조’라는 뜻은 조선의 북쪽 두만강과 압록강 주변에 사는 여진족들이 조선의 임금을 찿아온다는 의미입니다.
찿아온 목적은 조선으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얻고, 조선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위 목적 중 첫번째 경제적 이익은 조선 조정과 조공무역( 朝貢貿易)을 통해 접경지역에서 찿을 수 없는 물건을 구하고 이를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두번째 목적은 이 책의 주제와도 관련있습니다.
즉, 여진족들은 조선과 독자적인 조공-책봉(朝貢冊封)관계를 통해 조선과 여진족 간에 일정의 천자-제후관계를 형성하고 조선의 영향력 아래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는 말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남쪽에서 쓰시마(對馬島)와 류큐(琉球)와 같은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이들의 내조를 허락했습니다.
이책이 커버하는 조선전기는 명나라의 전성시대로 흔히 동아시아는 전통적인 조공책봉관계에 의거 중화주의의 입장에서 명나라와 다른 오랑캐 국가 ( 조선도 포함)들 간의 단일한 중국중심의 외교관계로만 설명되어왔는데, 사료와 연구는 단일한 조공책봉관계로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은 명과 조공책봉관계를 유지하며 사대를 지속하는 한편으로 북쪽에서는 여진과 남쪽으로는 일본과 류큐와 조공책봉관계를 맺고 소중화로서 중심을 잡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대외관계는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일본의 침공을 받고, 건주여진의 누르하치 세력이 커지고 대청제국이 성립되고 병자호란이 일어나면서 모두 바뀌게 됩니다.
책의 6장은 청이 건국하기 이전 누르하치가 조선이 국경방어를 위해 두만강유역에서 복속해온 여진족 부락인 번호(藩胡)를 어떻게 쇄환 (刷還)하는지의 과정을 설명합니다.
건주여진의 누르하치가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통합시키고 이후 산해관 (山海關)을 넘어 명을 멸망시키게 됩니다.
이전에 소개했던 계승범 교수의 ‘모후의 반역 (역사비평사,2021)’에서 조선이 사대를 하던 명을 버리고 살기위해 병자호란이후 청과 조공책봉관계를 맺었다고 했습니다.
국내정치적으로 집권 서인 세력들은 유일한 천자(天子)로 받들고 책봉을 받아온 명을 버린 것으로 조선왕가의 정통성을 스스로 버린 셈이 되었습니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쿠데타 세력이 광해군을 폐위한 주요 명분중 하나인 배명(背明)을 스스로 저버리는 아이러니에 직면한 것입니다.
좀 더 긴 역사적 기간을 보면 병자호란의 패배로 조선 태조 이래 조선왕실로 내조 (來朝)를 해오던 여진족 오랑캐에게 무릅을 꿇고 이들을 천자로 다시 관계를 맺어야하는 기막힌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중국 천자(명)-조선-여진의 관계에서
여진 천자(청)-조선의 관계로 완전히 상하주종관계가 뒤바뀐겁니다.
이런 상황으로 정당성을 상실한 조선의 근본주의적 성리학(fundamental neo-Confucianism)이 점점 사회를 등한시한 체 사변적으로 변해가게 됩니다.
조선이 여진과 맺어온 조선중심의 ‘조공책봉’관계가 잘 작동하고 별 문제가 없어 한 수 아래로 보던 오랑캐 여진족에게 힘으로 역전당하는 굴욕을 맛보았으니 잘못을 시인할 수도 없고 내부로 침잠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상업과 공업을 천시하고 군사력 향상을 도외시한 성리학이 조선 국력 약화에 일조한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사회구조상 조선의 사대부의 물질적 삶을 노비계급에 의지해야 하는 형편이라 경제적으로도 자생눙력이 없는 계급이 사대부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조선사회를 노예제 사회라고 주장한 미국의 학자도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조선인구의 약 30%가 노비였고 이들이 없으면 사대부들이 책만 읽는 건 불가능했다는 말입니다.
즉 사대부는 명분만 있고 실리는 챙기지 않은 의식구조를 갇진 계급인 겁니다.
따라서 오랜기간 억압받았던 피지배층이 장기적 관점에서 19세기에 일으킨 농민 반란과 서북지역의 민란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