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의 모후(母后)는 임금의 어머니를 뜻하는 말로 이 책에서는 조선의 15대 임금 광해군(光海君)의 계모이자 광해군의 아버지이자 조선 14대 왕 선조(宣祖)의 두번째 왕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제목에 따르면 모후의 반역이라 하는 말은 서궁에 유폐(幽閉)되었던 인목대비의 반격이라는 의미로 즉 인조반정( 仁祖反正)을 의미합니다.

계승범 교수의 이 책은 광해군의 집권 시기를 다루는 정치사로 광해군이 왜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했는지를 밝히고 있으며 굉해군 정권을 쿠데타로 무너뜨린 능양군(인조)의 반정이 17세기 이후 조선후기라고 명명된 기간동안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합니다.

계승범 교수의 이전 저서인 ‘중종의시대(역사비평사,2014)’에 따르면 조선에 왕위찬탈(王位簒奪)로 볼 수 있는 쿠데타는 총 4번으로 첫번째가 조선초 태종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난에 따라 아버지 조선태조 이성계의 왕위를 빼앗은 것이고, 두번째는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 즉 세조의 욍위찬탈입니다.

이 첫 두번의 쿠데타는 태종의 것은 조선 건국초에 일어난 것으로 별 비난을 받지 않았고 세조의 쿠데타는 유교화가 어느정도 지난 상태에서 일어나 지탄의 대상이 된 쿠데타였습니다.

16세기가 들어서 일어난 중종의 쿠데타, 즉 중종반정( 中宗反正)은 폭군 연산군의 왕위를 빼앗은 것으로 연산군의 폭정으로부터 별 무리없이 정상적인 ‘바름으로 돌아간다’는 말에 걸맞게 정당화되었습니다.

15세기까지 양반과 상민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았던 조선사회는 중종당시인 16세기부터 사대부라는 관인계급이 등장하면서 조선은 급속히 유교근본주의 사회로 진화합니다.

하지만 사대부계층은 유교경전만 읽고 주희의 성리학을 절대시 하면서 상업과 공업을 무시하고 군사를 중요하지 않게 생각합니다. 경제적 현실주의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거죠.

거기에 명나라와의 사대(事大)만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며 스스로 명의 번국 (藩國)을 자처해 조선왕들은 권위를 명의 책봉(冊封)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렇게 집권 사대부 계급이 유교 근본주의에 빠져 현실적 생각을 등한시 하던 16세기 말 동아시아를 뒤흔든 국제전쟁인임진왜란이 터지고, 군사적 방비가 전무했던 조선은 왜(倭)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밀리게 됩니다.
무능력하고 소심한 환란을 맞아 조선 땅을 버리고 선조는 중국의 요동(遼東)으로 망명할 생각만 하고 이 와중에 광해군은 세자로 임명됩니다.

명의 책봉도 못 받은체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권력을 일부 이양받아 전란으로 어지러운 나라를 이끌어야 했던 사람이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광해군을 견제했던 선조는 적자를 볼 요량으로 새 장가를 드는데 이 사람이 인목대비입니다.

40년 이상 나이차이가 나던 왕과 왕비 사이에 적자가 태어나는데 선조는 적자가 아닌 광해군에게 보란 듯 젊은 왕비도 둘이고 60이 넘은 나이에 적자를 보게 됩니다.

역사상 보여지는 선조라는 임금은 능력이 없으면서도 권력욕은 강하고 자식인 광해군에게 평생 상처를 주면서도 이를 모르는 무심하고 먼 아버지였던 것 같습니다.

권력 유지를 위해 자신의 어린 이복동생(8세)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강화도에 위리안치( 圍籬安置)시키고 죽게 만들었고 계모인 젊은 어머니를(9세 연하)를 서궁에 유폐시키고 대비(大妃)라는 왕후의 지위에서 강등시켜 어머니 자격을 박탈한 폐모(廢母)론은 이야기 자체가 가지는 폭발력 덕분에 많은 사극의 소재가 되어왔고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광해군과 인조 당시의 조선은 몇가지 눈여겨 볼 대목이 있습니다.

첫째, 광해군이 집착적으로 자신의 왕권에 위협을 가할 수 밖에 없는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할 수 없었던 것은 적장자가 아닌 광해군이 임진왜란이라는 환란의 시기를 지나고 불안정한 조선에서 상황에 떠밀려 왕이 된 이유가 크고, 조선 왕으로는 드물게 명으로부터 세자 책봉을 받지 못한체 왕이 된 첫 케이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왕권이 불안정하다는 걸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고 광해군은 불안정한 왕위를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습니다.

두번째, 성리학의 관점에서 역모를 모의한 경우 비록 부모라 하더라도 역적으로 처벌이 가능하다고 인정되어 왔으나 조선의 경우 인조반정을 계기로 부모에 대한 효가 나라에 대한 충을 앞선다는 경직적 성리학 근본주의가 자리잡는 계기가 됩니다.

성리학에서 볼때 충과 효 중 어느 가치가 더 중요한지 논쟁할 수 있는 대상이었으나 인조반정을 계기로 조선에서 효는 충을 뛰어넘는 절대 가치로 교조화하고 이는 조선후기를 규정짓는 경직적인 성리학 근본주의로 귀결됩니다.

셋째, 따라서 필연적으로 성리학은 효에 우선순위를 둠으로서 더 철학적 사변적 심리적인 면을 강조하게 되고 나라의 운영을 포함하는 좀 더 사회적인 의미의 충이 우선시되지 않아 군주권이 신권에 밀리며 조선 말 세도정치를 비롯한 각종 폐단을 가지고 오게 됩니다.
그 시작이 인조반정입니다.

넷째, 광해군의 배명(背明)적 외교정책과 인목대비 서궁유폐를 말하는 폐모(廢母)를 명분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조는 병자호란에서 청에게 패해 청에게 사대를 하게 되면서 광해군을 공격했던 배명의 명분을 잃게 됩니다.

성리학 근본주의가 인간의 내면 수양을 중시하고 현실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는데다 상업과 군사를 무시하기 때문에 군대양성을 소홀히 하는데다 몰역사적이고 비현실적이게도 오로지 명나라 황제만을 천자(天子) 로 인식하는 경직적 사고를 가지고 있어 기마부대가 우수한 유목민족 출신인 청의 현실적 힘을 애써 무시한 것도 병자호란에서 패배하게 된 원인으로 생각됩니다.

현실적 외교와 군사력 강화가 근본주의적 성리학적 사고 앞에는 불가능했고 필연적 결과를 삼전도에서 항복하면서 인식하게 된 겁니다.

명을 배반하고 청과 화친했다고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해버린 서인을 비롯한 척화파 세력들은 병자호란에서 져 ‘오랑캐’인 청국에게 항복하고 살기 위해 군신관계를 맺어 광해군이 행한 배명보다 훨씬 더한 배명을 행하게 됩니다

다섯째, 그 결과 배명은 사라지고 폐모만 남아 광해군은 어머니를 폐한 천륜을 저버린 군주로 남게되고 사대의 대상인 명이 멸망한 후애도 명에 대한 사대를 계속하는 조선중화주의 혹은 소중화주의라는 지극히 ‘분열적인’사대의식이 조선에 남게 됩니다.

충격적이게도 명에 대한 사대의식은 19세기 말 고종 때까지 이어졌는데 이해하기가 어려운 현상입니다.

명을 배반하지 않는 제후국이라는 자기 최면하에 멸망한 지 200년이 넘은 나라를 위해 의식을 치루고 중국 한족이 보기에 동쪽 오랑캐중 한 나라인데도 스스로 ‘소중화’로 여기고 있고, 청과 다시 책봉관계를 유지하는 상황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조선 사대부 스스로 청의 만주족들이 ‘오랑캐’라고 여기면서도 현실적 필요에 의해 사대와 책봉관계를 유지하고 거기다 다시 망한 명에 대한 의례를 200년 넘게 지속하고. 얼마나 이율 배반적인 나라인지 모르겠습니다.

조선 전기와 중기 정치를 읽기 전에는 몰랐는데, 조선의 성리학적 근본주의 그중에서도 인조반정 이후 조선후기 버전은 조선의 역사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은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천륜(天倫)이라고 주장하면서 왕권보다 신권을 우선하며 국가의 녹을 먹으면서도 국가에 대한 충의(忠義)는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본인은 일 안하고 책만 읽고 일은 모두 노비가 하고, 즉 노비가 없으면 경제적 기반을 만들 수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노비의 수는 계속 늘어가게 되는 상황을 방치하고, 노비는 국방의 의무가 없기 때문에 군사력도 계속 감소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사대부 수가 늘어날수록 노비 수가 늘어나고 군사력은 약화될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가 만들어 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세력들과 그후예들이 병자호란을 거치며 자신들의 거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들이 저지른 ‘배명’을 숨기고 광해군을 희생양 삼아 인목대비의 폐모를 더욱 강조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충과 효라는 두 중요한 가치에서 효를 더욱 절대화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효가 충보다 중요해지면서 군신관계가 약화되고 왕권이 약화되어 조선후기는 신권정치로 점철됩니다.

사변적 성리학이 성행하고 스승으로서의 군주상이 요구되고 이에 부합하는 걸로 알려진 성리학 군주 정조이후 학자적 자질이 정조보다 떨어지는 군주들이 등장하자 조선의 정치는 외척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됩니다.

주자의 성리학이 최초의 유학에 비해 근본주의자이지만 충과 효라는 두 가치가 서로 상보적이고 경쟁적이며 군주의 통치에 있어 충이 효을 앞설 수 있는 것인데도 조선에서 17세기 인조반정이후 효는 반정 세력이 생존의 필요에 의해 경직적 성리학을 추구하게 되고 누구도 효가 충을 앞선다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 수 없게 됩니다.

끝으로 이책의 장점을 몇가지 말하고자 합니다.

첫째, 실증적 근거에 제시해 주장을 전개합니다.

둘째, 조선의 사료뿐만 아니라 중국측 사료까지 같이 설명하기 때문에 조선과 명과의 책봉관계를 좀더 면밀하게 재구성할 수 있으며 인목대비 폐위 논쟁에 대한 중국의 전거를 따로 정리해서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셋째, 이전의 연구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비평하며 구체적인 연구와 주제를 정합니다.

넷째, 인목대비의 서궁유폐에 대한 당시 정치적 역학관계를 대해 종합적으로 저술한 첫 한국어 연구서입니다.

인조반정의 직접적 원인 중 하나인데도 여태 독립된 주제로 연구가 되지 않았다는 건 충격적입니다.


다섯째, 조선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당시 중국의 나라인 명과 청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중국의 경우 조선 당시만이 아니라 사서와 당시 사대부들이 인용한 경전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고 경전이해를 위해 필수적으로 춘추전국시대에 대한 이해도 필요합니다.

중세 근세사에 있어 중국의 영향력은 절대적입니다. 중국의 역사와 유교에 대한 이해없이 조선은 이해가 불가능한 과거입니다.

근래 중국을 무시하고 폄하하는 일부 목소리는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미국과 길게 잡아야 1860년대부터 교류를 시작했다면 중국과의 교류역사는 그 수십배에 달하는 긴 기간입니다. 수천년을 헤아립니다. 조선만 따져도 500년 입니다.

한국은 중국을 단순히 최대 교역상대국이라는 표면만 볼 입장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몰역사적인 시각을 가진 것이 분명한 집권층의 시각을 자주접하게 되어서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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