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다. 겨울에 맞는 시, 뭐가 있을까 하다가 오래 전에 읽었던 정대구의 이 시집을 꺼내들었다.

 

인간의 기억은 한계가 있어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참으로 가물가물한 시집이다. 분명히 읽었을텐데... 시란 이렇게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쉬워하지 않는다. 분명 내 마음 속 어딘가에, 또는 내 몸 어딘가에 살아있을테니.

 

이 시집을 꺼낸 이유는 제목 때문이다. "겨울기도" 지금은 겨울.

 

계절만이 아니라 우리네 삶 역시 겨울.

 

겨울임에도 황사가, 미세먼지가... 우리를 습격하고... 경제는 더욱 어려워진다고 난리고... 노동자들은 힘든 삶을 보내고... 시민단체들은 제 역할을 못하고... 남과 북은 여전히 경색국면이고...

 

이럴 때 경건하게 기도를 하지 않겠는가. 겨울에는 이 겨울을 잘 보내게 해달라고. 이 겨울을 이겨내고 움트는 봄을 맞이하게 해달라고. 이 시집의 제목이 된 '겨울 기도'처럼 힘듦은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힘듦이 비켜가기를...

 

힘든 계절, 힘든 시대...기도를 통해... 행동으로 나아가는 힘을 얻게 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추위가 봄을 더욱 즐겁게 맞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런 기분으로 시집을 꺼내들었는데...

 

오래된 시집이다. 오래된 시들이다. 어렵지 않게 읽히는 시들이다. 그럼에도 생각할 수 있는 시들이 여러 편 있다. 시란, 시대가 흘러가도 언제나 시대와 함께 하는, 그 시대에 맞게 재해석 될 수 있는 그런 존재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여기서 발견한 시. '워키토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이제는 사라진 물건이라고 해야 하나. 한 때 이것을 지니고 멀리 있는 사람과 무전기 놀이를 할 수 있었던 그런 물건.

 

이 워키토키에서 소통을 생각하게 된다. 소통은 서로 믿음이 있어야 이루어질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소통이 그리운 시대...

 

이렇게 소통이 되는 상황이 우리에게 온다면 그야말로 봄이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예로부터 시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많이들 꿈꾸어 왔으니... 

 

워키토키

 

이쪽은 자유의 마을, 그쪽 나와라 - 오버

이쪽은 평화의 마을, 왜 그러냐 - 오버

 

지금 말잠자리 한 마리 철조망을 넘어 그쪽으로 날아간다 - 오버

지금 고추잠자리 한 마리 역시 철조망을 넘어 그쪽으로 날아간다 - 오버

이쪽 하늘엔 구름이 한가롭다 - 오버

이쪽 하늘에도 구름이 한가롭다 - 오버

 

휴전선 일대의 하늘엔

우리말 워키토키의 전파가 무성하고

땅 속의 풀뿌리들도

저희끼리 왕성하게 뒤엉키는구나.

 

남남북녀 이쪽에 미끈한 총각 있다 - 오버

남남북녀 이쪽엔 어여쁜 처녀 있다 - 오버

 

새 소리 바람 소리 이쪽저쪽 넘나들며 짝을 맺고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 똑같은 우리 말

우리들의 자유만, 우리들의 평화만

철조망에 얽혀서 찢어지는가.

 

이쪽을 겨눈 그쪽의 총부리

그쪽을 겨눈 이쪽의 총부리.

 

정대구, 겨울기도. 문학과지성사. 1987년 초판 4쇄. 14-15쪽.

 

이렇게 봄이 왔으면 좋겠다.

 

이 시를 보는 순간 신동엽의 시가 생각이 났다. 신동엽은 꿈을 꾸었다고 했지. 또 그는 "봄은"이라는 시에서 봄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닌, 우리들의 내부에서 우리들이 맞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가 꾼 꿈은 이렇다.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

                                       - 신동엽

 

술을 믾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

자다가 재미난 꿈을 꾸었지.

 

나비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다가

발 아래 아시아의 반도

삼면에 흰 물거품 철썩이는

아름다운 반도를 보았지.

 

그 반도의 허리, 개성에서

금강산 이르는 중심부엔 폭 십리의

완충지대, 이른바 북쪽 권력도

남쪽 권력도 아니 미친다는

평화로운 논밭.

 

술을 많이 마시고 난 어제밤은

자다가 참

재미난 꿈을 꾸었어.

 

그 중립지대가

요술을 부리데.

 

너구리새끼 사람새끼 곰새끼 노루새끼들

발가벗고 뛰어노는 폭 십리의 중립지대가

점점 팽창되는데,

그 평화지대 양쪽에서

총부리 마주 겨누고 있던

탱크들이 일백팔십도 뒤로 돌데.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

물방게처럼

한 떼는 서귀포 밖

한 떼는 두만강 밖

거기서 제각기 바깥 하늘 향해

총칼을 내던져 버리데.

 

꽃피는 반도는

남에서 북쪽 끝까지

완충지대,

그 모오든 쇠붙이는 말끔이 씻겨가고

사랑 뜨는 반도,

황금이삭 타작하는 순이네 마을 돌이네 마을마다

높이높이 중립의 분수는

나부끼데.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 자면서 허망하게 우스운 꿈만 꾸었지.

 

신동엽, 신동엽 전집. 창작과비평사. 1985년 3판. 76쪽.

 

이런 꿈을 꾸고 싶다. 아니 꿈이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평화가 바로 우리들의 봄일텐데...

남과 북에서만 아니라, 우리 사회 모두에서 이렇게 껍데기들이 사라진 세상, 서로가 서로 소통이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이 곧 봄이다.

 

지금은 겨울. 이런 봄을 꿈꾸는 기도를 해본다.

 

봄은 온다. 겨울은 간다. 그것이 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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