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하기 위하여 송년회란 이름으로 술어 절어 산 나날들이다. 술에 젖어드는 만큼 세월의 무게가 나를 짓누른다. 그리고 세상의 습기가 나에게 스며든다. 술과 세월과 세상과 나이가 한꺼번에 나에게 다가온다. 무겁다.

 

이 삶의 무게는 정말 도도하다. 도저히 나에게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그럼에도 나는 낙타처럼 이 무게들을 지고 간다. 아직은 쓰러지지 않았으므로. 쓰러질 수 없으므로. 나에게는 이 짐들을 지고도 가야 할 길이 있으므로. 

 

가끔 오아시스를 그리워한다. 오아시스를 찾는다. 잠시 목이라도 축이게. 몸이라도 쉬게. 짐을 잠깐 동안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게. 앞만 보고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 볼 수 있게. 그리고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게.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상태에서 책장을 기웃거린다. 며칠 동안 읽었던 바우만의 책들이 더 삶의 무게를 더해주고 있기에.. 그런 분석에서 내 삶도, 우리들의 삶도 자꾸 '부수적 피해' 쪽으로, '밑바닥 계급' 쪽으로 가고 있기에.

 

최장기간 파업이라는 기록을 세웠던 철도노조 파업이 막을 내렸다. 노동자들이 얻은 것이 무엇일지. 과연 민영화라는 이름의 사영화(私營化)가 막아질지 그것은 지켜볼 일이지만, 파업 내내 마음을 졸였던 노동자들. 또 앞으로 그들에게 발부된 체포영장, 구속영장 등은 더 많은 짐을 지우게 될텐데...

 

즐거운, 밝은 내용의 시로 시작을 해야 하는데... 한 해 우리는 우리네 삶을 이 시로 표현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정말로 사냥꾼에 몰린 사냥감이 된 해라고 해야 하나.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게는 사냥꾼이겠지만, 이 시에서 보듯이 인간은 인간에게 더 무서운 사냥꾼이 된다. 약자들은 세계화 시대에,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유란 이름으로, 자본이라는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에 의해 사냥감으로 전락한다.

 

현실을 직시하자. 그래야 벗어날 길이 보인다. 슬프지만...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시.

 

사냥꾼

- 이희중

 

벌레의 집으로 옷을 짓고

꽃으로 베를 짜며 짐승의 살갗을 뺏어 입는다

식물의 시체 썩은 검은 물을 태워 수레를 굴리고

돌을 녹여 생각 없는 무서운 짐승과

그의 이빨을 만든다 흙을 박제한 후

의자에 의지하고 제 비린내를 강물에 씻어

세상을 더럽힌다 그리고 직설적으로

더 상징적으로 동족을 사냥한다

 

안도현 엮음, 바람난 살구꽃처럼, 현대문학북스. 2002년 1판. 22쪽

 

그래. 인정하자. 작년 한 해는 이러한 사냥꾼들이 득세를 한 해였다. 사냥꾼들에게 우리는 마냥 쫓기고만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쫓기고만 있었을까? 아니다. 분노도 했다. 광범위한 분노. 그러나 그 분노는 결코 그릇을 넘지 못했다. 그릇 안에서만 부글부글 끓고 있었을 뿐이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는 외침은 외침으로만 끝나고.. 우리는 우리의 분노를 그릇 안으로, 그릇 안으로만 삭여내고 있었다. 세상에... 분노할 일에 분노해야 하는데...우리는 단순한 '원민'이 아닌데... 분노도 못 하는 '항민'이 아닌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호민'이 되어야 하는데...

 

이 시집에서 이 시가 내 맘에 꽂힌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의 내용은 바로 내 얘기이기도 했으므로.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했으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짐 지운 자들에게 분노하고, 끓어오르기도 했지만, 그것이 겨우 그릇 안에서만 그랬으므로. 이제는 넘쳐야 한다. 끓어 넘쳐야 한다. 뜨거움을 보여주어야 한다. 

 

물이 끓어서 그릇 밖으로 넘쳐 나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끓을 뿐이다. 사라져갈 뿐이다. 이제는 정당한 분노는 제대로 끓어오르게 해야 한다. 뜨거움이 번지게 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 분노다. 진짜 끓어오름이다.

 

                      물 끓이기

          - 정양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혈식(血食)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 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 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늘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호랑이든 구렁이든 미친 개든 말단이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 놓고 넘치고 싶은 물이 끓는다

 

                                  안도현 엮음, 바람난 살구꽃처럼, 현대문학북스. 2002년 1판. 56-57쪽

 

새해에는 '끓어오른 놈만 미쳐보이는, 열받는 사람만 쑥스러운' 모습으로 남지 않고,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아름다운 세상'이 되도록 해야지. 그래서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 놓고 넘치'는 물이 되도록 해야지.

 

아름다운 시어들이, 세상을 밝고 명랑하게 보는 시로 시작하지 않고, 이런 시로 시작한 아름다움.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하여 한 해를 되돌아보고, 새해를 다짐하는 시가 내게는 바로 이런 시가 된다.

 

시가 다시 내게로 다가왔다. 내 삶 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고맙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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