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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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경기에서 승부차기를 없애자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승부차기에 나서는 선수들에게 너무도 큰 불안감을 준다는 이유에서다.

 

마찬가지로 페널티킥을 얻어 차는 선수 역시 엄청난 중압감을 느낀다. 골키퍼는 막으면 대단하다고 칭찬을 받고, 막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는 소리를 듣는 반면에 차는 선수는 골을 넣으면 당연한 일이고, 넣지 못하면 그것도 못 넣느냐는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페널티킥 앞에서 누가 더 불안을 느끼겠는가. 골키퍼가 아니라 차는 선수여야 한다. 그런데... 제목은 반대다. 불안을 느끼는 것은 골키퍼다. 왜 그럴까? 주인공이 골키퍼 출신이어서?

 

아니다. 골키퍼는 지켜야 하는 사람이다. 무언가를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을 잃을까 봐 불안에 떤다. 삶에서 지킬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은 행복이기도 하지만 불안이기도 하다.

 

그 점을 골키퍼에 비유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주인공은 블로흐는 골키퍼 출신으로 어느 날 직장을 그만둔다. 이상하게 현장감독이 해고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는 지레 짐작으로 직장을 그만둔다.

 

현장감독이 아무 소리 안 한 것을 해고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대와 소통을 하지 않고, 자신이 판단해 버리는 것, 그것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들이 하는 일이다.

 

차는 선수와 골키퍼, 이들은 서로를 속여야 한다. 서로가 소통이 되면 안 된다. 그래서 서로 지레짐작으로 이러겠거니, 저러겠거니 하지만 상대에게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알리지 않는다.

 

어쩌면 삶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한다. 블로흐가 직장을 그만두는 순간도 소통의 부재이지만, 그가 직장을 그만두고 난 다음에도 그는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는다.

 

극장 매표원과 하룻밤을 자지만, 그녀를 죽여버리고, 죽였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그는 사람들 누구하고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다. 국경 근처 마을까지 가서도 그는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한다. 그는 문장을 생각해 내고 완성하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문장을 완성한다는 것, 그것은 소통을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자신이 있는 모든 곳에서 사람들과 제대로 관계를 맺지 못한다. 소통을 하지 못한다. 이들과 나누는 대화는 자꾸만 어긋날 뿐이고, 그의 행동 역시 제대로 되지 못한다.

 

술집에서의 싸움, 자꾸만 어긋나는 통화, 그리고 대화... 이런 관계들... 소외된 현대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런 모습은 비극이 될 수밖에 없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라고 하지만, 이제 블로흐에게는 지켜야 할 무엇이 없다. 지켜야 할 것이 없으니, 상대의 의도를 읽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 의도를 읽으려 하지 않으면 소통이 될 수 없다. 그것이 살인으로 나타나고 도피생활을 하면서도 누구와도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하는 블로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는 블로흐.

 

이렇게 소통이 안 되는, 최소한 지킬 것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사회 속에서도 겉돌게 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고...

 

결국 우리는 소통을 해야 한다. 문장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생각을 완성된 말로 남에게 전달하는 것 아닌가. 이런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는 블로흐가 아니라, 문장을 완성하는 우리들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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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6 09: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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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6 10: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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