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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ㅣ 환상문학전집 34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0월
평점 :
참 마음에 와닿는 말이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이라는 말. 숲이 없으면 세상도 없다. 지구가 지닌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가? 다른 SF소설들에서도 지구는 푸른색과 동격으로 나온다. 즉 지구는 푸르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행성이다. 그리고 지구를 푸르게 하는 두 요소는 바다와 숲이다. 바다와 숲이 없으면 이 지구에 과연 생명체들이 살 수 있을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종족들을 애스시인이라고 하는데, 애스는 어스(earth)이고, 시(sea)는 바다니, 땅과 바다, 즉 숲과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종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종족들에게서 숲을 파괴하려고 하는 지구인들은 그들의 삶을 없애려 온 외계 종족일 뿐이다.
이를 우리 지구로 가져와 이야기한다면 원주민 또는 선주민들이 잘살고 있던 곳에 들어온 이주민들이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선주민들에게 강요해서 선주민들이 살아가는 터전을 파괴하는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이 자자손손 살아왔던 터전을 파괴당한다면 가만히 있어야 할까? 그들에게는 같은 종족을 죽이는 법이 없었다고, 살인의 방식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침략자들에게 그냥 순종해야 할까?
이런 순종적인 종족에게 전쟁을, 폭력을, 살인을, 강간을 가르친 이주민들, 외계 종족들은 그들이 자신들에게는 그런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소설에서 애스시 종족인 셀버는 지구인인 데이비드슨에게 아내가 강간당하고 죽임을 당하자 복수에 나선다.
복수는 피에는 피로 대응하는 방식. 셀버를 구해주고, 그와 함께 했던 류보프는 이들 종족이 평화적이라고 믿고 있었으나, 어느 순간 셀버를 중심으로 애스시 종족은 지구인들을 공격한다. 그것도 가차없이.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특히 여자들을.
전쟁에서 피해를 입는 집단이 주로 여성과 아이들인데, 평화를 유지했던 종족이 전쟁을 하면서 여자들을 한 명도 살려두지 않는 이유는 너무도 명확하다. 이들로 인해서 지구인들이 이 행성에서 자손을 남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평화의 선을 넘어 전쟁으로 나아갔고, 거기에는 어떤 자비도 없다.
왜 평화로운 종족이 이렇게 변할까? 바로 이들을 이끄는 신적인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신적인 존재 역할을 셀버가 하는데, 그는 통역자라는 말로 번역이 된다. 통역. 이는 다른 세계와 이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존재이자, 바꾸는 존재라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통역자는 신이다.
그는(셀버) 환영의 중심적인 체험을 각성해 있는 삶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이다. 두 실재란 애스시 인이 동등하게 여기는 꿈 시간과 세계시간으로서 둘의 관계는 긴밀하지만 분명치가 않았다. 연결 고리, 다시 말해 무의식이 지각하는 것을 소리 내어 말할 수 있는 사람, 언어를 '말하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다. 바꾸거나 바뀌는 것이다. 근본으로부터 철저히. 근본은 꿈이다.
그래서 통역자는 신이다. 셀버는 새로운 단어를 그의 사람들의 언어 속에 들여왔다. 그는 새로운 행위를 해내었다. 살해라는 단어, 그 행위를. (111쪽)
이런 셀버로 인해 그들은 전쟁을 한다. 살인을 저지른다. 이제 이들에게는 새로운 말, 새로운 행동이 도입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들이 지녀왔던 문화를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 그들을 도발하지 않으면 먼저 공격을 하지는 않는다. 다만, 데이비드슨이 상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이들을 공격했기에 이들은 데이비드슨의 기지를 공격해서 그들을 몰살시킨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항복을 하는 적을 죽이지 않는, 즉 살려달라는 표시를 하는 상대는 죽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살려달라는 표시를 할 줄 아는 지구인은 거의 없다.
셀버와 함께 지내고 애스시 종족의 문화를 어느 정도는 아는 류보프는 알고 있고, 그로 인해서 데이비드슨 역시 그 방식을 알고는 있다. 이로 인해 그는 목숨을 건지게 되지만, 그에게는 우리나라 전통에 의하면 유배라는 형식의 처벌이 남겨져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롭게 전개된다. 지구인들이 떠날까? 과연 이 행성에 평화는 올까? 선주민들이 원시적인 무기로 최첨단 무기를 지닌 지구인들을 이길 수 있을까? 소설과 현실은 다르니, 소설 속에서는 이들 선주민들이 제 행성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미 전쟁을 겪은 그들은 과거 그들과 같을 수가 없다. 씁쓸한 진실이 여기에 있다.
선주민들이 이주민을 물리쳐도 그들이 그 과정에서 겪은 일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경험으로 인해 그들은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게 바로 이주민들이 선주민들을 억압하고 지배하려 했을 때 일어나는 부작용이다. 그들이 저지른 해악이다. 그들은 선주민들의 현재를 힘들게 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미래를 바꿔놓기 때문이다.
이 점이 무섭도록 이 소설에 잘 표현되어 있다. 셀버의 마직막 말이 마음을 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류보프는 여기 있을 거예요. 데이비드슨도 여기 있을 겁니다. 두 사람 다. 내가 죽은 후 사람들은 내가 태어나기 전이나, 당신들이 오기 전 모습대로일지 모르죠. 하지만 내 생각엔 그럴 것 같지 않네요." (173쪽)
무섭다. 선주민에 대한 이해없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그들을 대하는 이주민들의 태도는 이렇게 미래까지도 바꿔놓기 때문이다. 결코 그들은 과거의 그들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그러니 더 조심해야 한다. 다른 문화를 만났을 때는.
르 귄의 소설이 대부분 그렇듯이 서로 다른 종족들이 만나서 갈등하고 융합하는 과정이 이 소설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물론 이 소설에서는 이 행성에서 지구인들이 완전히 물러나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이 행성에 지구인이 오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미 한번 알려진 행성은 어떻게든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때의 연결이 폭력이 아니라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융합으로 나아가야 함을 이 소설은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다른 종족과의 만남뿐만이 아니라, 지금 지구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벌목 현장들을 보라. 이소설에서 지구에서도 숲이 사라졌기에 이 행성에서 나무를 벌목해 가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는데, 70년대에 나온 소설에서 벌목의 위험성, 숲이 사라지면 인간 세상도 존재하기 힘듦을 이미 보여주고 있는데도, 여전히 숲이 계속 사라지고 있는 이 현실이...
다른 행성, 다른 종족들의 갈등과 해결로 이 소설을 읽어도 좋지만, 지금 지구에서 숲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에 대한 비유로 이 소설을 읽어도 좋겠다. 50년 전에 쓰인 소설이 지금도 유효하다니... 그리고 이 소설 제목이 아직도 이렇게 큰 울림을 주다니...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이라는 이 말. 마음에 새겨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