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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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살아가면서 선택해야 할 때가 많다. 그 선택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진다. 어떤 때는 내가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이상하게도 알 수 없는 무엇에 선택당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것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한다. 운명에 거스를 수 없었다는 말을 하는데... 그러나 그 운명조차도 자신의 선택으로 일어난 일임을, 자신이 선택해야 할 그때그때 한 선택들이 모여 운명을 결정했음을, 따라서 자기 운명의 책임자 역시 자신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 소설은 마법을 빌려 이 점을 말해주고 있다. 재혼한 가정에서 흔히 우리가 동화에서 봄직한 차별을 겪는 소년이 탈출을 한다. (이 소설을 재혼 가정이 겪는 그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그 흔한 갈등으로만 파악하면 안 된다. 이런 상황은 주인공이 자신이 겪은 일에서 도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게 하기 위한 배경일 뿐이다.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가 찾아간 곳은 평소에 자주 들러 빵을 사던 위저드 베이커리.

 

마법사의 빵 정도 되는 이름을 지닌 곳, 그곳에서는 진짜 마법사가 살고 있고, 그는 마법의 빵을 인터넷으로 판매하고 있다. 온갖 주술이 담겨 있는 빵을.

 

그러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이런 문구가 실려 있다고 한다.

 

'긍정이나 부정, 자기가 바라던 어느 쪽의 변화든 간에 이것은 물질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계의 질서에 변화를 일으키는 일입니다. 따라서 모든 마법의 이용 시 그 힘이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하십시오.' (63쪽)

 

'모든 마법은 자기에게 그 대가가 돌아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자신의 행위로 인한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는 분만 가입하시기 바랍니다.' (63쪽)

 

이 빵가게에 의탁해 피신해 있던 주인공이 홈페이지 관리 일을 하면서 보게 된 내용이다. 그리고 이 내용이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이 아닌가 한다.

 

책임, 어떤 형태로든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최종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 남에게 어떤 행동변화를 유발하려고 하는데, 자신의 힘이 아닌 다른 힘을 빌려오면 그것은 우주의 평형을 깨는 일이라는 것. 즉 그만큼 다른 존재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 따라서 신중을 기해야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어린 여자아이 성추행 혐의를 받아 도앙쳐 온 주인공, 그가 이 빵집에서 겪는 일들로 그는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집으로 돌아간다. 이는 자신의 일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것, 자기 일에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는 것이다. 그만큼 빵가게에서 지내면서 주인공이 성장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주인공은 고전소설의 여느 인물들처럼 영웅적인 모습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그냥 우리처럼 고민하고 갈등하고 두려움에 떠는 인물이지만, 그래도 자기 일을 정면으로 보겠다는 의지를 지닌 인물일 뿐이다.

 

그에게 마법사는 선물을 준다. 그 선물을 이용하느냐 마느냐는 주인공이 선택할 일이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도 주인공의 몫이다.

 

여기서 소설이 그쳐도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뒤를 독자들이 상상하게 하는 것도 좋았을 거라는 것.

 

그래도 소설은 열린 결말을 추구하고 있다. Y의 경우와 N의 경우로 나누어 전개한다. 마법사의 선물을 먹었을 때와 먹지 못했을 때...

 

둘 다 우리에게 행복한 결말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주인공이 자기 삶을 책임지는 모습은 보여주고 있다. 어떤 선택이든 주인공은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실이다. 이 소설의 장점, 결코 우리를 환상의 세계에 갇혀 있게 하지 않는다. 비록 마법은 비현실적이만 주인공이 겪는 일, 그가 선택한 일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다만, 전자의 경우는 기억을 잃고 살아가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기억을 하면서 이겨나가는 것이다.

 

어떤 쪽이 더 좋을까?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다만, 한 가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모든 존재들이 얽혀 있기에 내 일이 나만의 일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일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임의로 고치려는 것은 다른 존재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것.

 

그 점을 생각해 보라는 것,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말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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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백한다 - 정도전 암살 미스터리
이재운 지음 / 예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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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선 건국의 공신, 그러나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혁명가. 왕보다는 신하의 권리를 더 주장한 사람, 그래서 왕권과 신권의 대립 속에서 왕권 강화를 위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던 사람.

 

조선의 기초를 다진 사람, 지금도 그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는데, 특히 경복궁에는 그가 지은 이름들이 남아 그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으니, 그는 자신의 사상을 한 나라의 기본 사상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그에 대한 평가와는 상관없이.

 

어쩌면 그는 그 먼 과거에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고 할 수 있는 정치가이기도 하다. 왕 하나에 어떻게 나라를 다 맡길 수 있느냐고, 현명한 신하들이 정치를 주로 하고, 왕은 나라를 대표하면 된다는, 신하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해야 한다는 신권(臣權)을 주장한 것은 지금에서 보면 입헌군주제를 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헌군주제는 유럽의 여러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는 정치제도이기도 하고.

 

그러나 그는 시대를 너무 앞서 태어났다. 중세 시대에, 그것도 왕이 다스리지 않는 나라를 꿈꾸지 못하던 시대에 신하의 권리, 신하 중심의 정치를 주장한 그가 용납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특히 자기들이 나라를 세웠다고 생각하는 세력들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그러니 태종 이방원에게 정도전은 눈엣가시였을테고, 어떻게든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제거되어야만 했을 대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제거되었다.

 

그 다음 태종이 얼마나 왕권을 강화했는지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정도전은 역적죄로 죽어야 했다. 역적죄란 무엇인가? 삼족을 멸한다는 죄이다. 직계 가족은 물론이고 방계 친족들도 피해를 입어야 하는 죄다.

 

여기서 소설은 출발한다. 정도전 아들의 관점에서. 이상하지 않는가. 역적죄로 죽었을텐데, 정도전 아들의 관점이라니... 정도전 아들이 살아있어? 어떻게? 이런 의문에서 소설이 출발한다.

 

신기하게도 정도전의 아들은 정도전이 죽은 지 16년이 지나서 복권이 된다. 그리고 그는 세종 때에는 높은 벼슬 (형조 판서- 요즘 말로 하면 법무부 장관쯤 된다)까지 하게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게 바로 역사소설의 묘미다. 재미다. 역사에서 비어 있는 한 틈을 찾아 그 틈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우는 것. 그것도 참으로 사실적으로.

 

소설은 정도전을 명나라와 조선의 세력 다툼 사이에 낀 희생양으로 만들고 있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이 명나라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조선을 꼽고, 그 중에서도 정도전을 가장 위험한 인물로 지목하고 제거하려고 했다는 것.

 

여기에 지나치게 신권이 커지자 불안감을 느끼고, 또 조선의 건국에 아무런 공이 없는 배다른 아우 방석이 세자가 되자 불만을 가진 이방원이 주원장과 결탁하여 조선의 안정과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정도전을 제거한다는 내용.

 

정도전을 제거하되, 정도전의 사상이 나라 통치의 방향과는 맞기 때문에 그가 제시한 정책들을 따르겠다고, 자손들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겠다고 정도전에게 약속을 한다는 그런 내용.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빈 틈을 이런 상상력으로 채워나가고 있는 소설이다. 그렇다. 정도전의 자손들이 어떻게, 그것도 큰아들이 정도전이 그렇게 죽어갔음에도 중용되어 벼슬을 했는지 의문이었는데, 이 의문을 상상력으로 채워넣었으니...

 

아들의 관점에서 내용이 전개되고 또 소설이 긴박하게 전개되고, 문장도 잘 읽혀서 읽는데 문제가 없는 소설이다. 재미도 있고, 역사의 빈 틈을 메우려는 상상도 해볼 수 있고.

 

다만, 이 소설에 나온 내용을 사실(史實, 事實)로만 믿어서는 안 된다는 점. 역사소설은 역사보다는 '소설'에 더 강조점을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읽으면 읽는 재미가 쏠쏠한 소설이다.

 

내가 읽은 소설은 옛날 판이라 절판이 되었고, 새로운 제목으로 책이 다시 나왔던데... 제목을 살펴보니 내용이 그리 대폭 수정이 된 것 같지는 않고.

 

새로운 제목은 "칼에 베인 용" (책이 있는 마을, 2015년)이다.

 

덧글

 

읽으면서 좀 거슬렸던 장면이 몇 있는데...

 

우선 하나는 아들인 정진이 복수를 다짐하면서 춘추전국시대의 오자서(오원) 예를 들면서 오자서에게는 부차와 손무가 있었다고 하는데... 오자서에게는 오왕 부차가 아니라 합려 아닌가. 부차에게서 죽음을 명령받은 게 오자서일텐데... (170쪽 등)

 

또 하나는 장량이 항우를 황제로 만들었다고, 정도전을 장량에 이성계를 항우에 비기는 대사가 나오는데, 장량은 항우가 아니라 유방을 황제로 만들었다. (181쪽)

 

개정판에서는 고쳐졌을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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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풀꽃도 꽃이다 - 전2권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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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이름만으로도 자신의 작품을 다른 사람이 읽게 만들 수 있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조정래일 것이다.

 

어떤 프로그램에 나와 그는 말했다. 자신은 아직도 원고지에 손으로 글을 써서 넘긴다고. 이름 없는 작가들이 이렇게 했다간 원고를 퇴짜 맞을 가능성이 아주 많지만, 자신에게는 어쩔 수 없다고. 작가로서의 자부심과 조정래라는 작가가 우리나라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잘 알 수 있는 말이었다.

 

대형작가,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이름보다는 우리나라 현실을 소설 속에서 재현해내고, 그것을 통해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한 작가, 어쩌면 그는 예전의 작품인 "태백산맥"의 작가로 단번에 그 자리를 차지했고, 그 이후의 소설들을 통해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그가, 일제시대, 6.25, 독재시절 개발시대 등을 소설에 담아 내었다면, 다음 소설은 자연스레 교육 문제일 수밖에 없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교육 문제에 관심을 지니지 않을 수 없을테고, 교육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지금 경제 문제와 더불어 너무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망국론이 나온 지 오래고, 그렇지만 변하려는 몸부림이 도처에서 있었지만 변한 것이 잘 보이지 않는 교육. 교육의 효과가 당장 나타나지 않고 참으로 더디게 나타난다고 해도, 대안학교 붐이 일었던 것이 1997년 정도부터이니 대안 교육도 이미 20여년이 되어 가는데, 그 때 대안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이제는 사회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일할 때가 되었음에도 어떤 변화가 보이지 않으니...

 

교육은 이렇게 20년이 되어도 그 변화를 잘 포착하지 못하는데, 해방 이후 공고화된 교육 문제가 어떻게 몇 년 내로 싹 해결되겠는가,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해결이 아니라 더 안 좋은 쪽으로 심화되었다는 것이 조정래의 생각이 아니던가.

 

이 소설을 읽어보면 참, 암담하다. 도대체 희망이 없다. 이것이 우리나라 교육 현실이라면 이 나라 도대체 가능성이 있는 나란지 참담한 마음만 들 뿐이다.

 

이게 소설 속 상상의 세계에서나 그렇다면 괜찮겠는데, 소설을 읽으면서 지금의 현실이 그대로 느껴지니 더 문제다. 그러니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불편해진다.

 

현실은 그대로인데,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결말이 없다. 그냥 진행형이다. 가장 암담한 순간을 제시해 놓고 소설은 끝나버린다. 이게 현실이라고, 똑바로 보라고, 지금 대치동에 가 보라고? 이렇게 하고 있다고 외치고 있는 듯하다.

 

소설 속에 긍정적인 인물들도 나온다. 모두 전교조 교사들이라는 짐작이 가게 만드는 그런 교사들인데, 이들에 공감하기가 참 힘들다. 특히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강교민". (그는 말했다. 이 이름은 자기가 포기할 수 없는 이름이라고. 자기의 의도가 담긴 이름이라고. 교육민주화의 줄임말) 이토록 완벽한 교사가 있을까?

 

교장에게서도 무시당하지 않고, 동료교사들에게도 인정을 받으며 학생들에게는 짱이라는 소리를 듣고 수업도 잘하고 생각도 바른데, 여기에 자기 자식 교육까지 완벽하게 잘 시킨 사람... 이상적이어도 너무 이상적이다. 이런 사람이...

 

이 사람의 아내는 교사였는데, 아이가 혼자 밥 먹는 것을 견딜 수 없다고 해서 학교를 그만두고 전업주부 생활을 한다. 그리고 아이가 알아서 공부할 수 있게 분위기를 조성하고 함께 공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전혀 강요는 없다. 아이는 알아서 자기주도 학습을 한다.

 

그런데 좋아보이지 않는다. 이 완벽한 가정의 모습, 가정과 학교의 생활을 일치시킨 강교민 선생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심보인지 반발감이 막 생긴다. 도대체 뭐야, 이 사람? 하는 마음이 든다.

 

그가 해결 못 할 일은 없다. 아니 있다. 그것은 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편법, 개인의 힘이 작동할 수 없는 함법을 가장한 편법은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이것 빼면 나머지는 모두 '수퍼맨'이다. 그는 교육계의 '수퍼맨'이다.

 

하지만 그런 교사는 없다. 그리고 그의 가정이 그리 좋아보이진 않는다. 그의 아내는 아이가 혼자 밥 먹는 것 못 보겠다고 학교 그만두었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다른 맞벌이 가정들은? 자신의 인생은? 그녀 역시 자신의 인생을 가정 또는 자식에 건 것 아니겠는가?

 

이런 점에서 주인공이 우선 감정이입을 하는데 거리를 두게 만든다. 문제적 시대에 문제적 개인이 등장하는 것이 소설이라고 하는데, 이건 너무도 완벽한 중세의 영웅이 소설이 나와 버린 것이다.

 

그런 그 앞에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범속한 사람들일 뿐이다. 영웅 앞에서 쪼그라들 수밖에 없는 인물들. 이것이 소설에 마음을 주기 힘들게 한다.

 

게다가 이 땅의 어머니들은 다들 왜 이리 못됐는지... 자신의 인생을 오로지 아들의 인생에 건다. 아들이 무슨 자신의 아바타라도 되는 줄 아는지. 그러나 특정 엄마들은 이럴지 몰라도, 대부분의 엄마들은 그렇지 않다.

 

아들과 자신의 인생을 구분할 줄 아는 엄마들이 더 많다. 그리고 그런 엄마들 때문에 이런 지옥같은 교육현실에서도 살아남는 아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 점이 아쉽다. 소설에서는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지만 자식과 자신의 삶을 구분할 수 있는 엄마들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전혀 나오지 않기에 이건 너무 과장이 심한 것 아냐, 그냥 다른 나라 이야기로 치부하기가 쉬어진다. 감정이 이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설을 읽으며 아이들의 불행에 두 손을 꽉 쥔다든지, 눈물을 머금는다든지, 화가 나 두 손이 부르르 떨린다든지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소설은 내 마음 바깥에서 그냥 사건을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등장인물에게도 마음이 다가가지 않는다. 도대체 왜 다들 이렇게 나쁜 쪽 인물들과 성공한 인물들만 나오는지...

 

작가가 너무 위에서 교육 현실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 현실은 위에서 그리고 바깥에서 보면 진실을 알 수 없다. 그 복잡함을 알 수 없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얽히고 설켜 있는 그 복잡함을 무슨 알렉산더라고 단 칼에 잘라버릴 수는 없다.

 

단 칼에 잘라버리면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냥 통쾌할 뿐이지, 그 어려움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래서 소설 속 주인공은 강교민이나 다른 인물들처럼 '영웅'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현실에 처절하게 실패해 가는 보통 사람이 나와야 한다.

 

교사라면 학부모와 학생 그리고 학교 권력자인 교장과 교감, 교육 당국에 끼어서 고뇌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해야 한다. 그런 사람, 결코 이 소설의 주인공인 강교민처럼 학생들에게까지 짱으로 불리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실패를 학교에서 하겠는가. 얼마나 많은 실패를 수업에서 하겠는가.

 

마찬가지다. 엄마들도... 엄마들을 이렇게 모두 악마로 만들어 버리면 엄마들의 모습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아이를 위해서 무조선 좋은 대학, 좋은 성적, 이것은 엄마들이 아이에게 바라는 모습 중 일부일 뿐이다.

 

그들의 고뇌는 나오지 않고 오로지 결과만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고전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감정처럼 악인은 그냥 그냥 악인일 뿐이다. 변화가 없는. 다만, 힘에 의해 자신의 감정이나 행동을 누를 뿐인.

 

성적지상주의, 학교폭력, 왕따 문제, 영어만능주의 등 많은 것들을 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데, 어느 하나도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있지 않다. 그 점은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교육 문제가 어떻게 해결이 되갰는가. 그것은 지난한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 소설의 장점을 이 점에서 찾는다. 조정래라는 문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가 교육 문제를 소설로 다뤘다는 것. 교육 문제를 소설을 통해 우리 사회에 화두로 던졌다는 것.

 

이제 이 화두를 풀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이다. 누가 대신 풀어주지 않는다. 누가 대신 풀어주길 기대해선 안 된다. 자, 화두는 나왔다.

 

그 화두를 중심으로 궁리하고 고민하자. 짧은 시간에 깨달으려고 하지 말자.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아니라, 점수돈오(漸修頓悟)다. 천천히 천천히 고민하고 실천하고 하는 과정에서 해결책은 하나하나 나오기 마련이니.  

 

덧글

 

여성주의자들 입장에서 이 소설을 읽으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다. 이 나라 교육 문제는 사회 구조에서 비롯됐는데, 마치 여성들이, 특히 엄마들이 일으킨 것처럼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엄마들의 극성스런 교육열은 사실 교육 문제의 일각에 불과하다. 더한 것은 제대로 살기 힘든 우리나라 사회 구조 아니겠는가. 그 점이 이 소설에서는 잘 표현되지 않았으니, 여성들, 특히 자녀를 둔 여성들에서 이 소설은 많이 거슬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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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와 왕국 알베르 카뮈 전집 8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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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제목을 단 작품을 찾으면 없다. 이 제목은 이 소설집의 전체적인 주제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니까 각각 다른 제목을 달고 독립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단편을 하나의 주제로 꿰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제목이다. 그러니 제목에 해당하는 소설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말 것.

 

또다시 카뮈다. 무언가 몽롱한 환상상태로 나를 빠뜨린다. 무어라 딱 정리할 수 없는, 그러나 자꾸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게 만드는 소설들. 이야기들. 카뮈의 이번 소설을 읽으며 자꾸만 카프카의 소설들이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도대체 이 몽환적인 분위기는 뭐지. 하나로 정리할 수 없는 이런 분위기로 소설이 전개되고 있는데, 카프카 소설에서 느끼는 그런, 어두움 속에서 헤매게 하는 그런 분위기를 또 느끼고 있으니...

 

그래도 이 작품집에는 내용이 명확한 것도 있다. 그냥 어둠 속에서 꿈속을 헤매듯 두손을 허우적 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도 되는 소설, 그러나 읽고 난 뒤 뭔가 생각하려면 또다시 헤매야 하는 그런 소설들.

 

제목에서 이 점을 너무도 잘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적지와 왕국" 번역자가 지금으로부터는 조금 먼 과거에 활약했던 분이라서 제목이 한자어로 되어 있는데, '적지'는 적의 영토가 아니라 유배지, 추방지 정도라고 하면 될 듯하다.

 

즉, 자신이 살고는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장소는 아닌 곳, 그곳이 바로 '적지'다. 그렇다면 '왕국'은? 바로 '적지'의 상대어다. 자신이 살고 있지는 않지만 살고 싶은 곳, 이상향, 유토피아 정도가 되는 곳, 그곳이 바로 '왕국'이다.

 

그렇다면 제목인 '적지와 왕국'은 비루한 현실에서 살아가고는 있지만 이상 세계를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삶이라는 뜻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서문에 이런 뜻이 잘 나와 있다. 서문을 직접 보자.

 

  이 단편집은 다음과 같은 6편의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간부>, <배교자>, <말없는 사람들>, <손님>, <요나>, <자라나는 돌>이 그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주제, 즉 '적지'의 문제가 내적독백에서부터 사실주의적인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여섯 가지의 서로 다른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사실 이 여섯 개의 이야기들은 비록 나중에 따로따로 다시 손질하고 다듬긴 했지만 원래는 단숨에 연이어 쓴 것들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 또한 문제시되고 있는 '왕국'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들이 마침내 새로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되찾아야 할 자유롭고 벌거벗은 삶 같은 것과 일치한다. '적지'는 그것 나름대로 우리들에게 그런 삶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르쳐준다. 물론 우리가 그 '적지'에서 예속과 동시에 소유를 거부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지만.

(서문에서. 9-10쪽)    

 

'적지'에 대해서 절절히 느낄 수 있는 소설로는 아마도 첫번째 소설인 <간부>가 될 것 같고, 간부라고 해서 불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결혼해서 평범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 과연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래서 자신의 평범한 결혼생활이 '왕국'이 아니고 '적지'임을 생각하게 하는, 사막 한 복판에서 깨닫게 되는 그런 내용... 물론 명확이 내용이 잡히지는 않지만.

 

여기에 비하면 적지와 왕국이 함께 나오지만 결국 적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모습을 표현한 소설이 <손님>이 아닐까 싶은데...

 

인종차별을 거부하는 모습에서, 또 권력에 종속되어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모습에서 '적지'에서 '왕국'을 추구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지만, 그가 놓아준 사람이 결국 사람들이 정한 길로 가는 것을 보고서는 '적지'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깨닫게 하는 그런 소설. 마찬가지로 <요나>도 그렇다. 세속적인 성공? 이것이 바로 '적지' 아닐까 하게 하는, 카뮈 소설치고는 참 쉽게 읽히는 그런 소설.

 

이 중에서 내 마음에 가장 아프게 들어온 소설은 <말없는 사람들>이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생각 차이, 입장 차이가 얼마나 큰지, 그들에게 과연 소통이 있는지... 왜 노동자들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 생각하게 하는. 우리의 지금 현실과 비교해도 결코 달라지지 않은, 그런 노동자들의 현실. 그러나 여기서 노동자들은 말없이 자본가에게 대항이라도 했지, 지금은 그도 불가능한 상태 아닌가 하는, 그런.

 

이런저런 이유로 여섯 편의 단편이 '지금-여기'의 삶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리라'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카뮈의 말처럼 그냥 현실에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 무언가 "찍"소리라도 내야 한다.

 

밟았는데 꿈틀거리지도 않는 지렁이는 너무 세게 밟혀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그 고통을 당연스레 받아들이는 자기 의지가 없는 지렁이일 뿐이다. 꿈틀거려야 한다. 그래야 '적지'에서 '왕국'을 꿈꿀 수가 있고, '왕국'을 '적지'로 가져올 수가 있다.

 

그 점을 생각하게 한 소설들이다. 카뮈, 읽을수록 잘 모르겠지만, 읽을수록 왠지 매력있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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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9-08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책 저도 처음이네요! 저장해둬야겠어요~^^

kinye91 2016-09-08 08:27   좋아요 1 | URL
저도 요즘 책세상에서 나온 김화영 번역의 카뮈 전집을 읽고 있어서 읽게 됐어요. 카뮈 작품으로는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인데, 저는 좋게 읽었어요.

[그장소] 2016-09-08 09:08   좋아요 0 | URL
책세상 에서 나온 카뮈는 대부분 다 본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시를 어루만지다
김사인 엮음, 김정욱 사진 / 비(도서출판b)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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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 방송 중에 "너의 목소리가 보여"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목소리가 보인다고? 그럴 리는 없다. 다만, 목소리를 듣지 않고 그 사람의 외형이나 다른 행동을 보고 추측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보고 판단하면 된다.

 

마찬가지다. 시는 어루만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시는 눈으로 읽거나 입으로 소리내어 읽을 것이지 손으로 어루만지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시를 어루만지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시를 자신의 마음으로 어루만진다는 뜻이다.

 

시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애틋한 마음으로 읽어보고, 그 시를 제 마음 한 곳에 잘 간직해서 두고두고 필요할 때 꺼내서 바라보는 것, 읽어보는 것, 낭송해보는 것, 그것이 바로 시를 어루만지는 일이다.

 

그런 사람이 많은 사회, 이렇게 시를 어루만질 수 있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아름다운 사회일 것이다. 모두가 시인일 수는 없지만 모두가 시를 사랑할 수는 있다.

 

그 사랑하는 시가 모두 같을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짧은 시가, 어떤 사람에게는 긴 시가,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을 울리는 서정시가, 어떤 사람에게는 사회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주제가 강한 시가, 어떤 사람에게는 실험적인 시가, 어떤 사람에게는 우리나라 전통시가 마음에 들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시들을 어루만질 수 있다. 아니, 어루만져야 한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줄 수 있다고, 시도 어루만져본 사람이 다른 사람이 어루만지는 시의 사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시와 관련된, 시인이자 학자인 저자가 자신이 어루만지는 시에 대해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들을 만하다. 그가 왜 그 시들을 어루만지며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고, 그와 비교해 우리는 어떤 시들을 어루만지는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이 아주 좋았다. 김소월이 번역시를 썼다는 것, 잘 모르는 사실이었는데... 두보의 시를 이렇게 감상적으로 번역해내다니. 김소월식 두시언해다. 그리고 저자가 말한 것처럼 시번역의 전범이라 할 수 있다.

 

두보라는 당나라 말기,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던 시인이 어떤 마음으로 그 시를 썼을지, 그 시에 쓰인 표현들이 어떤 의미일지를 비슷하게 혼란스러운, 아니 더 혼란스러운 일제강점기에 시인인 김소월이 두보의 시에 두보의 마음과 자기의 마음을 담아 이렇게 아름답게, 처연하게 번역을 해내다니...(번역문을 옮기지는 않는다. 직접 읽어보라. 과연 이것이 두보의 시를 번역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놀라운 김소월식 번역이다)

 

과연 시는 국경을 떠나서도 공유될 수가 있는 것이구나, 그리고 시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시가 국경을 넘어 살아남느냐 마느냐가 결정될 수도 있구나 하는 점을 생각하게 했다. 첫 장부터.

 

이 책에 나온 시들은 철저하게 저자의 취향이 반영된 시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글을 읽으며 어떻게 이 시에서 감흥을 받지, 이런 시를 어떻게 어루만질 수 있지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아, 이 사람은 이 시를 이런 점에서 좋아하고, 어루만지는구나 하면 된다.

 

나는, 내 마음에 들어온 시, 내가 언제든지 어루만질 수 있는 시를 지니면 된다. 그것이면 이 책은 제 할일을 다한 셈이다. 즉, 이 책은 다른 시들을 찾아 읽고 자기만의 시들을 마음 속에 담아두고 언제든지 꺼내서 어루만지는 사람이 많아지는 사회가 되는데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싶은 것이다.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시를 읽으면 또 그것대로 맛이 있으니... 읽자, 읽어야 어떤 시를 어루만질지 찾을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내가 어루만질 수 있는 시들, 다른 사람에게도 선물하자.

 

특히 제 메마른 감성을 지니고 있는 소위 높다 하는 분들에게 이런 시들 선물하자. 마음을 좀 촉촉하게 적시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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