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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어루만지다
김사인 엮음, 김정욱 사진 / 비(도서출판b) / 2013년 10월
평점 :
케이블 방송 중에 "너의 목소리가 보여"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목소리가 보인다고? 그럴 리는 없다. 다만, 목소리를 듣지 않고 그 사람의 외형이나 다른 행동을 보고 추측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보고 판단하면 된다.
마찬가지다. 시는 어루만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시는 눈으로 읽거나 입으로 소리내어 읽을 것이지 손으로 어루만지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시를 어루만지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시를 자신의 마음으로 어루만진다는 뜻이다.
시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애틋한 마음으로 읽어보고, 그 시를 제 마음 한 곳에 잘 간직해서 두고두고 필요할 때 꺼내서 바라보는 것, 읽어보는 것, 낭송해보는 것, 그것이 바로 시를 어루만지는 일이다.
그런 사람이 많은 사회, 이렇게 시를 어루만질 수 있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아름다운 사회일 것이다. 모두가 시인일 수는 없지만 모두가 시를 사랑할 수는 있다.
그 사랑하는 시가 모두 같을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짧은 시가, 어떤 사람에게는 긴 시가,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을 울리는 서정시가, 어떤 사람에게는 사회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주제가 강한 시가, 어떤 사람에게는 실험적인 시가, 어떤 사람에게는 우리나라 전통시가 마음에 들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시들을 어루만질 수 있다. 아니, 어루만져야 한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줄 수 있다고, 시도 어루만져본 사람이 다른 사람이 어루만지는 시의 사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시와 관련된, 시인이자 학자인 저자가 자신이 어루만지는 시에 대해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들을 만하다. 그가 왜 그 시들을 어루만지며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고, 그와 비교해 우리는 어떤 시들을 어루만지는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이 아주 좋았다. 김소월이 번역시를 썼다는 것, 잘 모르는 사실이었는데... 두보의 시를 이렇게 감상적으로 번역해내다니. 김소월식 두시언해다. 그리고 저자가 말한 것처럼 시번역의 전범이라 할 수 있다.
두보라는 당나라 말기,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던 시인이 어떤 마음으로 그 시를 썼을지, 그 시에 쓰인 표현들이 어떤 의미일지를 비슷하게 혼란스러운, 아니 더 혼란스러운 일제강점기에 시인인 김소월이 두보의 시에 두보의 마음과 자기의 마음을 담아 이렇게 아름답게, 처연하게 번역을 해내다니...(번역문을 옮기지는 않는다. 직접 읽어보라. 과연 이것이 두보의 시를 번역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놀라운 김소월식 번역이다)
과연 시는 국경을 떠나서도 공유될 수가 있는 것이구나, 그리고 시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시가 국경을 넘어 살아남느냐 마느냐가 결정될 수도 있구나 하는 점을 생각하게 했다. 첫 장부터.
이 책에 나온 시들은 철저하게 저자의 취향이 반영된 시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글을 읽으며 어떻게 이 시에서 감흥을 받지, 이런 시를 어떻게 어루만질 수 있지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아, 이 사람은 이 시를 이런 점에서 좋아하고, 어루만지는구나 하면 된다.
나는, 내 마음에 들어온 시, 내가 언제든지 어루만질 수 있는 시를 지니면 된다. 그것이면 이 책은 제 할일을 다한 셈이다. 즉, 이 책은 다른 시들을 찾아 읽고 자기만의 시들을 마음 속에 담아두고 언제든지 꺼내서 어루만지는 사람이 많아지는 사회가 되는데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싶은 것이다.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시를 읽으면 또 그것대로 맛이 있으니... 읽자, 읽어야 어떤 시를 어루만질지 찾을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내가 어루만질 수 있는 시들, 다른 사람에게도 선물하자.
특히 제 메마른 감성을 지니고 있는 소위 높다 하는 분들에게 이런 시들 선물하자. 마음을 좀 촉촉하게 적시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