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이방인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0
알베르 카뮈 지음, 방곤 옮김 / 범우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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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잊고 있었던 작가다. 카뮈는. 적어도 다시 그의 마지막 작품, 완성이 되지 않은, 유고로만 남았지만 나중에 발간이 된 "최초의 인간"을 읽기 전까지는.

 

어린 시절, 세계 명작에서 이름을 보고 문고판으로 읽었던 페스트, 이방인의 작가. 어렴풋이 남아 있던 그 소설들의 줄거리.

 

그냥 줄거리만 남았다. 그게 다다. 오히려 카뮈는 소설가로서보다는 사상가로서 내게 다가왔다.

 

'시지프의 신화', '반항적 인간'

 

우리는 끊임없이 결론을 알면서도 나아갈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싸움에 나설 때, 그럴 때 인간은 시지프의 전철을 밟게 된다. 다시 내려와 무거운 돌을 또다시 굴려야 할 것을 알면서도 그 돌을 언덕 위로 굴려가는 지난한 노력을 하는 인간.

 

그런 인간은 반항적 인간일 수밖에 없고, 무언가 변화를 추구하는 인간의 숙명이기도 하고, 자신의 선택이기도 하다.

 

따라서 반항적 인간인 시지프 (시지프스 또는 시시포스라고도 한다)는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인간, 즉 자유를 획득하려는 인간이다. 자신의 의지로 행하는 인간. 그런 인간이 바로 카뮈가 말하는 인간이고,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인간이다.

 

그런 인간들과 그의 소설을 구별했었는데... 세계 명작을 다시 읽으면서, 또 요즘 우리나라 상황 속에서 그가 쓴 "페스트"가 생각났다.

 

페스트로 인해 시가 폐쇄되고 죽음이 넘쳐나는 곳에서 포기하지 않고 움직이는 인간들, 그런 반항적 인간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지금 페스트로 시가 폐쇄된 오랑시와 같은 처지 아닌가. 물론 우리는 물리적인 폐쇄하고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세계 각국으로 여행도 다니며 경제, 정치 교류도 하고 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이념에는 닫혀 있다. 그 이념은 우리에게 페스트 균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것은 우리를 격리시키고 단절시키고 죽음에 이르게까지 한다. 그런 이념, 그것이 바로 카뮈의 페스트가 생각나게 한 것이다.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죽음 속에서 그냥 손을 놓고 지내는 인간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은 인간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는 죽음에 이를 수도 있지만 그 죽음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나온다. 나중에 이 소설의 필자이자 서술자로 밝혀지는 베르나르 리외 의사와 더불어 지원대를 조직해 일을 해나가는 타루, 이방인이지만 결국 오랑시에 남기로 하는 기자 랑베르, 시청의 임시직원이면서 함께 봉사를 하는 그랑.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의 활동으로 어느 날 갑자기 페스트는 사라지고 만다. 갑자기라는 말이 맞다. 시작 부분에서 쥐들이 갑자기 죽는 것으로 페스트가 등장했다가, 쥐들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으로 페스트는 사라진다.

 

이들이 무한한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페스트는 이들의 노력으로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환경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굴복하지 않았다는 경험으로 다시 이런 재난에 대처해 나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자신이 해결하지 않았더라도 그 일에 대처하는 자세이어야 할 것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념의 균들. 이것이 우리의 힘으로 처리하기 힘들지 몰라도 우리가 포기하고 있지 않는다면 이 소설에서 페스트가 물러갔듯이 언젠간 물러가게 되리라.

 

그리고 우리는 이념의 페스트 균으로 인해 겪었던 불신과 고통, 죽음들을 하나의 경험으로, 체험으로 기억하게 되리라.

 

아니, 기억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리외라는 의사가 이 소설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카뮈가 굳이 이 소설의 끝부분에서 그것을 밝혀 놓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 리외는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했다.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사람들 틈에 끼지 않기 위해서, 페스트에 휩쓸려간 사람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가해진 부정의와 폭행의 최소한 추억만이라도 남겨놓기 위해서, 그리고 재난 속에서 배운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당할 것들보다는 더 많은 찬양받을 것들이 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해두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래도 그는 이 기록이 결정적인 승리의 기록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276쪽)

 

이렇게... 비록 승리의 기록이 아닐지라도 '아직도 수행해 나가야 할 것에 대한 증언이 될 수 있을 따름' (276쪽)이라는 자세로 남겼다고 한다.

 

현실에 주저앉는 인간이 아니라, 그 현실에서도 묵묵히 무언가를 하는 인간, 그런 인간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카뮈.

 

페스트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행동을 한다는 것을 소설을 통해서 보여준 그의 작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다시 읽으니 더 많은 것들이, 적어도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 어려운 환경에서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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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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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세계 명작 하면 빠지지 않았던 소설이 "로빈슨 크루소"였다. 무인도에 표류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는지 참 흥미롭게 읽었는데...

 

그냥 재미있게 읽었다고나 할까? 로빈슨의 불굴의 의지, 그리고 섬에서 문명을 일구어내는 능력, 결국 다시 문명의 세계로 돌아오는 그러한 사람의 이야기.

 

그것뿐이었다. "로빈슨 크로소"는. 그런데... 어느 순간, 자라면서 다른 세계를 알게 되면서, "로빈슨 크로소"가 인종차별적, 문화차별적 요소를 많이도 지니고 있다는, 제국주의의 이념을 소설로 구현한 작품이라는 얘기를 읽었다.

 

그럴 수도 있구나? 특히나 로빈슨이 '프라이데이'를 하인으로 부려먹는 장면, '프라이데이'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로빈슨이 시키는 일이나 하는, 자기 의지가 없는 인간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또한 '프라이데이'라는 미개인을 문명화시키는 로빈슨의 호의.

 

그랬다. 이 소설은 정말로 서구 사람들이 다른 세계의 사람들에 대해 지닌 우월감을, 그들을 자신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사상이 잘 드러난 소설이었다.

 

이렇게 "로빈슨 크루소"로만 끝났으면 서양 소설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세계 명작이라는 말도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빈슨 크루소"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았기에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세계 명작이라고 할 만하다.

 

적어도 다르게 생각해 볼 여지를 마련해 주는 작품이니 말이다. 그렇게 다른 여지를 마련하는 작품이 나왔다. "로빈슨 크루소"의 한계를 끝까지 밀어부치는 작품.

 

그것이 바로 미셀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다. 여기서 방드르디는 '프라이데이'다. 하나는 금요일을 뜻하는 영어식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식 이름이다.

 

결국 '방드르디'라는 이름에서 "로빈슨 크루소"를 차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제목이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의 이름으로 삼지 않고, 그가 만난 이방인의 이름으로 삼고 있다.

 

제목에서 보듯 이 소설에서 중심은 '로빈슨'이 아닌 '방드르디'다. 그렇다면 제목에서 보듯이 이 소설은 "로빈슨 크로소"를 차용했지만 그것을 거꾸로 뒤집는다.

 

즉 문명의 문제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는 이 소설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로빈슨은 천진한, 자연과도 같은 '방드르디'에게 동화된다. 그리고 그는 구출될 기회가 있었음에도 거부하고 섬에 남기로 한다.

 

그는 이미 문명을 떠나 자연의 일부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이 소설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어야 할 '방드르니'는 섬을 떠난다. 그는 새로운 문명을 경험하러 간다.

 

아직, 문명의 험난함을 경험하지 못한 그에게는 새로운 세계는 새로운 도전일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이미 문명 세계를 경험한 로빈슨에게는 그 세계는 이미 자신에게 멀어진 세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세계, 돌아가고 싶지 않은 세계가 된다.

 

그에게는 '자안'이라는 또다른 소년이 남는다. 그와 그는 무인도에서 자연과 동화된 삶을 살아가리라. 이것이 이 소설의 끝이다.

 

이렇게 이 소설은 "로빈슨 크루소"를 뒤집는다. 그 뒤집음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최첨단 과학시대에, 이제는 우주를 개척한다는 미망하에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과연 사람다운 삶은 무엇일까?

 

저 자연과 우리는 어떻게 어울리며 살아야 할까? 우리가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문명이 과연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까?

 

이 소설을 통하여 너무도 자명했던 우리들의 생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것은 이 소설의 또다른 주인공인 '로빈슨'의 변모를 통해서 느낄 수 있다.

 

최소한 우리의 생활에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시간, 그런 태도를 이 소설은 지니게 해 준다. 그게 이 소설의 의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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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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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판 2권이다. 1권에 이어 숨가쁘게 이어져 온 내용들이 전개되고 있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말을 더 잘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멜키아데스라는 집시가 양피지에 쓴 내용을 마지막 세대인 아우렐리아노가 해독함으로써 이 소설이 끝난다.

 

소설의 끝에서 백년의 고독, 아니 백년에 걸친 한 집안의 운명이 드러나는데,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그 운명은 현실의 역사에서는 사라질 수 있지만 문학의 역사에서는 사라질 수 없음을 이 소설이 말해주고 있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구체적인 줄거리야 읽어보면 알겠지만, 약 6대에 걸쳐 일어난 일들, 한 집안을 세운 사람으로부터 한 집안이 완전히 몰락해가는 과정까지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다.

 

왜 이 소설이 고전이라고 불리는지 읽어보면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냥 환상적인 한 집안의 흥망성쇠를 다룬 소설이 아니라 남아메키라의 역사와 관련지어 읽으면 더욱 풍부한 현실을 담고 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유파와 정부파의 대립과 전쟁, 휴전, 그리고 자본의 유입으로 인한 마을의 변화와 자본과 결탁한 군부 권력의 탄압, 역사 왜곡... 이런 것들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역시 백년의 고독을 겪지 않았던가. 그것을 한 집안의 역사로 풀어낸 소설이 '토지' 아니던가.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현실이 자꾸 떠올랐고, 이렇게 왜곡된 역사적 사실들을 사람들이 알고 지낼 수도 있음을, 이 소설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보았고, 그렇게 역사적 격랑 속에서 고립되어 있는 집안이, 마을이 어떻게 몰락할 수밖에 없는지도 생각하게 한 소설이다.

 

더불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만 천명관이 쓴 '고래'라는 소설이 생각났는데... 이주해서 한 마을을 건설하고, 결국 그 마을이 몰락해 가는 과정... 이런 모습이 '고래'라는 소설에도 나타나 있지 않은가.

 

다만, 마르케스의 이 소설이 한 가족의 더 많은 구성원들의 역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방대하다고 할 수 있는데...

 

마술적 리얼리즘 속에 담겨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비극, 그들이 지금도 겪고 있는 혼란... 소설에서 부엔디아 집안은 몰락하지만... 우리에게 남미로 불리는 라틴아메리카는 그 전철을 밟고 있지 않다는 생각.

 

좋은 소설은 그 나라 사람들,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한 가족의 비극이 한 나라의 비극이 되고, 그것이 우리 인류의 비극이 될 수도 있음을,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소설을 통해서 되돌아보고 방향을 설정할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해준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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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환희 2016-02-13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다가 포기 했던것 같은데 ,, 의미가 깊은 책이네요

kinye91 2016-02-13 08:46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소설 읽으려고 몇 번 시도하다가 접곤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읽으니 읽을수록 흥미롭더라고요. 명확하게 표현되지는 않지만 남미의 역사와 연결지을 수 있고, 우리나라의 상황과 비교하면서 읽게도 되고, 나름 좋았어요.

비로그인 2016-02-13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년의 고독이 세계의 고전이라면 라틴 아메리카의 가족사라도 충분이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가 한 집안을 통해서 생생하게 재현되겠네요. 라틴 아메리카 문화에 무지한 저로서는 한번 읽봐야 할 같네요. 건필하세요. *^^

kinye91 2016-02-13 21:43   좋아요 0 | URL
리얼리즘이라는 사실주의적 표현에서 벗어나 환상적 표현 속에서도 현실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점이 이 소설의 매력인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백년의 고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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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유명한 소설. 그래서 더욱 읽지 않았던 소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라는 명성 때문에 읽기가 망설여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지니게 한 소설.

 

남미문학을 대표한다는 소설인데, 지금까지도 언급이 되는 이유는 이 작품에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을 확립한 사람이라고 이 소설의 작가 마르케스를 이야기하는데, 그만큼 이 소설은 현실에 기반하고 있으면서도 현실을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우리 삶이 상당히 현실적인 것 같지만 우리도 모르는 우연 또는 강렬하게 우리를 이끄는 어떤 예감 같은 것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으니, 이런 예감들, 우연들이 소설에 나타났다고 해서 리얼리즘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를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겠지. 가령 이 소설의 1권에서 (민음사 판은 1권과 2권으로 책이 나뉘어 있다. 상품 검색을 하면 1,2권이 함께 나와 있지 않으니, 이렇게 따로 쓸 수밖에 없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경우는 자신의 운명을 또는 다른 사람의 운명을 미리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과연 그런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도 어떤 강한 예감이 온몸을 떨 때가 있고, 이상하게도 그 예감은 맞은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남미라는 지역의 현실에 기반을 두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한 집안 사람들의 이야기를 현실감 있게 다루고 있다.

 

이 현실이 꼭 사실일 필요는 없다.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밝혀지지 않아도 자신의 삶에서 사실로 존재하는 일들은 있으니까.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술라로부터 시작하는 이 소설. 1권에서는 주로 그들의 아들인 호세 아르까디오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를 거쳐 그들의 손자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자세한 내용은 2권에서 연결될테고.

 

한 집안의 역사에서 남미의 역사를 읽고, 한 집안의 삶에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찾아내야 하는 소설 읽기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 소설은 남미판 '토지'라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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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진짜 친구
설흔 지음 / 단비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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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시인의 진짜 친구"이지만 이 책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연암 박지원이 쓴 "우상전"을 알아야 한다.

 

아마도 "우상전"을 읽은 사람이라면 (우상전은 한문소설이다. 박지원의 작품이 한문으로 쓰여졌고, 그것을 우리는 한글 번역본으로 읽을 수밖에 없지만.) 이 책이 좀더 가깝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은 세 명이다. 이언진, 성대중, 이덕무... 그리고 이 세 명의 중심에 있는 인물 박지원.

 

작품은 고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형식은 고전이되 내용은 현대적이다. 그러니 박지원의 글쓰기법에 해당하는 '법고 창신'이 이루어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해설자가 작품을 사람들 앞에 펼쳐놓고 설명해주는 듯한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서술자는 전지전능해서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툭툭 던져놓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들의 역할이 미미한 것은 아니다. 세 명의 인물이 거의 동등한 비중으로 나타나는데, 이 중에서도 핵심은 이언진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박지원이 쓴 "우상전"의 주인공인 이언진이다. 그는 역관이지만 돈보다는 시에 목숨을 건 사람이다. 그러니 이 책의 제목이 된 "시인의 진짜 친구"는 이언진의 진짜 친구가 누구인가 하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더 흥미로울 수 있다.

 

물론 이 세명이 모두 만나서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다. 이언진을 유일하게 만난 인물은 성대중이다. 그는 서얼 출신이면서도 신중한 행동으로 벼슬살이를 하는, 시를 잘 쓰고는 싶으나 보통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이언진의 시적 재능을 높이 사고, 그의 시를 보관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그가 시인의 진짜 친구인가?

 

이덕무는 우리가 잘아는 실학자다. 책만 읽는 바보 (간서치)로 더 잘 알려진 사람.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으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 그는 이언진을 만나진 못한다. 그러나 그의 시적 재능을 알아본다. 시적 재능을 알아보지만 만나지는 못한 사람, 그가 시인의 진짜 친구인가?

 

여기에 박지원은 이들 셋의 중심에 있다. 사건은 모두 박지원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언진은 박지원에게 자신의 시적 재능을 인정받고자 한다. 그러나 박지원의 대답은 냉혹했다. 이게 끝이다. 이 냉혹한 평가 속에는 덕과 재주의 문제가 있다. 바로 '우상전'에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국 이언진은 자신의 작품을 불태우고 젊은 나이에 죽는다. 그는 끝내 박지원을 만나지 못했다. 박지원에게 인정받지도 못했다. 아니, 박지원의 인정을 받았지만, 인정 받았다는 표식을 받지 못했다.

 

그가 자신의 재능을 더 발휘해서 책으로 냈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그의 죽음에 박지원의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시적 재능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시를 잘 쓴다고, 적어도 박지원 만큼 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과 동등한 재주를 지니고 있다는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렇다면 시인의 진짜 친구는 박지원일까?

 

답은 나와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 책은 박지원의 "우상전"을 현대판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우상전"에서 더 벗어날 수 없다.

 

시인의 진짜 친구는 누구일까? 아니, 어떤 사람이 시인의 진짜 친구일까에 대한 답은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한다.

 

시인의 진짜 친구는 "지음(知音)"이라는 말처럼 그 사람을 인정해주고, 그 사람과 함께 어울리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 얘기는 거의 동등한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함께 공명할 수 있다.

 

진짜 친구라는 말 때문에 우정을 다룬 책이구나 하고 단정지으면 안 될 책이다. 이 책은. 박지원의 '우상전'을 현대판으로 개작한 작품이라고 보면 더 좋으니, 이 책을 읽고 '우상전'을 읽어도 좋고 (참 짧다. 금방 읽는다), '우상전'을 읽고 이 책을 읽어도 좋다.

 

그리고 진짜 친구가 되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도 한 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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