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2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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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코제트 : 1. 워털루 - 2. 군함 오리옹 - 3. 고인과 한 약속의 이행 - 4. 고르보의 누옥 - 5. 어둠 속 사냥에 소리 없는 사냥개떼 - 6. 프티 픽퓌스 - 7. 여담 - 8. 묘지는 주는 것을 취한다

 

2부다. 제목은 코제트다. 가련한 어린아이. 그러나 장발장에게 사랑을 일깨워 준 아이. 그렇다고 해도 코제트가 주인공으로 서술되는 분량은 아주 적다. 왜냐하면 코제트를 중심으로 하기에는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겨우 여덟 살이다. 우리나라 나이로 치면 이제 초등학교 1학년.

 

코제트가 겪어야 할 불행은 어머니와 떨어져 살 수밖에 없다는 것, 가정에서 떨어진 아이들이 행복하기는 참 힘들다. 물론 환경에 따라서는 행복해질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이 1860년대에 나온 것을 생각하면 가정을 잃은 아이, 특히 엄마를 잃은 아이의 생활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엄마인 팡틴은 돈을 내고 아이의 양육을 부탁하지만 엄마의 눈에 띠지 않는 아이가 어떤 대우를 받는지는 소설에서 너무도 잘 서술되어 있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생계 때문에 아이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맡기지만,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들이 있었던가.

 

결국 엄마의 눈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 감시카메라까지 설치하고 그것을 인터넷에 연동시켜 언제든지 부모가 살펴볼 수 있게 하는 방법까지 동원되지 않는가.

 

그런데 이런 방법이 없던 그 과거에는, 아이는 전적으로 양육자의 선의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양육자인 테나르디에는 인간성을 상실한 부류다.

 

그가 얼마나 못된 인간인지를 또 뒤편의 내용과 연결짓기 위해서 이 2부는 워털루 전투에서 시작한다. 장황하게 워털루 전투를 묘사하고 있는데, 그 끝부분에 가면 드디에 테나르디에가 등장한다.

 

전투에서 죽은 사람들의 몸에서 온갖 귀중품을 훔쳐가는 인간으로. 그런 인간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제대로 키워줄 리가 없다. 그에게는 돈이 전부인 것이다. 돈을 제때 부쳐줄 때도 코제트를 잘 대해줬다고 할 수 없는데, 돈을 잘 부쳐주지 않았을 때 어떤 대우를 했겠는가. 테나르디에 부부는 코제트를 식모보다도 더 못한 존재로 부려 먹었다.

 

부모 없는, 또는 부모의 눈에서 멀어진 아이들이 겪을 수 있는 고난, 그리고 그 아이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 꼭 다 그렇지는 않지만, 인간성을 상실한 불쌍한 사람과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은 사람이 2부에 나온다.

 

결국 사건은 코제트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중심 사건은 장발장과 그 주변 인물들이다. 장발장이 수녀원에 들어가 자리를 잡기까지의 과정.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 코제트를 만나고 코제트를 데리고 가, 팡틴에게 한 약속을 지키는 과정.

 

그리고 코제트는 이제 장발장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는데, 그것을 수녀원 생활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그는 두 번 갇혀 지내는데, 한 번은 감옥, 또 한 번은 수녀원이다. 모두 다 철조망 안에 갇혀 있지만, 한쪽은 증오와 억압이 있다면 한쪽은 사랑이 있다.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쪽은 정말로 불쌍한 사람들이고, 한쪽은 성스러운 사람들이다.

 

'그토록 비슷하면서도 그토록 사뭇 다른 그 두 장소에서, 그토록 판이한 그 두 종류의 인간들이 똑같은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즉 속죄를.' 453쪽.

 

그러나 그 속죄의 종류가 다르다. 감옥에서는 자신의 죄에 대한 속죄를 하고 있다면 수녀원에서는 다른 사람을 위한 속죄를 하고 있다. 이기적인 모습과 이타적인 모습.

 

'인간의 너그러움 중에서도 가장 숭고한 것, 즉 남을 위한 속죄다.' 453쪽.

 

이렇게 장발장은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앞으로 그의 삶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다. 즉 그는 불쌍한 사람에서 이제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사람, 코제트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불행한 삶을 살던 코제트를 위한 삶, 그 삶을 살기 위해 장발장은 여기까지 왔던 것이다. 단지 코제트만을 위해. 아니다, 코제트와 같은 삶을 사는 불쌍한 사람을 위해 장발장은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제 그는 코제트를 통해 미리엘 주교의 정신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레 미제라블들'에게 그는 다가갈 것이다. 이런 그로 인해 이제는 불쌍해지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 주변의 사람들, 테나르디에나 자베르 같은 사람이 되겠지.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의 정신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게 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코제트다. 사랑을 몰랐던 장발장의 마음에 사랑으로 가득차게 해주는 존재, 코제트. 이제 장발장은 자신의 마음에도 사랑을 채우게 되었다.

 

3부는 마리우스다. 이제 소설은 더 확장되어가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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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1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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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축약본으로 읽었던 책, 제목은 "장발장"이다.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책 제목을 붙였고, 우리는 '레 미제라블'이라는 제목보다는 '장발장'이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어릴 적 읽었던 축약본으로 이 책을 다 읽었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읽지 않는다. 이 책이 무려 5권이나 되는 분량이라는 사실도 다시 읽기 힘들게 한다. 그럼에도 완역본을 읽고 싶어졌다. 소설은 작가가 쓴 그대로 읽어야 더 맛을 느낄 수 있지 않나.

 

게다가 '레 미제라블'은 뮤지컬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레 미제라블'은 마치 춘향전이나 홍길동전처럼 다 읽지는 않았지만 내용은 알고 있는 그런 소설이다.

 

전체적인 줄거리를 알고 있어서 완역본을 읽으면 감흥이 덜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전체적인 줄거리가 감흥을 받는데 별로 지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세세한 부분의 묘사를 읽어가는 데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축약본에서 생략된 부분을 읽으면서는 축약본이 줄거리를 중심으로 참 많이도 생략했구나 하는 생각도 하면서 읽을 수 있고.

 

이제 '레 미제라블' 읽기의 시작이다. 겨우 1권을 읽었을 뿐이다. '레 미제라블'이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쓰인다면,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억압받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이라고 보면 된다.

 

상류층 사람들 이야기도, 귀족 이야기도 아닌, 사회 하층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나 너무도 힘들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

 

첫권의 제목이 바로 '팡틴'이다. 팡틴을 첫권의 제목으로 삼은 이유가 무얼까? 사회 하층민 중에서도 가장 무시당하고 버림받은 사람, 바로 매춘에 종사하는 여성이 아닐까 하는데... 매춘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비하하고,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위고는 이 소설의 처음을 매춘에 종사하게 되는 여인, 팡틴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들도 사람임을,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개인의 타락한 성품이 아니라 사회제도임을, 그래서 사회제도를 고쳐야 함을, 팡틴이라는 여인을 통해서 보여준다.

 

여직공으로서 한량이라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버림받고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하는 여자. 이 여자에게는 일이 필수적인데, 남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괴롭힘을 받아 결국 직장에서 쫓겨나는 여자.  

 

직장에서 쫓겨난 여자가 자기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 그것도 비열하게 아이를 볼모로 돈을 뜯어내는 사람들에게 속고 있는 여자는 결국 마지막 단계인 몸 파는 단계까지 간다.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전락. 그런데도 인간의 고귀한 품성을 잃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의 품성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팡틴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첫 시작에 팡틴을 놓은 이유가 바로 이것일 것이다. 가장 밑바닥에서 고통받는 사람, 그 사람도 인간성을 잃지 않고 살려고 몸부림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제목은 팡틴이지만 시작은 미리엘 주교로부터 시작한다. 축약본에서는 생략된 부분이다. 미리엘 주교에 대한 부분이 100쪽이 넘게 전개되는데... 이 주교가 장발장을 감화시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성스러운 사람으로 시작하는 것은, 소설에서 장발장이 이 주교의 단계에까지 오르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아니겠는가. 주교 역시 젊은 시절엔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주교가 된 이후 그는 성자의 삶을 산다.

 

인간은 변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좋은 쪽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엘 주교를 통해 시작부분에서 보여주고 있다. 결국 장발장 역시 미리엘 주교처럼 변할 수 있다는 것, 매춘에 종사하지만 팡틴 역시 미리엘 주교처럼 살 수 있다는 것.

 

비참한, 불쌍한 사람들, 이 사람들이 늘 불행하고 불쌍한 것이 아니라 이들도 이 주교처럼 성스러룬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그런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의 첫권이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다만, 주교처럼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 사람들이 지닌 편견이 얼마나 강한지, 그것을 극복하고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소설에서는 계속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삶은 그렇게 사회에 종속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소설의 또다른 축인 자베르 역시 불쌍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자기 틀에 갇혀 사는 사람. 다른 의미에서 가엾은 사람이 바로 이 자베르 형사다. 그가 얼마나 가엾은 사람인지 이 첫권에 잘 나타나 있다.

 

비참한 사회 속에서도 인간성을 지키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들이 비록 사회경제적으로는 불쌍한 사람, 비참한 사람, '레 미제라블'이겠지만, 이들의 정신은 숭고하고 성스러울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첫권이 보여주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회경제적으로 상층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추악한지, 그들보다 한참 못한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더 충만한 삶을 사는지 우리는 지금 보고 있지 않은가.

 

역설적으로 '레 미제라블'은 바로 그런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 영혼이 썩어있는 사람들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하는 소설이다.

 

이제 팡틴을 지나 코제트로 간다. 순수한 어린이가 겪는 고통, 그 아이의 성장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이 첫권의 작은 제목들은 다음과 같다.

 

1부 팡틴 : 1. 올바른 사람 - 2. 추락 - 3. 1817년에 - 4. 위탁은 때로 버림이다 - 5. 하강 - 6. 자베르 - 7. 샹마티외 사건 - 8.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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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중심 삶창시선 47
정세훈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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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명징하다. 시에 쓰인 낱말들도 그렇고, 시를 이루고 있는 주제도 그렇다. 명확하게 다가온다. 아니  마음으로 에둘러 오지 않고 직접 마음에 꽂힌다. 그렇게 시가 쓰였다.

 

이유는 단순하다. 시가 바로 시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시로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순하다? 그 삶이 바로 노동의 삶이기 때문이다. 거짓이 없는 노동의 삶.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노동하며 살아온 사람의 삶이 이 시집에 오롯이 드러나 있다. 그렇게 시인은 시를 통해서 우리나라에서 소외되어 온 노동을, 노동자들을 시의 중심으로 다시 불러내고 있다.

 

잊혀진 것 같지만 노동은 잊혀져서는 안된다. 우리가 생각하지 않고 있는 순간에도 노동은 이루어지지고 있고, 이 노동현장에는 아직도 차별과 억압이 존재하고 있기에.

 

이것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른 것으로 포장해도 감춰질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들을 시인은 다시 시를 통해 불러내고 있다.

 

그래서 명징하기는 하지만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아직도 이런 일이? 라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아프기도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 잊으려고 애써 눈 감고 지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더욱 아프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것이 노동현장일텐데... 아직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차별을 받고 심지어는 생명의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일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에 시인이 눈 감아서는 안되지.

 

이 시집의 제목이 되기도 한 '몸의 중심'이라는 시, 중심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시인이 이런 표현을 해서 그런지, 국정 농단으로 언론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들이야말로 진정 우리 사회의 중심일텐데... 우리는 너무도 이 중심을 잊고 지내오지는 않았는지.

 

시를 보자.

 

몸의 중심

 

몸의 중심으로

마음이 간다

아프지 말라고

어루만진다

 

몸의 중심은

생각하는 뇌가 아니다

숨 쉬는 폐가 아니다

피 끓는 심장이 아니다

 

아픈 곳!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처난 곳

 

그곳으로

온몸이 움직인다

 

정세훈, 몸의 중심, 삶창. 2016년. 26-27쪽

 

얼마나 진실한 표현인가. 얼마나 명징한 표현인가. 마음 속으로 곧장 날아와 꽂히는 말이지 않은가.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 안 되는 / 상처난 곳'이 몸의 중심이라니. 그렇다. 우리 몸의 중심은 바로 이곳이다. 아픈 곳, 상처난 곳, 그래서 우리가 늘 어루만져 주어야 할 곳.

 

몸의 중심이 이럴진대 사회의 중심은 어디인가? 정치권의 꼭대기에서 권력을 누리는 자들인가. 경제력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자신들의 부를 축적해 사적으로 써버리는 경제권력들인가. 기타 힘있는 자들인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중심은 바로 어루만져 주어야 할 사람들,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들, 드러나지 않으나 사회를 지탱해가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중심이다.

 

주목받지 못하는 곳에서, 소외받는 곳에서 그래도 우리 사회를 지탱해가도록 노동하는 사람들, 우리 인간들의 생명을 유지해나가도록 노동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사회의 중심'이다.

 

우리의 관심도 이제는 국정농단을 넘어 이렇게 '사회의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들이 아프지 않도록. 더는 아프지 않도록 말이다.

 

이번 시집을 읽으며, 특히 이 시를 읽으며 든 생각이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시집이다. 너무도 잘 읽었기에 고맙고 기쁘다. 잊고 있었던 것을 다시 생각해낸 기분을 느낀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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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굴라.오해 알베르 카뮈 전집 12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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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읽어가고 있는 카뮈의 작품들 중에서 이번엔 희곡이다. 젊은 시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 전에 카뮈의 '정의의 사람들'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방인'이나 '페스트'라는 학교에서 들었던 작품 이외에 내가 처음으로 읽은 카뮈의 작품이 아마 그 작품일 듯하고, 그래서 카뮈의 소설 말고도 희곡도 읽을 만하다는 생각을 계속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 읽은 두 편의 희곡 중에서 '칼리굴라'는 그다지 감흥이 오지 않았고, '오해'는 엇나가는 운명에 대해서, 인간들의 삶이 이토록 엇나가고 있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서 괜찮은 편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로마의 황제 칼리굴라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었다. 그가 폭군이었다는 것, 그래서 쫓겨났다는 것, 그것이 전부 다다. 이 희곡에서 그가 폭군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그런데 어떻게 폭군이 되었나 하는 것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희곡이 아닐까 한다.

 

로마의 황제, 절대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 그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단 하나만 빼고. 그것은 바로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 그 진리 앞에서는 황제라도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면 절대권력의 소유자에게도 자유란 완전하지 않다는 말인가?

 

여기서 '달을 따다 달라'고 하는 말은 결국 소유할 수 없는 진리를 개인의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 이 욕망은 바로 죽음을 자신이 조종하려는 마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죽음마저 조종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완전한 자유에 이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칼리굴라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누구라도 그렇게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차피 막지 못할 죽음을 자신의 뜻대로 해보려 하는 것. 이때부터 궁정에는 피바람이 분다. 그는 죽음의 본질은 어쩌지 못하니 다른 사람의 죽음을, 즉 다른 개체의 죽음을 자신이 조종하려 한다.

 

또한 자신의 죽음에서도 한 발 물러나 있기도 하다. 암살 기도를 알면서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기도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 죽음을 조종하려는 몸부림이라고나 할까.

 

여기서 부처가 생각났다. 부처 역시 절대권력을 쥘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권력을 탐하지 않는다. 그는 진리를 깨우치려고 한다. 그는 절대로 진리를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깨우치려 할 뿐이다. 여기서 칼리굴라와 부처의 길이 달라진다.

 

부처의 깨달음, 그 깨달음 뒤의 자유, 그것은 죽음조차도 넘어서는 자유다. 그러니 부처는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도달해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람들에게로 그 진리의 세계를 가지고 온다.

 

'옛다, 여깄다' 하고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우치도록. 스스로 깨우침이 없는 진리는 진리가 아님으로. 그 깨우침으로 죽음을 넘어서도록 안내자가 된다. 칼리굴라는 죽음으로 이끄는 안내자라면 부처는 죽음을 넘어서게 하는 안내자다. 이렇게 다르다. 이런 점을 중심으로 읽긴 읽었는데...

 

그렇다면 '오해' 역시 '죽음 앞에 선 인간'-필립 아리에스의 책 이름이기도 하다- 이다. 오해로 아들과 오빠를 죽인 여인숙 주인들. 그러나 이런 오해는 운명 앞에서 서로의 말이 빗나가는 데서 나온다.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말의 비틀림.

 

말은 진실에 한 발 다가서기도 하나 자꾸만 그 자리에서 어긋난다. 서로의 마음을 열어주는 말들이 아니라, 서로가 알아주길 바라는 말들일 뿐이다.

 

즉, 내 감정의 진실을 담아 전달하는 말이 아니라, 상대방이 내 진실을 알아주길 바라지만 미끄러지는 말을 하고 만다. 이 미끄러지는 말들 속에 사람들의 관계가 있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이렇듯 말들이 미끄러지고 만다면 진실한 관계에 이를 수가 없다.

 

좀더 크게 보면 죽음 앞에서 인간들은 진실한 말들을 주고 받아야 하는데도 자꾸만 말을 비트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진실을 담지 않고서도 남들이 진실을 알아주기만 하는 말들. 그런 말들은 기필코 오해를 부른다. 그리고 오해의 끝은 죽음이다.

 

이런 파멸적인 관계로 치닫는 말들... 마지막 장면이 계속 마음에 울린다. 마음을 받아주는 말들이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슬픔에 가득 차 있는 마리아에게 하인이 하는 말, '아뇨.'

 

소통하지 못하는 말들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던가. 그걸 희곡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카뮈는. 그런 생각을 하게 한 희곡 '오해'였다. 

 

희곡이라는 글의 특성 상 무대에서 상연될 것을 전제로 쓰여졌기에, 대사가 많으니 그 대사를 중심으로 읽어가면 빨리 읽게 된다. 그러나 빨리 읽으면서도 지시문에 있는 내용들을 머리 속에서 상상해내야 하기 때문에, 읽어가면서 연극의 장면처럼 머리 속에 내용을 떠올리며 읽게 된다. 그것이 희곡을 읽는 매력이기도 할 것이다.

 

아마, 직접 연극으로 보면 또다른 감흥을 맛볼 수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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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6-12-22 0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뮈 희곡 중에 칼리큘라는 많이 들어본 거 같아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고 하셨는데, 서평을 읽는 동안 한번쯤 꼭 접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해도 마찬가지구요. 좋은 서평 잘 읽고 갑니다.

kinye91 2016-12-22 09:41   좋아요 1 | URL
저한테 그렇다는 얘기니까요.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다른 느낌이 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너 없는 그 자리
이혜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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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사전에 없는 낱말이 자꾸 머리 속에 맴돌았다. "비끄러지다" 이런 말이 있을 리가 없는데도 이 말이 떠오르는 이유는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에 나오는 인물들이 모두 비틀리고 미끄러지는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엇갈린 관계를 맺고 있다. 엇갈린다기보다는 일방적인, 자신의 처지에서 바라보는 관계를 추구하기에 결코 맞물릴 수 없는 관계로 끝나고 마는 그런 만남들을 지속한다.

 

첫소설에서부터 이 점이 드러난다. 첫소설은 이 소설집의 제목이기도 한데, '너 없는 그 자리'라는 소설, 여성 화자의 편지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얼핏 보면 사랑하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있을 때 느끼는 애틋한 감정들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읽어보면 그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감정의 전달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일방적인 감정, 이런 일방적인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그러기에 이 만남은 지속될 수 없다. 남자는 여자에게 해외 근무 파견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이것을 알게 되는 여자로 소설이 끝난다.

 

그만큼 둘의 관계는 일방적이다. 일방적으로 사랑에 빠지기 때문에 상대의 감정을, 상대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일방통행만이 있다. 이 소설집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렇다.

 

일방통행. 이것은 소통이 아니다. 소통이 아니기에 제대로 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런 관계는 결국 비틀리고 미끌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꾸만 '비끄러지다'라는 말이 생각났는지도 모른다. 이런 말을 만들어내고 싶었는지도.

 

이 소설의 감상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면 그렇게 '비끄러지다' 가 된다. 두번째 소설인 '한갓되이 풀잎만'에서도 일방적인 사랑이 나오고 '북촌'에서도 그렇다. 기다림이 주제인 것 같지만, 결국 함께 할 수 없는 관계로 끝나게 된다. 그런 소설들이 '감히 핀 꽃'에서도 '해풍이 솔바람을 만났을 때'에서도 나타난다.

 

좀 대상이 다르기는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렇게 비끌어지게 표현한 소설인 '금빛 날개'에서 절정을 이룬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현대인. 자수성가한 사람이 자식에게 기대하는 것, 자신의 삶을 유지해가는 것,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고, 그것이 결국 자식의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

 

비틀린 관계가 이런 비극을 유발한다는 것을 소설에서는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나마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검은 강구'다. 물론 토끼 반도라든지 여우 열도, 흑곰, 독수리라는 표현으로 우리나라와 일본, 러시아, 미국을 빗대어서 사할린으로 끌려가 살게 된 우리 민족의 비극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도 관계는 비틀리고 만다.

 

그래도 이 소설에서 아버지가 결국 사할린에 남는 것으로 끝나지만, 이 아버지 역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니... 소설의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 편 한 편의 소설이 모두 이런 어긋나는, 서로 맞물리지 못하는 관계를 드러내주고 있다. 마치 지금 현대인들이 관계를 맺고 있지만, 서로 함께 가는 관계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지내는, 언제든지 따로 갈 수밖에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축제'에서 이런 관계가 어느 정도 회복되는 듯도 하지만, 이 소설에서 남편과 함께 한다는 결말을 찾기는 힘들다. 자신의 과거 속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비록 인도네시아에 가서 그런 단초를 마련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극복했다고는 할 수 없다.

 

자신의 과거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그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지 못하게 한다. 즉, 자기 속에 갇혀서 남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한없이 이해해 줄 수 있는 남편이라고 해도 함께 하기는 힘들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에서 주인공이 자살을 하게 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은 최선을 다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가족을 제대로 돌볼 수 없다는 절망, 그 절망 속에서 정신줄을 놓아버리지만 또 하나의 자기 세계에 갇힌 사람으로 인해 현실로 돌아오게 되는 사람.

 

남을 이해해준다는 행위가 남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음을, 이 소설을 통해 역시 비틀리고 미끄러지는 관계를 만날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남들과 함께 살아가지만, 어떨 때는 자기 속에 갇혀 자신의 안경만으로 남을 판단할 때도 있다. 자기만의 안경을 고집하는 것, 그것은 제대로 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한다.

 

내 안경이 과연 남을 제대로 보게 했는가? 자신을 남의 위치에 놓아보지 못한 사람, 그런 사람은 결코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처럼 잘못된 관계로 파국에 이를 뿐이다.

 

그러니 이 소설집은 이런 일방통행적인 관점에서 만남을 이루는 것이 어떻게 관계를 파탄내는가를 생각하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한편의 단편들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며 읽지만, 어쩌면 이것이 지금 우리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는 나만의 세계에 갇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를 되돌아보게 만든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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