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의 향기
제운 지음 / 지혜의나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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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행을 통해 스스로를 성찰하는 수행자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데 특정한 시기가 있는 것일까? 한창 앞만 보고 뛰어가던 시절은 뒤를 돌아볼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도 많고 또 내일에 대한 희망과 꿈이 앞서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생활이 안정되고 사회적 지위 또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될 시기쯤에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기회가 많아진다. 일상을 살아가는 여유가 생긴 탓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지나온 시간을 돌아본다는 것이 주는 또 다른 힘을 느끼며 지금 살아가는 현실에 더 굳건히 발 딛고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리라.

 

이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만 구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스님들의 경우는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매순간 자신을 돌아보며 깨달음의 걸음걸이가 한 치도 어긋나지 않게 하려는 수행자라면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자신을 점검하는 일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산문의 향기’는 한 구도자가 걸어온 시간에 대해 스스로를 돌아보며 지금 현재의 자신을 성찰하는 내용이라 의미가 있게 다가온다.

 

저자 제운 스님은 19살 나이에 출가하여 깨달음의 길에 들어섰다. 스님의 고백처럼 특별하게 부처님 법을 알았거나 그 법 안에서 자신의 앞날에 대한 희망을 가진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저런 이유로 출가하고 사찰과 선방을 두루 거치는 동안 부처님 법에 의지하여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더해간 것으로 보인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세속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곤란이나 어려움은 없을지라도 수행자로 살아가는 동안 경험했던 또 다른 어려움이 담겼다. 아름다운 여인을 대하는 모습이나 해수욕장에서의 일화 몸이 아픈 가운데 치료도 적절하게 받지 못하며 느끼는 심정 등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이 책에서 보여주는 이야기는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구도자로써의 모습 뿐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지는 삶 속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기에 어쩜 수행자라는 신분에 대한 선입견을 배재하고 볼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점은 기존 스님들이 발행한 책들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점이다. 인간이 가지는 근본적인 의문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구도의 길을 걷는 수행자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경전이나 수행자의 규범에 매이지 않지만 그 속에 나타나는 구도자의 모습은 그래서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스님은 다양한 재주를 선보인다. 붓글씨, 집필, 선화를 그리는 등의 일상이 수행자의 삶과 그리 멀지 않은 일이며 그것 속에서 자신이 걸어가는 수행의 방편임을 알아 스스로를 성찰하고 있기에 산문을 들어서는 모습이나 산문을 나서 만행의 길에 선 스님의 모습이 한결같아 보이는 이유 또한 그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만행이 여러 곳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닦는 온갖 수행을 뜻하는 말이기에 스님의 글 속에 나타난 다양한 행적은 길고 긴 수행의 길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수행자의 모습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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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 나는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
한한 지음, 김미숙 옮김 / 생각의나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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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세상은 지나간 시간과 더불어 내 안에서 만난다

세상을 만나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일상을 살아가는 모두가 세상과 만나 아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간다. 일상은 그렇게 세상과 나를 관계 맺으면서도 내가 살아가는 세상 이외에 또 다른 세상에 대한 꿈을 꾸게 만든다. 내가 일상을 살아가며 만나는 세상 말고 또 다른 세상이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쩜 잃어버렸거나 잊고 살아가는 내 꿈의 일부가 그 또 다른 세상에서는 현실이 되고 있지는 않나 하는 것에 대한 환상은 아닐까?

 

세상을 살아가며 확고한 꿈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의 시간을 살아가며 마치 꿈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 가슴속에는 언제부턴가 소망했던 것들이 하나씩은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 꿈이 어린 시절 하늘을 날고 싶었던 일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이 해쳐갈 낯선 세상을 향해 외치지 못했던 절망일 수도 있다. 꿈에서 멀어지는 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삶이라고도 하지만 꿈을 잃지 않았다면 새롭게 맞이하는 내일은 결코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오늘을 내일로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음을 깨달아가는 시간이리라.

 

‘나는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1988’이라는 소설의 핵심이다. 나는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것이 지금까지의 삶이 세상과 단절된 삶이었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살아가지만 그 중심에서 벗어난 있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마음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성찰이며 곧 내일은 나의 삶의 중심으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의 소망의 다른 이름일 테니까 말이다.

 

‘1988’은 주인공이 타는 차의 이름이다. 1988년에 생산된 차라고 하니 주인공이 세상과 만나 자신을 가꿔온 시간과 엇비슷할지도 모른다. 차의 나이로 보면 이미 전성기를 벗어난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면 주인공 역시 세상과 만남에서 이제는 중심부에서 벗어나 주변부에 머물고 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아니면 세상의 중심에서 벗어난 주변부 삶에 대해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소설 ‘1988’은 세상의 중심에서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는 아니다.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그 친구가 만들어 준 차를 타고 가는 주인공이 또 다른 주변부 인생을 살아가는 매춘부를 만나 길 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기록으로 채워지고 있다. 애기치 않게 여정에 들어온 낯선 사람과 다소 엉뚱한 일을 겪으며 살아가다 한번쯤 아주 가까운 곳을 시간차이를 두고 걸었던 일상과 마주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별 상관도 없이 지나간 일들이다.

 

‘1988’에서 만나는 길은 두 갈래다. 지금 1988를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과 어린 시절 이지 지나간 추억의 길이 그것이다. 그 두 길이 서로 어긋나 결코 만나지 못할 길이 아님을 주인공은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먼 길을 찾아와 만나려 했던 친구는 이미 유골이 되었고 낯선 길에서 동행했던 매춘부는 병원에서 사라졌다. 또한 추억의 길에서 들 동행했던 어린 시절의 친구들 역시 이미 더 먼 길을 떠난 이후다.

 

이 모두는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 온 과거의 시간이지만 이미 멈춰있는 것만은 아니다. 살아갈 시간과 살아가며 만나게 될 낯선 세상 속에서 늘 함께 하는 것이다. 매춘부 나나가 새로운 생명을 품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낯선 세상에 맞서는 모습은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일상의 그것과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아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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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
김현 지음, 산제이 릴라 반살리 외 각본 / 북스퀘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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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명의 존엄을 넘어선 그 무엇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을까? 살아가다보면 무엇인가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이 있다. 하지만 그런 소망은 때론 그때뿐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잊거나 묻히고 만다. 하지만, 간절히 원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이루려고 하는 것이 또한 사람들의 마음일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이루고 싶은 무엇을 가진다는 것은 꿈을 가진다는 말 일 테니까? 꿈이 사람의 삶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바꾸는지 그 꿈을 향해 질주해 본 사람은 누구나 안다. 그렇기에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삶이 무기력하고 허무한지도 충분히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소망하는 그것과는 다른 꿈을 가진 것이라면 어떨까? 꿈은 희망, 설레임, 미래 등과 결부되어 또 다른 삶을 충족시키는 일이다. 이런 것과 정반대의 꿈을 가진다면 어떨지 짐작도 못하는 일이 있다. 보통의 그것도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꾸지 않을 꿈이기에 더 간절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 ‘청원’은 바로 자신의 목숨을 마칠 권리를 달라는 것이다. 그것도 간절하여 국가에 청원할 정도로 말이다. 타고난 생명을 스스로 결정에 의해 마무리하고자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선 ‘청원’이란 국어사전의 개념으로는 ‘국민이 국가기관에 대하여 일정한 사항을 문서로써 진정하는 것을 말한다. 국민은 국가기관에 대하여 일정한 희망이나 의사를 문서로써 제출함으로써 권리의 구제·위법의 시정 또는 복리증진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비추어볼 때 사회적 규범이나 법률로 허락되지 않은 무엇인가에 대한 용인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 청원의 대상이 되는 것이 사람의 생명이다.

 

몇 년 전 ‘안락사’라는 말이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적이 있다. 식물인간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끝내게 한다는 것이다. 한 환자에게 그 안락사가 실제로 허락되어 행해졌다. 이를 둘러싸고 찬, 반 양론의 말들이 많았던 것이 생각난다. 이 소설 ‘청원’이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안락사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잘나가던 마술사, 그것도 최고의 마술사에게 허락된 멀린이라는 호칭을 받은 마술사가 사고로 인해 목 아래 부분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온갖 의학적 시술을 통해 치료를 했지만 현실적으로 회복 불가능이라는 확정판단을 받았다. 그렇게 움직이지 못하는 삶을 타인의 도움으로 연명한 시간이 14년이다. 그사이 자신의 마음을 담은 수기를 출간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하고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늘 그의 마음 속에는 이제 그만 이 삶을 마칠 수 있길 희망하는 것이다. 그것을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국가에 ‘청원’을 냈다. 바로 스스로 목숨을 마칠 수 있도록 국가에서 허락해 달라는 것이다. 이를 둘러싸고 찬, 반의 여론이 팽배하지만 법원은 그의 청원을 기각한다. 다량한 노력을 하지만 상소심에서도 기각 당한다. 이제 마지막 결정을 스스로 내리게 되는데 그를 보내냐 하는 친구와 지인들은 어떤 마음일까?

 

‘췅원’은 이렇게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다. 절박한 심정에서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청원에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숭고한 사랑의 마음이 늘 함께 한다. 그의 친구들뿐 아니라 1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의 곁을 지켰던 사람과의 마음으로 나누는 사랑이 절절하게 묻어있다. 그래서 더욱더 절절함이 느껴진다.

 

영화 ‘청원’을 소설로 새롭게 바꿔 출간한 것이라는 점은 어쩌면 영화에서 얻은 느낌을 눈으로가 아닌 상상 속에서 재현하는 것이기에 절박함에 대한 깊이를 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국가에서 안락사를 인정하는 나라가 얼마나 되는지 모를 일이지만 이 문제는 법률로 정해진 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넘어서는 인간의 삶과 죽음의 선택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담아내고 있어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만드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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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 시의 루브르
박제 지음 / 이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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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고 따로 읽어내는 그림이야기

사람이 몸의 감각기관을 통해 인식하는 모든 대상에는 이야기가 있다. 자신이 인식하는 대상을 자신이 주목하는 시각에 의해 재구성하고 그를 근거로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공감을 받을 때 일정한 흐름을 형성하여 한 시대를 대표하는 표상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포함하여 자연을 인식하는 내용이나 방식 또한 구전되어온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그 대상이 되곤 한다.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창작활동의 산물인 그림, 사진, 시, 소설, 음악 등은 그렇게 대상을 인식하고 그 속에 창작자가 만들어 놓은 이야기들이 각각의 영역에 따라 표현되는 방식의 차이로 나타난 모습이다. 이러한 창작물에는 창작자가 담아놓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다시 대상으로 삼을 때 이 대상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해석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야기는 반복되거나 읽혀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때의 이야기는 원작자의 의도와 공감을 이루거나 또는 전현 다른 이야기가 될 때도 있다.

 

이러한 흐름을 보여주는 실례를 그림을 해석하고 그림 속에 담긴 이야기를 전달해 주는 사람들에 의해 화인하게 된다. 박제의 ‘오후 네 시의 루브르’는 그림이라는 대상이 원 창작자가 모티브로 삼아 그림 속에 담은 이야기와 그 그림을 보는 작가가 읽어내는 이야기를 동시에 비교 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로 대상이 담고 있는 이야기와 대상을 읽어내는 사람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 책 ‘오후 네 시의 루브르’는 저자가 프랑스 왕가의 궁전이었다가 예술품을 소장한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한 그림들 가운데 선별한 70여점의 그림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는 책이다. 30여년을 프랑스에 거주하며 저술과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저자는 빈번하게 찾은 루브르에서 자신이 보고 경험한 그림의 세계를 화가들이 살아온 실제 생활을 바탕으로 그림에 얽힌 이야기와 그 그림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실들과 출처를 밝혀 상세한 해설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선정한 70여점의 그림을 일정한 주제로 다시 나눈다. ‘잊을 수 없는 얼굴을 그리다’의 초(肖)는 초상화를 중심으로 살피고 있으며 ‘거친 세상을 그리다’의 속(俗)은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보여 지는 모습을 주로 담았으며 ‘바깥세상을 그리다’의 풍(風)은 배경이 되는 자연의 모습을 담은 그림들이며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을 그리다’의 성(性)은 성을 주제로 한 인물군상을 담았고 ‘영원한 어머니의 슬픈 아들을 그리다’의 성(聖)은 기독교의 내용을 담은 그림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렇게 네 가지 큰 분류로 작품들에 대한 작가의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화가들의 그림들에 관한 내용을 읽어가다 보면 같은 이야기를 다른 시각에서 표현한 그림들을 만나게 된다. 그림을 그리게 된 원 이야기는 같은데 화가들은 그 속에서 자신이 주목하는 스토리를 재구성하여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렸다. 이는 대상이 담고 있는 이야기와 자신이 주목하는 이야기가 다를 수 있으며 이런 과정 속에 예술가들의 창작의 자율성을 엿볼 수 있다. 이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 뿐 아니라 화가들의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읽어내는 데이도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예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빗장’이라는 그림을 읽어내는 방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저자 박제는 이 빗장에 대한 해설에서 그림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열정적인 사랑이 끝난 후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읽고 있으나 같은 그림 빗장을 다른 이야기로 읽는 사람도 있다. 아트파탈(휴먼아트, 2011)에서 빗장에 대해 이연식은 이제 막 사랑을 나누려는 주인공들이 빗장을 잠그려는 모습으로 읽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같은 화가의 같은 그림을 두고 읽어 내는 이야기가 차이를 나타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가인 화가가 그림을 통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동일한 주제에 대해서 화가마다 다르듯 동일한 그림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이야기로 읽어 내고 있다. 이는 화가가 그림에 담고 싶었던 이야기와는 상관없이 그림을 대하는 관람자가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되어 그림을 보는 재미만큼이나 책을 읽어가는 재미가 좋다.

 

400여 페이지를 훌쩍 넘어가는 제법 두꺼운 책이지만 부담 없이 읽히는 또 다른 점은 선명한 도판을 보는 재미에다 저자의 개인적인 관점이 곳곳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은 유명한 화가의 작품일지라도 그 작품을 대하는 저자의 솔직한 심정의 표현이 곧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관객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듯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이야기와 통하는 것이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곳 루브르 박물관처럼 우리나라에도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미술관이 있고 그곳이 소장하는 예술품을 관객들과 공감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공간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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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파탈]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아트파탈 - 치명적 매혹과 논란의 미술사
이연식 지음 / 휴먼아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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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

어느 사회나 어떤 시대나 금기사항은 있었다. 사회적 규범이나 법률로 하지 말아야 할 것, 해서는 안 되는 것 등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준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마치 국방부에서 작성한 읽지 말아야할 도서 목록에 올라온 책들이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는 일처럼 말이다. 금기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음란’, ‘폭력’ 등이다. 이것들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규범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금기시하는 것이 암묵적으로 합의된 이유일 것이다.

 

‘금기’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설명에 의하면 ‘종교적 관습에서 어떤 대상에 대한 접촉이나 언급이 금지되는 일’이라고 한다. 또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이 금지되는 것에는 행동과 말 양쪽을 포함하며 터부(taboo,tabu)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고 한다. 그렇다면 금기의 기준이 무엇일까? 한마디로 정의하기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위의 말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권위나 권력을 가진 측에서 그 권위나 권력을 지켜가려는 의도가 다분하게 들어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이 금기는 사회적 환경이나 조건에 의해 범위나 대상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창작자의 자유의지나 자율성이 중요한 덕목이 되는 예술계 특히 미술이나 영화 등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부분이 영화가 아닐까 한다. 19세 관람가능이라는 등급을 전해두고서도 화면에 이상한 처리를 하는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역사적 맥락을 살펴 그 현상을 파헤쳐 보는 책이 이연식의 저 ‘아트파탈 : 치명적 매혹과 논란의 미술사’다. 미술은 애초부터 ‘음란’하기 위해 존재했다고 전재하며 동서양의 미술작품 속에 나타난 누드 작품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살피고 있다.

 

저자는 이를 위해 먼저 음란함에 이르게 되는 생각의 도구들인 알몸과 성기 등에 대해 살핀다. 절정에 대해 살핀다. 또한 종교 속에 나타난 음란함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며 성과 성에 관련된 시각으로 다양한 작품들을 비교 분석한다. 세상의 근원, 올랭피아, 풀밭 위의 식사, 레다와 백조, 여인숙에서, 빗장 등의 작품이 저자의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팜 파탈’에 대한 저자의 해석과 ‘춘화’를 통해 동양의 한국, 중국, 일본을 비교하는 점이다. ‘팜 파탈’은 여성의 성을 매개로 남자들을 몰락시킨다는 점인데 ‘유딧과 살로메’를 통해 다르게 나타나는 여성의 성을 설명해 주고 있다. 또한 춘화는 성적인 생각에 이르게 만드는 장면 묘사가 중심인데 한중일 삼국의 춘화에 나타나는 차이로 문화를 설명하고 있다. 한국 춘화에는 키스는 물론 성기를 제외한 몸의 다른 부분을 적극적으로 애무하는 모습도 없다. 이는 이들 나라의 문화적 차이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되지만 춘화가 남아 있는 절대적 수량에 의해 다 살피지 못하는 점도 있다는 것이다.

 

서양미술의 역작이라고 평가되는 여러 가지 작품들을 보면 대부분 여성의 누드가 포함되어있다. 신화나 전설, 성서 이야기 등을 소재로 한 많은 작품들 속에 나타난 누드는 무엇이며 이런 표현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저자는 음란함의 기준이 '공식적인 영역'에서 인정할 수 있느냐, 아니면 '비공식적인 영역'에 머무르도록 해야 하느냐에 따라 각 시대의 기준이 달랐다고 한다. 이러한 기준에 의하면 산화나 종교화에 등장하는 누드는 당시 시대상에 의해 허락된 부분과의 타협의 결과로 보고 있다. 이후 19세기 현대 미술로 접어들면서도 공식적인 부분과 비공식적인 부분에 대한 입장과 견해에 의해 달라져 왔다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와 창조적 활동을 유난히 강조하는 현대사회에서도 금기는 존재한다. 금기의 기준이 저자의 말대로 ‘비공식적 영역’이라는 경계에 한정될 경우 대부분 인정된다. 하지만, 미술이나 영화 등 표현 예술의 경우 비공식적 영역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예술가의 창작물이 대중과 호흡하지 못한다는 것은 예술의 영역을 극도로 제한하는 일과 관련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개인적 영역에 국한되었던 금기의 영역을 비록 서적이라는 형태일지라도 공식적 영역으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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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08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기를 공식적인 영역으로 확장한 책이라니, 무척 흥미로운걸요? `금기`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흐물흐물거리는 굴이에요. 예전에 어떤 광고에서 소녀가 굴을 먹는 장면이 있었는데, 기독교 재단에서 격렬하게 비판했다고 하죠. 늘 한 구석에 존재해왔지만 제대로 드러낼 수 없었던 금기에 대해 어떤 서술을 했는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네요. 추운 겨울날, 살포시 들렸다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