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가을밤의 정취를 더한다. 어제밤 이후 제법 온 듯도 한데도 여전히 반가운 비다. 텃밭 일궈놓아 한시름 덜었더니 때마침 비까지 내려준다.오늘은 달을 못봐도 아쉽지 않다.띠살문을 넘어오는 은근한 빗소리가 그 틈으로 스며든다.
가을은 속이 깊다.저녁무렵 눈 앞을 분간하지도 못하게 쏟아지던 비가 불과 10분 거리를 지나니 거짓말 처럼 말짱하다. 마치 인심이라도 쓰는듯 차오르는 달까지 보여주며 가을 밤의 정취를 누릴 수 있게 여유를 부린다.깊은 밤, 텅빈 고속도로를 달려 돌아오는 길, 도로를 점령한 안개 속을 바람인양 날았다.
안개의 시간을 벗어난다. 먼 곳에서 닭우는 소리로 깨어난 하루는 안개의 시간이다. 소리없이 번지는 아침햇살에 안개의 짧은 생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내 의식의 무명癡도 이렇게 깨어나길 소망한다.
'정갈하다'자연스럽다는 것 속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았지만 억지를 부려 욕심내지 않은 상태를 포함한다. 또한 시간을 거스르는 것이 아닌 앞서거니 뒷서거니 그 시간과 동행하는 것이니라. 그 가운에 정갈함이 머문다.나무둥치 위에 가즈러히 흰고무신 한컬레 놓였다. 뒷축을 실로 꼬맨자리가 어설퍼 보이지만 단정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닫힌 문을 열어볼 마음을 내 보지도 못하고 머리 위 글귀를 따라 읽는다.살어리살어리랏다청산에살어리랏다멀위랑다래랑먹고청산에살어리랏다토방에 놓인 고무신이 정갈한 주인의 마음자리를 닮았으리라. 굳이 청산별곡을 읊조리지 않아도 이미 마음은 청산 그 한가운데 머문다.가만히 흰고무신을 들었다. 두 손으로 가슴에 대어보고 그 자리에 놓아본다. 주인의 정갈한 마음자리가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안개와 함께하는 아침들녘,이 평화로움이 전해져 그대의 가슴에 오랫동안 머물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