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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의 자세 ㅣ 소설Q
김유담 지음 / 창비 / 2021년 1월
평점 :
첫 문장 읽고 사왔다며, 남편이 책을 내민다.
“나는 종종 공중목욕탕에서 우는 여자들을 본다. 유난히 세수를 오래 하는 여자들, 그들은 하얀 김이 서린 흐릿한 거울 앞에 웅크리고 앉아 물을 세게 틀어놓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다. 혼자만의 욕실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거울 앞에 서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흘리는 눈물보다 여탕 목욕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흐느끼다가 샤워기에 씻어내 버리는 눈물이 나는 조금 더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7p)"
과연 마음 저 밑바닥 묵직한 것들을 느리게 움직이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나 역시 이 문장들을 읽고 페이지를 넘겼다.
주인공 유라의 어머니는 세신사다. 남편을 사별하고 받은 보상금을 사기로 다 잃은 후 유라를 데리고 동네 목욕탕에서 기거하며 때밀이를 해왔다. 빨간 속옷차림으로 때를 밀고, 목욕탕 탈의실에 전기장판을 깔고 잠을 잤다. 그렇게 해서 3년 안에 빚을 모두 갚았지만 엄마는 여전히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형벌을 받는 시시포스처럼 씻겨도 씻겨도 또다시 더러워지고 마는 여자들의 몸뚱이를 닦아주면서, 아파트를 분양받았고 승용차를 샀다.(48p)”
유라는 이 기억으로부터 치유되지 않는 심리적 상처를 지니고 있다. 무용을 전공하는 그녀는 목욕탕에서 벌거벗은 여자들을 보면서 자란 탓에, 인간의 몸이 얼마나 아름다운 곡선과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배우기 이전에 그저 몸은 몸일 뿐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채버렸다. 그녀는 타인의 손이 몸에 닿을 때마다 경직된다. 무용가로서는 치명적일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어려움을 겪는다.
이곳 선녀탕을 찾는 사람들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육체 뿐 아니라 마음의 고단함을 푼다. 신호에 따라 손을 올리고 뒤집으며 몸을 맡긴다. 매일같이 여탕을 찾는 여성들은 노동으로 지친 몸을 달래 주어야 하는 이들이다. 그 중에는 직업여성도 있었다. 딸의 부축을 받으며 온 노인들이 있다. 소외된 몸이다.
“뜨거운 물에 몸을 불리고 때를 씻어낸 후에도 풀리지 않는 피로 때문에 누군가의 발밑에 깔려야 하는 여자들이 이 목욕침대에 매일 눕는다. 엄마는 천장에 달린 봉을 잡고 그녀들의 몸 위를 걸어 다니며 발끝으로 뭉친 곳을 찾았다.(166p)”
계급장을 떼고 알몸과 알몸이 만나는 그곳에서도 서열과 위계가 존재한다. 몸매 관리, 재테크, 자식교육에 능한 사람들이 위세를 한다. 그들은 잠시라도 권력의 중심자리를 누린다. 그렇게 소외된 몸과 마음은 위로를 받기도 한다.
다양한 사람들의 때를 밀고 몸을 만져서 엄마가 번 돈으로 공부하고 무용학원을 다닌 유라에게 목욕탕은 벗어나고 싶은 공간이었다. 그들 모녀는 생계를 위한 억척스러움과 비정상적인 공간에서의 성장으로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을 줄줄 모르는 빗나간 관계가 되어갔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찜질방으로 바뀐 그곳, 탈의실에 엄마 오혜자씨는 벗은 몸으로 누워서 휴식을 취한다. 목욕탕에서 자란 유라, 때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엄마의 노동을 눈앞에서 보고 자란 그녀는 타인의 몸이나 자신의 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기만 하다. 탕 속에 들어가 사지에 힘을 빼고 앉아있는 유라의 몸에서 구멍들이 열리고 어떤 것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상태! 그 이완의 자세가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육아에 지쳐가던 어느 날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겨놓고 동네 목욕탕에 가서 몸을 담그며 너무 행복했었다고 울먹이던 어느 독서 모임 회원의 이야기가 기억이 났다. 김장을 마치고 함께 목욕 가자던 말씀에 어색해서 쭈뼛거리던 며느리들에게 못내 서운해 하시던 어머님도 기억이 났다. 그 모습이 마음에 걸려 모시고 가면 내색은 안하셔도 좋아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공중목욕탕에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을 이완시켜야 할 여인들이 많았다.
황금탕, 선녀탕 등으로 불리던 동네 목욕탕들은 사라지고 찜질방이 들어섰다. COVID-19로 위기감이 극도로 치달을 때, 찜질방에서 감염된 사람들에 대한 뉴스를 보면서, 이런 상황에도 그런 시설을 이용해야만 하는 이들에 대해 남편과 이야기 했었다. 화물차 운전자들, 공사장 일용직 노동자들과 같은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제는 누군가에게 오락을 제공하는 공간이 된 그곳에도 소외된 몸을 쉬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