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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평점 :
헤밍웨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짧고 간결한 글에는 드러난 사실보다 감춰져 있는 의미들이 더 많다. 그래서 그의 글은 빙산에 비유된다. 설터의 글은 일상의 행위, 풍경, 대화, 생각을 아름답게 서술한다. 독자는 그 문장의 일각 밑에 가라앉아 있는 의미들을 탐사하고 건져올린다. 헤밍웨이의 글이 다시 읽고 싶어진다.
설터의 이 소설 서두는 말미를 읽고 나면 두 부분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빠르게 검은 강에 다가간다. 강변은 돌처럼 평평하고 매끄럽다. …… 강물은 우리 밑에서 시야를 흔들며 흐르고, 물새들은 그 위를 날아 빙그르르 돌다가, 사라진다. 우리는 이 넓은 강을 흘끗 본다. 과거가 흘린 꿈, 강의 깊은 곳을 지나니 강바닥이 수면을 흐렸다. 얕은 물을 따라, 겨우내 보트를 묶어두는 황량한 부두를 따라 우리는 빠르게 나아간다. 그러곤 갈매기처럼 휙 솟아올라,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본다.(23p)”
“그는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강 쪽으로 걷는다. 그의 양복은 너무 덥고 꼭 꼈다. 강가에 닿았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부두가 있다. 칠이 벗겨지고, 판자는 썩었고, 받침대는 이끼가 끼었다. 그 넓고 어두운 강, 그 둑에 온 것이다.(437p)”
강가로 나간 사람, 그가 갈매기처럼 솟아올라 몸을 돌려 뒤를 돌아 본 것은 ‘과거가 흘린 꿈’이다. 그가 지나온 시간의 이야기들이 그 사이에 담겨 있다. 이 서두와 말미 사이에 지나온 시간의 이야기들이 담겨있기도 하고, 같은 장면이기도 하다. 영화적 표현이다. 이 시적 표현에서 주목하게 되는 구(句)는 “과거가 흘린 꿈”이다.
비리(Viri)는 “약간의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의 삶의 기준은 사그리다 파밀리아와 같은 위대한 건축물이다. 유명해지는 것을 꿈꾸었다. 그는 성공한 사람이고 강변에 집을 짓고 부러워할 만한 아내와 가정을 이뤘다. 그렇지만 자존감은 낮았다.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이 높았고 아내 네드라(Nedra)의 인정에 의존적이었다. 항상 그는 “그녀로부터, 그녀의 인정, 그녀의 종잡을 수 없는 기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321p)” 이혼 후에도 그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울증까지 앓는다.
미국 중산층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두 사람
‘사르가소’ 그것이 집을 상징하는 단어다. 외도를 하고 돌아온 비리에게 뱀장어에 대한 글을 읽어주는 장면은 암시와 중첩된 의미들을 전한다.
“암컷은 강어귀에서 평생을 보낸 수컷을 만나 함께, 다른 수백, 수천 마리와 함께 그들이 태어난 곳으로 간다. 해초가 많은 바다 사르가소 해. 깊이조차 알 수 없는 깊은 바다 속에서 그들은 교배하고 죽는다.91p”
사르가소 해(Sargasso Sea)는 북대서양 해류에 둘러싸여 흐름이 없는 바다다. ‘마의 바다’, ‘죽음의 바다’라고 불린다. 그러나 해조류로 덮여 있는 이 바다 속에서 유럽뱀장어와 아메리카뱀장어 이곳에 알을 낳는다. 광막한 사르가소! 아득하고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이 바다 속에서 생명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뱀장어는 성적인 의미를 암시하고 있어서 네드라가 비리의 외도를 알고 있지만 묵인하고 있음을 암시하기도 하고, 자신의 성적 욕구를 다른 사람에게서 채우고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또한 그녀에게 사르가소는 집에 대한 은유이다. 중산층의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괴로운 그에게는 집이 적막하고 해초로 뒤덮인 흐르지 않는 바다다. 한편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 생명이 탄생하는 바다 속이다. 아이들이 주는 기쁨은 네드라를 그곳에 머물게 한다. 사르가소 해인 것이다!
“삶은 날씨고 삶은 식사다(52p)”라고 작가는 가벼운 날들의 의미를 전한다. 그래 그게 삶일지 모르지…! 그러나 순간순간 그게 다일까, 그것만으로 만족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타인의 눈에 비리와 네드라의 생황은 행복한 것으로 보인다. 친구와 이웃들을 초대하며 식사를 즐기며 이것이 삶이고 행복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합니다. 그러나 비리와 네드라는 서로에게서 채울 수 없는 욕망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 만족을 얻고 있다. 심지어 비리가 성적욕망을 채우는 것은 상사로서 위압에 가까운 것이었음을 은밀하게 폭로한다. “만족감 없이 살아가는 행복한 삶”이라는 모순은 네드라 내면의 갈등을 점점 키워간다.
부친의 죽음을 앞둔 임종과 장례를 기점으로 네드라는 집을 떠나는 결정을 하게 된다. 죽음은 언제나 인간에게 삶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다. 오고가는 길 위에서 목격한 풍경들 속에서 그 영감이 있었다. 홀로 집을 떠나 아버지에게로 갔다가 돌아오는 자동차 여행은 예기치 못한 고독감을 선물한다. 그 며칠의 시간은 홀로됨과 자유에 대한 필요를 더욱 선명하게 한다.이후 유럽 여행은 네드라에게 연습과 같았다.
네드라는 욕망을 따라 집을 떠나지만 과연 그녀가 원한 자유를 얻었을까? 이혼 전 네드라는 자주 쇼핑을 하고 돈을 썼다. “소비주의는 정서적 공허감을 먹고 번성한다”는 캐럴라인 냅의 말을 기억하게 한다. 혼자 여행하고 사랑하고 욕망대로 살아가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징후를 이 소비에서 본다. 그녀는 “도대체 뭐 때문에 그렇게 돈을 쓰는지 모르겠어.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386p)”라고 의문을 갖는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본주의적 습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미국의 중산층 삶은 전적으로 자본에 의존하고 있음은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네드라와의 헤어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혼 후에도 그녀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리, 돈을 쓰던 습관에서 자유롭지 못한 스스로를 발견하는 네드라, 두 사람 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에 그들이 바라는 욕망은 모두 돈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출발자체가 성공과 유명이었던 비리는 사랑하는 여성도 네드라처럼 예쁘고 멋있고 거실과 식탁을 멋지고 세련되게 가꿀 줄 아는 여자여야 하는 것이었을까? 그는 그녀를 사랑했을까? 사랑했을 것이다. 자본으로 환원되는 욕망이 그 사랑을 왜곡시켰을 것이다. 이제는 “칠이 벗겨지고, 판자는 썩었고, 받침대는 이끼낀(437p)” 그 넓고 어두운 강둑에 돌아와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는 그는 여전히 그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일까?
우리가 꿈꾸는 나날은 무엇일까? 타인이 욕망하는 그런 일상인가? 산뜻한 날씨 아래 멋진 집에서 세련된 가구와 잘 차려진 식탁 앞에서 가벼운 대화를 즐기는 일상일까? 자본으로 환원되는 욕망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