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역사상 최초로 가장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한 대규모 전쟁이었다. 4년간 치러진 이 전쟁으로 1,000만 명이 죽고, 2,000만 명이 부상당했다. 총 3,000만 명의 사상자가 이 전쟁에서 나왔다. 흥미롭게도 러시아는 이 전쟁에서 빠지게 됐는데, 이는 1917년에 발생한 러시아 혁명의 여파 때문이었다. 19세기부터 낙후된 농업 국가였던 러시아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전쟁 초기 독일은 슐리펜계획에 따라 대부분 병력을 서부전선에 투입했으나, 예상외로 잘 버틴 프랑스와 영국에 의해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짐으로써, 전쟁은 4년간이나 지속됐다. 


러시아군은 수적으로는 우세했으나,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적잖은 패전을 거듭했다. 1915년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은 수적으로 불리했음에도 동부전선에서 유리한 전세를 잡았으며, 1914년에서 1917년까지 러시아군은 총 200만 명이 전사하고 또 다른 200~300만 명이 부상당했다. 총 500만 명의 사상자가 속출한 것이다. 그러나 1917년에 시작된 2월 혁명은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렸고, 러시아는 점차 전쟁을 수행하지 않는 쪽으로 가게 됐다. 특히나 1917년 레닌과 볼셰비키가 주도한 10월 혁명은 인류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를 등장시켰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건설한 레닌은 “즉각적인 전쟁 중단!”을 외쳤다.

(아르헨겔스크에 상륙했던 미군 사진, 성조기를 들고서 이렇게 기념 사진도 찍었었다.)


1918년 3월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으려 했던 소비에트 정권은 단독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독일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체결은 러시아가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해서 제1차 세계대전을 진행중이던 영국·프랑스·미국·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들이 소비에트 러시아를 침공하며 백군을 지원했는데, 이렇게 해서 발발한 것이 바로 적백내전(Russian Civil War)이었다. 적백내전은 사회주의 혁명을 수호하려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이에 맞서는 차리즘 복권 세력 간의 전쟁이었다. 볼셰비키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근본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었고, 제국주의 열강들의 불법 침공이었다.


1918년에 시작된 내전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백군 세력·체코 군단·영국·미국·프랑스·일본·폴란드·그리스·에스토니아·이탈리아로 구성된 반란군 및 침략군대를 무찔렀고, 1920년에서 1921년 사이에 승기를 잡았으며, 궁극적으로 내전에서 승리를 쟁취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미국은 적백내전에 병력을 보냈다. 그 이유는 바로 미국이 적색공포에 빠졌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미국 내에서 이른바 좌파 색출작업을 단행했는데, 그 결과 적잖은 좌파 운동가들이 감옥에 갔으며, 미국 내에서의 반공주의 정서가 극심해졌다. 우드로 윌슨 정부는 1918년 러시아에 미군을 보냈다. 말 그대로 혁명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침략군을 보낸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된 간섭군들, 열병식을 하는 이들 중에는 미군들도 있었다.)


윌슨 정부는 총 13,000명 정도의 미군을 러시아에 보냈다. 1918년 9월 러시아 북부에 있는 아르헨겔스크와 극동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미군 병력이 상륙했으며, 이들의 임무는 러시아 백군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13,000명의 미군 병력 중 5,000명은 아르헨겔스크에 주둔했고, 나머지 8,000명은 극동지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러시아로 파견된 미군들 또한 전투를 치렀다. 1918년 10월 붉은 군대는 미군을 공격하여 적잖은 사상자를 안겨주기도 했는데, 미군들은 아르헨겔스크에서 전투에 투입됐던 병력의 10% 정도를 잃었다. 총 110명의 미군이 전사했고, 30명이 실종되었으며, 또 다른 70명은 당시 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2021년 프랑스에서 나온 르몽드 기사에 따르면, 부상당한 미군은 눈보라치는 숲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다 얼어 죽었고, “그해 가을과 겨울 미군은 이미 끝난 전쟁에서 미국 정부에 의해 잘못된 길로 들어섰고 장교들에게 속고 동맹국에 혹사당했으며, 적과 싸우기에는 태부족이었다.”

(아르헨겔스크에 배치된 미군 사진)


아르헨겔스크에 배치된 미군 대다수는 흥미롭게도 겨울 날씨에 잘 버티는 미시간 출신의 병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미군 지휘관들은 이들이 아르헨겔스크의 추운 겨울을 잘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들은 배치되기 전 영국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당시 이들이 받았던 훈련 중에는 영하 기온에서 버티는 방법도 있었으며, 이걸 교육한 사람은 남극을 탐험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 탐험가 에르네스트 섀클턴(Ernest Shackleton)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또한, 아르헨겔스크에서의 군생활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들 중 하나였던 헨켈맨과 3명의 병사는 연대장에게 최후통첩을 썼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919년 3월 15일까지 전선에서 철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러시아 적군들과 싸우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둔다.”

(미국에서 만든 시베리아 파병 미군 병사 관련 프로파간다, 이 프로파간다는 시베리아에 있는 미군들 지원하기 위해 전쟁우표를 살 것을 요청하고 있다.)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는 1919년 1월에 아르헨겔스크에 있는 미군을 몰아내기 위한 공세를 게시했다. 7일간의 공세 기간 동안 미군 병력은 8 대 1이라는 수적 열세에 처해 있었고, 이 미군들은 바가 강을 포함하여 지키고 있던 여러 곳에서 북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볼셰비키의 점진적인 공세는 5월에도 지속됐고, 미군은 1919년 6월 15일 아르헨겔스크에서 철수를 마쳤다. 아르헨겔스크에서 9개월간 주둔했던 미군은 총 235명이 전사했다. 그러나 윌슨은 시베리아 지역에서 미군을 주둔하며 백군을 지원하고자 했다. 


2019년 스미소니언 매거진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당시 시베리아에 주둔 중이던 콜차크 제독의 백군들은 점령한 지역에서 백색테러를 했다고 한다. 대량 처형이나 고문 등이 대표적이었으며, 기사에 따르면 “코사크 장군 출신인 그리고리 세메뇨프(Grigori Semenov)나 이반 칼미노프(Ivan Kalmikov)가 지휘하는 백군 병사들은 일본군의 비호하에 점령한 지역과 마을을 배회하며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일각에서는 당시 미군들이 백군 세력을 도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주민들을 학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1920년 1월 우드로 윌슨 정부가 시베리아에서의 철군을 결정하면서, 미군은 4월 1일에 철수를 완료했다. 시베리아에 있던 미군 병력은 전사자 189명을 남긴 채 철수했다.

(현재 러시아 아르헨겔스크에 있는 간섭군대 관련 묘비)


적백내전기 미군 전사자 숫자는 344명에서 424명 정도로 추정되며, 부상자도 최소 300명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적백내전기 미군의 파병은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적백내전은 볼셰비키 세력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이다. 1921년 내전에서 승리한 볼셰비키는 1922년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USSR) 즉, 소련(Soviet Union)이라는 나라를 탄생시켰다. 적백내전 또한 제1차 세계대전 만큼이나 참혹했다. 대략 1,000~1,200만 명이나 되는 인명이 사망했는데, 1921년에서 1922년에 강타한 기근으로 최소 500만 명이 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군인 전사자도 100만 명을 넘었다. 이러한 숫자를 보더라도 제1차 세계대전 못지 않게 참혹한 전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놀랍게도 이 내전의 존재를 아는 유럽인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서양 현대사마저도 루소포비아적 시각에서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문헌


단행본

쉴라피츠패트릭, 고광열 옮김, 『러시아 혁명 1917-1938』, 사계절, 2017.

R.B 에스프레이, 편집부 옮김, 『세계게릴라전사 1』, 일월서각, 1993.


기사

마이클 M.필립, “볼셰비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미군들”, 르몽드, 2021.07.30.,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4830>.

Blake Stilwell, “The United States' Invasion of Russia Was a Yearlong Freezing Hell for the Troops”, Military.com, 2022.06.28.,

<https://www.military.com/history/united-states-invasion-of-russia-was-yearlong-freezing-hell-troops.html>.

Erick Trickey, “The Forgotten Story of the American Troops Who Got Caught Up in the Russian Civil War - Even after the armistice was signed ending World War I, the doughboys clashed with Russian forces 100 years ago”, Smithsonian Magazine, 2019.02.12., <https://www.smithsonianmag.com/history/forgotten-doughboys-who-died-fighting-russian-civil-war-180971470/>.


인터넷 사이트

https://en.wikipedia.org/wiki/Allied_intervention_in_the_Russian_Civil_War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1650&code=kc_age_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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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2018년 12월이나 2019년 1월이었던 것 같다. 당시 페북으로 연락하던 한 페친과 처음 오프라인에서 만났다. 페친과 만난 나는 같이 집회에 참여했으며, 같은 역사 전공자로서 한국 현대사 관련 얘기를 나눴다. 이때, 나무위키의 친미 극우 반공주의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는데, 페친이 소위 한국 건군의 아버지로 알려진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usman)이 “한국인은 일본인보다 더한 야비한 새X들이다!”라고 말한 것을 나무위키는 절대 언급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제임스 하우스만의 존재를 알게 됐다.

(제임스 하우스만의 사진, 하우스만은 이후 1990년대 KBS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내가 제임스 하우스만의 존재에 보다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김득중의 박사학위논문인 저서 『빨갱이의 탄생』을 읽게 되면서였다. 김득중의 논문에는 “미군고문단이 여순항쟁에 군사작전상으로 개입한 사실”이 상세히 나와 있었고, 거기서 다시 한번 제임스 하우스만에 대해 제법 상세히 알게 됐다. 글쓴이는 지난번 허호준의 저서 『4.3, 미국에 묻다』를 완독하면서, 미군사고문단이 4.3에 어떻게 개입하여 학살에 관여했는지를 얘기한 적이 있다. 오늘은 한국 현대사에서 제임스 하우스만의 역할이 어떤 것이었는지 얘기해보고자 한다.


제임스 하우스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장교로 참전했고, 1944년 히틀러의 마지막 공세로 알려진 벌지 전투(Battle of Bulge)에도 참전했던 인물이었다. 하우스만은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지 1년 후인 1946년에 한국으로 파견된 인물이다. 하우스만은 조선경비대를 창설하는 것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춘천8연대에 배치되어 연대를 훈련 및 조직하고,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베로스(Russel D.Barros) 대령의 보좌관역할을 수행했다. 해방 이후 당시 이남의 군병력과 경찰의 지휘체계는 일본 육사출신이나 만주군 출신 그리고 친일경찰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하우스만은 광복군 출신들을 상당히 무시했으며, 그 이유에는 “광복군 출신들이 일본군 출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산주의자를 덜 적대했다.”는 데에 있었다. 하우스만에게 있어서 마음에 차고 안차고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반공 이데올로기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통령,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미고문단장 등이 참여하는 군사안전위원회에 참가했다. 하우스만은 군사고문단장과 국군 참모총장 사이의 연락 임무를 맡았으며, 이승만은 “군대에서 당신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나에게 알려 달라, 그를 교체하겠다”라고 할 만큼 제임스 하우스만을 신뢰했다. 제임스 하우스만의 개입이 가장 두드러진 역사적인 사건은 바로 여순항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 4.3과 더불어 여순에서 토벌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한 주체가 미국이었음을 지금까지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하우스만 사망을 보도한 국내 기사, 마치 한국의 군사전문가로만 소개가 됐다.)


여순항쟁은 1948년 10월 19일 한국군 제14연대와 제6연대의 일부가 진압을 거부하면서 일으킨 봉기였다. 이승만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토벌대를 동원했으며, 그 과정에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 당시 이승만이 보낸 토벌대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이 현재까지 발견된 시신만 3,384명이지만, 실제 사망자는 12,000명이라는 추산치가 있을 정도다. 김득중에 따르면, 여순항쟁 당시 미국은 정규부대를 투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신 고문단이 들어갔고, 이들은 사실상 진압군의 지휘관이자, 한국군 장교들과 장성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었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모든 한국군 부대에 미국인 고문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인사는 진압작전의 주요 고문으로 임명된 할리 풀러 대령과 군사고문단 G-3의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 미군 정보부 G-2의 존 리드 대위였다. 여순항쟁 당시 미군은 C-47 수송기를 동원해 한국군 병력과 무기 및 기타 장비를 실어 날랐고, 군사고문단의 정찰기들은 반란이 이어지는 기간 내내 그 지역을 감시했으며, 미국 정보기관들은 미군과 경무부의 정보과에 긴밀히 협력했다. 김득중에 따르면, 당시 하우스만은 토벌대 총사령관인 송호성을 보좌하는 군사고문으로 여순에 파견됐다. 하우스만은 이후 KBS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송호성의 명령에 반하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고문관의 역할을 했다”고 했으며, 하우스만은 여순항쟁 진압을 위한 작전계획을 백선엽과 협의하여 수립했다. 즉, 여순항쟁에서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나온 것은 제임스 하우스만이 세운 군사작전 때문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우스만에 대해 강연을 했던 역사강사 배기성)


실제로 제임스 하우스만은 1949년 1월 10일 미 국방부로부터 미 공로훈장을 수여 받았다. 이 훈장은 은성무공훈장 바로 아래의 4번째 서열에 해당하는 훈장이었는데, 전시가 아닌 평시에 보충역 대위에게 이런 훈장이 주어진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에 따라 김득중의 경우 여순항쟁 당시 미군이 남한 상황을 전시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봤다. 1948년 11월 20일, 총 99명의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미군 주둔에 관한 결의안’을 발의했는데, 이 결의안을 주도한 최윤동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미군은 여수순천 반란과 대구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만약 미군이 없었더라면 국군은 전멸당했을 것이다.”

(여순항쟁 당시 작전을 지휘하는 미군고문단과 한국군)


이런 점에 근거하여 보자면, 여순항쟁에 개입하여 총사령관 이상의 역할을 맡은 제임스 하우스만은 학살의 방조자이자 진정한 수행자였다. 또한, 이 사건에서 남로당이었던 박정희를 살려준 인물이기도 했다. 참고로 하우스만은 일제 간도특설대 출신인 김창룡을 신임한 인물이기도 했다. 김창룡은 한국전쟁 당시 서울 수복 이후 부역자 색출이라는 미명하에 대량의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김창룡은 하우스만에게도 직접 보고하며, 전쟁 이전 군 내부에 침투한 빨갱이 사냥을 자행했다. 2014년에 작성된 제주 언론사 『제주의 소리』 기사에 따르면, 제임스 하우스만은 한국전쟁 당시 한강 다리 폭파에도 책임이 있었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한강교 폭파의 진짜 명령자는 누구인가? 당시 참모부장이었던 김백일은 하우스만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사실상 하우스만이 미군 최고 책임자였다. 하우스만이 한강교를 건너자마자 다리는 폭파되었는데, 하우스만이 단지 행운아였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한강다리 폭파는 육참총장 채병덕- 참모부장 김백일-공병감 최창식-공병학교장 엄홍섭 선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윤영 당시 사회부장관은 회고록에서 "26일 심야 국무회의에서 이범석 국무총리가 처음으로 제안, 이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다"고 밝혀 한강교 폭파가 참모총장보다 윗선에서 결정됐음을 시사했다.”


이 기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임스 하우스만은 한강다리를 폭파한 실질적인 주동자였다고 할 수 있다. 하우스만은 이후에도 46년간이나 한국에 있으면서 한국 현대사의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하우스만은 제주 4.3 항쟁 당시 진압군 지휘관이던 송요찬의 고문이었다. 하우스만은 3.15 부정선거 이후 반이승만 시위가 일어나자, 계엄사령관으로서 송요찬을 통해 미국의지지 철회를 통고했다. 그렇다고 해서 하우스만이 민주주의적 신념이 있는 사람으로 절대 볼 수 없다. 그 증거는 아래 하우스만의 발언을 통해 확인된다.


“우리에게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룬다는 환상이란 없었다. 초보자들에게는 너그러운 독재자가 필요할 것이다.”


참고로 하우스만은 제주 4.3의 현장에도 있었다. 당시,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좌익 문상길이 처형당하자, 처형대에 다가가 그 시체의 머리에 권총을 한 번 더 발사한 인물이 제임스 하우스만이었다. 이후 제주도 시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총살하고 그것을 녹화해 훈련용 교재로 활용한 인물이 하우스만이었으며, 제주도 시민 20여명의 총살을 지시한 일에 대해 문책하던 미국 대사에게 하우스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몇 개 월 전에는 민간인 200명 죽이는 것도 보통이었는데 20명 죽인 것이 무슨 문제냐!”

(김득중의 박사학위논문인 저서 『빨갱이의 탄생』, 이 책은 여순항쟁을 분석한 책으로 당시 미군의 개입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순에서의 민간인 학살 또한 사실은 미국이 자행한 학살임을 알 수 있는 책이다.)


앞서 언급한 인용문을 보면 하우스만은 ‘너그러운 독재자’라 표현했다. 그러나 하우스만이 지원한 한국의 독재자들은 너그러운 독재자가 전혀 아니었으며, 가난한 빈민들을 챙기는 독재자 또한 전혀 아니었다. 이들은 분배와 빈민 해결보단 성장과 재벌 계급의 부의 축적을 우선시했다. 따라서 하우스만이 얘기한 너그러운 독재자들은 실제로 보자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치인이었을 뿐이다. 박정희 또한 5.16을 하기 전 군부 내 쿠데타 기도를 파악한 하우스만의 집에 찾아가 상황을 전했고, 하우스만은 자진에서 미국으로 날아가, 미 육군 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무성, CIA에 박정희와 한국 상황에 대해 브리핑했다. 그 결과 하우스만은 박정희에 대한 훌륭한 정보를 제공한 보답으로 미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공로표창을 받았다.


제임스 하우스만이 한국을 떠난 것은 1981년이다. 지난 2023년 말 국내에서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하면서, 젊은이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한가지 품은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개입이다. ‘서울의 봄’은 훌륭한 영화였지만, 아쉽게도 미국의 개입은 전혀 조명하지 못했다. 글쓴이는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굴곡에 있던 하우스만의 입김이 12.12에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제임스 하우스만은 앞으로도 연구가 많이 되어야할 한국 현대사 주제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 선인, 2009.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옮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현실문화, 2017.


A.B. 에이브람스, 박현주 옮김, 『끝나지 않은 전쟁 I – 북미 대결 70년사』, 민플러스, 2022.


김관후,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미국인’, 제주의 소리, 2014.12.26.,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56322>.


https://ko.wikipedia.org/wiki/제임스_하우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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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특수군사작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지금까지 글쓴이 또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전황과 여러 사건들을 지켜봐왔다. 전쟁 초기,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이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를 노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전면적인 침공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했다. 또한, 침공을 하더라도 친러 계열 주민들이 많은 돈바스 쪽으로만 갈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전쟁은 시작됐고 러시아군은 동부뿐만 아니라 벨라루스와 서부에서도 군사작전을 게시했다.


전쟁 초기, 러시아가 수도 키예프를 향해 진격을 하자, 글쓴이는 전쟁이 단기적으로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놀랍게도 이러한 예상은 완벽히 빚나갔다. 그 시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보도들은 지극히 우크라이나와 서구 중심적이었기에, 글쓴이 또한 서구의 내러티브에 아주 약간은 흔들렸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초기 보도된 민간인 피해에 대한 편향된 보도들은 사람을 충분히 그렇게 세뇌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약간의 흔들림이 완벽히 바뀌게 된 것은 2022년 5월 초에 들은 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님의 강연이었다. 이 강연을 들으며, 내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어떻게 잘못 생각했는지를 아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물론, 전쟁 전부터 스테판 반데라나 OUN 등의 우크라이나 나치즘의 역사를 알고 있었고, 2013년에 발생한 유로마이단 시위가 CIA에 의해 사주 받은 폭동인 것도 알고 있었다. 전쟁 전 올리버 스톤의 다큐멘터리인 Ukraine On Fire를 리뷰한 것이 바로 글쓴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언론들이 편파적으로 보도하다 보니, 조금이라도 주류 언론과 다른 주장을 하다가 블로그와 일부 커뮤니티에서 욕을 먹기도 했다. 어떤 이는 “미국이 이라크 폭격할 때는 그렇게 자극적으로 보도하지 않은 이들이 정작 러우전에선 난리를 친다.”고 얘기한 내 글에 대해, “이 정도면 병이다.”라고까지 했었다. 그 외에도 스테판 반데라와 우크라이나 나치들이 홀로코스트와 인종청소를 벌인 역사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가, “너는 푸틴에게 얼마를 받았냐?”는 조리돌림도 당했다. 물론 이런 욕을 무수히 많이 인터넷상에서 들었다.


이야기를 다시 이해영 교수의 강연으로 돌리자면, 이 강연을 통해 글쓴이는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이 무엇을 목표로한 것이고, 또 어떻게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시켰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번 특수군사작전에서 러시아는 키예프를 그렇게 맹폭격한 적이 없다. 미국의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할 때 했던 짓을 생각하면 그 사실은 더욱 명확해진다. 무튼, 그 이후부터 이해영 교수의 페이스북 글들을 유심히 보게 됐고, 더 나아가 한설 장군의 글들 그리고 유튜브에서 러우전에 대해 서구의 왜곡을 까는 영상들을 보다 더 많이 시청하게 됐다. MBC 전 보도국장 박상후의 ‘문명개화’나 벨라루스 교민인 최기영 교수가 운영하는 ‘러시아 학당’, 러시아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교민인 안정현 씨의 ‘모스누나’ 그리고 재미교포인 스캇 리의 ‘Scott 인간과 자유’ 등도 같이 보게 됐다.


내 개인적인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2022년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이 게시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여러 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선 그 이유 중 하나인 2022년 초 돈바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주목해보고자 한다. 우선 유로마이단부터 얘기하겠다. 2013년 오바마 행정부의 사주로 일어난 유로마이단 폭동은 친러 계열 대통령이던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축출하고, 포로셴코를 집권하게 만들었다. 포로셴코 정부는 마이단 폭동에서 자라난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을 키웠고, 이들을 군사화 했다.


사실 우크라이나는 무력이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마이단 폭동으로 집권한 포로셴코 정부는 2014년부터 국가의 예산 지출 방향을 복지로부터 군사력 강화로 바꿨다. 2015년에서 2019년까지 우크라이나의 국방비는 17억 달러에서 89억 달러로 증가했으며, 2019년에는 GDP의 6%를 차지하는 수준에 달했다. GDP 비율로 비교해보자면 우크라이나는 서방 선진국에 비해 3배나 더 많은 금액을 군대에 투자한 셈이다. 이렇게 우크라이나는 군사력을 강화했고, 이들을 실전에 투입했다. 2014년부터 친러계열 주민들이 돈바스 지역에서 저항을 시작했는데, 이렇게 시작된 것이 돈바스 내전이다.


돈바스 내전 당시, 우크라이나에는 아조프 연대와 같은 네오나치 성향의 민병대들이 존재했는데, 놀랍게도 이들은 궁극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정규군이 됐다. 돈바스 내전은 8년간 지속됐고, 이 과정에서 최소 15,000명의 친러 계열 주민들이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에 의해 학살당했다. 일각에서는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추산하기도 한다. 2019년 우크라이나에서 코미디언 출신인 블라디미르 젤렌스키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젤렌스키는 유대계 출신에 할아버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으로 참전한 사람이기도 했다. 거기다 돈바스 내전의 종식을 약속하기도 해서, 동부계열 주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젤렌스키는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포로셴코보다 더 악랄한 전쟁광이었다.


2021년 2월 젤렌스키는 돈바스 분쟁 지역 근처로 병력과 중화기를 보냈다. 이 병력들은 돈바스를 공격했다. 말 그대로 전쟁 도발행위를 한 것이다. 당시 젤렌스키의 이러한 행동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충돌할 뻔했다. 다만, 러시아가 10만 명의 병력을 우크라이나 국경에 배치하고 초강경 대응하겠다고 위협을 했기에, 전면적인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 젤렌스키가 이러한 짓을 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돈바스에 대한 군사적인 대응을 함으로써 서우크라이나의 지지층들을 결집시키고, 러시아 침략의 희생자로 보이도록 그리고 자신의 나라가 러시아의 대유럽 진출을 저지하는 전선으로 보이도록 연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것이 젤렌스키의 우크라이나 외교의 핵심이다.


거기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2021년 4월 나토 가입이 안 될 경우 핵무장을 하겠다고 선언했으며, 그해 봄 NATO군은 30년 만의 최대 규모로 합동 군사훈련인 디펜더 유럽을 실시했다. 말 그대로 러시아를 자극하기 위한 도발이란 도발은 거의 다 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2021년 내내 서구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국경에 집결했다는 뉴스를 내보냈지만, 정작 우크라이나가 전체 병력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인 12만 5,000명의 병력을 돈바스 분쟁 구역에 집결시킨 사실은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2014년 9월에 체결된 민스크 협정에서 양측은 도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약속은 철저히 깨졌다. 서방과 우크라이나에 의해서 말이다. 민스크 협정으로 설치된 유럽안보협력기구의 우크라이나 ‘특수감독 미션’은 돈바스 내 우크라이나와 분리 공화국 사이의 접촉선을 따라 매일 휴전 위반 사항을 기록했는데, 이기록에 따르면 2022년 2월 16일부터 돈바스에 대한 우크라이나군의 포격이 시작됐다. 이 기록을 보면, 2월 16일 509회의 정전 위반과 316회의 폭발음이 있었다. 2월 17일부터 22일까지의 기록을 보면, 17일에는 870회의 정전 위반, 654회 폭발음, 18일 1,566회 정전 위반, 1,413회 폭발음, 19~20일 3,231회 정전 위반, 2,026회 폭발음, 21일 1,927회 정전 위반, 1,481회 폭발음, 22일 1,710회 정전 위반, 1,420회 폭발음이 기록됐다.


스위스 정보부 대령 츨순인 자크 보는 이 기록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2월 17일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가 며칠 안에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미스터리다. 그러나 OSCE 일일 보고서가 보여주는 것처럼 16일 이후 돈바스 주민에 대한 포격이 극적으로 증가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 보자면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와 미국의 바이든은 의도적으로 전쟁을 도발한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유에는 당연히 이러한 점이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사실들은 서방 언론과 국내 언론에는 전혀 보도가 되지 않았다. 거기다 2022월 2월 19일 젤렌스키는 “부다페스트의정서보다 나토 조약 제5조가 더 효과적이라고 믿고 싶다”라고 선언하면서 핵무장 계획을 밝혔다. 이는 당연히 러시아 입장에서 실존적 위협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이 한국의 언론에는 전혀 보도가 되지 않았다. 그저 러시아가 약소국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괴롭힌다는 내러티브로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했다.


따라서 러시아가 특수군사작전을 게시하자 서방은 자신들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리비아에서 어떠한 짓거리를 했는지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전범 푸틴이 약소국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내러티브를 광범위하게 퍼뜨렸다. 그래서 전쟁 초기 왜곡된 가짜뉴스들과 우크라이나 오신트들이 아무런 검증 없이, 퍼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크라이나가 정규군화 한 아조프 포함 네오나치 정규병력들이 “침략자 러시아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수호자”로 미화됐다. 물론 언론은 나치가 있다는 사실을 짧게나마 언급하긴 했다. 그러나 자기들 멋대로 우크라이나의 나치즘과 발트 삼국의 나치즘의 문제를 심각하게 왜곡해서 전달했다.


즉, “이들이 나치에 협력한 건 소련 때문이고, 따라서 지금까지도 일부 극단적인 세력들이 소수로 남아 있으며, 러시아가 프로파간다로 사용한다.”는 내러티브를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을 옹호하는 데 이용한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치주의자 스테판 반데라도 옹호했다. 그래서 글쓴이는 전쟁 초기부터 약간은 흔들려도 우크라이나 깃발을 든 반전 평화운동에 매우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네러티브는 사실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경찰청이 2018년도에 발표한 것에 의하면 반데라주의 성향 단체가 군소조직 포함하여 3,840여 개 정도로 집계된다고 한다. 이쪽 전문가인 정길선 교수에 따르면, 등록되지 않은 것을 포함하면 10,000여개로 추정될 정도다. 말이 반데라주의 성향 단체지 이거 다 네오나치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만 500여 개가 넘게 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이 소수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며, 몰역사적인 시각이다.


우크라이나가 패배해가고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소위 ‘우뽕’들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전쟁범죄 국가이며, 따라서 이들에 맞서 서구가 무기를 지원해야 한다.”고 헛소리들을 한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지지한다며, 우크라이나 반전 집회를 주도한 인사들은 침략했다는 내러티브에 빠져, 어떻게든 이를 우크라이나 민중들과 엮으며 반데라가 들었던 우크라이나 깃발을 잘만 내세운다. 


그러나 본문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이 전쟁을 일으킨 주체는 러시아가 아니라, 포로셴코와 젤렌스키 그리고 미국과 서방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들을 키웠으며, 2월 24일 러시아가 침공하도록 돈바스를 포격하여 전쟁을 도발했다.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이들은 이런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 비약을 자주 저지른다. 참으로 웃기고 한심한 이들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악마화시키며 서구의 무기 지원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또 다른 주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민간인 학살이다. 2022년 4월에 발생한 부차 학살에 대해서는 다음번에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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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1-13 0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진실이 드러났는데도 국내 기레기들은 우크라이나의 호전적 반공 극우 혐러성향과 나치부역자 숭배행각에 대해서는 절대 보도하지 않는다죠.
 
먼나라 이웃나라 21 : 러시아 1 - 시즌 2 지역.주제편 먼나라 이웃나라 21
이원복 글.그림, 그림떼 그림진행 / 김영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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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 러시아 전근대편 리뷰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는 내가 어린 시절 열심히 읽었던 책 중 하나다. 이원복 특유의 설명은 읽는이의 흥미를 상당히 유발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다. ‘먼나라 이웃나라‘ 러시아편이 등장했다는걸 알게된 것은 아마 코로나 초기였을 것이다.

러시아편이 나왔을 당시 읽어보고 싶긴 했지만, 이원복이 뉴라이트라는 사실 때문에 한동안 이 사람 책에 거리를 뒀다. 2년 전 동남아시아 편을 읽었는데, 재밌게 읽긴 했으나 필리핀 역사를 설명한 부분에서 ˝필리핀인들이 미국의 식민지배에 크게 저항하지 않은 것˝처럼 묘사해서 어이없던 적이 있었다.

그런 문제를 뒤로하고 ‘먼나라 이웃나라‘ 러시아 전근대 편을 오랜만에 읽었다. 확실히 만화다보니 읽는 재미는 있다. 그리고 러시아 역사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는 이들이 읽기엔 비교적 러시아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몇몇 사례들을 한국 역사에 비유해서 설명하는 것도 재밌었다. 예를 들어, 예카테리나 여제 2세 때 일어난 푸가초프의 농민 봉기를 1894년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에 비유한다던지 뭐 그런 것을 들 수 있다. 비록 책에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해방 이후 김일성이 고국으로 귀국할 때 타고온 소련군 함선 이름이 푸가초프호다.

사실 이번 장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에피소드는 가짜 드미트리 사건이다. 이반뇌제 사후 일어난 일인데, 그의 혈통을 이었다는 이가 나타난 사건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이반 뇌제 사후 그의 4번째 아내인 표도로브나 나가야는 어린 아들 드미트리가 죽고 이반 뇌제에 불만을 품었던 신하들에 의해 수도원으로 쫓겨났다.

그가 나은 아들이 죽었음에도 아들이 살아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1600년 대 초 드미트리를 참칭하는 이가 기아와 굶주림 속에 빠져 있던 상황에 등장하여 정권을 잡은 것이다. 물론 그 드미트리는 가짜였고, 자신의 사적 권력욕을 채우다 1년 만에 목숨을 잃었다. 이후에도 그 드미트리의 이름을 이용한 이가 두번이나 더 등장했다. 물론 이들 모두 기회주의자였다고 한다.

나폴레옹 관련한 얘기도 흥미롭다. 사실 8~9년 전 러시아사를 독학으로 열심히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나폴레옹의 조국전쟁에 대해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는데, 만화로 보니 더 쉽게 이해가 되는 느낌이다. 그 외에도 책은 차이코프스키나 푸쉬킨 등 러시아사의 유명한 인물들도 다수 소개한다.

물론 이번 편에서도 내용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볼셰비키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을 견지하는 점이 그렇다. 그리고 솔직히 이원복 작가가 아프리카인을 묘사할 때, 과거 서구의 내러티브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사 지식이 전혀 없는 이가 접근하기에는 여러모로 유용할 것이다. 다음에 현대편을 읽고 리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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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50년
김수지 지음, 윤철기.안중철 옮김 / 후마니타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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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비록 새해에는 옆 나라의 쓰나미와 국내에서의 백색테러라는 암울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지만, 이런 일 말고 많은 이들에게 기쁜 일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코로나바이러스가 한참이던 2020년 말이었을 것이다. 이 책을 우연히 인터넷 상에서 오프라인으로 만나게 된 지인을 통해서 알게 됐다. 지인은 나에게 이 책이 브루스 커밍스의 제자가 쓴 책이며, 북조선 초기 역사에 대한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고 했다. 이 책을 사게 된 나는 몇 년 후 영문판으로 일부분만 읽어봤다. 예를 들어, 토지개혁이나, 선거 그리고 젠더 관련한 부분을 조금 읽었는데, 일반적인 책들에서 찾기 힘든 내용이라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러던 20238월 초 드디어 이 책이 국내에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참으로 기뻤고, 따라서 인터넷을 통해 바로 책을 구매했다. 책을 읽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요즘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읽고 싶은 책을 읽는 독서시간이 부족했다. 그래도 새해를 맞이하며 완독하니 상당히 기쁘다. 브루스 커밍스 선생이 가르치고 키운 수제자의 책을 이리 한글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기 때문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제자이기도 한 김수지(영어로 Suzy Kim)는 루트거스 대학의 역사학 교수로 북한사를 연구한 인물이며, 통일운동가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정전 협정 70주년을 맞이하여 글쓴이는 평화운동 국제연대 차원에서 작년 여름에 미국에 갔다왔었다. 그때 워싱턴 D.C에서 접촉한 여성주의 성향의 평화운동 단체가 있었는데, 그 단체가 바로 Women Cross DMZ이며, 이 책의 저자가 몸을 담고 있는 조직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단체는 사실 국내 언론사에도 많이 실렸는데, 구글이나 네이버에 우먼 크로스 DMZ’ 혹은 위민 크로스 DMZ’로 검색하면 여러 기사들이 나올 것이다. 물론 미래한국같은 우익 언론사에선 종북단체 혹은 북한의 꼭두각시라 욕하며 혹평 일색이다. 이번에 읽은 책 혁명과 일상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2013년 그녀가 쓴 책인 “Everyday Life In The North Korean Revolution 1945~1950”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사실 북한사는 역사학 분야에 있어서 아직은 연구가 많이 되지 않은 주제 및 분야이며, 또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자 주제다. 물론 우리가 이에 대해 연구를 하지 못하는 것은 북한 사회에 접근하기 힘들다는 점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북한에 대해 적대적인 정책을 내려놓지 못하는 한국 그리고 미국 자신의 책임도 크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폐지되지 않은 국가보안법의 존재도 한몫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북한사는 자료의 접근이 많이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북한사 연구의 경우 1940년대부터 1960년대 전까지는 비교적 연구가 축적됐다. 이는 소련 해체로 인한 냉전의 영향도 한몫한다. 이에 따라 러시아측 문서고가 열리고, 한중수교가 성사되면서 중국 측 자료도 비교적 열람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전에는 미국에서 북한사 연구를 어떻게 했을까? 그것은 바로 미국 안에 있는 문서고를 통해 가능했다. 이와 같은 연구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다. 1980년대에 완성된 커밍스의 연구는 미국 워싱턴 근처에 있는 NARA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노획문서를 통해 진행됐다. 한국전쟁 당시 북진을 한 미군은 점령한 북한 지역에서 무수히 많은 문서를 확보하여 미국으로 가지고 갔다. 그리고 여기 담겨 있는 문서들 중에는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자료들도 많다. 1·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을 연구하는 이들이 이 곳을 방문하는데, NARA국립문서보관소에는 그만큼 자료가 많이 있다.

 

NARA국립문서보관소에는 전쟁 시기 북한에 대한 자료 뿐만 아니라, 1945년부터 1950년 전쟁 이전까지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정권 하에서 진행되고 수행된 많은 것들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많이 있다. 이 중에는 1946년 북한에서 실행된 토지개혁에 관한 것도 있고, 당시 여성들의 일상을 볼 수 있는 자술서를 비롯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과거에는 북한 땅이었다가 현재는 남한 땅인 인제군이나 양양 그리고 속초 등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정권 시기 강원도 지역의 모습을 담은 자료들도 NARA국립문서보관소에 많이 있다.

 

김수지의 책 혁명과 일상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은 과거 미국이 노획한 북한 측 1차 사료를 바탕으로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 나온 한국 사학계 측 연구자료들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김수지는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정권 하에서 나타나는 인민들의 일상에 주목했다. 또한, 김수지는 2010년대부터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젠더의 문제도 북조선의 역사를 통해 접근하고자 했다. 사실 젠더 부분에 대해선 많이 모르는 글쓴이 입장에선 책을 통해 많이 배우는 느낌이었다. 책에서 현재 대한민국 영토인 강원도 인제군에 집중한 것도 상당히 흥미롭다. 예를 들어, 김수지는 1945년 해방 이전 일제 하에서 여성의 문맹률이 90%였는데, 해방 이후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실질적으로 나타난 문맹퇴치의 성과를 언급한다.

 

“1945년 당시 여성의 90%가 문맹이었기 때문에, 문맹은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 큰 문제였다. 이 점에서 문맹 퇴치 운동은 여성들에게 많은 혜택을 제공했는데, 실제로 [문맹 퇴치] 학교의 학생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1948년 인제군 졸업생을 보면 여성이 남성보다 3~4배가 더 많았다(<3.11>참조). 글을 읽지 못하는 인제군 주민들[대체로 만 12세 이상 50세 미만 남녀]은 거의 모두 한글학교에 다녔고, 그들 가운데 다수가 [겨울철 농한기에 이루어지는] 4개월 과정이 끝난 후 치러진 최종 시험을 통과했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162~163.

 

인용문을 보면 북조선에서 실행한 문맹퇴치운동이 실질적인 성과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고, 그 혜택을 여성들이 많이 보았음을 알 수 있다. , 이러한 근거를 통해, 김수지는 북조선에서 진행된 혁명의 성과를 보여주기도 한다. 김수지가 북조선 혁명에서 나타난 여성상에 대해 긍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어머니상을 내세우면서 정권 초기에 나타난 육아와 보육의 부재나, 일부 여성 지도자들이 북조선 정권 하에서 쓴 자서전 및 책에서 나타난 맥락 생략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북조선 혁명 하에서 진행된 여성 혁명의 성과들 또한 많이 보여줬다. 예를 들어, 북조선민주여성총동맹의 가입 비율이나 조직화 등에 대한 묘사를 보면 알 수 있다.

 

“19451118, 북조선민주여성총동맹 (이하 '여맹으로 약칭)의 결성과 더불어 여성은 가장 먼저 조직된 단위 가운데 하나였다. 중앙집권화되기 전 마을 단위에서 자발적으로 결성된 인민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여성 단체 역시 여맹의 우산 아래 모이기 전까지 전국적으로 홑어진 형태로 조직되어 있었다. 1946510일 첫 번째 총회를 개최할 무렵 여맹은 12개 도시 89개군 616개 면에 지부를 두고 총 80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1946년 말까지 여맹 회원은 103만 명으로 확대되어 18~61(은퇴 연령) 성인 여성 인구의 3분의 1을 조직한 상태였다. 1947년 무렵 여맹의 회원 수는 150만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농민이 73퍼센트를 차지했다. 노동자는 5.3퍼센트 사무원은 1퍼센트 미만이었으며, 나머지 20퍼센트는 '기타로 분류되었는데 대부분 주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187.

 

여성 관련한 얘기들 중 글쓴이가 상당히 흥미롭게 읽은 지점을 뽑자면, 빨치산 운동에 참가한 여성의 기억이다. 흥미롭게도 남한에서 빨치산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의 경우, 자신들이 빨치산 운동에 참가한 것을 보람있게 생각했으며, 그 이유 중 하나가 남녀평등이었다.

 

여성들 역시 민족 해방 문제를 우선시했다. 예를 들어, 박선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라가 없으면 여성 권리도 필요가 없는 것이고 ……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 여성들이 더 이렇게 학대를 받고 이렇게 한단 말이야.” 민족 해방 투쟁에 참여하는 것은 자신의 해방 곧 여성해방을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수많은 빨치산 여성들이 산에서 보냈던 시간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해방감을 느꼈던 시간으로 설명했다. 누군가의 아내 또는 딸이 아니라 남성 동지들과 동등하게 혁명가가 되는 꿈을 꿀 수 있었다. 빨치산 시절 한쪽 팔을 잃었음에도 변숙현은 산에서 보냈던 삶에 대해 내 생애에서 젤로 보람 있게 산 시간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조 큰 포부를 갖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다녔으니까라고 말하며, “보람 있게살았다고 단언했다. 박선애도 다음과 같이 동의했다. “여자이기 때문에 힘들다는 것은 없었어요. 왜냐면 너무 우리가 억압당하고 살았잖아. 긍께 이제야말로 우리가 말할 수 있고, 맘대로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할수 있다, 우리도 여성이지만 인간으로 살 수 있다.”

 

두 여성의 감정에서 공통적인 것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할수 있다.”는 해방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결정하는 전통적인 가족(그것이 친정이든 시댁이든)과 연계된 그 어떤 의무나 책임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그녀들은 살면서 처음으로 가족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규정하지 않아도 되는해방공간을 경험했던 것이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346~348.

 

이와 같은 김수지의 여성 관련 서술들을 글쓴이에게 젠더적 관점에서 본 북조선 혁명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줬다. 이 부분에 대한 글쓴이의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 글쓴이는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혁명에서 여성들에게 미친 영향은 부정적인 것 보다 긍정적인 것들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물론, 책에서 언급한 부분대로 일정부분에서의 한계나 미흡한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과거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통치시절과 비교해보자면, 여성이 혁명과 일상의 주체로서 나설 수 있는 길이 보다 열리게 된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김수지가 결론부분에서 언급했듯이, 이후 북조선에서 여성은 남성과 함께 일하고 공부하며, 군대에서 복무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의무교육이 전적으로 무상화됐고, 마찬가지로 의료도 무상화됐다. 북한의 김일성은 1964년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결국은 전체 인민의 행복한 생활을 보장하며 그들의 부단히 높아 가는 물질적문화적 수요를 더욱 더 완전히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라고 선언했는데, 이와 같은 사회적 변화와 복지의 제공은 북한이 실제로 그걸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본다.

 

김수지의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생각해본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북한의 친일파 청산이다. 일각에서는 남한의 부재한 친일청산 역사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북한의 친일파 청산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오류가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책의 5장인 자서전, 혁명의 내러티브파트를 보면, 출신성분이 부르주아였거나 부유층으로서 소극적 혹은 적극적 친일에 가담한 이가 어떻게 해방 후 혁명 속에서 자신의 친일 행각에 대해 표현하는지가 나와 있다. 흥미롭게도 학교에서 일본의 태평양 전쟁을 칭송했던 한 인물의 경우, 혁명 정권이 들어선 뒤 쓴 자서전에서 이를 부끄럽게 간주하는 얘기들을 하고 있으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북한 사회가 친일한 이들의 친일행각에 대해 사회적으로 반성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한의 경우 친일파들이 자신들의 친일행각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이것과는 상당히 대조된다고 할 수 있다. 아래의 인용문을 보자.

 

그러나 이런 기만적인 사실을 이해 못하고 그 교육 이념과 그 정책을 옳다고 인정한 나의 친일적인 사상을 해방된 오늘에 반성하여 볼 때, 너무나 양심의 가책과 무익한 인간 생활을 한 것이 원통하다고 뉘우친 것처럼, 해방은 큰 전환점이 되었다. 자신의 죄책감을 표현하면서 리원갑은 해방 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전향을 상세히 설명한다.

 

“1945815일 우리 조국과 민족의 해방의 날이 우리 조국을 찾아왔다. 소련 군대의 영웅적 투쟁으로우리 민족은 일제의 기반에서 해방되었다. 해방 이후 우리는 소련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못가지고, 우리 북조선에 진주한 후에도 적극적으로 이 소련 군대에 대한 친절을 도모하지 못하였다. 물론, 로어를 이해하지 못한 점이 …… 큰 원인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지방 인민들의 요청으로 다시 나의 모교인 동상인민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 일제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나는 인제야 나의 과거의 과오와 이제부터의 나갈 방향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어린이들에게 조선 민족의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하여 힘써 나갈 것을 교육했다. 이 동안에 상부에서의 지시, 각종 회의, 북조선에서 발간하는 신문, 잡지 등을 통하여 우리 조선 민족이 나갈 길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9465월부터 19471월 사이 평안북도 교육국의 추천으로 그에게 북조선로어학교에 입학할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매달 500원의 장학금을 비롯해 모든 필수품과 기본 용품을 제공받았다 일제가 주도한 식민지 근대성을 열정적으로 옹호해 왔던 사람들에게 해방 후의 상황은 훨씬 더 열악했을 것이기에, 이 같은 상황은 확실히 그에게 나쁜 것이 아니었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255~256.

 

북한의 친일파 청산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은 무엇보다 1946년에 단행된 토지개혁에 있다.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정부는 혁명정부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고 농민들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북조선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이하 토지개혁법)’194635일 공표했다. 이 법령에서는 일본 정부 일본 국민과 기관 그리고 일본인에 협력한 조선인 반역자들이 소유한 토지를 몰수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했다. 5정보 이상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 조선인 지주들의 토지 역시 무상으로 몰수됐으며, 지주들이 계속해서 소작을 주고 있던 토지는 면적과 상관없이 몰수됐다.

 

토지개혁으로 전체 105만 정보가 몰수되었고 25일 만에 98만 정보가 모두 71만 농민 가구에 무상으로 재분배되었다. 토지개혁은 지주의 권력을 무너뜨렸으며, 지주들 가운데 대다수는 일제 부역자로 규탄받던 이들이었다. 이들이 규탄 받으며 토지가 몰수된 반면에, 북조선 전체 농민 가구의 70% 이상이 혜택을 받았다. 1946년 북조선의 토지개혁은 토지가 없는 다수의 농민과 빈농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며, 일제 식민지 시기 친일을 했던 지주들은 쓴 약을 삼켜야만 했다. 일제 시대 당시 지주였던 한 사람이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한 것을 보도록 하자.

 

새로 들어선 공산주의 정부는 우리의 토지를 모두 하룻밤에 빼앗아 소작농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들은 그것을 토지개혁 제1조라고 불렀다. 토지는 인민들의 것이 되어야만한다고 말했다. 갑자기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토지를 잃었다. 그들은 우리를 집에 머물게하고, 우리 집과교회 사이에 있는세 개의 논을 남겨 놓았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논 내가 거머리 밭이라고 부르던 에 발을 담갔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134~135.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보자면, 북한의 친일파 청산을 토지개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해방 이후 남한에 있던 친일파들이 미군정 하에서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과는 분명히 대조된다. 따라서 북한의 친일파 청산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오히려 친일파 청산을 전혀 하지 않은 집단은 미군정의 통치를 받았던 이남 정부다. 앞서 인용 및 언급한 토지개혁에 관한 내용 또한 김수지가 쓴 책을 통해 보다 심층적으로 그 진싱을 알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서 상당한 지적 희열을 느꼈다.

 

그 외에도 김수지의 책들은 북한의 선거 제도와 인민위원회 및 각종 단체들의 결성과 과거 일제시기 억압받던 계층들의 참여를 통해, 혁명 하에서 나타난 북조선의 일상들을 보여줬다. 그런 점도 상당히 좋았다. 과거, 억압과 외압으로만 봐왔던 북조선 혁명의 또 다른 부분을 일상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김수지의 말대로 북조선 혁명은 그 자체로 20세기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경험이었고,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대중 선거와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에 따라 시행된 급진적 토지개혁을 통해 전례 없이 많은 농민들이 지도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을 만큼 매우 폭넓은 대중에 기반을 두었으면서도 매우 급진적인 혁명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은 인민들의 참여다.

 

책을 읽으면 알겠지만, 북조선 혁명에서 주체가 되었던 것은 일반적인 인민들이었고, 정권 초기 이들이 아주 광범위하게 혁명적 일상에 반체제적 감정을 품었다는 근거는 없다. 일부 지주 및 기독교 계층의 반발이 있었던 것은 맞으나, 이것을 일반 민중들의 심각한 불만으로 등치 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런 편견에 대한 반박과 교정작업이라는 생각도 든다. 따라서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책이며, 특히 북한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는 적극 추천하는 역작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그것은 바로 소련에 대한 얘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책은 북한 사람들이 당시 소련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한 얘기가 많지 않다. 물론 일반 민중들이 인민민주주의 정권에서 교육받는 커리큘럼을 통해, 이들이 소련에 대해 긍정적으로 배웠다는 점을 알 수는 있었지만, 실제로 이들이 어떻게 소련을 인식했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를 아무래도 찾아봐야 할 것 같지만, 글쓴이가 아는 바에 따르면 김수지의 경우 당시 대다수 북한 주민들이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생각했고, 또 환영했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 고 있다. 이 부분은 보충적으로 찾아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와 세계가 가지는 북한에 대한 편견에 대해 얘기하겠다. 사실 아직까지도 전 사회적 영역에서 북한을 보는 시선은 큰 틀에서 보자면, 왜곡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최근 들어, 세계 최대의 자본가인 일론 머스크가 한반도의 위성 사진을 트위터에 공개했다. 일론 머스크가 공개한 사진을 보면, 남한은 불빛이 많이 있고, 북한은 평양이나 일부 지방도시들 빼고는 어둡다. 그러나 이러한 사진과 주장들은 역사학자인 김수지가 자주 반론을 제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이 사진의 경우 사진을 여러 장 겹쳐서 만든 것이다. 거기다 김수지에 따르면, 북조선은 한국이나 일본보다 야간 조도가 낮은 유일한 국가가 아니며, 아프리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국으로 이어지는 광범위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1인당 전력 소비량은 미국과 유럽에 미치지 못한다.” , 이 점에서 프로파간다와 서구식 발전주의의 프레임이 사회에 편향 및 선전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우리는 이런 시각으로 북한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김수지는 책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의문을 던지고 있다. 아래 김수지가 책에 쓴 내용을 언급하며 긴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다.

 

동아시아의 위성사진을 보면 한반도 이남은 그 주변 지역과 함께 빛으로 둘러싸여 있는 반면, 이북 지역은 수도인 평양을 제외하고는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이 사진은 20021223일 도널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이 뉴스 브리핑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이후 북조선의 후진성을 보여 주는 이미지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밤에 찍은 한반도 위성사진을 보면, 한반도 남쪽이 빛과 에너지 그리고 활력과 경제 호황으로 가득 차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한반도 북쪽은 그저 어둡기만 합니다.” 뒤이어 그는 무미건조하게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비극입니다.” 분명 북조선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 그런데 이 비극의 정확한 본질은 무엇인가?

 

위에서 언급된 위성사진이 제작되는 과정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사진을 여러 장 겹쳐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현대 기술의 산물인 위성사진은 지구궤도에서 다각도로 촬영한(정확하게 말하자면, 236개 궤도에서 촬영한) 다중 이미지를 합성해 화재나 번개 같은 이상 현상을 보정하는 정교한 알고리즘을 거쳐 완성된다. , 럼스펠드의 말처럼 위성사진은 하늘에서 맨눈으로 볼 수 있는 실제 모습이 아닐뿐더러 그 사진 자체가 원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낸다고 할 수도 없다. 이 점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조선으로 약칭]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들 역시 북조선에 대한 어떤 일정한 전제들에 맞춰 사용되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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