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의 전쟁 -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냉전까지, 스탈린은 소련을 어떻게 이끌었나
제프리 로버츠 지음, 김남섭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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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 한국 사회에서 이오시프 스탈린 하면 가장 강조되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아마도 스탈린에게 붙는 수식어는 학살’, ‘독재’, ‘숙청’, ‘폭군과 같은 부정적인 표현들이다. 당장 세계사 관련 강의에서 스탈린 관련 강연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하는 얘기들이 앞서 말한 수식어에 전부 다 끼어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대숙청, 고려인 강제 이주, 독소 불가침 조약, 냉전의 시작 등 이러한 소재는 스탈린 개인을 강력히 비난하기 위한 서방측의 소재 중 하나다. 그런 이미지와 더불어 한국에서 강조되는 스탈린에 대한 인식은 “1950625일 김일성의 불법 남침을 허용한 분단의 원흉이라는 주장이다. 마찬가지로 서방 사회가 가진 스탈린에 대한 이미지 또한 앞서 언급한 수식어들에 다 맞아 들어간다. 이들이 하는 주장을 보면, 스탈린은 항상 학살자여야만 하고, 독재자여야만 하며, 긍정적으로 서술돼야 할 부분이 하나도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위 서방 사회가 주장하는 그러한 이미지만 가지고 해석이 가능한 인물이 아니다. 특히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를 생각해보면 말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1941622일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한 시점부터 194559일 독일이 공식적으로 연합국에게 항복하는 시점까지 스탈린이 지휘했던 소련군은 과연 무엇을 했는지 말이다. 히틀러의 소련 침공으로 세계 역사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파괴와 살상을 경험했다. 히틀러의 군대는 현대화된 수만 대의 항공기와 수만 대의 탱크와 장갑차 그리고 서부전선에서 훈련된 수백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소련을 침공했다. 나치의 진격으로 소련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그리고 스탈린그라드까지 전선이 밀렸으나, 모스크바 전투와 스탈린그라드 전투 그리고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승전을 통해, 동부전선 곳곳에서 파시스트 침략자들을 격퇴했고, 1945년에 궁극적으로 승리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단순히 소련군과 소련군 장성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한 민중들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이었을까? 이런 점을 생각해보자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소련의 지도자였다. 스탈린을 비난하기 바쁜 인물들은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과 1941년 독일군의 침공으로 밀린 전선과 그에 따른 막대한 인명피해를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은 어떤 면에선 서구사회의 단편적인 역사해석에 가깝다. 우선 독소 불가침 조약을 예로 들자면, 과거 서구 학계는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이라는 소재를 통해 스탈린을 히틀러와 같은 폭군이자 학살자로 묘사하고 싶어 했다. 여기에는 냉전시대 소련에 대해 흑색선전과 비난을 하던 인사들도 합류했다.

 

하지만 독소 불가침 조약의 맥락에는 파시즘 위협을 대비하기 위한 시간벌기라는 목적이 있었다. 1938년 뮌헨 협정 이후 나치 독일에게 양보만 보이던 서방의 모습에 스탈린은 그 누구보다 비판했던 인물이었으며, 스페인 내전 당시에도 적어도 서방보다 지원을 더 많이 했다. 1930년대 파시즘이라는 위협속에서 스탈린은 어떻게든 이들에 맞설 시간을 벌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체결한 것이 소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 알려진 독소 불가침 조약이었다. 물론 이것이 나치독일과 소련 양국의 군사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동맹을 뜻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으며, 스탈린은 독일의 침공을 대비하기 위해 최신식 전차와 항공기 등의 생산가동을 강화했으며, 1938년 당시 150만 명이었던 붉은 군대는 1941년엔 500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길 것이다. 왜 스탈린은 예상되는 전쟁을 대비했음에도, 독일군의 기습 공격 시점 자체를 빗나갈 정도로 파악하지 못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당시 히틀러는 영국과의 전쟁을 끝내지 않은 상태였다. 1940년 프랑스 점령 이후 독일은 영국을 상대로 항공전을 벌였고, 결과적으로 항공전에서 패배했다. 항공전에서 승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독일이 곧바로 침공하지 않을 거라는 게 스탈린의 판단이었다. 생각해보면, 스탈린의 판단은 제법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과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빌헬름 2세가 겪은 양면전선은 결국 패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스탈린의 합리적인 판단을 초월하는 전무후무한 침략자였다. 그래서 1941622일 독소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의 지도력은 탁월했다. 비록 스탈린은 소위 대테러라 불리는 대숙청을 단행하여, 무고한 희생자를 불러오긴 했지만, 독소전쟁 시점에선 소련의 장성 및 군사 전략가들과 협력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스탈린은 개인적으로 매우 부지런하게 일하는 사람이었고, 오히려 밑에 있는 사람이 그 열정을 따라가기 힘든 예도 있었다. 적어도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까지 진격했음에도 탁월한 용기와 지도력을 보여, 소련 인민들을 파시스트에 맞서 단결시켰고, 독일군에게 쓰라린 패배를 맞보게 했다. 그 이후에도 스탈린의 보인 지도력 덕분에 소련의 군사전략가들은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스탈린에 대한 제프리 로버츠의 평가를 보자.

 

스탈린은 매우 유능하고 대단히 성공적인 전쟁 지도자였다. 스탈린은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야만적인 정책을 추구하여 수많은 인민의 죽음을 야기했지만, 그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소련은 나치 독일에 맞선 전쟁에서 패배했을 것이다. 처칠, 히틀러, 무솔리니, 루스벨트, 그들은 모두 군사 지도자로서 대체 가능한 인물이었지만 스탈린은 그렇지 않았다.”

 

출처: 스탈린의 전쟁 p.7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은 군인 1,000만 명과 민간인 1,700만 명을 포함해 2,700만 명에 달하는 인명이 목숨을 잃었다. 독소전쟁으로 무려 2,500만 명의 소련인이 집을 잃었고, 1,700여 개의 도시와 소읍, 7만 이상의 촌락, 32,000개 이상의 공장, 65,000km의 철도, 10만의 콜호즈와 소호즈가 파괴 또는 소실됐다. 히틀러의 침공으로 소련 국부의 1/3이 날아가버렸다. 이러한 인명손실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받은 군사적 손실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동부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소련군은 600개 이상의 적군 사단(독일군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 크로아티아군을 포함해)을 괴멸시켰다. 특히 독일의 경우 동부전선에서 300만 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1,000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독일 총 전쟁 사상자의 75%), 히틀러의 추축 동맹국들은 100만 명을 잃었다. 붉은 군대는 48,000대의 적군 탱크, 167,000문의 대포, 77,000대의 항공기를 파괴했다.”

 

출처: 스탈린의 전쟁 p.45~46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1943년 쿠르스크 전투 그리고 1944년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의 승리는 스탈린과 소련군 장성 그리고 소련군대가 군사적으로 탁월한 군대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19446월부터 8월까지 소련군이 동부전선 전역에서 반격한 일명 바그라티온 작전에는 제1, 2, 3 벨라루스 전선군들과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동원됐다. 4개의 전선군은 240만 명의 병력과 5,200대의 탱크, 36,000문의 대포, 5,300대의 항공기로 구성됐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은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를 탈환했고,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를 탈환했으며, 우크라이나의 중심지인 리보프를 탈환했다. 그 결과 동부전선 전역에 있는 수많은 곳이 소련군에 의해 해방됐고, 독일의 추축국 동맹은 점차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소련군이 이렇게 많은 지역을 파시스트 침략자에 맞서 해방할 당시, 영미 연합군은 그해 6월 프랑스 북부 해안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겨우 제2 전선을 구축했을 뿐이었다. 소련군의 이러한 군사적 성공에는 스탈린의 지도력이 한몫했다.

 

스탈린그라드 때부터 쭉 있었던 일은 스탈린이 더 많이 귀를 기울였고, 자문이 좋을수록 그것을 더 잘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탈린뿐 아니라 소련 장군들도 전쟁 1일 차부터 가파른 학습 곡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바로 이 쓰라린 패배 경험을 통해 장군들은 더 좋은 사령관이 되었고 스탈린은 더 나은 최고 사령관이 되었을 뿐이다.”

 

출처: 스탈린의 전쟁 p.278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에 맞서 승리할 수 있는데 크게 기여한 지도자는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제2차 세계대전 승리에 기여한 역사는 서방세계에서 아직도 공정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이런 문제점을 아주 잘 잡아주는 책이 이번에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번역한 제프리 로버츠의 책 <스탈린의 전쟁>이다.

 

사실 글쓴이는 이 책이 국내에 출판되기 전 제프리 로버츠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 책이 출판되기 몇 년 전 국내 언론사가 보도한 기사를 읽었는데, 그 기사가 바로 제프리 로버츠가 내리는 스탈린에 대한 평가였기 때문이다. 제프리 로버츠는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잔혹한 독재자이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뛰어난 전시 지도자였고, 전쟁 이후 평화를 추구했다고 얘기했다. 그래서 제프리 로버츠라는 인물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올해 베트남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페친을 통해 제프리 로버츠의 책이 국내에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글쓴이는 귀국하자마자 책을 구매했고 너무나도 흥미롭게 이 책을 읽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업적을 재평가한 책은 국내에 있긴 하다.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이나,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 1941-1945>가 대표적인 예시다. 그러나 이 책들은 주로 군사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지, 당시 소련군을 총괄적으로 지도하며 승리에 기여한 스탈린의 헌신과 노력은 크게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제프리 로버츠의 책은 여러모로 큰 의미를 지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로버츠의 책은 스탈린 인물에 대한 평가를 담은 국내 출판물 중에 가장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강철권력>이나 올레크 흘레브뉵의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 등은 이오시프 스탈린 개인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스탈린이 보인 지도력과 냉전시기 평화를 위한 노력 등은 기본적으로 생략된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반면에 로버츠의 책은 스탈린의 노력을 드러내고자 하는 노력과 헌신이 보였다. 그런 점에서도 참으로 훌륭했다.

 

특히나 냉전시대에 대한 제프리 로버츠의 평가는 상당히 탁월하고 훌륭하다. 냉전시기 서구사회는 냉전의 책임을 소련에게 전가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저서들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소련과 스탈린은 반파시즘 인민전선 투쟁에서 얻은 전유물 한에서만 세력을 넓혔지, 다른 곳에 깊숙이 개입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바로 소련의 경쟁자 미국과는 분명히 달랐다. 로버츠 또한 냉전의 책임은 스탈린이 아닌 영국과 미국에게 책임이 더 있다고 본다. 1946년 처칠의 철의장막 연설이나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의 선포는 스탈린을 전적으로 자극하는 행위였다. 처칠의 철의장막 연설이 있고나서, 스탈린은 이에 대한 항의의 반박문을 프라우다지 등 소련 기관지에 실었다. 19466월 몰로토프는 미국과 서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항의하기도 했다.

 

세계에 미국이 안 보이는 구석이라곤 없습니다. 미국은 가는 곳마다, 아이슬란드, 그리스, 이탈리아, 튀르키예, 중국, 인도네시아 등지에 공군기지가 있고, 태평양에는 더 많은 공군 기지와 해군 기지가 있습니다. 소련의 군대는 중국을 비롯해 다른 외국 영토들에서 철수했습니다만, 미국은 아이슬란드 정부에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슬란드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중국에서도 병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진정한 팽창주의의 증거로, 제국주의 정책을 꾀하는 어떤 미국 집단의 노력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출처: 스탈린의 전쟁 p.506

 

당시 소련과 스탈린이 미국과 달리 개입주의적 성격을 띠지 않은 이유에 대해 제프리 로버츠에 따르면 냉전 초기 유럽 내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알바니아는 전쟁 전에 비해 공산당원이 1,000명에서 12,000명으로 급증했다. 중립국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는 16,000명에서 132,000, 벨기에는 1만 명에서 12만 명, 영국은 15,000명에서, 5만 명, 프랑스는 34만 명에서 100만 명, 독일은 30만 명에서 80만 명 등으로 증가했다.서유럽만 해도(알바니아는 동유럽이니 여기서는 논외) 공산당원의 숫자가 급증했으며, 동유럽에서의 당원 증가비율은 어마어마했다. 전쟁 이후 유럽에서 실행된 선거 결과를 보자.

 

유럽 공산주의자들이 보여준 이 인상적인 전후의 실적은 전쟁 후 실시된 선거 결과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동유럽 수치만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불가리아의 경우, 194511월 선거에서 공산주의가 이끄는 조국전선이 투표의 88%를 득표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 19465월 공산주의자들은 투표의 38%를 획득했다. 헝가리에서 공산주의자들은 194511월에는 불과 15%의 투표만 획득했지만 19478월 선거에서는 22%까지 증가했고, 당이 이끄는 좌익 블록은 의석이 66%를 얻었다. 19471월 폴란드 선거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민주블록은 80%의 표를 받았다. 루마니아의 경우, 194611월에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민주주의 정당 블록이 투표의 80%를 득표했다. 유고슬라비아의 경우, 194511월에 야당이 선거를 보이콧하여 대안 후보가 없었음에도 유권자의 90%가 공산주의자들의 인민전선에 투표했다.”

 

출처: 스탈린의 전쟁 p.422~423

 

비록 책 본문에서는 크게 강조하지 않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은 반식민주의 해방운동과의 연관성을 땔 수 없는 것 같다. 1943년 코민테른은 해체되었지만, 그것을 구성하던 조직적 요소들 중 많은 요소는 이전처럼 계속 기능을 했다. 또한 1947년 쯤 코민포름이라는 것이 구성되면서, 식민지 해방운동과도 연계가 됐고,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역에서의 인민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는 요소로도 작용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차이나 반도나 한반도 이북에서 인민민주주의적 개혁이 이루어졌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1935년 코민테른 제7차대회에서 결정된 인민전선이 식민지 해방운동 속에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미국이 지원한 세력들은 지주와 자본가를 중심으로 하는 친식민주의 혹은 친파시즘적 세력이었다는 점에서 소련과는 명확한 차이점을 보인다. 아래는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코민토름 회의에서 한 연설이다.

 

우리가 전쟁의 종결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전후 국제 정치에서 두 가지 기본 지향이 더욱더 분명히 두드러지는데, 이는 두 개의 기본 진영으로의 분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제국주의ㆍ반민주주의 진영이 하나이고 반제국주의ㆍ민주주의 진영이 다른 하나입니다. 제국주의 진영을 이끄는 주요 세력은 미국입니다. 제국주의 진영의 근본적인 목표는 제국주의를 강화하고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을 준비하고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에 맞서 싸우고 반동적ㆍ반민주주의적ㆍ친파시즘 체제와 운동을 전면적으로 지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제국주의 진영은 모든 나라에서 반동적ㆍ반민주주의적 분자들에 의지하고, 자신의 전시 동맹국들에 반대하여 이전의 전쟁 적국들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반제국주의ㆍ반파시즘 세력은 다른 진영을 구성하는데, 이 세력의 중추는 소련과 신민주주의 국가들입니다. 이 진영의 목표는 새로운 전쟁과 제국주의 팽창의 위협에 맞서 싸우고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며 파시즘 잔재를 뿌리 뽑는 것입니다.”

 

출처: 스탈린의 전쟁 p.526~527

 

앞서 강조했듯이 제프리 로버츠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이 보인 리더쉽에 대한 재평가와 냉전시대에 대한 재해석이다. 그러나 글쓴이가 보기에 로버츠의 책 또한 몇몇 부분에서는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스탈린이 1930년대 단행했던 강제 이주 정책에 대해 인종청소라고 표현한다든지, 1943년 나치 독일이 주장한 카틴 대학살에 대해 소련 측 학살만을 주장하는 자료만 인용한다든지, 전쟁 말기 소련군의 전시 강간을 다루는 부분에서 유고슬라비아의 친미 반공주의자인 밀로반 질라스의 검증되지 않은 증언을 액면 그대로 인용한다든지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부분에선 제프리 로버츠 또한 역사해석에 있어서 한계가 있다.

 

또한 냉전을 다루는 파트에서 한국전쟁을 다루는 파트도 너무 서구의 일방적인 시각으로 집필된 느낌을 버리질 못했다. 저자 제프리 로버츠가 서양 현대사에서 소련사를 전공으로 하고 스탈린에 관해 주로 연구한 사람이다 보니, 한반도 상황에 대해서 너무 단편적으로만 접근했다. 한국전쟁에 대해 스탈린의 실패라는 구절을 쓰는 건 둘째치고, 굳이 김일성의 침공 부분만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까? 로버츠 또한 김일성의 증언을 토대로 일부 남로당들의 무장투쟁을 잠시나마 언급했는데, 최소한 해방 이후 미국이 이승만 정부를 세우는 과정에서 저지른 제주 4.3학살을 포함한 서방 쪽의 심각한 폭력에 대해선 왜 언급조차 안 했는지 다소 불편했다. 저자가 이쪽으론 비전공자니 보이는 한계라고 단순히 생각해야 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

 

물론 제프리 로버츠가 이러한 한계점을 보인다고 해서, 책 자체를 헐뜯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런 한계점들은 여전히 좀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책의 저자는 현재까지도 서방 사회가 무작정 폄하의 대상으로만 보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또 다른 이면을 조명하기 위해 큰 노력을 했고,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 책을 통해 보였다. 특히나 스탈린이라는 인물을 주제로 다룬 국내 번역서 중에 2·3차 가공된 책이 이 정도로 스탈린에 대해 재평가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로버트 서비스나 올레크 흘레브뉵의 경우만 봐도 스탈린에 대해 재평가는커녕, 비하하기 바쁘다. 반면에 로버츠는 스탈린의 리더쉽과 외교술을 조명하기 위해 여러 자료와 근거들을 인용하고자 한 것이 보인다. 그런 점에서 로버츠의 <스탈린의 전쟁>은 서방 사학자가 쓴 스탈린 관련 책 중에 제법 읽어볼 만한 가치가 높은 책이라 생각한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제법 얻을 만한 점들도 많다고도 본다.

 

따라서 세계사와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과 스탈린에 대한 재평가가 궁금한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적극적으로 권하는 바이며, 앞으로도 이런 훌륭한 스탈린 관련 서적이 국내에 많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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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습니다. 키이우는 평온합니다. 건물이 멀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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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끼이프(Киев)는 폭격 없이 도시가 버텼습니다. 왜냐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전선이 대부분 동부 우크라이나 쪽에 있기 때문에 전선에서 꽤 떨어져있기 때문이지요.
 

1990년 독일 통일과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냉전은 미국의 승리로 종결됐다. 1975년 베트남 전쟁에서 패전한 미국은 이른바 베트남 신드롬(베트남 트라우마, Vietnam Syndrome)을 겪었다. 1980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은 이른바 미국의 애국주의와 반공주의를 내세웠고, 1983년 그레나다를 침공하여, 미국의 성공적인 군사작전을 전 세계에 대대적으로 홍보하고자 했다. 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정책을 이어받은 아버지 조지 부시 또한 1989년 파나마를 침공하여, 군사작전의 성공을 홍보했다. 그레나다 침공이나 파나마 침공이나, 미국의 개입 명분은 표면적으론 공산주의 세력 소탕이거나 독재자 축출이었다.

(1999년 코소보 내전 당시 미군 폭격을 받은 베오그라드)

 

냉전 말기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더불어 미국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이후 대규모 군사작전을 동반한 전쟁에 참전했다. 그것이 바로 걸프전쟁(Gulf War)이었다. 1991117일 미국의 노먼 슈워츠코프(Norman H. Schwartzkopf) 장군이 이끄는 다국적군은 쿠웨이트를 침공한 후세인의 이라크군을 공격했다. 미국 및 31개국이 모인 다국적군의 병력은 54만 명이 넘었고, 1,800대의 항공기로 구성됐다. 작전을 전개하자, 세간의 예상과는 달리 이라크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당시 미국은 걸프전쟁 6주 동안 베트남 전쟁 당시 9개월 동안 북베트남에 투하한 양보다 2배가 넘는 레이저 유도 폭탄들을 투하했다. 공중발사순항미사일부터 M1에이브람스 탱크 그리고 베트남 전쟁 당시보다 성능이 훨씬 강화된 B-52 폭격기와 유도미사일까지 걸프전쟁은 미군의 최신식 무기 실험장이 됐다. 6주 만에 이라크군은 10만 명 이상이 전사하고 30만 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6만 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세르비아 어느 도시, 예전에 밀로셰비치쪽 지지자가 만든 영상을 유튜브로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영상에선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언급했었다. 밀로셰비치의 인종청소적 만행과는 별개로 유고 내전 당시 미군의 폭격은 참혹했다.)

 

연합군의 공중 폭격은 이라크 육군에도 상당한 피해를 입혔는데, 전쟁이 끝날 무렵 이라크 육군은 탱크의 76%, 병력 수송 장갑차 55%, 그리고 포병 전력 90%의 손실을 입었다. 현재까지도 미군의 전쟁범죄로 규탄 받는 죽음의 고속도로(Death of Highway)에서는 최소 수천 명의 병사 및 민간인(이 부분은 좀 논란이 있다고 한다. 사망자 추정치는 최소 수백 명에서 최대 1만 명까지도 집계한다.)의 죽음과 더불어 수천 대의 차량도 파괴됐다. 그 외에 당시 미군 공습으로 사망한 이라크 민간인은 람제 클라크의 추산에 따르면 25,000명이나 된다. 반면에 다국적군 사상자는 사망자 148명을 포함하여 300명의 군사상자와 31대의 탱크가 파괴된 수준이었다.

 

1991년 걸프전쟁 종결 10개월 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붕괴했고, 미국은 냉전의 승리자로써 기억됐다. 그러나 냉전에서의 미국의 승리가 세계 평화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미국은 여전히 전 세계 분쟁에 간섭하고 있었으며, 자국의 이익에 방해되는 존재에게는 악랄한 철퇴를 가하고 있었다. 199310월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했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정부에 대한 색깔혁명 공세와 살인적인 경제제재를 멈추질 않았으며, 북한의 김일성 정부 또한 미국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음에도 묵살 당했으며 미국은 1994년 전쟁 위기를 의도적으로 조성했었다. 냉전의 승리는 자본주의 진영의 일시적인 승리를 가져왔으나. 이것은 미국의 신제국주의적 폭력의 정당화로 이어졌다. 그런 과정에서 또 다른 나라에 끔찍한 내전이 벌어졌다. 그것이 바로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다.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자신의 집을 바라보는 세르비아의 한 여성)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20세기 역사에 있어 최악의 내전이자, 국제분쟁이었다. 서로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와 혐오, 민간인 학살, 인종청소, 부녀자들과 아이들에 대한 인권 유린 등,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나치가 저질렀던 만행들이 이 내전이 지속되는 와중에 일어났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과 인종청소는 참으로 추악하고도 잔인했다. 그러나 이 추악하고 잔혹한 내전에, 이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학살극을 벌인 나라가 있었고, 이는 당연히 미국을 위시한 NATO 세력들이었다.

 

지금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 유고슬라비아는 현재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보스니아를 합친 6개의 연방으로 이루어진 국가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았던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공산주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4년간의 파르티잔(빨치산) 투쟁을 전개했었다. 동쪽에서 진격하던 소련군과 연합하여 유고슬라비아를 해방시킨 티토는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가 되었다. 냉전 초기 스탈린과 대립하던 티토는 동유럽 국가 중에 유일하게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가 되었고, 이른바 자주노선을 택하면서 미국과 소련 그리고 제3세계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했었다.

 

그러나 1980년 티토가 사망한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점차 힘을 잃게 되었고,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연방이 해체가 되었고, 티토 사후 표출된 민족갈등 그리고 종족 갈등은 내전으로 이어졌다. 물론 이것이 내전으로 이어지고 연방국가로 나뉘게 된 것은 유고슬라비아의 인구 구성이 많은 종족만 하더라도 40% 안팎이었던 점도 많이 작용했다. 1992()유고슬라비아 연방이던 보스니아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3년 동안 지속되었던 이 보스니아 내전에서 세르비아측은 차마 입으로 표현하기도 힘든 학살과 범죄 그리고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당시 미국은 평화유지군(사실상 NATO)의 일원으로 대략 2만 명이 넘는 병력을 파병했다. 이것은 평화유지군으로 들어갔던 미지상군을 뜻한다.

 

19934월 미국과 NATO 소속의 항공기들은 이른바 작전명 디나이플라이트(Deny Flight)로 알려지게 되는 작전에서 보스니아에 비행금지구역을 강제로 적용했다. 그해 8NATO는 사라예보를 포위하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들을 응징하기 위해 공중폭격을 실시하겠다고 위협했다. 19944월 미군 항공기들은 세르비아측의 목표물들에 산발적인 항공기 타격을 가했지만, 세르비아는 소위 유엔 피난처였던 스레브니차를 침공하여 수천 명의 시민들을 무참하게 살육했다.

(미군의 F-117 스텔스 전투기, 천문학적인 비용과 좋은 성능을 자랑하는 미군 전투기다.)

 

1995828일 세르비아측이 사라예보(1차 세계대전의 발단이 된 그 도시다.)의 시장에 박격포 공격을 가했다. 이러자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세르비아를 협상 장으로 끌어내 내전을 종식시킨다는 명분으로 딜리버레이트포스 작전(Deliberate Force)을 전개했다. 17일에 걸친 이 작전에서 NATO400대 이상의 항공기가 항시 대기하면서 5개국 18개 비행장과 최대 3척의 항공모함에서 3,500회 이상의 비행을 수행했다.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NATO(사실상 미군이라 봐야함) 항공기는 1,026발의 폭탄과 미사일을 48개의 표적에 발사했다. 이는 걸프전쟁 당시 항공 작전에서 하루 동안 퍼부은 폭탄의 양과 거의 비슷한 규모다.

 

미국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보스니아 내전에도 개입했다. 이 과정에서 RQ-1 프레데테 무인 항공기(UAV)도 실전에 투입했다. 알바니아의 자데르에 있는 부대가 보스니아로 날아가는 프레데테를 조종했고, 15회나 출격시켰다. 이 중 12회는 효과적으로 150시간 이상 보스니아를 감시했다. 작전 중 프레데터가 입수한 이미지는 세르비아가 사라예보에서 퇴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했고, 결국 공습을 지속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물론 이것이 효과가 크기 않았기에 미국은 공습을 지속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당시 미군의 교전 방식은 단순했다. 세르비아측을 섬멸하기 위해 들어간 미군은 세르비아측 저격수가 사격을 가하면 바로 공군기를 출동시켜 저격수가 있는 건물 자체를 무너뜨려 버렸다. 특히나 F-16혹은 F-18 공군기가 세르비아군 거점에다 무차별 맹폭을 가했었다. 아무튼 내전은 전황이 불리해진 세르비아가 협상 테이블로 나오면서 종결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인 1998년 내전이 다시 발발했다. 그 전쟁이 바로 코소보 내전이었다. 코소보 지역에서 내전이 발발하자 미국은 1999324일부터 610일까지 작전을 전개했다. 작전명은 얼라이드포스(Allied Force)였다. 이 작전은 78일간 전개되었고, 829대의 항공기가 동원되었으며, 38,000회 이상의 비행을 실시했었다.

(B-2 스텔스 폭격기, 1999년 코소보 내전 당시 이 폭격기는 이른바 출퇴근 폭격을 수행하기도 했다. , 미국 본토에서 출격하여 유고슬라비아를 폭격한 뒤 다시 본토로 귀국했다.)

 

당시 미군이 투입한 항공기 종류는 군사전문가인 이세환(샤를 세환)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전투기 F-16, 전투기 F-15, F-117, B-52, B-1B 그리고 B-2A였다. 특히나 스텔스 폭격기인 B-2A의 경우 폭격 작전에서 미국 본토에 있는 공군기지에서 발진했다. 중간에 급유기로부터 기름을 지원받으며 유고슬라비아까지 가서 폭격임무를 마친 뒤 미국 본토로 귀국하는 기록을 보여주었다. 이 스텔스기는 출퇴근 폭격을 수행했다. 18톤의 폭탄을 장착하고 있었고, 폭격 임무에는 스마트탄과 같은 최첨단 폭탄을 사용했다. 그 항공기 1대만 2조원(한국돈 기준임)에 달한다고 한다. 말 그대로 미국은 코소보 내전에서 매우 비싼 항공기를 투입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가 연합군 헬리콥터 발진기지로 사용됐고, 미국의 루스벨트 항공모함과 프랑스군 항모 포슈가 폭격작전에 동원됐다.

 

코소보 내전 동안 미군을 위시한 NATO군은 세르비아의 목표물에 23,600발 이상의 폭탄을 사용했다. 미군의 첫 공격에만 미국 수상함 4척과 미국 잠수함 2, 영국 잠수함 1척이 나섰고, 214대의 미국 항공기와 130대의 연합군 항공기가 100여 발의 레이저 유도 폭탄을 투하했었다. 국내의 군사전문가 이세환에 따르면, 군사작전 첫날만 해도 총 400대의 NATO 항공기가 유고슬라비아의 하늘을 덮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따른 민간인 희생자가 코소보 내전 당시 미군의 폭격에 의해 발생했다. 유고슬라비아측 추산에 따르면, 8,000명 이상의 민간인 사상자가 나왔는데, 폭격 기간 동안 대략 2,500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반면, 휴먼라이츠워치는 민간인 사망자가 500명 안팎이라고 낮게 추산했다.

(1999년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중국 대사관)

 

1999424일 폭격에선 베오그라드에 있는 방송국이 폭격을 받아서, 30명의 사상자(이 중 16명이 사망)가 나왔다. 이에 대해, 언어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는 명백한 테러이자 전쟁범죄라고 주장했다. 또한 57일 베오그라드의 유고슬라비아군 관련 기관을 겨냥했던 합동직격탄 3발이 중국 대사관에 투하되어 중국 대사관측 인사 4명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추가적으로 중국 대사관에 있던 세르비아인 14명이 숨지고 2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외교 위기를 촉발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2주간 베오그라드에서 폭격이 중단됐다.

(빌 클린턴을 나치에 빚대어 표현한 당시 중국의 반전 시위대)

 

그 외에도 1999412일 세르비아 공화국 남부 그루데라츠카 크리슈라 철교와 통과 중이던 열차가 폭격을 받아 민간인 20명이 사망했고, 414일 코소보 자치주 자코비차에서 알바니아인 난민이 탄 차량 행렬이 폭격을 받아 약 75명이 사망하고 100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57일 세르비아 공화국 니슈 시 중심부 주택가에 클러스터 폭탄이 떨어져 14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당하는 일도 있었으며, 531일 세르비아 공화국의 슬르도차에 있는 병원이 미사일 두 발을 맞아 16~17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걸프전쟁 당시 미국을 위시한 다국적군은 방사선을 포함한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했다. 열화우라늄탄은 중금속 화학적 독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심각한 건강 피해를 초래하는 무기였다. , 이러한 무기의 사용으로 사용한 미군 병사는 두통, 현기증, 백혈병, , 간과 장의 불안 등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 폭탄 피해자들은 백혈병, , 선천성 장애아 출산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걸프전쟁에서 이러한 무기가 사용되어 미군 군인과 이라크 민간인에게 피해가 생겼는데, 미국은 1995년 보스니아 내전과 1999년 코소보 내전에서도 이 폭탄을 상용했다. 그 결과 NATO군 병사와 현지 주민들도 같은 건강 피해 증상이 나타났다. 오죽하면 이에 대해 발칸증후군이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다.

(코소보 내전 당시 투입된 미군 테어도어 루스벨트 항공모함, 이와 더불어 프랑스측 항공모함도 폭격에 동원됐다.)

 

이런 민간인 사상자가 나오자 NATO는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한 부수적 피해 혹은 오폭이라는 변명을 했다. 비록 민간인 사망자를 낮은 수치로 추산했지만, 휴먼라이츠워치는 이러한 민간인 사망 사건이 최소 90건 이상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반면에 미국 국방성의 발표는 20~30건으로 축소됐다. NATO는 공습으로 5,0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했으나, 여기에 군인과 민간인의 구분은 명확하지 못하다. 거기다 NATO군의 항공부대가 발사한 23,614발의 무기 가운데 8,160발이 정밀 유도병기로 전체에서 34%정도에 해당했다. , 나머지 무기는 무차별 폭격으로 사용될 무기였고, 유도병기들도 적잖은 오폭을 일으켰다.

(1999년 코소보 주변을 정찰하는 미 지상군)

 

코소보 내전 당시 미국은 3달간의 폭격 임무를 수행하며, 전쟁 영웅을 만드는 데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9327일 오후 815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수도 베오그라드 북서쪽 3지점 상공에서 공습을 마치고 귀환하던 미 공군 조종사 데일 젤코 중령이 조종하던 F-117 스텔스 전투기가 세르비아 측 방공전력에 의해 격추됐다. 조종사는 격추된 스텔스기에서 탈출했고, 격추 8시간 만에 미군 구출팀에 의해 구출됐다. 비록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간 스텔스 전투기중 한 대가 유고 상공에서 격추되었다는 점은 미국 정부에겐 아까운 손실이었을 꺼다. 이후 스텔스 전투기 조종사의 탈출기에 대한 이야기는 미국 내에서 제법 홍보됐고, 이후엔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도 다큐로 제작됐다.

(데일 젤코 중령, 1999년 폭격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 세르비아 방공망에 의해 격추된 스텔스기의 조종사다.)

 

종합해보자면, 미국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개입하여 NATO군의 형태로 최신식 폭격을 감행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도중 일어난 인종청소로 수십만 명이나 되는 인명이 학살당했다. 그런 점에서, 유고슬라비아의 민족 갈등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생각해봐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빌미로 유고슬라비아를 폭격하고, 또 최신식 무기의 성능을 실험하는 장소로 유고슬라비아를 선택했다. 1994년과 1995년 당시 폭격 그리고 1999년의 폭격은 냉전 이후 발달된 미국의 신무기 실험 현장이었다. 물론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에 비하면, 미군의 폭탄 실험은 전에 경험한 전쟁에 비해 적은 민간인 사상자를 불러왔지만, 이것이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는 얘기가 되지는 못했다.

 

20019.11 테러 이후 미국이 일으킨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서 수십만 명의 중동 민간인이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은 미국의 제국주의가 폭격이라는 폭력행위를 얼마든지 정당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미군의 폭격에 대해 전쟁범죄라고 규탄하는 목소리도 제법 있었다. 코소보 내전 당시 최소 2,000명 이상의 세르비아계 미국인들이 뉴욕에서 반전운동을 전개했었고, 호주 시드니에서도 7,000명이 반전시위를 전개했었다고 한다.

 

러시아 연방의 경우 자신들과 비슷한 혈통을 가진 슬라브 민족을 폭격하는 미국에 대해 분노했다고 한다.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폭격에 대해 러시아인의 96%가 이를 반인륜 범죄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푸틴 정권이 시작되던 2000년 당시 조사를 보면 81%가 미국의 정책을 반러시아적이라고 응답했으며, 이는 미국의 유고슬라비아 폭격과 연관이 있었다. 미국의 폭격행위는 1920년대 니카라과 개입부터 현재까지 지속된 역사다. 이 과정에서 미군의 폭격은 무고한 타국 민간인의 피로써 채워졌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미군의 폭격도 그러한 역사 중 일부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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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기원 1 -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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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 전공자로써 앞으로 무조건 읽을 책이다. 완역된다고 하니 정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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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크라이나 세뇌교육을 받은 아이의 모습.

ㅇㅇㅇ 이러고 있음.

현재 나치 협력자 스테판 반데라는 우크라이나의 국부가 되서, 애들한테도 러시아놈들 죽이라고 이러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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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네오나치 사상에 세뇌되어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우크라이나 극우들을 보노라면, 동족인 북한을 적대하고 한반도 침략을 저질러놓고도 반성하지 않는 철천지원수 일본을 우방으로 떠받드는 국내의 친일 수구 뉴라이트들(+일제의힘, 조센닛뽀 등도 포함)과 소름끼치게 닮아있습니다.

newdvs117 2023-07-16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크라이나 극우 네오나치들은 (역사와 문화를 공유한 같은 슬라브족인) 러시아에 대해 혐오감정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5000년간 같은 역사와 문화를 공유한 동족인) 북한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는 국내 수구세력들(MB, 윤석렬, 황공안, 박그네, 뉴라이트, 조선일보, 국짐당 등)과 아주 똑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