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2018년 12월이나 2019년 1월이었던 것 같다. 당시 페북으로 연락하던 한 페친과 처음 오프라인에서 만났다. 페친과 만난 나는 같이 집회에 참여했으며, 같은 역사 전공자로서 한국 현대사 관련 얘기를 나눴다. 이때, 나무위키의 친미 극우 반공주의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는데, 페친이 소위 한국 건군의 아버지로 알려진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usman)이 “한국인은 일본인보다 더한 야비한 새X들이다!”라고 말한 것을 나무위키는 절대 언급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제임스 하우스만의 존재를 알게 됐다.

(제임스 하우스만의 사진, 하우스만은 이후 1990년대 KBS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내가 제임스 하우스만의 존재에 보다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김득중의 박사학위논문인 저서 『빨갱이의 탄생』을 읽게 되면서였다. 김득중의 논문에는 “미군고문단이 여순항쟁에 군사작전상으로 개입한 사실”이 상세히 나와 있었고, 거기서 다시 한번 제임스 하우스만에 대해 제법 상세히 알게 됐다. 글쓴이는 지난번 허호준의 저서 『4.3, 미국에 묻다』를 완독하면서, 미군사고문단이 4.3에 어떻게 개입하여 학살에 관여했는지를 얘기한 적이 있다. 오늘은 한국 현대사에서 제임스 하우스만의 역할이 어떤 것이었는지 얘기해보고자 한다.


제임스 하우스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장교로 참전했고, 1944년 히틀러의 마지막 공세로 알려진 벌지 전투(Battle of Bulge)에도 참전했던 인물이었다. 하우스만은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지 1년 후인 1946년에 한국으로 파견된 인물이다. 하우스만은 조선경비대를 창설하는 것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춘천8연대에 배치되어 연대를 훈련 및 조직하고,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베로스(Russel D.Barros) 대령의 보좌관역할을 수행했다. 해방 이후 당시 이남의 군병력과 경찰의 지휘체계는 일본 육사출신이나 만주군 출신 그리고 친일경찰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하우스만은 광복군 출신들을 상당히 무시했으며, 그 이유에는 “광복군 출신들이 일본군 출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산주의자를 덜 적대했다.”는 데에 있었다. 하우스만에게 있어서 마음에 차고 안차고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반공 이데올로기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통령,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미고문단장 등이 참여하는 군사안전위원회에 참가했다. 하우스만은 군사고문단장과 국군 참모총장 사이의 연락 임무를 맡았으며, 이승만은 “군대에서 당신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나에게 알려 달라, 그를 교체하겠다”라고 할 만큼 제임스 하우스만을 신뢰했다. 제임스 하우스만의 개입이 가장 두드러진 역사적인 사건은 바로 여순항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 4.3과 더불어 여순에서 토벌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한 주체가 미국이었음을 지금까지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하우스만 사망을 보도한 국내 기사, 마치 한국의 군사전문가로만 소개가 됐다.)


여순항쟁은 1948년 10월 19일 한국군 제14연대와 제6연대의 일부가 진압을 거부하면서 일으킨 봉기였다. 이승만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토벌대를 동원했으며, 그 과정에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 당시 이승만이 보낸 토벌대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이 현재까지 발견된 시신만 3,384명이지만, 실제 사망자는 12,000명이라는 추산치가 있을 정도다. 김득중에 따르면, 여순항쟁 당시 미국은 정규부대를 투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신 고문단이 들어갔고, 이들은 사실상 진압군의 지휘관이자, 한국군 장교들과 장성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었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모든 한국군 부대에 미국인 고문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인사는 진압작전의 주요 고문으로 임명된 할리 풀러 대령과 군사고문단 G-3의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 미군 정보부 G-2의 존 리드 대위였다. 여순항쟁 당시 미군은 C-47 수송기를 동원해 한국군 병력과 무기 및 기타 장비를 실어 날랐고, 군사고문단의 정찰기들은 반란이 이어지는 기간 내내 그 지역을 감시했으며, 미국 정보기관들은 미군과 경무부의 정보과에 긴밀히 협력했다. 김득중에 따르면, 당시 하우스만은 토벌대 총사령관인 송호성을 보좌하는 군사고문으로 여순에 파견됐다. 하우스만은 이후 KBS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송호성의 명령에 반하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고문관의 역할을 했다”고 했으며, 하우스만은 여순항쟁 진압을 위한 작전계획을 백선엽과 협의하여 수립했다. 즉, 여순항쟁에서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나온 것은 제임스 하우스만이 세운 군사작전 때문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우스만에 대해 강연을 했던 역사강사 배기성)


실제로 제임스 하우스만은 1949년 1월 10일 미 국방부로부터 미 공로훈장을 수여 받았다. 이 훈장은 은성무공훈장 바로 아래의 4번째 서열에 해당하는 훈장이었는데, 전시가 아닌 평시에 보충역 대위에게 이런 훈장이 주어진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에 따라 김득중의 경우 여순항쟁 당시 미군이 남한 상황을 전시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봤다. 1948년 11월 20일, 총 99명의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미군 주둔에 관한 결의안’을 발의했는데, 이 결의안을 주도한 최윤동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미군은 여수순천 반란과 대구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만약 미군이 없었더라면 국군은 전멸당했을 것이다.”

(여순항쟁 당시 작전을 지휘하는 미군고문단과 한국군)


이런 점에 근거하여 보자면, 여순항쟁에 개입하여 총사령관 이상의 역할을 맡은 제임스 하우스만은 학살의 방조자이자 진정한 수행자였다. 또한, 이 사건에서 남로당이었던 박정희를 살려준 인물이기도 했다. 참고로 하우스만은 일제 간도특설대 출신인 김창룡을 신임한 인물이기도 했다. 김창룡은 한국전쟁 당시 서울 수복 이후 부역자 색출이라는 미명하에 대량의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김창룡은 하우스만에게도 직접 보고하며, 전쟁 이전 군 내부에 침투한 빨갱이 사냥을 자행했다. 2014년에 작성된 제주 언론사 『제주의 소리』 기사에 따르면, 제임스 하우스만은 한국전쟁 당시 한강 다리 폭파에도 책임이 있었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한강교 폭파의 진짜 명령자는 누구인가? 당시 참모부장이었던 김백일은 하우스만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사실상 하우스만이 미군 최고 책임자였다. 하우스만이 한강교를 건너자마자 다리는 폭파되었는데, 하우스만이 단지 행운아였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한강다리 폭파는 육참총장 채병덕- 참모부장 김백일-공병감 최창식-공병학교장 엄홍섭 선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윤영 당시 사회부장관은 회고록에서 "26일 심야 국무회의에서 이범석 국무총리가 처음으로 제안, 이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다"고 밝혀 한강교 폭파가 참모총장보다 윗선에서 결정됐음을 시사했다.”


이 기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임스 하우스만은 한강다리를 폭파한 실질적인 주동자였다고 할 수 있다. 하우스만은 이후에도 46년간이나 한국에 있으면서 한국 현대사의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하우스만은 제주 4.3 항쟁 당시 진압군 지휘관이던 송요찬의 고문이었다. 하우스만은 3.15 부정선거 이후 반이승만 시위가 일어나자, 계엄사령관으로서 송요찬을 통해 미국의지지 철회를 통고했다. 그렇다고 해서 하우스만이 민주주의적 신념이 있는 사람으로 절대 볼 수 없다. 그 증거는 아래 하우스만의 발언을 통해 확인된다.


“우리에게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룬다는 환상이란 없었다. 초보자들에게는 너그러운 독재자가 필요할 것이다.”


참고로 하우스만은 제주 4.3의 현장에도 있었다. 당시,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좌익 문상길이 처형당하자, 처형대에 다가가 그 시체의 머리에 권총을 한 번 더 발사한 인물이 제임스 하우스만이었다. 이후 제주도 시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총살하고 그것을 녹화해 훈련용 교재로 활용한 인물이 하우스만이었으며, 제주도 시민 20여명의 총살을 지시한 일에 대해 문책하던 미국 대사에게 하우스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몇 개 월 전에는 민간인 200명 죽이는 것도 보통이었는데 20명 죽인 것이 무슨 문제냐!”

(김득중의 박사학위논문인 저서 『빨갱이의 탄생』, 이 책은 여순항쟁을 분석한 책으로 당시 미군의 개입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순에서의 민간인 학살 또한 사실은 미국이 자행한 학살임을 알 수 있는 책이다.)


앞서 언급한 인용문을 보면 하우스만은 ‘너그러운 독재자’라 표현했다. 그러나 하우스만이 지원한 한국의 독재자들은 너그러운 독재자가 전혀 아니었으며, 가난한 빈민들을 챙기는 독재자 또한 전혀 아니었다. 이들은 분배와 빈민 해결보단 성장과 재벌 계급의 부의 축적을 우선시했다. 따라서 하우스만이 얘기한 너그러운 독재자들은 실제로 보자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치인이었을 뿐이다. 박정희 또한 5.16을 하기 전 군부 내 쿠데타 기도를 파악한 하우스만의 집에 찾아가 상황을 전했고, 하우스만은 자진에서 미국으로 날아가, 미 육군 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무성, CIA에 박정희와 한국 상황에 대해 브리핑했다. 그 결과 하우스만은 박정희에 대한 훌륭한 정보를 제공한 보답으로 미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공로표창을 받았다.


제임스 하우스만이 한국을 떠난 것은 1981년이다. 지난 2023년 말 국내에서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하면서, 젊은이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한가지 품은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개입이다. ‘서울의 봄’은 훌륭한 영화였지만, 아쉽게도 미국의 개입은 전혀 조명하지 못했다. 글쓴이는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굴곡에 있던 하우스만의 입김이 12.12에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제임스 하우스만은 앞으로도 연구가 많이 되어야할 한국 현대사 주제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 선인, 2009.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옮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현실문화, 2017.


A.B. 에이브람스, 박현주 옮김, 『끝나지 않은 전쟁 I – 북미 대결 70년사』, 민플러스, 2022.


김관후,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미국인’, 제주의 소리, 2014.12.26.,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56322>.


https://ko.wikipedia.org/wiki/제임스_하우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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