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독일의 일본 프로파간다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교양도서 1
이경분 지음 / 제이앤씨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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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에 대한 관심이 한참이던 중고등학생때 나는 나치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이 맺은 3국동맹을 보면서 히틀러의 나치독일은 인종우월주의를 강조하면서 왜 아시아에 있는 일본과 동맹을 맺었는지, 나치독일내에 사는 동양인들의 대우는 어땠는지 또는 정말 독일은 동맹국으로써 일본을 돕고자 했는지 정말 궁금했었다. 현재 서구권에 있는 네오나치들은 동양인을 상대로 적잖은 폭행과 테러 그리고 살인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현 네오나치들이 추종하는 아돌프 히틀러는 한때 동양에 있는 일본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졋던 것 같다. 나는 나치독일과 일본의 관계, 나치독일 내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일상생활 그리고 나치독일이 선전에서 나온 일본은 어떤존재인지 매우 궁금했다.

 

1.나치독일내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받던 대우는 어땠을까?

 

1933년 독일에서 정권을 잡은 아돌프 히틀러는 유대인을 상대로한 반 유대정책을 펼첬고 집시를 비롯한 유럽의 소수민족과 동성애자, 반나치인사, 공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등을 탄압하고 억압했다. 특히 나치독일은 우생학적 논리를 믿었기에 독일의 게르만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했고 특히 히틀러가 아주싫어하던 유대인을 매우 차별하고 탄압했다. 나치가 게르만민족우월주의를 강조함에 때라 나치독일 내에는 인종주의가 만연했고 이는 독일내 거주하던 일본인이나 일본계 독일인들 또한 사회에서 어느정도 차별받는 사례가 적잖게 발생했다. 이런 사례는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독일과 일본이 공식적인 협약을 맺기 전까지 그리고 나치독일일 일본인을 '명예 아리아인'이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붙혀지기 전까지 적잖게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나치독일내에 있던 일본인들은 유대인이나 나치가 공식적으로 매우 차별하는 인종이나 민족에 비해선 대우가 훨씬 좋았고 히틀러 또한 공적인 자리에서 동양인 자체를 특별히 차별하거나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기록에 따르면 히틀러는 오히려 동양 문명에 대해 높이 평가했고 실제로 동양 문명을 칭찬하는 발언을 했던 기록이 존재한다.

 

이 책에 따르면 나치독일 내 일본인 문제가 이슈가 되자 히틀러의 최측근 하인리히 힘러는 "순수 아리아인 처럼 생긴 일본인을 찾아라"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고 나치독일과 일본이 점차 동맹 및 협력관계가 형성되어가자 나치독일안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대우 또한 조금씩 달라졌다 한다.

 

1941년 진주만 기습공격 이후 일본이 동남아 일대를 진격하여 영토를 확장하자 독일 선전 뉴스는 이를 아주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매우 극찬했고 동남아 일대를 침략하며 진격하는 일본군의 모습을 보여주며 용맹한 병사로 묘사했다. 이를 계기로 나치독일인들도 일본인을 기존의 인종차별적 관점과는 다르게 인식했을지도 모르겠다.

 

추가적으로 더 얘기하자면 이후 나치독일은 자국 내에 있는 일본인들을 어느정도 잘 대해줬고 나치독일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하기도 했던 친일파 안익태(그 애국가 작곡한 사람 맞다)또한 나치독일에 거주하면서 굉장히 좋은 대우와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2.나치독일은 왜 일본하고 동맹을 맺었을까?

 

중고등학교에서 세계사 수업을 듣다보면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맺은 3국동맹에 대해 교과서를 통해 알 수 있다. 10대 당시 내가 가장 의아해 하고 궁금했던 부분인데 답은 간단하다.

 

1930년대 히틀러의 나치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재무장하며 영국 프랑스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었고 나치독일 또한 미영프를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에 대항하려 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 또한 미국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에 반감을 가졌고 중일전쟁 당시 영국과 미국이 중국편을 들자 다른 동맹국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치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그리고 일본이 천황은 1940년 삼국동맹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즉 히틀러는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에 반대했기에 일본과의 동맹을 선택한 것이고 일본또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3.과연 나치독일은 동맹국으로써 일본을 적극적으로 도왔는가?

 

사실 독일과 일본이 위치한 거리는 매우 멀다. 굳이 계산하자면 대략 10000km이상은 떨어져 있을 것이다. 나치독일은 10000km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동맹국 일본을 적극적으로 도와줬던 것 같다. 1941년 진주만 기습공격 이후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일본 제국은 3000년간 패한적이 없는 제국이다. 그런 일본이 우리 동맹국이니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라고 하며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반면 일본은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당시 독일을 도와주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독일과 일본과의 협동 군사작전은 없었지만 독일은 무기지원을 비롯한 여러 측면에서 일본은 도와주며 그 나름 우방으로써 간주했던 것 같다. 물론 독일 아래에 붙어있던 이탈리아는 말 그대로 독일에게 짐덩어리 밖에 되지 않는 존재였지만 일본은 10000km 떨어진데다가 독일이 손이 닫지 않는 아시아에서 영국과 미국에 대항하니 아무래도 다르게 보였을 것이다.

 

4, 결론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굳이 생각하지 않거나 잘모르는 부분을 잘 서술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흥미로운 주제에 비해 책 내용이 너무 부실한 부분도 있다. 한 2시간 반에서 3시간 정도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을 수 있는 분량인데다가 주로 적잖은 내용을 친일파 안익태 관련 내용으로 다루는 등 약간의 아쉬움이 남기도 하다. 다르게 보면 이 책의 주제가 그만큼 연구가 되지 않았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나름 신선한 내용들도 있어 어릴적 내가 가지고 있던 궁금증을 어느정도 해소시켜주기도 했다. 그 점에 있어서 이 책은 적잖은 도움이 됐다. 나치독일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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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타빌레 2020-10-25 0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입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NamGiKim 2020-10-25 00: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3층 서기실의 암호 - 태영호 증언
태영호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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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10년을 넘게 한국을 떠나있던 주영한국영사가 지금 청와대와 민주당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속속들이 다 알고있고 문재인대통령을 평가한다고 책을 내면 그 내용을 믿을 사람이 몇 이나 되겠나요? 지금 태영호라는 탈북자가 하는 꼴이 딱 그 꼴인데 그 말들을 믿는 사람들은 생각이란걸 할 줄 모르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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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가될래 2018-06-14 15: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역사에 관심이 많은 20대 청년인데요 김남기씨와는 다른 생각을 합니다. 생각이란걸 할 줄 모른다고 비난하시는 건 무례한 행동이라고 봅니다. 시간을 두고 지켜보아도 나쁘지 않다 생각합니다.

NamGiKim 2018-06-14 15:17   좋아요 0 | URL
네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사실 이 글을 쓴건 제가 좀 감정적으로 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부분은 제가 좀 지나치긴 했지만 저자 태영호는 분명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 봅니다. 무튼 충고 감사합니다.

이종천 2018-06-17 2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씨의 전제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자유분방하고 다이내믹한 대한민국과
70년 계속된 세습독재국가는 달라도
너무 다른거지요. 비유가 적당하지
않아요.
또 수많은 재외공관을 운영하는 한국의
영사와 불과 몇개의 대사관을 유지하는
북한의 공사는 큰 차이가 있지요.

NamGiKim 2018-06-17 21:39   좋아요 0 | URL
북한이 우리나라보다 비민주적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탈북자들 또한 우리 사회가 포옹해야 하는 것이고요. 그러나 남북평화를 반대하는 태영호 같은 인간은 욕쳐먹어도 싸다 봅니다.
 
위 워 솔저스 : 리마스터링
랜달 월레스 감독, 멜 깁슨 외 출연 / 다일리컴퍼니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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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워 솔저스 감상평>



(주의 이 감상평은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65년 미군과 북베트남군이 정규전으로서 처음 맞붙었던 이아드랑 전투(Battle of Ia Drang)을 배경으로 한 영화 위 워 솔저스(We Were Soldiers)를 봤다. 영화 위 워 솔져스는 이아드랑 전투에 파병되어 미군을 지휘했던 할 무어(Hal Moore)가 쓴 책을 기반으로 제작되었고 영화에서 주연 혹은 조연으로 비중있게 출연하는 병사들은 대부분 실존인물이다. 헐리우드사가 1998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배경으로 했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의 영향을 받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위 워 솔저스의 전투씬은 현실에 가까울 정도로 참 리얼하다. 네이팜 폭탄에 맞아 죽어가는 북베트남군, 헬기에서 내려 작전에 투입되는 미군 병사들, 서로가 죽고 죽이는 미군과 북베트남군과의 교전 등 전투 장면과 리얼함에 있어선 위 워 솔져스는 정말 잘 만든 영화다. 실제 있었던 전투와 당시 전투에서 싸웠던 참전용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 스토리도 실화에 매우 가까울 정도로 잘 만들었다는 점에선 분명 호평 받을 만 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줄거리와 연출을 제치고 이 영화는 매우 비판적으로 보고 비판해야할 영화다. 영화를 보는 2시간 내내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던 장면들이 매우 많았다. 영화의 첫 시작은 1954년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1954년 이아드랑 주변 지역을 정찰하던 소규모의 프랑스 군대가 베트민군에 기습공격을 받아 순식간에 괴멸되고 살아남은 프랑스 병사들은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힌다. 영화 위 워 솔져스는 프랑스군을 포로로 붙잡힌 베트민군이 프랑스군을 학살해버리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일부러 반 베트남 감정을 심은 뒤 11년 후 미군이 대규모 헬리콥터 작전을 구상하는 장면으로 바꾼다. 미군부대가 이아드랑 전투에 투입한 군대는 주인공 할무어 중령이 이끄는 제1기병사단 제7연대였다. 제1기병사단은 1876년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장군이 지휘아래 <리틀 빅혼 전투>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을 무차별 학살하였던 군대였다. 그리고 제1기병사단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에서 수백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던 군대이기도 하다. 영화 위 워 솔저스에선 이아드랑 전투에 참전한 제1기병사단의 미군을 마치 “적의 끊임없는 공격으로부터 전우들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미군”으로 묘사했다. 마지막 전투에서 미군이 승리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미국식 영웅주의 결말을 보여줬다.



즉 위 워 솔져스는 이와같은 장면을 통해서 베트남군을 마치 죄 없는 병사나 학살해대는 군대로 만들었고 미군은 그런 병사들에 맞서 싸우는 훌륭한 군대로 만들었다. 마지막에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을 침략한 미군을 침략자 미군을 승리한 영웅으로 만들어버리기 까지 했다. 이런 모든 점을 봤을 때 영화 위 워 솔져스는 1970,80년대 나왔던 <지옥의 묵시록>, <플래툰>, <풀 메탈 자켓>과 같은 베트남 전 반전 영화들이 만든 기존의 반전성향을 없애고 미국식 애국주의와 국가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만든 미군 선전용 영화다. 추가적으로 더 얘기하자면 <풀 메탈 자켓>이나 <플래툰>과 같은 영화들은 1968년 구정공세(Tet Offensive)를 다뤘다. 위 워 솔저스는 이런 반전 성향을 희석시켜야 했고 따라서 영화 위 워 솔저스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성향을 희석시키기위해 1965년에 있었던 미군이 승리한 이아드랑 전투까지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역사는 정직한 것이다. 1965년 미군과 북베트남군이 맞붙었던 이아드랑 전투는 미군의 승리로 끝났다. 전사자 측면에서 봐도 이아드랑 전투에서 미군은 300명이 죽었고 북베트남군은 1700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이아드랑 전투는 베트남 전쟁에서 대규모의 미군과 북베트남군 처음으로 맞붙었던 전투였을 뿐이다. 미군은 이아드랑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지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다. 역사책에서 보면 알다시피 베트남 전쟁의 승리자는 미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승리다. 따라서 이아드랑 전투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자면 미군이 승리한 위대한 전투가 아니라 호치민과 공산당이 이끄는 북베트남 군대가 최신식 군대와 야만적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영웅적으로 투쟁하여 최신식 무기가 베트남 인민의 저항을 꺽지 못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보여준 전투일 것이다.



영화 점수는 10점 만점에 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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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10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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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전국민을 분노하게 했던 박근혜 퇴진 집회 때였다. 박근혜 정권에 분노했던 나는 광화문 거리로 나갔고 거기모인 수많은 민중들과 함께 '박근혜 퇴진'을외쳤었다. 촛불집회에는 수많은 깃발들이 나부꼈지만 내눈에 정말 선명하게 보이는 한 인물이 그려진 깃발이 있었다.(그 깃발은 동국대학교에 속해있는 동아리나 단체였던 것 같다.) 그 깃발에 그려진 주인공은 1967년 볼리비아에서 혁명투쟁을 하다 토벌대에 체포되어 39살의 나이에 사망한 혁명가 체게바라였다.

볼리비아 토벌대는 체게바라가 혁명의 우상이 되는 것을 우려하여 시신을 묘비도 세우지 않은 채 묻어버렸다. 1968년 5월 혁명시기 프랑스 파리의 젊은이들은 3명의 혁명가 사진을 들고 거리로 나와 구체제에 맞섰다. 하나는 1949년 장제스 국민당을 축출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시 미국의 침략과 남베트남 괴뢰정권에 맞서 투쟁하고 있던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이었고, 또다른 하나가 바로 1958년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바티스타 괴뢰 정권을 전복시킨뒤 높은 지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혁명을위해 볼리비아에서 투쟁하다 전사한 위대한 혁명가 체게바라였다.

68혁명을 시작으로 체게바라의 사진과 초상화는 점차 '저항의 상징, 젊음의 상징, 투쟁의 상징'으로 이미지화되었다. 전세계의 파업현장, 시위현장 심지어 체게바라가 죽기를 원했던 미국에서도 투쟁하는 민중들은 체게바라의 사진을 들었다. 제작년 대한민국에서 시작되었던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도 마찬가지였다.

도데체 체게바라는 어떠한 삶을 살았기에 왜 수많은 사람들이 저항의 상징으로 인식하는 것일까?

1.체게바라 일대기

체게바라는 1928년 아르헨티나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몸이 안좋아 2살때부터 천식을 앓았다. 그의 부모님은 공기 좋은 곳으로 여러번 이사했을 정도로 어린 체게바라와 그의 건강을 잘 보살폈다. 대학생이된 체게바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재학 중이던 1951년에 나이 많은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오토바이로 남미 전역을 여행했고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라는 여행기를 남겼다. 남미여행을 한 체게바라는 여행도중 자본주의 체제아래 고통받는 남미민중의 현실을 깨닫고 1953년 의대를 졸업한 뒤 과테말라 혁명에 참가했다. 과테말라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죽을 위험에 처한 체게바라는 1955년 멕시코로 망명했다. 거기서 평생 동지가 될 피델 카스트로를 만났고 피델 카스트로에게 감명받아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 전복을 위한 혁명"에 동참하게 되었다.

1956년 피델 카스트로를 중심으로 82명이 8인승 레저 보트 그란마호에 탑승하여 쿠바혁명을 위한 여정에 나섰다. 초반에 상륙했을 당시 바티스타 정규군의 습격을 받아 82명 중 20명만이 살아남았다. 체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의 일행은 정규군을 피해 밀림으로 숨었고 게릴라 전으로 정규군에 맞섰다. 미국의 앞잡이 바티스타 정권은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폭격기도 동원했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체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군은 쿠바내에서 세력을 넓혀나갔다. 혁명군 안에서 체게바라는 지휘관이자 의사역할도 했고 마을 주민들을 무료로 치료해주는등 민심을 잘 사로잡아나갔고 그들이 이끄는 혁명군은 나중에 가선 바티스타의 정규군 보다 세력이 강해졌다. 그러나 혁명을 이끌던 체게바라는 배신자와 적군을 처단하는데 있어서 무자비하다 싶을정도로 살인을 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쿠바땅에 상륙한지 2년만인 1958년 12월 체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는 제 2군을 이끌고 쿠바 제 2의 도시 산타클라라에 돌입하여 수도 아바나를 해방시켰고 1959년 최종적으로 쿠바혁명을 성공시켰다.

쿠바 혁명 이후 체게바라는 쿠바내에서 산업부 장관을 비롯한 온갖 고위직을 거쳤다. 1961년 체게바라와 카스트로는 미국이 주도한 피그스만 침공을 잘 막아냈다.1960년대 쿠바 외교부 장관을 지낸 체게바라는 1965년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다시 혁명의 길을 찾아 떠났다. 이후 그는 아프리카 콩고에서도 투쟁했고 마지막에는 볼리비아에서 투쟁했다. 볼리비아에서 투쟁하던 중 체포된 체게바라는 결국 토벌대의 어느 한 병사의 총에 맞고 처형됐다. 그의 나이 39이었다.

2.자본주의의 상품화와 우상화

체게바라는 죽고 난 뒤(위에서 언급했듯이) 68혁명 신좌파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는 죽은 뒤 저항의 상징이
됐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화되기도 했다. 수많은 티셔츠와 물품에 그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의 얼굴은 지금도 혁명의 상징 저항의 상징으로 간주되면서 동시에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화폐를 통해서 소비할 수 있는 소비의 대상 혹은 상품이기도 하다.

드라마틱한 그의 혁명투쟁과 죽음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주고 불의에 저항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난 체게바라가 자신의 자본주의의 상품화가 되기 위해 투쟁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체게바라 그는 자본주의의 체제아래 고통받고 독재정권 하에 억압받고 있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들을 위해 그리고 민중의 해방을 위해 혁명투쟁에 나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아주 드라마틱하고 영웅적인 죽음을 맞은 것이라 본다.

물론 난 투쟁에 나서는 이들이 상품화된 체게바라를 소비하는 것에 대해 나쁘게 보진 않는다. 상품화된 체게바라 또한 억압받는 민중의 자신의 권리와 민중의 해방을 추구하고 사회를 변혁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2011년 아랍의 봄때도 그랬고 2016,17년 박근혜 퇴진 집회때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3.글을 마치며

내가 이 책을 폈을 당시 박근혜 퇴진 집회가 시작되었을 시점이었다. 2년전(박근혜 퇴진 집회 이전이다.) 나는 혁명가 체게바라의 매력에 빠져 그에 대한 책을 여러권 읽었었고 그 중엔 장 코르미에가 쓴 체게바라 평전도 있었다. 그리고 난 그 책을 읽으며 체게바라의 매력에 푹 빠졌었다. 특히 박근혜 퇴진 집회 시기 장 코르미에의 체게바라 평전은 나로하여금 박근혜 퇴진 집회에 나가도록 만든 책이었고 체게바라의 삶은 나에게 크나큰 감동을 줬다. 체게바라의 삶이 나에게 감동을 줬듯이 앞으로도 정의를 꿈꾸고 불의에 맞서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거라 본다.

Viva La Cuba!! Viva La Che Guev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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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이형석 옮김 / 신라출판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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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었다. 책 자체는 요약본이지만 군주론의 핵심적인내용을 알기에는 충분했던것 같다.

내가 군주론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외할아버지께서 군주론을 읽어보라고 얘기해주면서 부터였다. 군주론도 철학 책인지라 매우 어려운 책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그리 어려운 책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이해한 군주론의 핵심을 얘기하자면 군주 자체가 아주 강력한 힘과 능력 그리고 자질이 있어야 하고 국가내의 민심을 잘 사로잡아야 하며 그래야 국가가 유지되고 타국을 정복하고 강한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성악설을 기반으로 서술되었다는 점과 마키아 벨리의 군주론이 결국 나폴레옹과 히틀러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악용이 되었다는 점이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마키아벨리가 무슨 이유에서 군주론을 썻는지 그 시대상을 고려해볼 필요도 있는 것 같다.

책을 읽는 것은 좋으나 좀 주의해서 읽고 너무 교조적으로 그 사상을 받아들이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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