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전국민을 분노하게 했던 박근혜 퇴진 집회 때였다. 박근혜 정권에 분노했던 나는 광화문 거리로 나갔고 거기모인 수많은 민중들과 함께 '박근혜 퇴진'을외쳤었다. 촛불집회에는 수많은 깃발들이 나부꼈지만 내눈에 정말 선명하게 보이는 한 인물이 그려진 깃발이 있었다.(그 깃발은 동국대학교에 속해있는 동아리나 단체였던 것 같다.) 그 깃발에 그려진 주인공은 1967년 볼리비아에서 혁명투쟁을 하다 토벌대에 체포되어 39살의 나이에 사망한 혁명가 체게바라였다.볼리비아 토벌대는 체게바라가 혁명의 우상이 되는 것을 우려하여 시신을 묘비도 세우지 않은 채 묻어버렸다. 1968년 5월 혁명시기 프랑스 파리의 젊은이들은 3명의 혁명가 사진을 들고 거리로 나와 구체제에 맞섰다. 하나는 1949년 장제스 국민당을 축출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시 미국의 침략과 남베트남 괴뢰정권에 맞서 투쟁하고 있던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이었고, 또다른 하나가 바로 1958년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바티스타 괴뢰 정권을 전복시킨뒤 높은 지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혁명을위해 볼리비아에서 투쟁하다 전사한 위대한 혁명가 체게바라였다.68혁명을 시작으로 체게바라의 사진과 초상화는 점차 '저항의 상징, 젊음의 상징, 투쟁의 상징'으로 이미지화되었다. 전세계의 파업현장, 시위현장 심지어 체게바라가 죽기를 원했던 미국에서도 투쟁하는 민중들은 체게바라의 사진을 들었다. 제작년 대한민국에서 시작되었던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도 마찬가지였다. 도데체 체게바라는 어떠한 삶을 살았기에 왜 수많은 사람들이 저항의 상징으로 인식하는 것일까?1.체게바라 일대기체게바라는 1928년 아르헨티나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몸이 안좋아 2살때부터 천식을 앓았다. 그의 부모님은 공기 좋은 곳으로 여러번 이사했을 정도로 어린 체게바라와 그의 건강을 잘 보살폈다. 대학생이된 체게바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재학 중이던 1951년에 나이 많은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오토바이로 남미 전역을 여행했고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라는 여행기를 남겼다. 남미여행을 한 체게바라는 여행도중 자본주의 체제아래 고통받는 남미민중의 현실을 깨닫고 1953년 의대를 졸업한 뒤 과테말라 혁명에 참가했다. 과테말라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죽을 위험에 처한 체게바라는 1955년 멕시코로 망명했다. 거기서 평생 동지가 될 피델 카스트로를 만났고 피델 카스트로에게 감명받아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 전복을 위한 혁명"에 동참하게 되었다. 1956년 피델 카스트로를 중심으로 82명이 8인승 레저 보트 그란마호에 탑승하여 쿠바혁명을 위한 여정에 나섰다. 초반에 상륙했을 당시 바티스타 정규군의 습격을 받아 82명 중 20명만이 살아남았다. 체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의 일행은 정규군을 피해 밀림으로 숨었고 게릴라 전으로 정규군에 맞섰다. 미국의 앞잡이 바티스타 정권은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폭격기도 동원했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체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군은 쿠바내에서 세력을 넓혀나갔다. 혁명군 안에서 체게바라는 지휘관이자 의사역할도 했고 마을 주민들을 무료로 치료해주는등 민심을 잘 사로잡아나갔고 그들이 이끄는 혁명군은 나중에 가선 바티스타의 정규군 보다 세력이 강해졌다. 그러나 혁명을 이끌던 체게바라는 배신자와 적군을 처단하는데 있어서 무자비하다 싶을정도로 살인을 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쿠바땅에 상륙한지 2년만인 1958년 12월 체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는 제 2군을 이끌고 쿠바 제 2의 도시 산타클라라에 돌입하여 수도 아바나를 해방시켰고 1959년 최종적으로 쿠바혁명을 성공시켰다.쿠바 혁명 이후 체게바라는 쿠바내에서 산업부 장관을 비롯한 온갖 고위직을 거쳤다. 1961년 체게바라와 카스트로는 미국이 주도한 피그스만 침공을 잘 막아냈다.1960년대 쿠바 외교부 장관을 지낸 체게바라는 1965년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다시 혁명의 길을 찾아 떠났다. 이후 그는 아프리카 콩고에서도 투쟁했고 마지막에는 볼리비아에서 투쟁했다. 볼리비아에서 투쟁하던 중 체포된 체게바라는 결국 토벌대의 어느 한 병사의 총에 맞고 처형됐다. 그의 나이 39이었다. 2.자본주의의 상품화와 우상화체게바라는 죽고 난 뒤(위에서 언급했듯이) 68혁명 신좌파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는 죽은 뒤 저항의 상징이됐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화되기도 했다. 수많은 티셔츠와 물품에 그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의 얼굴은 지금도 혁명의 상징 저항의 상징으로 간주되면서 동시에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화폐를 통해서 소비할 수 있는 소비의 대상 혹은 상품이기도 하다. 드라마틱한 그의 혁명투쟁과 죽음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주고 불의에 저항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난 체게바라가 자신의 자본주의의 상품화가 되기 위해 투쟁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체게바라 그는 자본주의의 체제아래 고통받고 독재정권 하에 억압받고 있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들을 위해 그리고 민중의 해방을 위해 혁명투쟁에 나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아주 드라마틱하고 영웅적인 죽음을 맞은 것이라 본다.물론 난 투쟁에 나서는 이들이 상품화된 체게바라를 소비하는 것에 대해 나쁘게 보진 않는다. 상품화된 체게바라 또한 억압받는 민중의 자신의 권리와 민중의 해방을 추구하고 사회를 변혁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2011년 아랍의 봄때도 그랬고 2016,17년 박근혜 퇴진 집회때도 그러하지 않았던가?3.글을 마치며 내가 이 책을 폈을 당시 박근혜 퇴진 집회가 시작되었을 시점이었다. 2년전(박근혜 퇴진 집회 이전이다.) 나는 혁명가 체게바라의 매력에 빠져 그에 대한 책을 여러권 읽었었고 그 중엔 장 코르미에가 쓴 체게바라 평전도 있었다. 그리고 난 그 책을 읽으며 체게바라의 매력에 푹 빠졌었다. 특히 박근혜 퇴진 집회 시기 장 코르미에의 체게바라 평전은 나로하여금 박근혜 퇴진 집회에 나가도록 만든 책이었고 체게바라의 삶은 나에게 크나큰 감동을 줬다. 체게바라의 삶이 나에게 감동을 줬듯이 앞으로도 정의를 꿈꾸고 불의에 맞서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거라 본다.Viva La Cuba!! Viva La Che Gueva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