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동안 코로나에 걸린 적이 없어서, 나는 항체가 생겼었나를 의심을 했지만, 오미크론과 같은 신종 변이 바이러스에는 아니었나 봅니다. 확진자와 접촉하여 23일 보건진료소에서 PCR 검사를 받았는데, 오늘 아침 결과를 보니 양성이 나와버렸네요. 앞으로 1주일간 집에서 꼼짝 못한채로 격리신세가 되버렸습니다. 오늘 아침에 집안에서 놀다가, 엊그제 1시간 정도 보다가 중단한 PBS The Vietnam War 3화 나머지 부분을 봤습니다. 아무것도 안하며 노는 것 보다야 이렇게 중간중간 리뷰를 남기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튼 The River Styx 리뷰 후반부를 이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The River Styx 전반부에 나오는 인트로 영상)


1965년 3월 미 해병대 3,500명이 다낭에 상륙했을 당시, 문제가 있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 상황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는 민간인과 게릴라가 구분이 되지 않는 베트남 전쟁의 특수한 형태였다. 거기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때도 미군 내에 존재했던 인종주의는 베트남 전쟁 당시에도 존재했고, 대다수 미국인들은 여전히 베트남에서도 아시아인들을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보거나 비하했다. 반면 베트남인들은 마음속 깊숙이,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미국도 과거 프랑스와 같은 적으로 인식했다. 당시 남베트남군 장교였던 트란녹토안(Tran Ngoc Toan)은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베트남인들 마음속 깊은 곳에는 외세는 모두 침략자에요. 미군이 베트남에 들어오니, 베트콩은 침략자에 맞서 싸울 사람들을 더 결집할 수 있었죠.”


대다수 미국인들은 1965년 시점까지도 베트남과 인도차이나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도,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패전을 앞당길 반전운동은 1965년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 관련 첫 번째 반전시위는 민간인을 대량학살하는 무기 네이팜탄을 만드는 미국의 다우케미컬 공장에서 있었다. 놀랍게도 첫 번째 시위는 겨우 40명이 결집한 수준에 불과했다. 이걸 보니,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반미시위를 하는 글쓴이의 처지가 다소 오버랩 되기도 했다.

(1965년 반전운동을 하는 학생들을 인터뷰하는 미국인 기자)


(반전 연설을 하고 있는 미국 대학의 어느 교수)


(1965년 수도 워싱턴 D.C에 모인 반전 시위대)


미 해병대 다낭 상륙 2주 후 미국 미시간 대학의 교수들은 베트남 전쟁 확전에 대해 교수와 학생 3,000명간의 밤샘 토론을 조직했고, 이어서 맨해튼에 있는 뉴욕 대학교와, 위스콘신 대학교,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U.C 버클리 대학교에서도 베트남 전쟁관련 반전토론 및 운동이 전개됐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지만, <미국 민중사>로 유명한 저자이자 학자인 하워드 진(Howard Zinn) 또한, 이 시점부터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실천행동에 착수했다. 아무튼 이러한 행동에 고무되어 1965년 봄 워싱턴 D.C에서는 민주 사회를 위한 학생 모임 줄여서 SDS(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에서 조직한 대략 25,000명에서 30,000명이 모여 반전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롤링썬더 작전 당시 북베트남을 폭격하는 미군 전투기, 미국은 북베트남을 폭격하여 초토화시켰다.)


(다큐멘터리에 나와 증언한 참전용사 레민쿠에, 레민쿠에는 1950년대 당시 토지개혁으로 부모를 잃어 이모네 집에서 자랐다. 그러던 1960년대 미국이 베트남을 침공하자, 북베트남군으로 참전하여 호치민 루트에서 복구작업에 투입됐다. 놀랍게도 이때 쿠에가 즐겨읽던 책은 해밍웨이의 미국 문학이다.)


(상공에서 촬영된 폭격 장면)


(폭탄을 피해 도망치는 북베트남의 민간인들, 북폭 당시 미군의 폭격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았다.)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고 있는 북베트남의 어느 마을)


1965년 3월 2일부터 미국이 전개한 롤링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 즉 북폭은 북베트남의 농촌과 도시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폭탄을 투하했는지, 그리고 그 폭격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아직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수준이다. 폭격 기간 3년 동안 대략 20만 명의 민간인이 폭격으로 죽었다고 추정하지만, 이 숫자는 상식적으로 믿기 힘든 숫자다.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의 북한 폭격을 조사했던 소련 측은 28만 명의 민간인이 죽었다고 하는데, 현재 학계에서는 북한에서 대략 군인 민간인 할 거 없이 10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95년 베트남 노동 사회부의 추정치에 따르면, 전쟁을 통틀어 민간인 400만 명이 죽었는데, 이 중 200만 명의 북베트남 민간인이 죽었다고 추정했다. 당시 미국이 북베트남에 투하한 폭탄의 양이 한국전쟁때 북한에 투하한 폭탄의 양보다 훨씬 더 많다. 대략 100만 톤의 폭탄이 북베트남에 투하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1995년 노동 사회부의 추정치는 단순히 과장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수치다.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오르고 있는 마을)


(폭격의 잔해 속에서 사망자와 부상자를 옮기고 있는 북베트남의 여성)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민간시설, 미군이 투하한 폭탄으로 마을과 학교 그리고 병원이 파괴됐다.)


1965년부터 존슨 정부가 북베트남을 폭격하자, 북베트남의 농촌과 마을 그리고 도시는 무차별적으로 파괴됐다. 미군은 폭격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네이팜 폭탄을 포함한 무수히 많은 폭탄을 남베트남 뿐만 아니라 북베트남에 무차별적으로 투하했다. 당시 16살이던 소녀 레민쿠에(Le Minh Kue)는 북폭을 경험하면서, 북베트남군을 돕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아래의 증언은 레민쿠에가 다큐멘터리에서 증언한 내용으로 당시 미군의 폭격이 민간인을 가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처음에는 크게 겁먹지 않았는데, 시체를 보게 되니 겁이 나더군요. 미군이 한 마을을 몇 시간 동안 폭격했습니다. 저는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보려고 뛰어다녔습니다. 마을이 말 그대로 형체도 없이 사라졌죠. 그때부터 진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우리 집은 노인 요양 시설 옆에 있었는데,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미군이 투하한 폭탄이 시장과 학교에 떨어졌죠.”

(폭격의 잔해속에서 발견된 어린이들의 시신.)


(호치민 루트에서 수송로 복구잡업에 투입됐던 북베트남 여군,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 여군들의 활약은 무수히 많다.)


북베트남군에 입대한 레민쿠에는 호치민 루트에 투입되어, 수송로를 복구하는 작업을 했다. 당시 레민쿠에가 정말 감명깊게 읽었던 책은 놀랍게도 어네스트 해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소설이었다고 한다. 특히나 해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자신이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통해 전쟁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웠고, 실제로 레민쿠에는 전쟁 기간 동안 미국 문학을 읽으며, 전쟁터에서 살았다.


한편 1965년 5월 남베트남의 상황은 소규모 5천명의 지원을 받는 베트콩 연대가 매주 남베트남군 1개 대대를 궤멸시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남베트남 정부는 몰락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주월미군총사령관인 웨스트모어랜드는 미군 수만 명을 증파하라고 존슨 대통령에게 요구했고, 이에 따라 미군 병력은 급증했다. 미군의 무차별 북폭은 계속됐지만, 북베트남의 지도부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반면 중국과 소련은 북베트남에게 상당한 전쟁 물자를 지원했고, 특히나 북베트남의 대공 방어망은 소련제 대공포와 샘 미사일로 채워졌다. 또한 중국에서는 북베트남을 지키기 위한 적잖은 병력을 보냈다.

(북베트남군에 배치된 소련의 신무기인 샘 미사일, 소련은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에게 막대한 물자를 지원했다.)


(마오쩌둥과 호치민의 초상화, 중국 또한 북베트남에 막대한 물자를 지원했다.)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건 중국군 트럭, 중국군 또한 북베트남에 배치됐다.)


미군 정규부대 인원이 증파되자, 미군은 군사작전을 전개하는 과정 속에서 남베트남 민중에게 반발을 살 만한 행위를 했다. 미군은 베트콩이 있는 곳으로 의심되는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은 강제이주 시키며, 이에 복종하지 않을 시 베트콩으로 간주하고 사살했다. CBS의 종군기자인 세이퍼는 작전에 참가한 미군과 함께하며, 전쟁의 참상을 보고했다. 당시 세이퍼가 TV에 나와 보도한 내용을 보도록 하자.


“이것이 바로 베트남 전쟁의 실상입니다. 마을에는 노인들과 어린이들뿐입니다. 미 해병대가 노부부의 집을 불태웠습니다. 여기서 불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 마을에 들어가보면 베트콩으로 의심되는 젊은이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날 작전으로 150채가 불에 탔고, 비무장 여성 3명이 부상당하고, 갓난아기 한 명이 죽었으며, 해병대 1명이 부상당하고, 포로 넷이 남았습니다. 오늘의 군사작전은 베트남의 절망이 축소된 것입니다.”

(다낭에서 군사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미군들)


(밀림을 수색하는 미군)


(농촌에 있는 집에 불을 붙이는 미군)


(화염 방사기로 집을 불태우는 미군들)


(이러한 전쟁의 참상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도하고 있는 CBS의 세이퍼 기자)


(미군이 마을을 불태우는 것에 대해 울고 있는 한 여성)


(미군이 군사작전을 전개하자 공포에 떨고 있는 베트남 민간인들)


미국 방송사인 CBS가 이러한 방송을 하자, 대통령인 존슨은 CBS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엿먹일 생각이냐? 저 세이퍼라는 놈은 소련의 첩자로 의심되니 해고하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이퍼는 이런 잔혹한 참상을 보고하면서도, 미군의 승리를 확신했던 인물이었다. 즉, 이러한 점에서 미국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실이나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존슨이나 웨스트모어랜드는 자신들이 이러한 행위를 하는 것을 마치 “베트콩의 테러 때문이다.”라고 변명을 해댔다.

(위 워 솔져스, 2002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1965년 미군과 북베트남군이 첫 교전을 벌인 이아드랑 전투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문제는 지나치게 미국을 미화했다는 점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아드랑 전투에 투입된 미군은 1876년 리틀 빅혼 전투에서 원주민을 학살했고,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에서 민간인을 학살했던 부대다.)


(착륙한 헬기에서 내리는 미군들)


(무전기를 통해 항공폭격을 요청하는 할 무어 중령)


(이아드랑 전투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주둔했던 지역)


(할 무어 중령이 이끄는 미군이 투입된 LZ 액스레이 지역)


대규모의 미군 병력이 남베트남에 도착한 이후 북베트남 정규군 또한 호치민 루트를 통해 남베트남에 증원됐다. 이에 따라 미군과 북베트남군 간의 교전은 시간문제였다. 1965년 9월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있는 안케 기지에 미군 최정예 부대라 할 수 있는 제1 기병사단이 증원됐고, 이들은 미군 특수부대 그린베레와 남베트남 특수부대인 레인저 부대 그리고 현지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부대와 함께 베트콩을 상대했다.

(M-16 소총을 발사하는 미군)


(미군 포격을 받은 이아드랑 지역의 밀림)


(기관총과 로켓 미사일을 발사하는 미군 휴이 헬기)


1965년 11월 14일부터 18일까지 대략 4일간 이아드랑에서 미군과 북베트남군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할무어 중령이 이끄는 병력은 LZ 액스레이 지역에서 10:1 수준으로 북베트남군을 궤멸시켰지만, 17일 날 LZ 올버니에 들어갔던 미군 병력은 북베트남 정규군에게 매복기습을 당하여 수백 명이 전사했다. 이아드랑 전투에서 미군은 300명 이상의 전사자와 500명 이상의 부상자가 속출했고, 전사한 남베트남군까지 합쳐서 1,20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또한 미군의 헬기사격 및 건쉽(Gun Ship) 공격과 B-52 폭격기와 각종 전투기의 항공 공습 그리고 포격과 같은 막강한 화력 공세를 당해서, 최소 1,8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아드랑 전투 이전에 인근 지역에서 북베트남군과 교전을 치렀던 찰스 베크위스 소령은 인터뷰에서 베트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중 200명 만 내 밑에 둘 수만 있다면 모든 걸 주겠습니다. 내가 본 군인들 중에 가장 최고였습니다. 베트콩은 헌신적이고 좋은 군인들입니다. 내가 본 가운데 단연 최고지요.”

(이아드랑을 폭격하는 미군 B-52 폭격기)


(네이팜 폭탄으로 파괴되고 있는 이아드랑 밀림)


(미군이 북베트남군에게 패배했던 LZ 올버니 지역)


(올버니 지역에서 북베트남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패배한 미군들)


(부상당한 미군)


이아드랑 전투 이후 웨스트모어랜드는 존슨 대통령에게 남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 병력을 20만 명으로 늘릴 것을 요청했다. 놀랍게도, 당시 베트남 전쟁을 구상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이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국방장관이던 맥나마라는 존슨에게 미국이 승리할 가능성은 1/3 이상이 되기 힘들다고 언급했다. 아래는 다큐멘터리에 나온 미군 참전용사 칼 말렌테스의 인터뷰 내용이다.


“당시 정권에 대해 제가 싫어한 것은 첫 번째로는 거짓말이었어요. 정책의 오류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주 고통스럽고, 실수로 많은 사람이 죽더라도 훌륭한 마음으로 그랬다면 말이죠. 아이젠하워와 케네디는 답을 얻으려 할 때 그랬습니다. 하지만 맥나마라는 1965년에 알고 있었다잖아요. 제가 베트남으로 가기 3년 전에 말이죠.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걸요. 그게 바로 제가 화나는 지점입니다. 사람이 실수 할 수 있지만, 실수를 덮으려 하면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남들을 죽이는 거니까요. 그게 화가 납니다.”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로버트 맥나마라)


이렇게 해서 존슨 대통령은 1966년 새해에 이르러 베트남 주둔 미군 병력을 20만 명으로 증강했다. 20만 명이나 넘는 미군이 남베트남에 들어왔지만, 미국 정부는 자신들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점에서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은 거짓말과 기만 속에서 진행됐다. 심지어 미국이 지키려 했던 남베트남 정부는 1965년 6월 중반까지 군벌들의 쿠데타가 끊이질 않았다. 한편 베트콩은 농촌에 해방구를 만들었고, 그 해방구는 대규모 미군 병력이 와도 굴복하지 않을 수준의 것이었다. 다큐멘터리 3부 The River Styx는 존슨 대통령의 베트남 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룬 에피소드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미국식 편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북베트남측과 남베트남측 그리고 베트콩의 입장도 같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점도 보인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자신들이 저지른 실책에 발목이 잡혀 베트남이라는 깊은 수렁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그 과정이 참으로 비참하다. 결국 미국식 우월주의와 군사력에 대한 맹신이 베트남 전쟁이라는 미국의 대학살극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질 것을 알면서도 수십만 명의 전투 병력을 남베트남에 보낸 것이다.


이로써 3화 후반부 얘기를 마칩니다. 다음에 4부 리뷰도 전반부와 후반부에 걸쳐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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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여행 마치고 나서 1일 뒤에 PBS 베트남 전쟁 2부를 리뷰했었는데, 여러모로 대학원 새 학기를 앞두고, 이런저런 일들과 약속 그리고 현장집회와 학습, 국내 역사기행을 하다보니 다큐멘터리 리뷰를 1달 만에 올리게 됐다. 3부의 러닝타임은 1시간 55분이나 되기에 앞으로 다큐멘터리가 1시간 30분 이상을 초과할 시, 한 번에 올리지 않고 한 에피소드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두 번 올릴 생각이다. 

(PBS 베트남 전쟁 3부 The River Styrx)


지난번에 리뷰 했던 2부는 1963년 미국이 지원한 응오딘지엠 정부가 몰락하면서 에피소드가 막을 내렸다. 2부가 존 F. 케네디 시절에 본격적으로 단행된 미군고문단 파병과 남베트남 응오딘지엠 정부의 무능하고 부패한 사정을 잘 조명했다면, 3부는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이후 대통령이 된 린든 B. 존슨의 베트남 전쟁 파병 결정과정을 1시간 55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번 2부에서도 밝혔듯이,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들은 미국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다큐멘터리 초반에 나오는 미국의 한 애국청년 모기 또한 영화 ‘7월 4일생(Born On The Fourth Of July)’의 주인공인 론 코빅처럼 애국심을 가지고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17살에 입대한 모기는 베트남에서 전사했고, 현재 워싱턴 D.C에 있는 베트남 전쟁 메모리얼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진을 보고 있는 린든 B. 존슨 대통령, 존슨 대통령은 미국 사회에서 나름 복지정책을 실현하고자 했지만 베트남에서 침략전쟁을 전개하면서 그 꿈을 내팽겨쳐버렸다.)


(응오딘지엠 사후 해방전쟁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베트콩 참전용사인 레콴콩씨)


1963년 응오딘지엠이 CIA에 의해 암살당하자, 남베트남 사회는 더더욱 혼란과 방황의 연속이었다. 응오딘지엠 정부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들은 응오딘지엠이 암살당하자, 무장투쟁을 더욱 확장했다. 남베트남군과 관련지역 마을에 대한 베트콩의 공격은 단 2주만에 최소 400건을 넘을 정도였고, 당시 미국 추산으로 남베트남 농촌 지역의 최소 40% 이상이 베트콩 수중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심지어 남베트남 국민들 중 최소 50% 이상이 베트콩 수중에 있었다고 추정하기까지 했다. 말 그대로 베트콩은 남베트남 농촌에 자신들 만의 국가를 만들었고, 이들의 해방구는 사실상 국가였던 셈이다. 1951년부터 항불전쟁에 참가했고, 1963년 압박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던 참전용사 레콴콩은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응오딘지엠 정권이 전복되었을 당시 우리들은 아주 기뻐했습니다. 남베트남 전체가 해방될 날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죠. 따라서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괴뢰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항복하고 우리 편으로 합류하는 괴뢰 군인들이 많아졌죠. 또한 우리 군대에 자원입대하는 젊은이들이 급증했습니다.”

(BAR 소총을 발사하고 있는 베트콩 전사)


(무기를 모아놓은 베트콩 부대, 베트콩은 1960년대 초반부터 꽤나 강력한 무장력을 보였다.)


베트콩이 농촌지역에서 해방구를 확장해나가고 있을 때, 남베트남 내부에선 정말 기가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응오딘지엠 정부를 전복시킨 남베트남의 즈엉반민 정부는 대중성이 전혀 없었다. 1964년 1월부터 1965년 6월까지 남베트남에선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로 새로운 정부 8개가 등장했을 정도로 막장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인사들은 과거 프랑스 식민지 시절 부역했던 인물이었고, 미국은 이들을 토대로 남베트남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정말 허황된 꿈을 꿨다. 린든 B. 존슨은 케네디 행정부때부터 베트남 문제에 개입한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를 남베트남에 보내 즈엉반민 이후 들어선 응우옌카인(Nguyen Khanh)에 대한 지지와 지원의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남베트남 내부에서 일어나는 군벌들의 쿠데타 롤러코스터를 끝내지는 못했다.

(쿠데타 롤러코스터를 진행했던 남베트남의 군벌들)


한편 북베트남에서는 민중에게 독립 영웅으로 존경받던 국부 호치민(Ho Chi Minh)과 항불전쟁과 응오딘지엠 집권 초기 당시 남베트남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던 혁명전사 레주언(Le Duan)이 권력을 양분하고 있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1964년을 기점으로 호치민 보다 더 남부통일에 대한 열정을 보였던 레주언의 당내권력이 강화되었다고 한다. 이 시점부터 호치민의 실권이 레주언보다 약했다는 얘기다.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가 집권을 하면서 소련에서는 스탈린 격하 운동이 진행됐고, 이는 중국과 소련 사이의 수정주의 논쟁으로 번졌다. 베트남은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중시했지만, 호치민은 친소련적 입장이었던 반면 레주언은 친중국적 입장이었다. 1963년에서 1964년부터 하노이 당국은 레주언의 입지가 강해지면서, 이 시기 베트남 하노이 당국은 가장 친중적인 입지를 보이기도 했다. 호치민의 실권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한 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에 헌신했던 그는 여전히 베트남 민중에게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아래는 베트민 참전용사의 인터뷰 내용이다.

(호치민과 레주언, 1960년대부터 호치민과 레주언은 당 내 권력을 공유했으나, 1963년부터 레주언의 권력이 보다 강해졌다. 레주언은 호치민 보다 남부해방 및 통일에 대한 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호 아저씨에 대해 얘기를 하는 건 아주 어렵습니다. 난 호 아저씨와 가까웠어요. 고급 간부 한 사람이 호 아저씨에게 물어본 적이 있어요. “왜 고무샌들을 신고, 수수한 카키색 옷을 입으세요?”라고 말입니다. 호치민 아저씨는 대답했죠. “국민들이 맨발인데, 어떻게 하죠? 도데체 내가 그들보다 뭐가 더 잘났다고?”말입니다.”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그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미국 군인으로 베트남 전쟁 당시 주월미군총사령관을 지냈다.)


(존슨과 맥나마라)


이런 사실을 통해서 호치민이라는 인물이 대다수 베트남인들에게 큰 신뢰를 줬고, 또 지지를 받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케네디 사후 집권하게 된 린든 B. 존슨은 남베트남에 주둔하던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를 16,000명에서 23,300명으로 늘렸다. 지엠 정부 시절 주월 미국대사로 있던 헨리 캐벗 로지를 대신하여 맥스웰 테일러 장군을 대사로 임명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튀니지와 시칠리 그리고 노르망디에서 큰 활약을 펼쳤고, 한국전쟁에서도 활약을 펼쳤던 군인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을 주월미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렇게 만발의 준비를 끝낸 존슨은 베트남 전쟁의 흐름을 뒤바꿀 또 다른 계획을 이들과 함께 준비했다. 그것이 바로 1964년 통킹만 사건이다.

(1964년 당시 미국이 계획한 통킹만 조작 사건 중 일부, 통킹만 사건 몇일 전 미국은 남베트남 특수부대로 하여금 북베트남에 있는 섬에 상륙 및 공격을 게시했다.)


(USS 매독스호)


(통킹만 사건에 대해 발표하는 존슨 대통령)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미군 전투기)


(북베트남군에게 최초로 포로로 붙잡힌 미군 조종사 알베트 알버레즈)


통킹만 사건은 사전에 철저히 미국에 의해 계획됐다. 미국은 라오스에서의 군사작전과 더불어 북베트남 영해에 있는 섬 두 군데에 남베트남의 특수부대를 상륙시키고,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의도적으로 북베트남 영해에 침투하여 통킹만 사건을 자극 및 조작했다. 1차 공격은 북베트남의 어뢰정 공격이 있었다고 하지만, 2차 공격은 미국의 조작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사건을 빌미로 북베트남 유류 저장소를 포함한 군사기지와 마을 몇 군데를 전투기를 보내 폭격했다. 이 전투기들은 미국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것들이었다. 이 중 전투기 한 대는 북베트남에 의해 격추됐고, 조종사는 북베트남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당시 포로로 붙잡힌 알버트 알버레즈는 이렇게 해서 북베트남군에게 처음으로 붙잡힌 포로가 됐다.

(북베트남군에게 심문받고 있는 알버트 알버레즈)


(작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통킹만 사건 이후 미국의 존슨 정부는 그해 8월 7일 통킹만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상원은 88 대 2로 이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이로써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게 됐다. 그해 10월에는 사이공 근처에 있던 비엔호아 공군기지가 공격을 받아 폭격기 5대가 파괴되고 나머지 항공기 및 헬기 수십 대가 파괴 및 손상을 입었다. 미군도 몇 명 전사했다. 더더욱 큰 사건은 1964년 12월에서 1965년 1월 대략 몇 일간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역인 빈지아(Binh Gia)에서 발생했다.

(남베트남군 장교와 미군 고문단)


(빈지아 지도)


(빈지아 지역에 결집했던 베트콩 부대)


(빈지아 전투 작전 지도)


(빈지아 전투에 투입된 미군 헬기)


(빈지아 전투 당시 전투를 치렀던 미군들, 이 전투에서 미군 5명이 전사했다. 미군들은 이들이 전사하자 남베트남군의 시체를 내팽게친채 이들의 시신만 수습하고 남베트남군이 죽든 살든 외면했다.)


빈지아에서 1964년 12월 28일부터 1965년 1월 1일까지 남베트남군과 베트콩 간의 교전이 벌어졌는데, 1963년 압박 전투처럼 베트콩이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남베트남군은 미군고문단에서 보낸 헬기와 APC 장갑차를 투입했고, 대략 4,000~5,000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했다. 반면 베트콩의 병력은 1,000명 안팎이었다. 전투 결과 미군 고문단 5명이 전사하고 남베트남군 최소 200명 이상이 전사했으며, 총 500명 이상의 사상자가 속출했다. 반면에 베트콩의 전사자는 32명이었다. 1963년 압박 전투에서와 마찬가지로 베트콩은 소총 및 기관총으로 미군 헬기를 격추시켰고, 오합지졸에 불과한 남베트남군을 섬멸했다. 당시 남베트남군은 최졍예 부대를 투입한 것이었지만, 베트콩에게 패배했다. 빈지아 전투가 보여주듯이, 남베트남 정부는 망해가고 있었다. 빈지아 전투에 대해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은 ‘작은 디엔비엔푸(Little Dien Bien Phu)’라고 극찬했을 정도로 베트콩은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다. 빈지아 전투 당시 베트콩 장교로 참전한 응우옌반통(Nguyen Van Tong)은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빈지아 전투는 전쟁의 중요한 이정표였습니다. 만약 미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1966년에 수도 사이공에 들어갔을 겁니다.”

(빈지아 전투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 호치민은 이 전투에 대해 작은 디엔비엔푸 전투라 호평했다.)


(호치민과 레주언, 레주언 또안 이 전투를 통해 해방전쟁이 이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큐멘터리에 나와 인터뷰를 한 빈지아 전투 참전용사 응우옌반통)


즉 남베트남은 이대로 가면 1965년이나 1966년에 망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1965년 2월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에 있는 플레이쿠 기지가 공격당하자, 대규모 북폭인 롤링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을 게시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북폭은 3년 동안 지속됐고, 미국은 북폭을 위한 공군기지를 형성하기 위해 1965년 3월 남베트남의 다낭에 3,500명의 미 해병대 병력을 상륙시켰다. 이렇게 되면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최초로 지상군 부대를 보내게 됐다. 그러나 놀랍게도, 미국이 이렇게 까지 조치를 취한 이유는 정말로 남베트남을 돕기 위함이 아니었다. 아래는 펜타곤 페이퍼에 나오는 미국의 대베트남 정책의 목표다.

(1965년 2월 플레이쿠 습격 당시 현장 사진)


(롤링썬더 작전 당시 미군의 북폭 지도)


(북베트남에 네이팜탄을 투하하는 미군 전투기)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진짜 목적)


10% 남베트남을 돕기 위해

20% 남베트남의 영토를 중국 및 공산주의로부터 지키기 위해

70% 미국의 굴욕적인 패배를 저지하기 위해


1965년 3월 미 해병대는 다낭에 상륙했고, 다낭을 통해 베트남 내륙으로 깊숙이 진군했다. 미 해병대를 본 한 베트남 노인은 미군을 향해 ‘프랑스 만세(Vive la France)!’를 외쳤다. 그 노인은 미군 병사를 프랑스군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베트남에서 물러난 프랑스는 미국이 일으킨 이 전쟁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1965년 3월 다낭에 상륙한 미 해병대)


(모래사장에 있는 미 해병대)


(미 해병대를 환영하는 남베트남의 여성들)


(다낭에 상륙한 뒤, 남베트남 내부로 깊숙이 행군하는 미군들)


(미군을 보고 프랑스군으로 착각했던 베트남의 노인)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강력한 동맹이자, 서방의 강력한 동맹인 영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미국은 서방진영으로부터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는 전쟁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미군에게는 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베트남에 상륙했지만,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 상황이 펼쳐졌던 것이다.


3화 전반부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에 3화 후반부를 리뷰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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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려는 사례는 한국의 인터넷 상에서 찾기 쉽다. 특히나, 나무위키를 비롯한, 반공주의적 색체가 강한 사이트는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이라는 문서까지 만들어 놓고, 어떻게는 베트남 전쟁 당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려는 추태를 보이고 있다. 네이버에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검색해보면, 나무위키식 주장에 영향을 받은 글들이 제법 보인다. 이런 주장을 하는 문서들에서 가장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부분은 바로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고자이 학살을 극구 부정하는 것이다.

(고자이 학살을 묘사한 벽화, 이걸 가지고 남베트남군이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사실 물타기에 가깝다.)


고자이 학살은 1966년 2월 26일 베트남 빈딘성 떠이선현에서 일어난 학살이다. 얘기에 따르면 주민 380명을 모아놓고, 한 시간 만에 한 사람도 남김없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당시 학살을 겪었던 대다수 그 지역 베트남 주민들은 학살의 주체를 한국군 소속 맹호 부대로 규정하고 있다. 2007년 오마이 뉴스에서 연재했던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관련한 기사를 보면, 당시 한국군이 어떻게 학살을 벌였는지 나와 있다.

(학살 피해자 응우옌떤런씨, 2016년 뉴스타파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에도 나왔고, 2015년에 학살을 증언하러 한국을 방문했었다.)


(응우옌떤런씨와 구수정 박사)


(빈딘성 박물관에 있는 고자이 학살 희생자의 사진.)


1966년 2월 26일 아침. 평화로운 베트남의 한 마을에 포탄이 날아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헬기가 마을의 하늘을 가득 메웠으며, 녹색 전투복을 입은 한국군이 마을로 밀려 들어왔다. 그렇게 해서 한 시간 동안 학살이 자행됐고, 모두 380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한 베트남 관리는 이 학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한국군은 주민들을 언덕위에 몰아 놓은 뒤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으며, 노인들을 끈으로 묶어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내버려두고, 어린이들의 몸을 찢어 손과 발을 나무 위에 내던져 버린 경우도 있었다.”


고자이 학살이 있던 곳에는 전쟁 이후 마을 주민들이 만든 큰 위령비가 있다. 이 마을에 있는 위령비에는 희생자 380명의 이름과 나이가 새겨져 있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침략자 미국에 대한 원한을 깊이 새긴다. 1966년 2월 26일 남조선 군대가 미제국주의 지도하에 380명의 무고한 주민을 학살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지역에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학살을 부정하려는 이들은 현재 고자이 학살 지역에 그려진 벽화를 문제를 삼고 있다. 그 이유는 벽화에서 묘사한 한국군의 군복 마크가 한국군의 맹호부대가 아닌 당시 남베트남군이던 레인져 부대의 마크라는 것이다. 한국군의 맹호부대 마크는 줄무늬가 있는 호랑이이지만, 벽화에 그려진 마크는 당시 남베트남군 특수부대인 레인져 부대가 사용하던 흑표범 마크다. 즉 그러한 점을 들어 학살의 주체를 한국군이 아닌 남베트남군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맹호부대 마크와 남베트남군 레인져 부대 마크, 이걸 가지고 학살 부정론자들은 한국군의 무고함을 주장하고 있는 중이며, 이는 나무위키 같은 반공 성향의 인터넷 사이트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소 함정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반론도 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학살당할 뻔한 피해자가 굴뚝 개수를 잘못 기억한다고 해서, 나치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즉 그러한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면피용에 가깝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상조사가 아직 이루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남베트남군이 했다고 주장하는 건 올바르지 못하다.

(빈안 학살 50주년 추모제)


그렇다면, 학살에 대한 묘사는 과연 거짓이고, 한국군은 그러한 학살로부터 무고한 것일까? 이러한 얘기는 한국군이 해방 후 제주 4.3 사건이나 여순사건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국민 보도연맹 학살이나 거창 양민학살 사건 등을 보면, 베트남인들이 증언한 한국군에 대한 묘사는 결코 거짓이 아니다. 실제로 한국군은 그러한 학살의 경험이 있고, 주월한국군사령관이던 채명신만 하더라도 제주 4.3 사건에서 진압작전에 동원됐던 인물이다. 즉 박정희 정부의 월남 파병은 그러한 연속성을 가진 상황에서 진행된 역사다. 따라서 한국군이 민간인 학살을 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것은 말 그대로 현실 부정이다.


2016년 방송채널인 뉴스타파에서 제작한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관련 영상을 보면, 빈딘성 박물관에서 해설하는 한 베트남 여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진은 1965년에 뀌년(Quy Nhon) 항구에 상륙했던 한국군의 모습입니다. 이때부터 빈딘성에서 학살이 시작됐습니다. 뀌년하고 빈딘성에 들어온 후, 한국군들은 북베트남군을 다 없애기 위해서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없애고, 깨끗이 죽인다’는 전략으로 굉장히 많은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한국군은 여성들을 강간하고 나서 음부에 칼을 꽂아서 죽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 위에 지푸라기를 덮어서 산 채로 태워 죽이기도 했습니다. 한국군들은 후잉티본 할머니 집의 방공호에 숨어 있던 17명의 주민들을 발견했을 때, 그 안으로 총을 난사했습니다. 그 후에 이 방공호 안에 침투하기 위해 지푸라기 같은 것들을 밀어 넣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 채로 불태워졌습니다.”


제주 4.3 사건 관련 진상조사 보고서에도 이러한 잔혹행위들이 무수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군이 이러한 잔혹행위로부터 무고할 것이라는 주장은 우리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되돌아 볼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

(고자이 학살을 반성했던 참전용사 이우석씨)


(고자이 학살 희생자 380명의 명단)


이후 채명신이 집필한 자서전인 <베트남 전쟁과 나>에서도 1966년 당시 한국군의 학살 피해의 그늘을 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1966년 1월에서 3월까지 대략 6주동안 벌인 작전으로 총 1,004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고, 이걸 빈안 학살이라 부르기도 한다. 빈안 학살은 모두 15개 지점에서 벌어진 학살로, 1966년 2월 26일에 일어난 고자이 학살도 그 중 일부다. 채명신 장군은 회고록에서 1966년 2월 26일부터 28일까지 전개된 맹호부대의 번개작전을 회고했다. 아래는 <베트남 전쟁과 나> 288쪽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작전 기간 중 전과는 적 사살 92명, 포로 33명으로 기록되었지만, 소총은 불과 4정 노획으로 그쳐 이 문제에 대한 심각한 분석이 요구되었다. 왜냐하면, 무기가 너무 없다면 사살자의 일부가 양민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기갑연대의 이번 작전지역인 빈케군 빈호아강 북방 평야지대에 산재해 있는 부락은 거의가 베트콩의 전략촌이기 때문에 사살자가 민간인이 아닌 것은 거의 확실하다. 즉 교전 중 사살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바로 “심각한 분석이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작전상 맹호부대는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벌였는데, 기록된 베트콩 사살 숫자에 비해 노획된 소총 숫자가 불과 4정 밖에 안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심각한 분석이 요구된다고 말한 것이다. 물론 채명신은 민간인이 아니라고 확신적인 발언을 했는데, 채명신 입장에선 학살의 가능성을 굳이 인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콩과 민간인의 구분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전개된 베트남 전쟁의 특수성을 생각해보면, 이 당시 전과보고는 정직하지 못했다. 사살된 시신만 가지고 전과를 보고하는 바디 카운트(Body Count) 방식인데, 당연히 여기에는 폭격으로 몸이 산산조각 나거나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된 시체는 포함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적군 사살이 비교적 적게 나올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다.

(빈안 학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구수정 박사)


또한 앞에서 말한 민간인 희생을 생각해보더라도, 380명의 민간인이 죽었음에도 기록을 하지 않는 경우가 높다. 당장 1년간 미군에 의해 철저히 은폐되었던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만 보더라도, 504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지만, 전과보고는 120명의 베트콩 사살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보자면, 고자이 학살이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로 규정해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일각에서는 고자이 학살 지역에 한국군이 있지 않았다고 변명을 하지만, 이것은 2017년 미국에서 방영했던 켄 번즈(Ken Burns) PBS Vietnam War만 보더라도 반박이 가능하다. 아래는 PBS Vietnam War Episode 4에서 나왔던 내용 중 일부다.


“주월미군사령관인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2만 명으로 구성된 미군과 남베트남군 그리고 한국군을 보내, 빈딘성 지역을 휩쓸어 적과 그들의 보급선을 찾아내고자 했다. 먼저 전단을 뿌리고 대형 스피커로 방송하길 “헬기에 사격을 가하면 가혹한 운명이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집을 떠나라고 권고했으며, 항복하는 베트콩에게는 안전을 보장했다. 그러고는 공군과 포병대를 불러 마을을 산산조각 냈다. 이 전쟁 최초의 대규모 베트콩 토벌 작전이었다. 공격은 42일간 지속됐고, 미 육군 보고에 따르면 적 2,389명이 죽었다. 웨스트모어랜드는 기뻐했지만, 현장 지휘관들은 미군이 화력을 그렇게 쏟아 부었는데도 북베트남 정규군 대부분이 중부고원 지대로 도망간 것을 우려했다. 이 작전은 민간인 10만 명을 고향에서 쫓아냈다.”


PBS Vietnam War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미군과 남베트남군 그리고 한국군은 당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곳에서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1966년 2월 26일날 일어난 고자이 학살도 주월미군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가 주도한 수색과 섬멸 작전(Search and Destroy Campaign) 과정 중 일부였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고자이 학살은 이 군사작전 중 일부였으며, 군사적으로 보고되지 않은 민간인 학살이었다. 또한 위에서 인용한 빈딘성 박물관 해설사의 내용은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신사군을 토벌하기 위해 전개했던 삼광작전”과 같은 비슷한 군사작전이 진행되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베트남 전쟁 당시 전쟁에 참여한 군 지도부는 이러한 경험을 일본군과 한국군에서 쌓은 인사들이었으며, 채명신 또한 제주 4.3 사건 당시 진압군이었다. 


따라서 고자이 학살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은 분명히 있었으며, 한국군의 이러한 학살은 과거 일본군에서 벌인 학살과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에서 벌인 학살의 연장선상이라는 점에서 봐야한다. 그리고 한국군에 있었다던 광복군 출신들도 엄밀히 따지자면, 양민학살이라는 측면에선 일본군과 크게 차이가 없는 중국 국민당군 출신들이었다. 중국 국민당군 출신이자 광복군 출신인 최덕신이 한국전쟁 당시 거창 양민학살을 자행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이를 입증해준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분명히 있었고, 고자이 학살도 한국군에 의한 것이었음은 여러 가지 근거를 통해 생각해보면, 한국군의 잔혹성을 보인 케이스며, 남베트남군이 했다는 변명은 물타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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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이승만 정부의 단독정부 수립에 맞서제주도에선 봉기가 일어났다제주도에서 봉기가 일어나자미군정과 이승만은 이를 막고자 했다그러나 미군정과 이승만의 정책은 제주도를 피바다로 물들이는 정책이었고이에 따라 상상을 초월하는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최소 3만 명 이상의 제주도민이 제주 4.3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미군정과 이승만이 파견한 진압군에 의해 학살당했다그러나 이러한 숫자가 다소 적게 추산되었다는 의혹을 받기도 하며, 6만 명 정도가 이들에 의해 죽었다는 통계도 있고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경우 그 숫자가 8만 명일 수 있다고 2016년 제주도에서 열린 학술 포럼에서 주장하기도 했다.

(제주도에 방문하여 진압군을 사열하는 대통령 이승만, 당시 이승만은 제주도 진압을 명분으로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러한 숫자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제주도 인구 최소 1/4이 학살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이다학살당한 이들의 수치가 보여주둣이제주도는 1948년부터 1949년 내내 섬 전체가 피바다였다그러나 제주 4.3 사건 당시 크게 얘기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그것은 바로 미군정과 이승만이 파견한 진압군 지휘관들의 출신성분이다놀랍게도 제주 4.3 사건 당시 진압의 책임을 맡았던 주요 지휘관이었던 박진경최경록송요찬함병선유재흥 등은 모두 일본군 출신이었다일본군 출신인 이들은 일본군에서의 경험 덕분에 진압군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

(제주 4.3 봉기를 진압했던 이들이 했던 발언)


(현재 제주4.3평화박물관에 있는 묘지)

 

박진경은 일본군 학병 출신으로 태평양 전쟁 말기 제주도에서 일본군 장교로 근무에 제주도에 구축된 진지구조와 지형에 익숙했다박진경이 암살당한 이후 부임한 11연대장 최경록은 일본군 지원병 1기 출신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실전경험이 풍부한 것으로 확인된다그는 일본군 제78연대에서 하사관 후보생 시험에 합격한 뒤 군조 대 일본 육사시험에 합격해남태평양의 뉴기니에서 전투를 하다 종전이 돼 준위로 귀국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심지어 그는 1989년 주일대사로써 일본 산케이신문에 기사를 기고 했는데그 기사에는 일본은 자위대의 명칭을 일본국군으로 바꾸고 당당히 군사력을 강화해 아시아의 방파제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썼던 인물이다.

(4.3 사건 당시 토벌대 사령관이던 유재흥, 놀랍게도 한국말을 잘 못했다고 한다.)


(4.3 사건 당시 암살당한 박진경을 대신해 부임한 최경록, 이후 주일본대사관을 지냈던 그는 1989년 일본 자위대를 칭송하는 글을 산케이 신문에 실었다가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1960년 4.19 혁명 때 이승만의 진압 명령을 거부했던 송요찬의 경우 일제시대 당시 일본군지원병훈련소에서 조교생활을 하다가 조장(상사)까지 진급한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다2연대장 함병선도 제주도 토벌작전을 전개한 전임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며낙하산 부대에서 근무한 경험을 가진 일본군 준위 출신이다. 2연대 출신 최갑석은 함병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함 연대장은 국내 전투에는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이 참가한 군인이었다그는 국군에 들어와서는 여순사건제주4.3사건옹진지구 전투홍천 전투춘천 수복 전투, 6.25전쟁 등 한국군의 전장에는 반드시 그 복판에 있었으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일본군 준위와 상사 출신은 사관학교 출신보다 실전 경험이 많고그래서 전쟁의 난국에는 머리 좋은 장교들보다 이들의 용맹성·효용성이 더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함 연대장이 그 대표적인 인물인 것이다.”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토벌을 지휘한 유재흥은 일본 육사 55기로 일본군 대위 출신이며해방 이하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한국어가 서툴러 통역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유재흥은 대위 시절인 1943년 이광수·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조선인 학병 지원을 촉구하는 연설을 할 정도로 친일파 출신 장교였다주한미대사관은 그를 말과 행동이 너무 일본식이기 때문에 한국적 방식에 적응할 수 없지만동급의 한국군 장교들보다 훨씬 더 영어를 잘 구사하고 이해한다고 평가했다.

(제주 4.3 사건 당시 진압군이 적색지역으로 설정한 곳에서 속출한 희생자들을 나타내는 지도)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육사) 4기로 1947년 9월 10일 졸업한 황인성은 임관과 동시에 동기생 4명과 함께 9연대 소대장으로 발령을 받아 1948년 1월 광주의 4연대 지불관으로 전출될 때까지 제주도 주둔 9연대 1소대장으로 근무했다그에 따르면당시 육사에서는 일본군의 보병조전’, ‘작전요무령등을 사용했고미군의 야전교범도 조금씩 번역돼 사용되기 시작했다일본군과 미군의 군사교육이 혼합된 체제였던 것이다.

(이후 진실화해조사위원회의 활동으로 발견된 학살로 희생된 이들의 유골)

 

이러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제주 4.3 봉기 당시 미군정이 도왔던 토벌군 지휘관들이 일본군에서 경력을 쌓았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결국 이들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서 쌓은 전투경험이 제주 4.3 봉기를 진압하는 데 이용됐고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 희생이 발생했다무엇보다 제주 4.3 사건 당시 희생자들 중 90%가 이들에 의한 희생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허호준그리스와 제주비국의 역사와 그 후그리스 내전과 제주4.3 그리고 미국선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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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55년 4월 18일 호치민 주석이 소련 기관지인 프라우다(Pravda)에 게재한 글입니다.)


1870년 4월 22일, 오래된 전제주의 러시아 땅에서 장차 전세계 근로대중과 피압박인민의 지도자요 탁월한 교사가 될 사람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태어났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자본주의는 그 최고이자 최후의 단계(제국주의)에 도달했으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맑스와 엥겔스의 위대한 작업을 새로운 역사적 조건 속에서 훌륭하게 계승한 사람이 바로 블라디미르 레닌이었다. 개량주의자들을 비롯하여 맑스주의를 왜곡한 온갖 종류의 인간들에 대해 비타협적으로 싸우면서 레닌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켰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위대한 이념적 무기인 맑스주의를 더욱 풍부화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의 정식화에 크게 공헌했다.


그는 노동자·농민동맹, 민족과 식민지 문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그리고 노동자 계급과 예속민족들의 다양한 형태의 투쟁을 지도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인 새로운 형태의 프롤레타리아당의 건설과 강화에 대한 맑스주의적 원칙을 발전시켰다. 레닌은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 이론을 수립했으며 일국 사회주의의 성공 가능성을 입증했다.


레닌은 제국주의의 억압에 신음하고 있던 근로인민들이 사회 발전의 법칙,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전체 해방운동의 각 단계에 있어서 정치투쟁의 주관적 요구와 객관적 조건들을 보다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피압박대중에게 복잡하게 뒤얽힌 우리 시대의 발전과정을 설명해주었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데 필요한 기적과 같은 무기, 즉 볼셰비즘의 이론과 전술들을 주었다.


레닌에 의해 건설된 소련 공산당은 세계 인민에게 빛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유능한 전략가이자 전술가인 위대한 레닌의 명민한 지도하에 공산당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권력을 장악하고 최초로 근로대중의 국가를 건설하도록 했다. 이 국가의 건설은 인류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다. 평화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민족들의 눈에 소연방은 독립과 자유의 견고한 보루로 비쳐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비에트 연방이 지도하는 평화와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강력한 진영이 제국주의에 대항해서 등장했다.


레닌의 인기와 교의는 엘베강에서 태평양까지, 그리고 북극에서 적도에 이르기까지 펼쳐져 있는 평화와 민주주의 진영이 거둔 모든 성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억압받는 불행한 민족들이, 모든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이 높이 쳐들고 있는 레닌의 기치를 신념의 상징, 희망의 횃불로 여기고 있는 이유다. 공산주의를 건설하려는 소연방 인민의 영웅적 투쟁은 이제 모든 민족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으며 그들에게 인간다운 생활을 쟁취하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레닌이 서명한 포고령 속에 구체화되었고,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후 즉시 공포되었던 소비에트 연방 정부의 일관회된 평화정책은 이제, 광범위한 인민대중들이 평화를 보존하고 강화하기 위한 투쟁과 미제국주의자들을 추중하는 전쟁광들에 대한 투쟁에 나서도록 고취하고 있다. 레닌에 의해 제기된 민족자결, 평화공존, 타국에 의한 내정불간섭(즉 관련 당사국들의 호혜평등원칙, 이 원칙은 소연방 외교정책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원칙들은 이제 식민지와 예속국 인민들에게 민족통일과 독립을 위한 투쟁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평화와 독립,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를 위해 싸우고 있는 전 세계 민족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아시아 민족들에게도 레닌주의는 즐거운 삶을 가져다주는 태양과 같은 존재다. 레닌은 항상 아시아 민족들의 민족해방운동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했으며 그것을 제국주의 지배자들에 대한 전 세계 근로인민들의 투쟁의 일부로 간주해왔다. 레닌은 아시아의 각성과, 권력장악을 위한 유럽 선진 프롤레타리아트의 초기 투쟁이 세계 역사에 새로운 시대, 20세기와 함께 시작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점을 명확히했다. 1913년 블라디미르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전 유럽은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유럽의 모든 부르주아 계급은 중국의 모든 반동세력, 봉건세력과 결탁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새로운 아시아, 즉 수억의 아시아 근로대중은 문명국들의 프롤레타리아트를 확고한 동맹세력으로 삼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 민족들의 해방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를 저지할 수 있는 세력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20세기 중반인 오늘날 레닌이 말한 ‘새로운 아시아’는 바로 중화인민공화국, 몽고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그리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이다. 아시아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이와 같은 새로운 세력이 민족해방투쟁을 위해 일어나고 있다. 위대한 혁명 전략가의 이러한 과학적 예견들은 너무 빨리 실현되었기 때문에 제국주의 진영은 초조와 두려움에 떨고 있다! 만약 마르크스-레닌주의 당의 지도하에 아시아 예속민족들이 실질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레닌의 위대한 가르침에 따랐기 때문이다.


레닌은 동방의 혁명가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여러분들 앞에는 세계의 다른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과제가 놓여 있다. 공산주의 이론과 공동실천에 따라 그것을 유럽에는 존재하지 않는 특수한 조건들에 적용하면서, 여러분들은 농민이 기본대중을 이루고 있고 자본주의에 대해서가 아니라 봉건 잔재에 대한 싸움이 과제가 되어 있는 조건 속에서 어떻게 그 이론과 실천들을 활용할 것인지를 알아내야 한다.”


이것은,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하며 부패한 봉건주의와 관료체제의 잔재가 여전히 광범위하게 남아 있는 우리나라 같은 곳에서 가장 유익한 교훈이 된다. 영광스러운 중국 공산당과 명민한 지도자 모택동 동지의 지도하에 위대한 중국혁명이 승리한 것은 레닌주의 사상의 승리였다. 모택동 동지가 “10월혁명의 총성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에 가져다주었고, 6억 인민이 일시에 모두 제국주의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레닌주의를 국제주의에 적용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성취한 소비에트 연방은 식민지와 예속국가들의 민족해방운동에 끊임없이 강력한 도덕적 지원을 보냈다. 특히 일관된 평화정책과 전세계에 걸친 막중한 권위로써 소비에트 연방은, 조선과 베트남 인민들이 미제국주의와 그 동맹국들에 의해 초래된 위험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조국을 지키는 것을 크게 지원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외교활동은 조선과 베트남에서의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베트남 인민들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신 속에서 교육 받았기 때문에 인도차이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프랑스 근로인민들도 포함한 전 세계 인민들의 도덕적 지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레닌은 모든 공산당과 노동당에게 그러했듯이 우리에게도, 그의 이데올로기였던 혁명적 당의 조직 원칙, 이론, 그리고 전술이라는 값진 보석을 남겨 주었다. 레닌주의는 우리 당을 지도하고, 또한 우리 당으로 하여금 근로대중조직의 최고 형태이자 인민의 지성, 존엄성, 양심의 구현체가 될 수 있게 해 주는 강력한 이념적 힘이다. 레닌주의의 기치 아래 베트남 노동당은 우리 인민의 신뢰를 획득했으며 그들의 전위당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 당은 노예와 식민주의의 굴레에 결코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 우리 인민의 잠재력과 창조성을 활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레닌은 당 내부의견의 통일, 당원간의 유대, 혁명적 규율의 존중, 위대한 공산주의의 대의에 대해 변함없는 믿음, 최후의 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체현했다. 이 모든 것들은 현재 베트남노동당에게 격려가 되고 있다. 베트남노동당은 매일 매시간 비판과 자기비판의 원칙을 적용해 왔으며, 그것을 주관주의와 자만의 정표들에 대한 투쟁에 있어 오류와 결점을 교정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으로 간주해왔다. 우리 당의 관심은 오로지 우리 인민과 조국에 대한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은 그 사업의 수준을 높이는 데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자신의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한편, 우리 당은 투쟁성, 정치적 역동성, 조직의 통일성, 그리고 당원들의 이념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레닌주의를 연구해 왔다.


우리 인민과 당원들은 민족해방을 위한 길고 험한 투쟁의 불꽃 속에서 단련되었으며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통을 감수했다. 8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 인민과 당은 베트남 인민을 승리로 이끌고 인도차이나에 평활르 재건한 영웅적 투쟁을 전개했다. 제네바 협정은 베트남 인민과 라오스, 캄보디아 형제들의 민족해방투쟁과 그들의 고결한 희생과 영웅적 행위가 국제적인 인정을 받아 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 세월동완 우리 당이 결연하고 끈질기게 인민들오 하여금 위대한 희생정신으로 투쟁하도록 이끌었다는 사실은 자랑할 만한 일이다.


평화가 회복된 오늘날에도 우리는 제네바 협정의 올바른 준수를 위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이미 확인된 자료에 따라 우리는 최근에 다음과 같은 것을 확언할 수 있다. 즉 협정상대가 2,114건의 협정위반을 저질렀으며, 거기에는 남베트남에서 위반한 467건도 포함된다. 게다가 그동안 806명이 사망하고, 3,501명이 부상당했으며, 12,741명이 근거 없이 체포당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지난해 9월, 베트남 노동당은 제네바 협정의 정확한 이행과 그것을 파괴하려는 모든 책동에 대항하기 위한 우리 인민의 행동에 관한 많은 결의들을 채택했다. 우리의 주요과제들은 다음과 같다,


1. 평화를 굳게 다진다. 

2. 민족통일을 완수한다. 

3. 완전한 독립을 획득한다. 

4. 민주주의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킨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기본과제들을 달성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마닐라와 방콕에서 제국주의자들이 회의를 연 이후 아시아에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지금 미국은 공공연하게 인도차이나 문제제 간섭하고 있으며 제네바 협정을 파괴하려는 수많은 책략들을 꾸미고 있다.


제국주의자들과 모든 그 앞잡이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영구히 분할하여 남베트남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고, 모든 민주세력들을 제거하며 1956년 총선거를 저지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시 전쟁에 불을 붙이려는 적의 음모를 저지하고 1956년 7월로 예정되어 있는 전국 총선거를 통해 민족 재통일을 달성키 위해 우리의 투쟁은 휴전단계에서 정치투쟁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평화, 재통일, 민족독립, 그리고 민주주의는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문제들이다. 만약 평활르 굳건히 다지지 못한다면 총선거를 통한 베트남 재통일의 가능성은 없다. 역으로, 총선거를 통한 민족 재통일의 달성이 없다면 평활르 위한 굳건한 토대를 건설할 가능성은 없다. 최근의 사태 진전과 정치상화엥 대한 점검을 통해 우리 당은 베트남 인민들의 평화와 독립,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매우 힘든일이라는 것과 투쟁의 도정에서 베트남 인민이 수많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당은 최후의 승리를 굳게 확신하고 있다.


가장 강력한 레닌주의 교의로부터 우리는 평화와 독립, 재통일, 그리고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우리의 신성한 과업을 달성하고 사회주의를 성취하기 위한 위대한 힘을 끌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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