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려는 사례는 한국의 인터넷 상에서 찾기 쉽다. 특히나, 나무위키를 비롯한, 반공주의적 색체가 강한 사이트는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이라는 문서까지 만들어 놓고, 어떻게는 베트남 전쟁 당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려는 추태를 보이고 있다. 네이버에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검색해보면, 나무위키식 주장에 영향을 받은 글들이 제법 보인다. 이런 주장을 하는 문서들에서 가장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부분은 바로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고자이 학살을 극구 부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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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이 학살을 묘사한 벽화, 이걸 가지고 남베트남군이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사실 물타기에 가깝다.)
고자이 학살은 1966년 2월 26일 베트남 빈딘성 떠이선현에서 일어난 학살이다. 얘기에 따르면 주민 380명을 모아놓고, 한 시간 만에 한 사람도 남김없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당시 학살을 겪었던 대다수 그 지역 베트남 주민들은 학살의 주체를 한국군 소속 맹호 부대로 규정하고 있다. 2007년 오마이 뉴스에서 연재했던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관련한 기사를 보면, 당시 한국군이 어떻게 학살을 벌였는지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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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피해자 응우옌떤런씨, 2016년 뉴스타파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에도 나왔고, 2015년에 학살을 증언하러 한국을 방문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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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떤런씨와 구수정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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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딘성 박물관에 있는 고자이 학살 희생자의 사진.)
1966년 2월 26일 아침. 평화로운 베트남의 한 마을에 포탄이 날아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헬기가 마을의 하늘을 가득 메웠으며, 녹색 전투복을 입은 한국군이 마을로 밀려 들어왔다. 그렇게 해서 한 시간 동안 학살이 자행됐고, 모두 380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한 베트남 관리는 이 학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한국군은 주민들을 언덕위에 몰아 놓은 뒤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으며, 노인들을 끈으로 묶어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내버려두고, 어린이들의 몸을 찢어 손과 발을 나무 위에 내던져 버린 경우도 있었다.”
고자이 학살이 있던 곳에는 전쟁 이후 마을 주민들이 만든 큰 위령비가 있다. 이 마을에 있는 위령비에는 희생자 380명의 이름과 나이가 새겨져 있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침략자 미국에 대한 원한을 깊이 새긴다. 1966년 2월 26일 남조선 군대가 미제국주의 지도하에 380명의 무고한 주민을 학살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지역에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학살을 부정하려는 이들은 현재 고자이 학살 지역에 그려진 벽화를 문제를 삼고 있다. 그 이유는 벽화에서 묘사한 한국군의 군복 마크가 한국군의 맹호부대가 아닌 당시 남베트남군이던 레인져 부대의 마크라는 것이다. 한국군의 맹호부대 마크는 줄무늬가 있는 호랑이이지만, 벽화에 그려진 마크는 당시 남베트남군 특수부대인 레인져 부대가 사용하던 흑표범 마크다. 즉 그러한 점을 들어 학살의 주체를 한국군이 아닌 남베트남군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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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호부대 마크와 남베트남군 레인져 부대 마크, 이걸 가지고 학살 부정론자들은 한국군의 무고함을 주장하고 있는 중이며, 이는 나무위키 같은 반공 성향의 인터넷 사이트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소 함정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반론도 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학살당할 뻔한 피해자가 굴뚝 개수를 잘못 기억한다고 해서, 나치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즉 그러한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면피용에 가깝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상조사가 아직 이루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남베트남군이 했다고 주장하는 건 올바르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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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안 학살 50주년 추모제)
그렇다면, 학살에 대한 묘사는 과연 거짓이고, 한국군은 그러한 학살로부터 무고한 것일까? 이러한 얘기는 한국군이 해방 후 제주 4.3 사건이나 여순사건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국민 보도연맹 학살이나 거창 양민학살 사건 등을 보면, 베트남인들이 증언한 한국군에 대한 묘사는 결코 거짓이 아니다. 실제로 한국군은 그러한 학살의 경험이 있고, 주월한국군사령관이던 채명신만 하더라도 제주 4.3 사건에서 진압작전에 동원됐던 인물이다. 즉 박정희 정부의 월남 파병은 그러한 연속성을 가진 상황에서 진행된 역사다. 따라서 한국군이 민간인 학살을 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것은 말 그대로 현실 부정이다.
2016년 방송채널인 뉴스타파에서 제작한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관련 영상을 보면, 빈딘성 박물관에서 해설하는 한 베트남 여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진은 1965년에 뀌년(Quy Nhon) 항구에 상륙했던 한국군의 모습입니다. 이때부터 빈딘성에서 학살이 시작됐습니다. 뀌년하고 빈딘성에 들어온 후, 한국군들은 북베트남군을 다 없애기 위해서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없애고, 깨끗이 죽인다’는 전략으로 굉장히 많은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한국군은 여성들을 강간하고 나서 음부에 칼을 꽂아서 죽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 위에 지푸라기를 덮어서 산 채로 태워 죽이기도 했습니다. 한국군들은 후잉티본 할머니 집의 방공호에 숨어 있던 17명의 주민들을 발견했을 때, 그 안으로 총을 난사했습니다. 그 후에 이 방공호 안에 침투하기 위해 지푸라기 같은 것들을 밀어 넣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 채로 불태워졌습니다.”
제주 4.3 사건 관련 진상조사 보고서에도 이러한 잔혹행위들이 무수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군이 이러한 잔혹행위로부터 무고할 것이라는 주장은 우리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되돌아 볼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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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이 학살을 반성했던 참전용사 이우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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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이 학살 희생자 380명의 명단)
이후 채명신이 집필한 자서전인 <베트남 전쟁과 나>에서도 1966년 당시 한국군의 학살 피해의 그늘을 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1966년 1월에서 3월까지 대략 6주동안 벌인 작전으로 총 1,004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고, 이걸 빈안 학살이라 부르기도 한다. 빈안 학살은 모두 15개 지점에서 벌어진 학살로, 1966년 2월 26일에 일어난 고자이 학살도 그 중 일부다. 채명신 장군은 회고록에서 1966년 2월 26일부터 28일까지 전개된 맹호부대의 번개작전을 회고했다. 아래는 <베트남 전쟁과 나> 288쪽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작전 기간 중 전과는 적 사살 92명, 포로 33명으로 기록되었지만, 소총은 불과 4정 노획으로 그쳐 이 문제에 대한 심각한 분석이 요구되었다. 왜냐하면, 무기가 너무 없다면 사살자의 일부가 양민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기갑연대의 이번 작전지역인 빈케군 빈호아강 북방 평야지대에 산재해 있는 부락은 거의가 베트콩의 전략촌이기 때문에 사살자가 민간인이 아닌 것은 거의 확실하다. 즉 교전 중 사살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바로 “심각한 분석이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작전상 맹호부대는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벌였는데, 기록된 베트콩 사살 숫자에 비해 노획된 소총 숫자가 불과 4정 밖에 안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심각한 분석이 요구된다고 말한 것이다. 물론 채명신은 민간인이 아니라고 확신적인 발언을 했는데, 채명신 입장에선 학살의 가능성을 굳이 인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콩과 민간인의 구분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전개된 베트남 전쟁의 특수성을 생각해보면, 이 당시 전과보고는 정직하지 못했다. 사살된 시신만 가지고 전과를 보고하는 바디 카운트(Body Count) 방식인데, 당연히 여기에는 폭격으로 몸이 산산조각 나거나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된 시체는 포함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적군 사살이 비교적 적게 나올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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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안 학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구수정 박사)
또한 앞에서 말한 민간인 희생을 생각해보더라도, 380명의 민간인이 죽었음에도 기록을 하지 않는 경우가 높다. 당장 1년간 미군에 의해 철저히 은폐되었던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만 보더라도, 504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지만, 전과보고는 120명의 베트콩 사살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보자면, 고자이 학살이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로 규정해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일각에서는 고자이 학살 지역에 한국군이 있지 않았다고 변명을 하지만, 이것은 2017년 미국에서 방영했던 켄 번즈(Ken Burns) PBS Vietnam War만 보더라도 반박이 가능하다. 아래는 PBS Vietnam War Episode 4에서 나왔던 내용 중 일부다.
“주월미군사령관인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2만 명으로 구성된 미군과 남베트남군 그리고 한국군을 보내, 빈딘성 지역을 휩쓸어 적과 그들의 보급선을 찾아내고자 했다. 먼저 전단을 뿌리고 대형 스피커로 방송하길 “헬기에 사격을 가하면 가혹한 운명이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집을 떠나라고 권고했으며, 항복하는 베트콩에게는 안전을 보장했다. 그러고는 공군과 포병대를 불러 마을을 산산조각 냈다. 이 전쟁 최초의 대규모 베트콩 토벌 작전이었다. 공격은 42일간 지속됐고, 미 육군 보고에 따르면 적 2,389명이 죽었다. 웨스트모어랜드는 기뻐했지만, 현장 지휘관들은 미군이 화력을 그렇게 쏟아 부었는데도 북베트남 정규군 대부분이 중부고원 지대로 도망간 것을 우려했다. 이 작전은 민간인 10만 명을 고향에서 쫓아냈다.”
PBS Vietnam War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미군과 남베트남군 그리고 한국군은 당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곳에서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1966년 2월 26일날 일어난 고자이 학살도 주월미군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가 주도한 수색과 섬멸 작전(Search and Destroy Campaign) 과정 중 일부였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고자이 학살은 이 군사작전 중 일부였으며, 군사적으로 보고되지 않은 민간인 학살이었다. 또한 위에서 인용한 빈딘성 박물관 해설사의 내용은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신사군을 토벌하기 위해 전개했던 삼광작전”과 같은 비슷한 군사작전이 진행되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베트남 전쟁 당시 전쟁에 참여한 군 지도부는 이러한 경험을 일본군과 한국군에서 쌓은 인사들이었으며, 채명신 또한 제주 4.3 사건 당시 진압군이었다.
따라서 고자이 학살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은 분명히 있었으며, 한국군의 이러한 학살은 과거 일본군에서 벌인 학살과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에서 벌인 학살의 연장선상이라는 점에서 봐야한다. 그리고 한국군에 있었다던 광복군 출신들도 엄밀히 따지자면, 양민학살이라는 측면에선 일본군과 크게 차이가 없는 중국 국민당군 출신들이었다. 중국 국민당군 출신이자 광복군 출신인 최덕신이 한국전쟁 당시 거창 양민학살을 자행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이를 입증해준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분명히 있었고, 고자이 학살도 한국군에 의한 것이었음은 여러 가지 근거를 통해 생각해보면, 한국군의 잔혹성을 보인 케이스며, 남베트남군이 했다는 변명은 물타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