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여행 마치고 나서 1일 뒤에 PBS 베트남 전쟁 2부를 리뷰했었는데, 여러모로 대학원 새 학기를 앞두고, 이런저런 일들과 약속 그리고 현장집회와 학습, 국내 역사기행을 하다보니 다큐멘터리 리뷰를 1달 만에 올리게 됐다. 3부의 러닝타임은 1시간 55분이나 되기에 앞으로 다큐멘터리가 1시간 30분 이상을 초과할 시, 한 번에 올리지 않고 한 에피소드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두 번 올릴 생각이다. 

(PBS 베트남 전쟁 3부 The River Styrx)


지난번에 리뷰 했던 2부는 1963년 미국이 지원한 응오딘지엠 정부가 몰락하면서 에피소드가 막을 내렸다. 2부가 존 F. 케네디 시절에 본격적으로 단행된 미군고문단 파병과 남베트남 응오딘지엠 정부의 무능하고 부패한 사정을 잘 조명했다면, 3부는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이후 대통령이 된 린든 B. 존슨의 베트남 전쟁 파병 결정과정을 1시간 55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번 2부에서도 밝혔듯이,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들은 미국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다큐멘터리 초반에 나오는 미국의 한 애국청년 모기 또한 영화 ‘7월 4일생(Born On The Fourth Of July)’의 주인공인 론 코빅처럼 애국심을 가지고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17살에 입대한 모기는 베트남에서 전사했고, 현재 워싱턴 D.C에 있는 베트남 전쟁 메모리얼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진을 보고 있는 린든 B. 존슨 대통령, 존슨 대통령은 미국 사회에서 나름 복지정책을 실현하고자 했지만 베트남에서 침략전쟁을 전개하면서 그 꿈을 내팽겨쳐버렸다.)


(응오딘지엠 사후 해방전쟁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베트콩 참전용사인 레콴콩씨)


1963년 응오딘지엠이 CIA에 의해 암살당하자, 남베트남 사회는 더더욱 혼란과 방황의 연속이었다. 응오딘지엠 정부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들은 응오딘지엠이 암살당하자, 무장투쟁을 더욱 확장했다. 남베트남군과 관련지역 마을에 대한 베트콩의 공격은 단 2주만에 최소 400건을 넘을 정도였고, 당시 미국 추산으로 남베트남 농촌 지역의 최소 40% 이상이 베트콩 수중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심지어 남베트남 국민들 중 최소 50% 이상이 베트콩 수중에 있었다고 추정하기까지 했다. 말 그대로 베트콩은 남베트남 농촌에 자신들 만의 국가를 만들었고, 이들의 해방구는 사실상 국가였던 셈이다. 1951년부터 항불전쟁에 참가했고, 1963년 압박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던 참전용사 레콴콩은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응오딘지엠 정권이 전복되었을 당시 우리들은 아주 기뻐했습니다. 남베트남 전체가 해방될 날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죠. 따라서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괴뢰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항복하고 우리 편으로 합류하는 괴뢰 군인들이 많아졌죠. 또한 우리 군대에 자원입대하는 젊은이들이 급증했습니다.”

(BAR 소총을 발사하고 있는 베트콩 전사)


(무기를 모아놓은 베트콩 부대, 베트콩은 1960년대 초반부터 꽤나 강력한 무장력을 보였다.)


베트콩이 농촌지역에서 해방구를 확장해나가고 있을 때, 남베트남 내부에선 정말 기가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응오딘지엠 정부를 전복시킨 남베트남의 즈엉반민 정부는 대중성이 전혀 없었다. 1964년 1월부터 1965년 6월까지 남베트남에선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로 새로운 정부 8개가 등장했을 정도로 막장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인사들은 과거 프랑스 식민지 시절 부역했던 인물이었고, 미국은 이들을 토대로 남베트남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정말 허황된 꿈을 꿨다. 린든 B. 존슨은 케네디 행정부때부터 베트남 문제에 개입한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를 남베트남에 보내 즈엉반민 이후 들어선 응우옌카인(Nguyen Khanh)에 대한 지지와 지원의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남베트남 내부에서 일어나는 군벌들의 쿠데타 롤러코스터를 끝내지는 못했다.

(쿠데타 롤러코스터를 진행했던 남베트남의 군벌들)


한편 북베트남에서는 민중에게 독립 영웅으로 존경받던 국부 호치민(Ho Chi Minh)과 항불전쟁과 응오딘지엠 집권 초기 당시 남베트남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던 혁명전사 레주언(Le Duan)이 권력을 양분하고 있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1964년을 기점으로 호치민 보다 더 남부통일에 대한 열정을 보였던 레주언의 당내권력이 강화되었다고 한다. 이 시점부터 호치민의 실권이 레주언보다 약했다는 얘기다.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가 집권을 하면서 소련에서는 스탈린 격하 운동이 진행됐고, 이는 중국과 소련 사이의 수정주의 논쟁으로 번졌다. 베트남은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중시했지만, 호치민은 친소련적 입장이었던 반면 레주언은 친중국적 입장이었다. 1963년에서 1964년부터 하노이 당국은 레주언의 입지가 강해지면서, 이 시기 베트남 하노이 당국은 가장 친중적인 입지를 보이기도 했다. 호치민의 실권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한 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에 헌신했던 그는 여전히 베트남 민중에게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아래는 베트민 참전용사의 인터뷰 내용이다.

(호치민과 레주언, 1960년대부터 호치민과 레주언은 당 내 권력을 공유했으나, 1963년부터 레주언의 권력이 보다 강해졌다. 레주언은 호치민 보다 남부해방 및 통일에 대한 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호 아저씨에 대해 얘기를 하는 건 아주 어렵습니다. 난 호 아저씨와 가까웠어요. 고급 간부 한 사람이 호 아저씨에게 물어본 적이 있어요. “왜 고무샌들을 신고, 수수한 카키색 옷을 입으세요?”라고 말입니다. 호치민 아저씨는 대답했죠. “국민들이 맨발인데, 어떻게 하죠? 도데체 내가 그들보다 뭐가 더 잘났다고?”말입니다.”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그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미국 군인으로 베트남 전쟁 당시 주월미군총사령관을 지냈다.)


(존슨과 맥나마라)


이런 사실을 통해서 호치민이라는 인물이 대다수 베트남인들에게 큰 신뢰를 줬고, 또 지지를 받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케네디 사후 집권하게 된 린든 B. 존슨은 남베트남에 주둔하던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를 16,000명에서 23,300명으로 늘렸다. 지엠 정부 시절 주월 미국대사로 있던 헨리 캐벗 로지를 대신하여 맥스웰 테일러 장군을 대사로 임명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튀니지와 시칠리 그리고 노르망디에서 큰 활약을 펼쳤고, 한국전쟁에서도 활약을 펼쳤던 군인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을 주월미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렇게 만발의 준비를 끝낸 존슨은 베트남 전쟁의 흐름을 뒤바꿀 또 다른 계획을 이들과 함께 준비했다. 그것이 바로 1964년 통킹만 사건이다.

(1964년 당시 미국이 계획한 통킹만 조작 사건 중 일부, 통킹만 사건 몇일 전 미국은 남베트남 특수부대로 하여금 북베트남에 있는 섬에 상륙 및 공격을 게시했다.)


(USS 매독스호)


(통킹만 사건에 대해 발표하는 존슨 대통령)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미군 전투기)


(북베트남군에게 최초로 포로로 붙잡힌 미군 조종사 알베트 알버레즈)


통킹만 사건은 사전에 철저히 미국에 의해 계획됐다. 미국은 라오스에서의 군사작전과 더불어 북베트남 영해에 있는 섬 두 군데에 남베트남의 특수부대를 상륙시키고,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의도적으로 북베트남 영해에 침투하여 통킹만 사건을 자극 및 조작했다. 1차 공격은 북베트남의 어뢰정 공격이 있었다고 하지만, 2차 공격은 미국의 조작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사건을 빌미로 북베트남 유류 저장소를 포함한 군사기지와 마을 몇 군데를 전투기를 보내 폭격했다. 이 전투기들은 미국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것들이었다. 이 중 전투기 한 대는 북베트남에 의해 격추됐고, 조종사는 북베트남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당시 포로로 붙잡힌 알버트 알버레즈는 이렇게 해서 북베트남군에게 처음으로 붙잡힌 포로가 됐다.

(북베트남군에게 심문받고 있는 알버트 알버레즈)


(작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통킹만 사건 이후 미국의 존슨 정부는 그해 8월 7일 통킹만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상원은 88 대 2로 이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이로써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게 됐다. 그해 10월에는 사이공 근처에 있던 비엔호아 공군기지가 공격을 받아 폭격기 5대가 파괴되고 나머지 항공기 및 헬기 수십 대가 파괴 및 손상을 입었다. 미군도 몇 명 전사했다. 더더욱 큰 사건은 1964년 12월에서 1965년 1월 대략 몇 일간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역인 빈지아(Binh Gia)에서 발생했다.

(남베트남군 장교와 미군 고문단)


(빈지아 지도)


(빈지아 지역에 결집했던 베트콩 부대)


(빈지아 전투 작전 지도)


(빈지아 전투에 투입된 미군 헬기)


(빈지아 전투 당시 전투를 치렀던 미군들, 이 전투에서 미군 5명이 전사했다. 미군들은 이들이 전사하자 남베트남군의 시체를 내팽게친채 이들의 시신만 수습하고 남베트남군이 죽든 살든 외면했다.)


빈지아에서 1964년 12월 28일부터 1965년 1월 1일까지 남베트남군과 베트콩 간의 교전이 벌어졌는데, 1963년 압박 전투처럼 베트콩이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남베트남군은 미군고문단에서 보낸 헬기와 APC 장갑차를 투입했고, 대략 4,000~5,000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했다. 반면 베트콩의 병력은 1,000명 안팎이었다. 전투 결과 미군 고문단 5명이 전사하고 남베트남군 최소 200명 이상이 전사했으며, 총 500명 이상의 사상자가 속출했다. 반면에 베트콩의 전사자는 32명이었다. 1963년 압박 전투에서와 마찬가지로 베트콩은 소총 및 기관총으로 미군 헬기를 격추시켰고, 오합지졸에 불과한 남베트남군을 섬멸했다. 당시 남베트남군은 최졍예 부대를 투입한 것이었지만, 베트콩에게 패배했다. 빈지아 전투가 보여주듯이, 남베트남 정부는 망해가고 있었다. 빈지아 전투에 대해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은 ‘작은 디엔비엔푸(Little Dien Bien Phu)’라고 극찬했을 정도로 베트콩은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다. 빈지아 전투 당시 베트콩 장교로 참전한 응우옌반통(Nguyen Van Tong)은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빈지아 전투는 전쟁의 중요한 이정표였습니다. 만약 미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1966년에 수도 사이공에 들어갔을 겁니다.”

(빈지아 전투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 호치민은 이 전투에 대해 작은 디엔비엔푸 전투라 호평했다.)


(호치민과 레주언, 레주언 또안 이 전투를 통해 해방전쟁이 이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큐멘터리에 나와 인터뷰를 한 빈지아 전투 참전용사 응우옌반통)


즉 남베트남은 이대로 가면 1965년이나 1966년에 망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1965년 2월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에 있는 플레이쿠 기지가 공격당하자, 대규모 북폭인 롤링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을 게시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북폭은 3년 동안 지속됐고, 미국은 북폭을 위한 공군기지를 형성하기 위해 1965년 3월 남베트남의 다낭에 3,500명의 미 해병대 병력을 상륙시켰다. 이렇게 되면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최초로 지상군 부대를 보내게 됐다. 그러나 놀랍게도, 미국이 이렇게 까지 조치를 취한 이유는 정말로 남베트남을 돕기 위함이 아니었다. 아래는 펜타곤 페이퍼에 나오는 미국의 대베트남 정책의 목표다.

(1965년 2월 플레이쿠 습격 당시 현장 사진)


(롤링썬더 작전 당시 미군의 북폭 지도)


(북베트남에 네이팜탄을 투하하는 미군 전투기)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진짜 목적)


10% 남베트남을 돕기 위해

20% 남베트남의 영토를 중국 및 공산주의로부터 지키기 위해

70% 미국의 굴욕적인 패배를 저지하기 위해


1965년 3월 미 해병대는 다낭에 상륙했고, 다낭을 통해 베트남 내륙으로 깊숙이 진군했다. 미 해병대를 본 한 베트남 노인은 미군을 향해 ‘프랑스 만세(Vive la France)!’를 외쳤다. 그 노인은 미군 병사를 프랑스군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베트남에서 물러난 프랑스는 미국이 일으킨 이 전쟁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1965년 3월 다낭에 상륙한 미 해병대)


(모래사장에 있는 미 해병대)


(미 해병대를 환영하는 남베트남의 여성들)


(다낭에 상륙한 뒤, 남베트남 내부로 깊숙이 행군하는 미군들)


(미군을 보고 프랑스군으로 착각했던 베트남의 노인)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강력한 동맹이자, 서방의 강력한 동맹인 영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미국은 서방진영으로부터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는 전쟁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미군에게는 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베트남에 상륙했지만,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 상황이 펼쳐졌던 것이다.


3화 전반부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에 3화 후반부를 리뷰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