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냉전이 한참이던 1950년대 두 진영사이에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려고 했던 국가들이 있었다. 당시 이런 국가들을 가리켜 부르는 용어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제3세계(The Third World)였다. 제3세계 국가들 중에 아랍 국가들을 상징하는 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군인 출신으로 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대통령이 된 인물로 1950년대 이스라엘의 견제를 받고 있던 아랍 국가들에게 있어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جمال عبد الناصر)다.


나세르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인도의 네루등과 더불어 제3세계 진영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또한 1960년대 아랍 사회주의(Arab Socialism)라는 이데올로기를 중동 지역에 전파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아랍 사회주의는 리비아의 카다피, 이라크의 후세인, 시리아의 하페즈 알아사드 등의 지도자들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쉽게 말해 나세르는 중동 현대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자, 제3세계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원지인 이집트의 근현대사는 3세기 동안의 오스만 제국의 지배와 제국주의 국가 영국의 지배를 받은 역사였다. 신사의 나라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19세기부터 산업 혁명으로 제국주의 국가가 된 영국은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답게 세계 4대 문명의 발원지인 이집트를 무력으로 식민지 지배를 했었다. 영국의 지배에 놓인 19세기 이집트에선 독립운동이 일어났었고, 영국의 폭압적인 통치에 많은 이집트인들이 반영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그로부터 4년 뒤인 1918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나세르였다.


1937년 왕립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한 나세르는 제2차 세계대전이 지속되는 와중에 독립 국가의 탄생을 목표로 했고, ‘자유 장교단’이라는 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이후 나세르는 1946년 육군 참모 대학에 들어가 2년 과정을 마쳤고, 1948년 이스라엘의 탄생 과정에서 일어난 제1차 중동전쟁에 참전했다. 제1차 중동전쟁이 끝난 이후 이집트에는 군주제가 유지된 국가가 되었다. 당시 이집트의 왕이던 파루크는 부정부패와 더불어 말도 못하는 사치를 부리는 인물이었고, 그로인한 이집트의 빈부격차와 부정부패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것이 결국 나세르가 자신의 조직인 자유 장교단을 이끌고 혁명을 계획하게 되는 이유였다.


1952년 7월 나세르는 자유 장교단을 동원하여 혁명을 실행했고, 궁극적으로 혁명에 성공했다. 이후 정권을 잡게 된 나세르는 초반에 나기브라는 인물에게 명목상 지도자 자리를 맡겼지만, 이후에 자기 자신이 대통령직을 맡으며 명실상부 이집트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나세르가 집권한 이집트는 과거하고 달랐다. 물론 초기의 나세르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둘다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이후 서방과 갈등하면서 소련의 흐루쇼프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받으며 친소적인 입장으로 바뀌었다. 토지개혁과 더불어 각종 개혁을 실시했고, 1960년대에는 이집트의 산업체와 기업들을 국유화 했다. 또한 반동적 자본가들을 체포하여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은행, 보험회사, 기타 많은 기업들이 국유화 됐다.


이처럼 나세르는 진보적인 정책들을 많이 실행했다. 나세르가 이집트인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아마도 1956년에 단행한 수에즈 운하를 완벽히 이집트 소유로 만들었다는 점일 것이다. 19세기에 완공된 수에즈 운하는 당시 영국 프랑스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영국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나세르에게 수에즈 운하는 당연히 식민지 지배의 상징과도 같았다. 이는 대다수의 이집트인들이 가지고 있던 감정이었다. 따라서 나세르는 1956년 수에즈 운하의 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 그곳을 이집트 소유로 만들었다.


물론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48년에 무력으로 남의 나라 땅을 강탈하고 탄생한 이스라엘 또한 마찬가지였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집트 군대를 공격하여 수에즈 운하를 접수했다. 당시 혼자서 싸우던 나세르는 군사적으로 제국주의 연합군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영국을 반대하여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제국주의적 행위를 지지했다. 그러나 수에즈 사태에서 국제적인 여론은 이집트의 나세르 편이었고, 외교와 정치적인 부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무엇보다 수에즈 운하를 다시 되찾았다. 이에 따라 나세르에 대한 민중의 인기는 압도적이었다.


나세르의 가장 큰 업적을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이집트를 자주적인 국가로 만들었다는 점일 것이다. 1967년에 일어난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막강한 공군력으로 인해 개전 초기에 300대 이상의 항공기(전투기, 폭격기, 수송기를 포함해서)를 잃고, 이집트의 영토 또한 이스라엘에게 빼앗기면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세르에 대한 민중의 지지는 압도적이었다. 심지어 패전의 책임을 묻고 사퇴하려고 하자 민중들은 “나세르여! 우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고 왜쳤다. 왜일까? 그것은 바로 이웃국가인 이스라엘이 제국주의적이고 매우 폭력적인 전쟁을 중동 지역에서 저질렀고, 나세르는 이에 맞서 자주적인 국가 이집트를 지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가지 진보적 사회개혁들이 민중에게 성과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물론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빼앗긴 영토는 1973년 제4차 중동전쟁(혹은 욤 키푸르 전쟁)에서 나세르 사후 정권을 계승한 사다트(Sadat)가 되찾았다.


이집트의 초대 대통령 나세르는 죽기 직전 미국의 평화 협상안을 받아들였고, 이집트 입장에서 성과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970년 9월 28일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52세였다. 나세르가 사망하자 이집트는 추모의 물결로 휩싸였다. 많은 이집트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고, 수많은 아랍 국가에서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나세르가 남긴 유산은 분명했다. 그는 현재까지도 이집트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책에 나온 그에 대한 평가를 인용하겠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집트인들에게 있어서 나세르는 국가 독립의 건설자였으며, 다른 아랍인들에게는 아랍의 역사적 유산에 자긍심을 가지고, 아랍의 영향력을 드높이기 위해 함께 협력할 것을 주장하면서 아랍 민족주의를 소리 높이 외친 선지자였다.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그 결과로 야기된 서구의 압력(이를테면 영불 연합군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굽힐 줄 모르던 그의 용기는, 아랍인들이 식민 종주국의 강요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여설히 보여준 쾌거였다. 1950년대 이래 중동 정치 역학의 최전선에서 활약해 온 투쟁적 아랍 민족주의는 그가 남긴 유산이다.”


출처 : 인물로 읽는 세계사 30 나세르 p.156


나세르는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한 평생을 바쳤다. 그는 독립운동가였고, 혁명을 통해 봉건왕조를 타도했으며 자주적인 국가 이집트를 탄생시켰다. 1950년대 당시 그는 영국을 몰아내려 했고, 미국의 지원을 얻고자 했었다. 거기서 NATO의 가입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영국과의 동맹은 있을 수 없었기에 이를 거절했다. 더 나아가 그는 미국과 경쟁하던 소련의 지원을 받았고, 1960년대 아랍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 내지는 정치 체제를 탄생시켰다. 나 또한 나세르의 이런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한 시대를 살다간 자주적인 지도자였다. 앞으로도 나세르는 이스라엘과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자주적인 국가를 지킨 지도자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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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2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2
존 톨랜드 지음, 민국홍 옮김 / 페이퍼로드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지난 8월 말에 완독했던 존 톨랜드의 저서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을 읽은 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그 책을 읽고 난 이후 썼던 서평에서 2부도 리뷰 하겠다는 말을 언급했는데, 생각보다 늦어진 것 같다. 휴학생이라 집에만 주로 머물고 있는 신세라 다시 한 번 존 톨랜드가 집필한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을 다시 펼치게 되었다. 1부를 읽던 여름 나는 이 두꺼운 책을 빨리 일겠다는 마음에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는데, 1권을 다 읽고 나서 2권을 대출하고자 하던 시기에 태극기 집회로 인해 코로나가 갑자기 창궐하면서 도서관에서의 대출이 불가능해지는 불상사를 겪었다. 그래서 난 여름에 알바해서 탄 월급으로 이 책의 2부를 구매했다.

 

2부를 펼치기 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필자 자신이 늦장을 부린 것도 있지만, 이 책 외에도 읽고 싶었던 책이 꽤나 많았기에 결국 2부를 읽는 것이 생각보다 늦어진 감이 있다. 아무튼 내가 이 책을 펼치게 된 건 202012월이었다. 지난여름에 읽었던 1부가 1889년 그의 출생부터 1938년 자신의 고향인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는 시점까지 다뤘다면, 이번에 읽은 2부는 소위 1938년 수정의 밤(Kristallnacht)부터 1945430일 그가 아내 에바 브라운과 함께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시점까지를 다루고 있다.

 

2부는 아돌프 히틀러가 일으켰던 제2차 세계대전을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물론 책이 아돌프 히틀러의 전기이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전황과 전투 자체를 깊이 다룬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히틀러와 그의 나치 지도층이 어떤 식으로 독일 영토를 팽창해 나가고 세계대전을 어떻게 계획하는지 그리고 각자의 입장과 생각이 어떠했는지를 다룬다. 루프트바페(Luftwaffe)의 사령과 헤르만 괴링이나 요제프 괴벨스, 하인리히 힘러, 알베르트 슈페어, 빌헬름 카이텔, 루돌프 헤스 등 당시 나치 지도층이나 히틀러 측근이었던 이들의 이야기들도 상당히 많이 나온다.

 

그 외에 많이 언급된 인물 중에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두 인물을 뽑자면 2004년에 나온 독일 영화 몰락(Der Untergang)에 사실상 주인공으로 나왔던 히틀러의 여비서 트라우들 융에(Traudl Junge)와 오토 슈코르체니(Otto Skorzeny). 트라우들 융에의 경우 아돌프 히틀러가 그를 비서로 채용하는 과정부터 히틀러와의 인과관계 그리고 영화 몰락에서 나온 장면들이 매우 상세하게 책에서 나온다. 영화 몰락에서 보면 히틀러가 비서를 채용하는 과정에서 면접을 보러 온 이들에게 독재자 혹은 폭군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매우 상냥하고 정많은 모습으로 나오는데, 톨랜드의 책 또한 이것이 사실이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영화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지만, 융에는 1943년에 SS 친위대 장교였던 한스 융에와 결혼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남편이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전사해버렸다. 책의 마지막 챕터인 자정은 5분 후, 선장은 배와 함께 침몰한다는 영화 몰락에서 나왔던 부분들을 조금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 부분에서 상당히 트라우들 융에의 시각이 책에 반영되기도 한다. 영화 몰락을 본 독자라면 이런 거 읽는 재미도 상당히 있을 것이다.

 

SS에 편재된 특수부대 지휘관이었던 오토 슈코르체니의 경우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상당히 총애했던 인물로 책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1943년 영미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고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하면서 체포되어 감옥에 간 무솔리니를 구출했다는 내용부터, 그가 전개했던 여러 특수 작전들이 책에서 나온다. 참고로 오토 슈코르체니의 경우 그의 자서전이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되기도 했다. 슈코르체니 관련한 부분은 개인적으로 그가 지휘했던 무솔리니 구출작전을 재밌게 읽었다. 사실 그가 무솔리니를 구출하면서 이탈리아 북부에는 여전히 독일의 지원을 받는 파시스트 이탈리아 체제가 남아있게 됐는데, 그 가교역할을 슈코르체니가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지난번에 리뷰했던 1부에서도 한번 언급했던 것이지만, 저자 존 톨랜드는 아돌프 히틀러라는 이 인물을 최대한 과거의 인물 그러니까 우리가 역사 속에서 크게 주관적인 평가를 하지 않고 보는 인물처럼 집필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것이 아돌프 히틀러의 반인륜적 범죄인 유대인 학살을 옹호한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책의 구성을 위해서 톨랜드는 히틀러를 따랐던 사람부터 반대했던 사람들까지를 포괄해서 인터뷰했고, 그 자료들을 토대로 책을 썼다.

 

사실 히틀러가 처음부터 유대인을 계획적으로 학살한 것은 아니었다. 그 시작은 유대인에 대한 사회적 제한이었지만, 1930년대 후반이 되면서 집단 거주지와 같은 강제 이주를 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장기화도면서 유대인이라는 종족을 계획적으로 학살하는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그것이 1941년과 1942년 사이에 있던 일이었다. 책에서도 600만 명의 유대인이 이렇게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600만이라는 수치는 단순히 과장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나치 지도부가 본인들 스스로 주장했던 학살 수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유대인의 절멸을 목표로 삼았었다. 책에 나온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히틀러는 여전히 자신의 최종 임무에 구속받고 있었다. 아이히만은 8월 세상에서 유대인을 제거하는 임무가 거의 끝나가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힘러에게 400만 명은 학살 센터에서, 나머지는 기동 작전에서 제거하는 등 600만 명의 유대인을 없앴다고 말했다. 히틀러는 붉은 군대의 빠른 진격과 가차 없는 콘라트 모르겐의 계속적인 조사에 자극받아 힘러에게 아우슈비츠를 제외한 모든 학살 시설의 해체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모르겐도 약 600만 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했다. 아직 헝가리, 우치, 슬로바키아, 테레지엔슈타트에서 잡혀온 유대인들은 가스실에 보내기 위해 남겨놓고 있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 회스는 동부 유럽 부대가 소련군의 진격을 막을 경우 남은 일을 끝내기 위한 시설을 남겨두고 있었다.”

 

출처: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2 p.547~548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내용은 히틀러가 시작한 폴란드 침공과 1940년의 서부 침공 작전, 덩케르크 철수, 프랑스의 항복, 영국의 본토 항공전과 1941년 그리스와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침공 과정을 잘 다루고 있다. 하지만 동부전선에서의 내용은 생각보다 빈약하다. 1941년 히틀러가 감행한 바르바로사 작전과 그 과정에서의 거침없는 독일군의 진격은 생각보다 상세하게 다루고 있지만,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이후부터는 동부전선에서의 전황에 대한 내용은 보통 1~2페이지 아주 길어야 3페이지를 할애하는 수준이다. 대표적으로 1943년 세계 최대의 전차전이었던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내용은 말 그대로 한 페이지 정도다.

 

그에 반해 서부 전선에서의 전황은 생각보다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나 194412월부터 19451월까지 있던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의 경우 책 한 권에 한 챕터를 할애하는 분량이다. 물론 벌지 전투 챕터가 말 그대로 벌지 전투만 깊게 다룬 것은 아니지만, 그 전투 과정에서 미군들이 어떻게 싸웠고, 또 어떻게 승리했는지를 알기는 충분할 것이다. 물론 벌지 전투를 많이 할애했기에 그 전투에 대해 생각보다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벌지 전투가 책의 챕터 하나를 차지하는 분량이라 생각보다 자세하게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여기서도 오토 슈코르체니가 미군복을 입고 교란작전에서 활약했던 내용과 더불어 미군 맥컬리프 준장이 만토이펠 장군으로부터 받은 항복 메시지를 대놓고 무시하여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이야기까지 흥미롭게 읽었다. 거기다 2001년 미국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하고도 내용이 겹치기에 개인적으로 흥미가 가는 챕터이긴 했다. 벌지 전투는 히틀러의 마지막 도발이라고 불릴 정도로 제2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에서는 그 상징성이 높은 전투인데, 독일군은 여기서 상당히 많은 전력을 투입했다. 독일측이 투입한 전력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은 책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25만의 병사와 수천의 기갑으로 이루어진 독일의 3개 군이 비밀리에 공격 개시 지점으로 이동했다. 독일군은 비행기를 낮은 고도로 비행시켜 반궤도 차량의 이동 소음을 잠재웠다. 부대들은 15일 자정 공격 시점에 집결했다. 병사들은 추위에 떨었지만 장교들이 야전원수 룬트슈테트의 메시지를 읽어 내려갈 때쯤에는 진정한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다.”

 

출처: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2 p.570

 

그 외에도 2부에선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여러 가지 자잘한 이야기들을 많이 다루고 있다. 히틀러의 2인자로도 선택될 정도로 명성을 떨치다가 1941년 영국으로 가서 명성이 완벽히 무너진 헤스의 이야기나 히틀러의 주치의 관련 이야기 등등은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많은 즐거움을 느겼던 것 같다. 학술적인 서적은 아니기에 문체 자체도 술술 읽히는 편이다. 마치 일반적인 문학 작품이나 소설 읽히듯이 말이다. 논픽션 역사책의 장점인 것 같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책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정보의 한계 등도 있다. 대표적으로 동부전선의 전황과 그에 대한 얘기등이 그렇다. 그러나 이 책이 1976년에 출간된 책이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시기는 미소냉전이 끝나지 않은 시기인과 동시에 동구권 문서가 공개되기 전이기 때문이다.

 

2부에 대해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자면 분명히 앞에서 서술한 문제점이 있긴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라는 인물을 다체적으로 알기 위해선 분명히 읽어볼 가치가 높다. 물론 국내에 이미 출판된 요하임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 1,2’이나 이언 커쇼의 아돌프 히틀러 I,II’에 비하면 학술적인 가치는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건 히틀러라는 인물을 다방면에서 쉽고 흥미롭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선 상당히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한 책인 건 확실하다.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많은 내용들을 어렵지 않게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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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TV에서 다룬 <디엔비엔푸 전투> 8부작 총합본으로 봤다. 반공적 접근을 한게 약간은 있지만, 전반적으로 내용은 아주 좋다. 그 또한 디엔비엔푸 전투가 명분은 베트민에게 있었고, 프랑스가 시대착오적인 식민지 전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런 프랑스의 절차를 결국 미국이 밟게 되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외에도 내가 잘 알지 못했던 사실들도 이 시리즈가 알려줘서 많이 놀랐다. 앙리 나바르가 만들고 드 카스트리가 지휘한 디엔비엔푸 요새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정말 알기 쉽게 설명했다. 그외에 베트민군을 돕기 위해 사력을 다했던 수십만의 베트남 민간인들의 각고한 노력으로 얻은 준비는 너무나도 감동적이었다. 이걸 보며 디엔비엔푸 전투가 세계 전쟁사에 있어서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다시한번 느낀다.


디엔비엔푸 전투를 총 지휘한 위대한 명장 보 응으옌 잡 장군의 천재적인 전략전술과 철저한 준비도 정말 대단하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말 그대로 보 응우옌 잡 장군의 명석한 두뇌에서 나온 작전대로 아주 쳬계적으로 진행됐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프랑스의 항공기 정찰을 피하기 위해 대규모의 베트민 군대를 위장전술로 속이고, 프랑스군이 주둔한 디엔비엔푸 요새 전방 200m까지 베트민의 참호를 만들어 놓고 대기하고 있었다는 건 진짜 대단하다.

 

나 또한 베트남 현대사를 공부하고 호치민을 공부하면서 항상 느낀거지만, 베트민과 베트남 민중이 이렇게 까지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엇던 건, 역시 호치민 주석이 항상 목표로 삼던 자유와 독립이라는 가치가 그만큼 소중했고, 그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게 바로 베트남이 세계최강의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와 미국을 무찌른 결정적인 이유가 아닐까?

 

디엔비엔푸 전투는 정말 세계 역사에 있어서 앞으로도 기리남을 업적이다. 1930년대 국민당군에 맞서 대장정을 했던 마오쩌둥의 홍군만큼 혹은 그 이상의 정신력과 지구력 그리고 전략전술로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을 무찔렀다는 생각이 정말 많이 든다. 프랑스가 오리엔탈리즘과 백인 우월주의에 빠져 베트민을 너무 무시했던 것도 있지만, 상식적으로 보 응우옌 잡 장군이 그정도로 준비했을 줄은 몰랐을거다.

 

거기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투입했던 군대는 프랑스의 최정예 부대였다. 최정예 부대 16,200명을 투입했다. 앙리 나바르가 195311월 디엔비엔푸를 습격할 당시, 프랑스는 이 지역에 그 모든것을 걸고 최고전력을 몰빵했다. 그렇지만 위대한 명장인 보 응우옌 잡 장군은 프랑스 제국주의의 최정예 특수부대를 아주 체계적으로 무너뜨렸다. 그 결과 19545711,000명의 프랑스 최정예 부대가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힌 것이다.

 

디엔비엔푸 전투를 보다보면 항상 느끼는 거지만, 침략자 프랑스가 대대적으로 비판받는 것에 반해, 그 프랑스를 물적으로 지원하고 디엔비엔푸 전투에 자신들의 병력을 파견하려 했던 미국에 대해선 비판이 없는 것 같다. 이번에 본 샤를TV의 영상도 그 부분에 대한 비판은 좀 미약했다. 하지만 미국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어떠한 짓을 하려 했는지는 최소한 언급하고 있어서 만족하는 편이다.

 

영상 보는 내내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끈 베트남의 명장 보 응우옌 잡 장군과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던 베트민군 그리고 이들을 돕던 베트남 민중과 최고 지도자인 호치민 주석까지 정말이지 감동하게 된다. 참으로 위대한 역사고 위대한 영웅들이며, 위대한 승리다. 디엔비엔푸는 앞으로도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이에게 감동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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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정되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주루트, 원주민들의 이주루트에 대해선 다양한 주장들이 있지만, 대채로 이 루트를 따르는 것 같다.)

 

메머드(Mammoth)라는 털덮인 거대 코끼리가 살던 14,000년 전 혹은 16000년 전에는 아시아 대륙과 북아메리카 대륙이 연결되어 있었다. 확실한 시기는 현재까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 시기부터 인류는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돌창을 비롯한 성능 좋은 연장들을 개발해 큰 동물들을 사냥했고, 이 유목민들은 해마다 조금씩 신대륙으로 건너가 점차 더 깊이 내륙으로 이동했다.

(매머드, 매머드는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전 대륙에 걸쳐 서식했던 코끼리와 비슷하게 생긴 돔울이다. 멸종 원인으로는 기후 변화에 적응 실패를 들기도 하지만,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의 과도한 사냥으로 명졸했다는 얘기도 있다. 최근 연구결과 러시아의 브랑겔 섬의 경우 비교적 최근은 기원전 1500년 경까지 살았다고 한다.)

 

기원전 8000년경에 이르러는 남아메리카 남단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남부 아메리카 대륙과 멕시코 지역에는 정교한 사회가 등장했고, 현재 페루에서는 잉카인의 인구가 거의 600만 명에 달하는 제국이 건설되었다. 중앙아메리카와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서는 마야인이 문자, 아라비아 숫자와 비슷한 숫자 체계, 정확한 달력 그리고 발달된 농업 체계를 갖춘 복잡한 문명을 발달시켰다. 그 문명은 한때 북부의 유목 전사 부족이었던 아스텍인에게 계승되었으며 13세기 말경이면 아스텍인은 멕시코의 중남부 지역 대부분을 지배했다. 우수한 행정·교육·의학 체계도 발전시켰다. 종교도 발달했다.

(마야 최대의 유적지 치첸이트사의 쿠쿨칸에 있는 피라미드 엘 카스 티요)

 

멕시코 이북에 살던 사람들 또한 정교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수준의 문명을 발달시켰다. 신대륙 북부 지역의 사람들은 사냥이나 채집, 고기잡이를 하며 살았다. 그들 가운데는 바다표범을 사냥했던 북극권의 에스키모, 북부 산림지역에서 큰사슴이나 순록과 같은 큰짐승을 쫓던 수렵꾼들, 해안을 따라 안정된 주거 지역을 형성하고 주로 연어를 잡아 생활했던 북서부 태평양 부족들 그리고 극서부의 비교적 건조한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고기잡이와 식용 가능한 식물을 채집하고 작은 짐승을 사냥해 생활하며 성공적인 공동체를 발달시켰던 부족들이 있다.

(에스키모인과 허스키 그리고 이글루, 과거 북아메리카 북부대륙에도 이러한 생활을 하는 원주민들이 있었다고 한다.)


(고래사냥을 하는 에스키모인)

 

현재 미국의 1/3을 차지하는 동부 지역은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서 가장 식량 자원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대부분 숲으로 덮혀 있었 우드랜드(Woodland)라 불리던 이곳은 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 거주한 대부분의 부족은 농사와 사냥, 채집, 고기잡이를 병행했다. 현재 미국 남부 지역에는 상당히 안정된 사회가 형성되었는데, 미시시피강 유역의 옥토에서 자라는 옥수수와 기타 농작물을 기반으로 커다란 교역망이 형성되어 있었다. 오늘날의 세인트 루이스(St Louis) 부근에 위치했던 카호키아(Cahokia)가 그 교역의 중심지로 서기 1200년 전성기 때에는 인구가 4만 명에 달했다.

(우드랜드 당시 거주하던 원주민들의 주거지역)

 

유럽에서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것은 스칸디나비아에 거주하던 바이킹(Viking)족들이었다. 그들은 서기 1000년경에 북대서양의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거쳐 북아메리카 대륙의 북쪽 해안에 도착했다. 사실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의 경우 이곳을 방문한 바이킹들이 현재 아이슬란드 땅이 살기가 좋아서 다른 외부인들이 오지 않게 그 땅을 아이슬란드라 이름을 지었고, 실제로 얼음이 가득 찬 곳을 그린란드라고 불렀다 한다.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던 바이킹들이 도착했던 곳이 어디인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했던 바이킹족의 레이프 에릭손(Lief Ericson)은 그곳은 빈랜드(Vinland)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와인랜드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아마 포도주하고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바이킹족, 바이킹족은 서기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유럽을 휩쓸고 다니던 스칸디나비아인들이다. 이들은 1000년 경에 북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던 적이 있었다.)


(레이프 에릭손의 빈랜드 상륙을 그린 상상화)


(현재 캐나다 지역에 복원해 놓은 바이킹 가옥)

 

바이킹족이 북대서양에 도착한지 10년 뒤, 토르핀 칼세프니(Thorfinn Karlsefni)가 이끄는 소수의 노르만족이 현재 캐나다의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에서 약 1년간 정착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원주민들의 적대적인 태도에 부닥치자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들의 모험에 관한 이야기는 입을 통해 후손들에게 전설로 계속 구슬로 전해지다가, 14세기에 이르러 문자로 옮겨져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유럽에서 이 미지의 땅을 동경하게 되는건 15세기에 이르렀다. 1347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nople)에서 시작된 치명적인 전염병인 흑사병이 1/3의 유럽 인구를 죽게 만들었다. 1세기가 지나 유럽은 원래의 인구로 회복할 수 있었고, 이와 더불어 전반적으로 상업이 부활했다. 그러자 해외 상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고 이에 부응해 새로운 상인 계층이 생겨났다. 교역이 증대하고 항해술이 발달해 장거리 항해가 가능해졌다. 따라서 교역에 대한 관심이 한층 더 높아졌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됐다. 그 결과 육로를 통한 동방무역이 막히자 유럽 중 일부는 항로개척에 나서게 된다.)

 

14세기 초 마르코 폴로(Marco Polo)를 비롯한 모험가들이 동양에서 향신료, 옷감, 염료 등 이국적인 상품과 그보다 더 이국적인 이야기들을 안고 돌아오자, 교역으로 부자가 되기를 갈망했돈 유럽인들은 무엇보다 동방과의 교역을 꿈꾸기 시작했다. 지난 2세기 동안 동방과의 교역은 아시아 왕국까지의 긴 육로로 가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제역을 받아왔다. 또한 1453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당하자 육로를 통한 아시아와의 교역은 더 막히게 되었다.

(희망봉, 희망봉은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다. 1486년 당시 포르투갈이 항로개척을 통해 희망봉에 도달했고, 이는 이후에 인도로 가는 길이 되기도 했다. 명나라와 일본의 명주도 이곳을 통해 오는 포르투갈과 무역을 하게됐다. 현재는 아프리카에사는 펭귄 서식지이기도 하다.)

 

서유럽 사회에서 항해술이 발달하자 보다 빠르고 안전하게 동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찾을 수 있다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해상무역과 항로개척에 뛰어든 나라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현재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15세기 당시 포르투갈의 항해술은 발달되어 있었고, 이것은 항로개척에 기여한 헨리 왕(Prince Henry the Navigator)의 덕택이었다. 헨리가 사망한 후인 1486년에는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를톨로뮤 디아스(Bartholomeu Dias)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Cape of Good Hope)을 돌았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미국의 민중사학자 하워드 진의 경우 그를 악랄한 정복자와 학살자로 강도높은 비판을 하기도 한다. 2009년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우고 차베스는 그를 학살자로 규정하고 콜럼버스의 날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선언하기도 했다.)

 

1480년대 당시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한 남성의 후원요청을 받았다. 이사벨라는 여러 번 거절했지만, 1492년에 그를 후원하기에 이르렀다. 이사벨라 여왕이 후원한 이가 바로 그 유명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당시 스페인의 이세벨라 여왕은 해외 진출에 관심이 많았기에 콜럼버스를 후원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소위 계약서를 작성하게 했는데, 이계약이 바로 산타페 계약(Santa Fe)’이다. 149283일 스페인 팔로스 항을 출발한 콜럼버스 일행은 120명의 선원과 3척의 배를 동원했다. 이들은 1년을 버틸 수 있는 충분한 양의 보급품도 실었고, 인도를 찾기 위해 오랜 기간에 걸쳐 서쪽으로 향해 계속했다. 14921012일 항해를 시작한 지 약 70일이 지났을 무렵 그들은 바하마 군도에 상륙했다. 이것이 바로 소위 콜럼버스의 신대륙 개척 역사의 시작이었다.


참고자료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1(개정판), 앨런 브링클리, 황혜성(역), 휴머니스트, 2011


미국사(완전 개정판), 이주영, 대한교과서,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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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0-12-30 1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분야로는 찰스 만의 <인디언>(원제: 1491)도 추천합니다

NamGiKim 2020-12-30 12:33   좋아요 0 | URL
그런책도 있군요. 호기심이 생기네요.
 

1. 새 과업

 

상황이 바뀌자 과업이나 지침, 전술까지 바뀌었습니다. 거의 9년 세월 동안, 우리 민족과 군은 당과 정부의 지도 아래 숱한 역경을 극복하고 용감하게 싸워 자랑스럽게 승리했습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 병력은 발전했습니다. 당과 정부의 올바른 정책에 힘입어 훌륭한 공적도 쌓을 수 있었습니다. 현재 상황이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도 바뀌고 있고, 이에 따라 정책과 슬로건도 바뀝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프랑스 제국주의 세력을 일소하는 데 온힘을 집중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프랑스인들과의 대화가 가능해진 반면, 미제국주의자들이 우리의 주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공격의 초점을 후자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평화를 되찾을 때까지 프랑스와의 전투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뿐 아니라 전 세계 민족 모두가 미국에 대한 공격에 집중해야 합니다. 미국은 인도차이나 전쟁을 확신하여 국제화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싸우며 미국의 전쟁 정책에 반대합니다.

 

우리 당은 9년 동안 계속해서 당의 방침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즉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의 완전 독립을 지지하고, 프랑스 연합을 인정하지 않으며,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군을 모조리 몰아낼 것입니다. 그리고 괴뢰정부와 괴뢰 무장세력을 제거하고, 제국주의자와 반역자의 재산을 몰수하여, 농업개혁을 위한 단계적인 조치로 지대와 이자율을 삭감할 것입니다. 또한 전 민족이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저항전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고 말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부분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도출했습니다. 실로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상황에서 낡은 방침에만 매달릴 순 없겠지요. ‘끝까지 저항하자가 예전의 모토라면, 지금은 평화, 단결, 독립, 민주주의라는 새 모토를 내걸어야 합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이 인도차이나 전쟁에 개입하여 전쟁을 확산하려는 정책에 반대하여, 평화의 기치를 강력하게 내세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정책도 바꾸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프랑스 제국주의 세력의 재산을 몰수했다면, 이제는 협상이 진행중인 만큼 평등과 호혜의 원칙에 따라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자국의 경제적, 문화적 이익을 보호하도록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협상에는 양쪽의 분별있는 용인이 필요합니다. 예전에는 프랑스 침략 세력을 일소해야만 한다고 말했지만, 이제는 우리 쪽에서 상호 협의하여 프랑스군 철수 날짜를 확정해야 한다고 요구했으며 프랑스도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과거에는 민족통일을 위해 괴뢰정부와 괴뢰군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이제는 관용을 실천하며 선거를 통해 국가의 통일을 달성하고자 합니다.

 

평화를 얻으려면 전쟁이 종식되어야 합니다. 전쟁을 종식시키려면 정전에 합의해야 합니다. 정전을 위해서라면 지역 재정비 작업이 필요합니다. 즉 적군이 어느 한 지역에서 점진적으로 병력을 철수하기 위해 조직을 재정비하면, 우리 군 역시 다른 지역에서 재편성 작업을 진행하여 합니다. 병력의 조직, 확대, 강화에 필요한 자원을 충분히 얻을 수 있도록 넓은 지역을 확보하여 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통일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역 재정비가 나라의 분할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이건 단지 통일에 필요한 한시적인 조치일 뿐입니다. 이때 지역의 경계를 정하고 통치 구역을 바꾸는 일도 생기기 때문에, 기존 해방구 중 일부는 한시적으로나마 적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고, 이 경우 그곳 주민들의 불만도 높아지겠지요. 어떤 사람들은 낙담한 채 적군의 기만에 넘어가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동포들에게 잘 알려야 합니다. 나라 전체의 이익을 위해 견뎌야 할 시련은 영광을 낳고, 시련을 견뎌낸 자에겐 민족 전체의 찬사가 따를 거라고, 모든 사람들이 비관주의나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돕고, 프랑스군의 전면 철수와 더불어 독립을 이룰 그날을 위해 열렬히 투쟁해달라고 호소합시다. 평화를 위해 지역을 재정비하고 민족통일을 위해 전국적인 선거를 치르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저항전은 독립, 단결,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를 목표로 합니다. 새로운 상황을 맞아 새롭게 성공하려면, 새 정책이 필요합니다. 전쟁이냐 평화냐를 가르는 중요한 시점인 만큼 솔선수범합시다. 선견지명을 가지고 항상 철저히 준비합시다.

 

평화를 지키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길고 복잡하며 거친 투쟁입니다.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도 있지만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유리한 조건이란, 우방국과 전 세계 인민이 우리를 지지한다는 것, 왕성한 혈기를 자랑하고 당과 정부를 신뢰하며 항상 단결 투쟁하는 인민이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에게 닥친 난관이라면, 미국이 인도차이나에서 평화가 다시 꽃피지 못하도록 철저히 방어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평화주의자들이 미국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현재 상황은 어렵과 복잡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이제는 구해방구와 신해방구에 각기 다른 정책을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장악한 해방구와 재편성 작업 후 한시적으로 적군이 관할하는 지역에 대해서도 각기 다른 정책을 펴야 합니다. 이제는 농촌뿐 아니라 도시 정책도 마련해야 합니다. 대프랑스 정책 역시 과거와 달라야 합니다. 친미, 친불 반역자에 대한 정책 역시 예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과거에는 국내 문제와 우방국과의 외교에만 신경 썼다면, 이제는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에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단기적 이익과 장기적 이익을 구별해야 하고, 지역별 이해관계와 전체의 이해관계 역시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엄청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여러 난관이 겹치면서 상황이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인민과 간부들의 생각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요.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고 적절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념적인 오류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먼저 좌파적 편향성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러 번의 승리에 도취되어 무조건 끝까지 싸우려 듭니다.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격이죠. 그들은 프랑스군의 철수에만 목을 맨 나머지, 적의 책략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프랑스와의 싸움에만 열중할 뿐, 미국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또한 군사행동에 치우쳐 외교를 경시합니다.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려면 전장에서뿐 아니라 국제회의에서도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새 슬로건에 대해, 그 내용이 우파적이며 주체성을 많이 잃고 양보한 것 같다면 반대합니다. 그리고 적이 받아들일 수 없는 과다한 조건을 내걸기도 합니다. 평화를 위한 투쟁이 어렵고 복잡할 거러난 생각 대신, 결과만을 재촉합니다. 이러한 좌파적 편향성 때문에 자민족뿐 아니라 전 세계 민족들에게서 멀어지고 고립되어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한편, 우파적 편향성은 비관주의와 무기력, 원칙 없는 관용을 낳습니다. 더는 인민의 힘을 신뢰하지 않고 전투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그들은 역경을 견뎌내기 위한 에너지를 상실한 채, 조용하고 평안한 인생만을 꿈꿉니다. 이와 같은 좌파적, 우파적 경향은 옳지 않습니다. 둘 다 적들에게 이용당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에게는 해를 끼칠 것입니다.

 

2. 과업과 노동

 

이처럼 상황이 바뀌면서, 우리에게도 세 가지 의무가 생겼습니다.

 

(1) 평화를 보장하고 공고화하며, 나라 전체의 단결과 독립, 민주주의를 달성한다.

(2) 인민무력부대를 강화하고, 새로운 상황에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강력한 인민군을 건설한다.

(3) ‘경작자에게 땅을이라는 슬로건을 실천에 옮긴다. 생산 복구와 국가 재건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이 세 가지 의무를 이행하려면, 열 가지 과업을 수행해야 합니다.

 

(1) 새로운 상황과 과업을 위해 당과 인민이 한마음으로 뭉친다.

(2) 외교전에 필요한 지도력을 강화한다.

(3) 인민군을 보강한다.

(4) 신해방구를 장악한다. 특히 도시를 장악하고 관리하는 문제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5) 적의 재편성 이후 한시적이나마 그들이 장악한 지역에서의 활동에 새 지침을 제시한다.

(6) 구해방구를 통합 정리한다.

(7) 열성을 다해 토지개혁에 필요한 대중동원에 나선다.

(8) 경제와 재무 관련 업무를 개선하고 국가 재건에 필요한 여건을 조성한다.

(9) 파테트 라오와 크메르군을 후원한다.

(10) 신해방구 내 당을 재정비하고 이념 개조 작업을 실시한다.

 

이상 열 가지 과업은 중앙위원회가 지도합니다. 모든 지역과 지부가 열 가지를 모두 완수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각 지역에 의무적으로 일정량을 할당할 예정입니다. 이중에서도 이념적 리더십이 가장 중요합니다. 당원뿐만 아니라 비당원도 새로운 상황과 과제를 제대로 이해해야 생각을 모을 수 있고, 생각이 모여야 행동이 하나가 됩니다. 당 안팎, 각 단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생각과 행동을 하나로 통일할 때,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일이라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은 현재 전 세계 인민의 주적이며 인도차이나 인민을 직접 위협하는 세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국을 반대하는 데 활동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심지어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미국에 우호적이지 않은 국가나 개인은 연합전선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평화와 독립과 단결, 민주주의는 변하지 않는 목표입니다. 원칙은 확고히 지키되, 전술은 유연해야 합니다. 각 활동이 전체를 구성하니, 모든 활동은 서로 연결되어야 하며 조화로워야 합니다. 각 지역의 구체적인 상황에 맞게, 주어진 시간에 과업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당과 정부의 올바른 지도력, 간부와 인민 모두의 노력과 단결, 전 세계 우방국과 평화를 사랑하는 인민들의 지지와 격려가 있으니, 우리는 위의 세 가지 의무와 열 가지 과업을 반드시 완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54715

호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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