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51127일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첫 번째 십자군 원정을 개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실한 자들에 맞서 방자하게 개인적인 전쟁을 발이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이여! 이교됴들을 향해 진격하자... 오랫동안 약탈자였던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병사가 되게 하자. 한때 형제들과 친지에 맞서 싸우던 사람들을 이제 당당하게 야만인과 맞서 싸우게 하자. 몇 푼의 은 조각 때문에 용병이 됐던 사람들에게 이제 영원한 보상을 받게 하자.”

 

교회는 서유럽 전역에 영지를 보유한 거대한 봉건 기업이었다. 교회는 권력과 부를 놓고 속세의 봉건 군주와 경쟁했다. 봉건 지배자와 마찬가지로 주교들은 해외에 폭력을 수출함으로써 자국의 평화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십자군 원정을 요청하자 반응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수천 명이 즉각 부름에 응했다. 엄청난 봉건 군대가 1097년 시리아로 들어갔고 1098년 안티오크를 함락했으며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십자군은 어딜 가든 살육과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남자,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함락된 도시의 거리에서 학살됐다. 포로들은 수시로 처형당했다. 십자군은 이슬람 사원, 유대교 회당, ‘이단교회를 샅샅이 뒤졌다. 수레는 강탈한 물품들로 가득 찼다. 네 개의 십자군 국가가 세워졌다. 봉건시대의 중강기갑부대가 전술적으로 투입된 덕분이었다. 그러나 십자군은 작은 규모의 군사 엘리트로 유지됐다. 500명의 기사들이 안티오크 공국을 지켰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군사력에 투자해야만 했다. 그만큼 집중적인 잉여 축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아랍 소작농을 극단적으로 착취했고 무역 대상들을 약탈했으며 이웃한 이슬람 국가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십자군은 중동에 아주 쉽게 침입했다. 그곳은 민중의 신망을 잃은 왕궁의 독재자들이 지배하는 몇몇 개의 라이벌 국가로 이미 뿔뿔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민사회와는 결별한 상태였다. 이슬람 통치자들은 대부분 십자군들과 합의하려 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평화는 불가능했다. 두 가지 모순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첫째, 봉건 정착민 국가들의 체제는 취약하고 불안정했기 때문에 합병되길 원했다. 더 많은 기사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토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슬람 통치자들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됐다. 둘째, 십자군 국가 내부에서 군사적 축적이 더 필요해지자 원주민들에게 더 무거운 세금, 임대료, 노동 부역을 받아야만 했다. 그 결과 십자군들은 무슬림 속국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전쟁에서 자신들을 방어해 줄 원주민 군대를 키워낼 수 없었다.

 

첫 번째 십자군의 충격과 공포는 한 세대 동안 이슬람의 저항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 통치자에 대한 십자군의 위협이 다가오자 이슬람은 정치적으로 중앙집권화 과정을 밟았다. 북시리아와 북이라크는 1128년에 통합되었다. 그 후 근처의 십자군이 지배하던 에데사 카운티를 탈환, 1144년에 합병했다.

 

2차 십자군 전쟁(1146~1148)은 이슬람의 부활에 맞서 일으킨 전쟁이었지만 엄청난 실패로 끝났다. 무적의 십자군 신화는 무너졌다. 다마스쿠스와 남시리아는 이슬람 국가로 편입되었고 안티오크 십자군 공국의 영토는 작은 해안 지역으로 밀려났다. 마침내 1183년 살라딘의 영도 아래 이집트가 시리아와 합쳐졌다. 이슬람의 저항이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살라딘은 봉건 십자군에 대항해 인민의 성전 지하드를 소집했다. 바야흐로 이슬람 세력은 선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118774일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은 3만 명을 이끌고 예루살렘 십자군 왕국의 군대 전원을 무찔렀다. 곧 이어 예루살렘 도시 전체가 함락됐다. 몇 차례 원정이 더 있었지만 십자군 국가는 되찾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과정이 한 세기가 넘도록 이어졋지만 그들의 성과 영토는 하나둘씩 줄어가기만 했다.

 

심바군 왕국들은 중동 지역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통치자들은 힘과 공포에 의존하는 잔인한 착취자였을 뿐이다. 이슬람 통치계급이 분열하고 타락했던 시기에만 십자군 왕국들은 그곳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들의 폭압적인 침략은 오히려 이슬람인들에게 투쟁을 위한 단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웠고 정체성을 확립시켜줬으며 이슬람 부흥의 촉매제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은 또한 서구 봉건주의의 한계를 드러냈다. 기사와 성을 유지하는 비요ᅟᅧᆼ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만큼 엄청난 착취가 필요했다. 전사 계급의 폭력은 민중의 재산과 안전에 영구적인 위협이 됐다. 봉건제의 폭력으로 이런 모순들을 억누를 수는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봉건주의는 합의가 바탕이 되는 안정적인 사회질서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체제였다.

 

본국에서는 이런 모순을 틈타 새로운 사회세력이 구질서 안에서 생겨났다. 왕들은 봉건 영주 보다 높은 지위로 올라섰다. 각 계층별 세력들 역시 위세를 더 키워갔다. 젠트리(Gentry), 요먼(Yeoman, 자작농)은 귀족들의 무정부 상태에 맞설 왕실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모였다. 새로운 사회세력은 새로운 방식의 전쟁을 도입했다. 창과 활, 총으로 무장한 보통 남자들은 봉건시대 기사가 누린 전쟁터의 패권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출처: 좌파세계사 p.20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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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때 중소논쟁이 격렬해지고 있었다. 북한은 처음에는 중국 측으로 기울었다. 1962년 10월의 중인(중국과 인도)분쟁에서는 네루정부를 ‘침략자’로 비난했다. 소련이 쿠바에 핵무기를 배치하려 했다가 이를 알게 된 미국이 최후통첩을 던졌던 쿠바 미사일 위기 때에는 북한은 흐루쇼프의 미사일 철거 결정에 불만을 표시했다. 1962년 12월 북한은 전인민의 무장화, 전국토의 요새화, 전군대의 현대화, 전군인의 간부화 등 4대군사노선을 채택했다.


1963년 6월 최용건은 베이징을 방문하여 류샤오치(유소기)와 함께 사회주의 국가의 외교정책을 평화공존정책에 가둬놓으려는 소련의 처사에 대해 비난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7월 25일에는 미영소 공동으로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에 조인했는데 북한은 중국과 함께 이에 반대했다. 가장 공공연한 소련 비판은 가을에 나왔다. 김석형 등 3인의 역사가가 소련 과학아카데미판 『세계사』의 조선사 기술에 대해 비난하는 소책자를 제작 발표한 것이다.


여기에는 ‘맑스-레닌주의 사학의 기본적 요구에 배치되는 중대한 오류’ ‘조선사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부터 오는 왜곡, 위조와 날조’ 등의 표현이 실렸다. 1964년이 되자 북한은 더욱 공공연히 소련을 비난했다. 『로동신문』의 1월 27일자 사설은 ‘현대 수정주의자’와 ‘모종의 사람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인민에게 반제투쟁을 그만두게 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6월에 평양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 경제 세미나는 소련을 비난하는 장이 되었고, 자력갱생의 자주경제 건설과 평등호혜, 주권존중의 경제협력 등을 주창하는 평양선언이 채택되었다. 7월 27일자 『로동신문』은 일본공산당의 내부분열을 기도하는 소련 당의 행위가 ‘대외배외주의’에서 나오는 것이라 비난했다.


그러나 소련과 대립함으로써 소련으로부터의 원조가 삭감 되었고 그 때문에 1961년부터 개시된 7개년 계획 수행이 난항을 겪었다. 1964년에 흐루쇼프를 대신해서 등장한 브레즈네프 정권이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자, 북한은 이에 즉각 응했다. 1965년 2월에는 코시긴과 셸레핀을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3월에는 북한 대표단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석유를 제공받기 위한 교섭을 벌였다.


출처: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p.15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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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통일 세대 - 미래 세대를 위한 북 바로 알기
김이경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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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운동에 앞장서고 있고, 내 페친이기도 한 김이경 선생의 <우리는 통일 세대>를 읽었다. 내가 북에 대해 좀 더 북의 관점이나 반공에서 벗어난 관점에서 보고자 했던 것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였던 것 같다. 애초에 대학교 1학년을 시작하던 2014년은 박근혜 정권 1년차라 시대적 분위기가 극우세력들의 힘을 얻고 있던 시기였다. 그 시점부터 갑자기 뉴라이트에서 마구잡이로 집필한 이승만 미화물이 줄줄이 출간했고, ‘국제시장’, ‘태양의 후예’, ‘연평해전’, ‘인천상륙작전등과 같은 반공정신을 고취시키는 영화나 드라마가 대대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나는 박근혜와 뉴라이트를 싫어하면서도 북한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그나마 북한을 보다 이성적인 접근을 하기 시작한 시점은 군복무 말기인 2018년이었다. 그때 읽은 신은미 선생의 책이나,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이 쓴 책 그리고 브루스 커밍스가 집필한 한국전쟁을 읽으면서 보다 북한을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차원에서 인식하게 되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제2차 북미회담이 개최되던 2019년 초 당시 나는 북미정상회담이 잘 마무리 되면 종전협정과 남북 자주 왕래가 꿈만은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쉽게도 협상의 결과는 결렬이었다.

 

비록 제2차 북미정상회담 결과는 결렬이었지만, 2018년 평창올림픽부터 시작된 남북화해무드는 이명박근혜 시절 대립과 적대주의로 포장되었던 한반도 정세에 평화라는 한 줌의 희망을 가지게 만든 원동력이었고, 북한을 새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였다. 이런 정세를 거치고 변화를 보면서 나 또한 북한이라는 존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싶었고, 실제로 자기검열이라는 차원에서 반북주의를 최대한 배척하고자 많이 노력해왔다. 2년 전 사회학 교수인 김귀옥 교수님의 수업도 북에 대한 그런 편견을 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전 세계는 이 전무후무한 질병에 발목이 묶인 상태다. 해외여행 같은 건 꿈도 못 꾸는 시대다. 북한 또한 코로나 바이러스 초기인 20201월 국경을 원천 봉쇄했다. 따라서 북한을 공식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루트는 죄다 막힌 셈이다. 물론 1월부터 국경을 원천 봉쇄했기에, 북한은 현재도 2021년 새해에 평양에 모여 신년축하행사를 그것도 집단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북한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만약에 북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했다면 구호물자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받지 않았다. 그러니까 북한은 현재 내부 시스템 안에서 통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얘기를 일반적인 한국인들에게 거리낌 없이 하면 이러한 주장을 믿지 않거나 주장을 한 이를 친북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볼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북한이라는 대상을 무조건적으로 의심하고 본다. 즉 북한이라는 존재는 무조건적으로 나빠야 하고 불행해야 한다는 도그마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기원은 한국이라는 국가가 그 이전부터 반공국가였기 때문이라고 난 생각한다. 물론 민주화를 거치면서 예전만큼의 반공주의는 보편적으로 희석되긴 했지만, 북에대한 인식은 여전히 객관적이지 못하다. 쉽게 말해 우편향적이다. 이러한 영향에는 저자가 주장하듯이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등에서 퍼뜨린 거짓뉴스의 영향이 크다. 책에 나온 저자의 주장을 인용하겠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회이건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이상적인 사회도, 절대 나쁜 사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북녘을 뿌연 잿빛의 나라, 가난함과 절망이 흐르는 땅으로 알고 있을까?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주의 사회인 북이 살아가는 방식과 문화가 우리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든 차이를 극단적인 이분법, 빨갱이라는 잣대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나라에서 살아온 우리는 사회주의 삶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분단 체제에 편승해서 기득권을 누리며 살아온 수구적폐 세력은 온갖 가짜뉴스를 퍼뜨리며 북을 악마로 만들어왔다. 북 고위층 인사가 처형되었다는 남녘의 언론 보도 후 다시 그들의 건재가 확인되어도 오보를 낸 언론은 반성하기는커녕 정정한 적이 없다.”

 

출처: 우리는 통일 세대 p.7~8

 

저자가 주장처럼 우리가 언론을 통해 받아들이는 북한에 대한 정보는 상당히 서구편향적 혹은 반공적으로 가공되는 정보가 많다. 또한 우리는 북한이라는 대상을 인식할 때, 독재나 굶주림과 같이 미국 부르주아지들이 타국가를 침략할 때 사용하는 말만 번지르르한 구실들로만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북한이라고 해서 다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접근법이 미국의 이라크 전쟁과 베네수엘라에 대한 사악한 경제제재의 합리화 논리로 사용된다는 점을 적어도 인지해야 한다 생각한다. 특히나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이라면 말이다.

 

책의 제목 우리는 통일 세대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미래의 통일 세대와 현재 통일을 준비하는 세대들에게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한 북한을 알려주고자 책을 쓴 것 같다. 책은 북한 청소년들의 교육과정이나 성장기, 북한 인민들의 일반적인 삶, 북한의 종교활동, 북한의 의료 정책, 북한의 경제 활동 등을 다루고 있다. 더 나아가 북한의 근현대사와 더불어 북한의 문화예술 그리고 부록으로 수도 평양에 대해 다루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북한에 대해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을 처음 알기도 했다. 얘를 들면 북한의 김일성 대학 교수들 그러니까 한국으로 치면 서울대학교 교수들이 매주 한 번씩 금요노동을 자발적으로 나간다는 내용은 참으로 흥미로웠다. 이 점에선 쿠바 혁명 이후 체게바라가 쿠바의 고위직에 있으면서 자발적으로 노동을 했던 모습이 생각나기도 했다. 심지어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2005년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생명공학부에 항생제 제작 공장 시설 건설을 지원한 적이 있었는데. 저자와 한국의 기술자들이 런닝 바람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던 분들이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수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도 했었다고 한다. 책을 읽은 나 또한 이 부분에서 매우 놀랐다. 왜냐하면 한국사회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그리고 무상주택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북한의 사회주의 국가의 기본적인 틀을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아직까지 북한에는 토착 자본가가 없다. 물론 북한에도 빈부의 차이는 있다. 그러나 빈부의 차이가 있지만 돈이 많은 사람이 자신의 돈을 자본의 형태로 투자하여 가치를 창출하지는 못한다. 즉 자본가가 없다는 것은 땅, 건물, 공장과 같은 사회의 공공재들이 개인 소유가 아니며, ‘자산소득으로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업별 초과이익은 기업소 노동자들에게 배분된다. 또한 북한의 회사나 사회 시스템은 상명하복식이 아니다. 실제로 한국으로 온 탈북자들이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불편함을 겪는 부분이 그런 부분이기도 하다.

 

북한은 쿠바와 더불어 무상의료 시스템을 사회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물론 한국에 비하면 기술이나 설비부분에서 부족함이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틀은 무상의료다. 일례로 의도치않게 탈북하여 한국에 온 김련희씨의 경우 한국 생활 초기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그냥 나왔다가 길거리까지 간호사가 달려와 애를 먹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북에서는 무상의료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1947년부터 사회보험법을 제정하여 일단 노동자와 사무원, 임산부와 3세 미만 아동까지 무상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가던 19531월 무상의료의 범위를 개인상공업자와 개인농을 제외한 전 인민으로 확대했으며, 전후복구를 완수한 1958년에는 개인병원이 완전히 사라졌다.

 

따라서 북한은 무상의료제도를 1950년대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유지했다. 여기서 얘기하는 무상의료는 진단, 검사, 치료, 수술, 입원 등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 일체를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부담을 국가가 부담한다는 뜻이다. 책 저자에 따르면 북한은 2012년 김정은이 집권한 이후에 무상의료 체제를 다른 나라의 일반의료 수준으로 올려놓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중이라 한다.

 

책에서 흥미로웠던 주제를 얘기하자면 북한의 군대 관련한 얘기다. 대한민국에 사는 남성이라면 무조건적으로 군복무를 해야 한다. 최소한 면제를 받지 않으면 말이다. 우리는 군복무 2년만 해도 사회의 불만이 많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북한은 군복무를 10년씩이나 해도 내부의 불만이 생각보다 없다. 이런 궁금증은 개인적으로 항상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궁금증이 풀렸다. 책에 따르면 북한이 완벽한 징병제라고 하기는 힘들다고 한다. 일단 북한에서 군대에 가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일단 중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군대에 가지 않는다. 전문학교 진학자는 졸업 후 모집 대상으로 검토되고 직장에 취업한 지 3년이 넘으면 모집 대상에서 제외된다. 신체검사 불합격자, 적대계층 자녀, 과학기술산업 관련자, 예술교육 종사자, 특수 영재학교 학생, 부모가 고령인 독자 등은 처음부터 제외된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당 간부의 자녀일수록 군 복무가 필수사항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부모가 군 복무를 반대하면 입대할 수 없다고 한다. 즉 이런 점에서 우리하고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또한 북한인민들이 군대를 인식하는 것도 우리하고는 다르다. 북한에서는 군대가 주민들에게 선망 받는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그 근본적인 이유는 북한 인민군의 뿌리가 1932년 만주에서 시작된 항일 유격대에 있기 때문이다. 즉 북한인민들은 자신들의 군대가 역사적으로 항일투쟁을 했고, 소련, 중국과 더불어 조국해방에 기여했다는 자긍심이 강하다. 이런 점은 현재 중국인민해방군이나 베트남의 베트민이 그 나라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북한에 대해 정말 다방면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쉽고 재밌게 알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책의 그런 점이 좋았다. 하지만 일부 내용들은 신빙성이라는 측면에서 의심이 가는 부분들도 있다. 그런 부분들은 솔직히 학계의 교차검증과 더불어 팩트체크가 필요하며,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무리였다. 조선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이 소련군보다 앞서 해방구를 만들었다는 얘기나, 평양의 단군릉 혹은 북측 학계에서 주장하는 대동강 문명 등은 솔직히 역사학을 공부한 나로썬 믿을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그렇다 해서 책 자체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굳이 책의 내용에 대해 내가 얼마만큼 공감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80%는 공감한다고 얘기하고 싶다. 아까 전에 지적한 그런 부분은 나머지 20%에 해당한다.

 

부록에서 평양 설명하며 다룬 릉라도의 곱등어관에 대해서도 한번 얘기하자면, 책에는 곱등어란 돌고래의 일종이라고 나온다. 사실 돌고래를 얘기했을 때 떠올리는 대부분의 돌고래는 큰돌고래(혹은 병코 돌고래)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국내에 많이 서식하는 돌고래는 남방큰돌고래인데, 책에 첨부된 사진을 봐서는 남방큰돌고래보단 큰돌고래 그러니까 병코 돌고래 같기도 하다. 개인적인 추측으론 아마 북에서 얘기하는 곱등어는 병코 돌고래를 뜻하는 것 같다.(어디까지 각자의 판단에 맡기는게 나을 것이다.) 한가지 사실을 더 붙이자면 물개쇼에 등장한 물개는 거의 100%에 가까운 확률로 바다사자(강치)가 분명하다.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책을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북에 있는 느낌도 살짝 들었다. 그리고 나중에 남북교류가 형성되면 나 또한 공식적으로 북을 방문해보고 싶다. 그것이 평양이 됐던 개성공단이 됐든 금강산이 됐든 말이다. 아무튼 책 내용이 대체로 좋다. 저자가 한국의 극단적 반공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것도 상당히 공감된다. 나 또한 평양에 놀러 가보고 싶다. 물론 합법적인 선에서 말이다. 여러 종류의 동물을 보유하고 있다는 평양의 동물원과 곱등어관도 방문하고 싶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항일 유적지도 답사해보고 싶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북한에 대한 얘기를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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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오왕조 시대 베트남 영토)

 

베트남의 역사는 중국의 지배에 맞서 저항해온 역사다대략 2천 년 동안 중국의 지배에 맞서 저항을 해왔는데이러한 역사를 생각해보았을 때 전투민족이라는 표현이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다.(축구를 좋아하는 것도 이런 역사와 관련 있을지도전투민족일수록 축구를 좋아한다는 말이 있으니베트남의 고중세사를 보면 칭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의 군대 그러니까 몽고의 침략을 막아낸 적이 있다. 1288년 제3차 원정을 단행한 몽고군대가 박당강에서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가 이끄는 군대에게 말 그대로 박살이 났는데이것이 몽고군의 마지막 침략이었다이로써 베트남은 세계 제패를 이룩했던 몽고의 침략을 무찌른(그것도 3번씩이나나라가 되었다.

(응오꾸옌 그림)

 

그러나 몽고군을 무찌르기 정확히 350년 전 베트남은 똑같은 장소에서 독립을 쟁취한 역사가 있었다당시 응오꾸옌(Ngô Quyền, 한자로는 오권)은 그 곳에서 독립을 쟁취했다그 독립을 이루게 한 전투가 바로 938년에 있던 박당강 전투다그 이전의 베트남 역사는 사실상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그로부터 1,000년 전 쯩 자매가 코끼리를 타며 한나라에 맞서 저항을 하기도 했지만중국의 지배는 강력했다응오꾸옌이 중국에 맞서 대항하던 시기는 당나라가 분열된 이후였다.

(하노이 썬떠이 시사에 있는 응오꾸옌 상)

 

900년대 당나라가 분열된 이후 중국 남부 지역에 나타난 남한은 베트남을 침략했었다남한의 침략을 받던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권 안에 머무르려는 세력과 중국을 몰아내고 독립을 이루려는 세력으로 나뉘었다이 중 33살의 응오꾸옌은 독립운동의 열렬한 후원자였다당시 그는 남한군을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었다이후 그는 봉기를 일으켜 남한에 대항하고자 했다이러자 중국의 지배권에 머무르려 했던 끼에우꽁디엔은 매국적인 행동과 더불어 남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이리하여 당나라의 후신인 남한은 바다와 육지 두 갈래로 나누어 침략에 나섰다.

(박당강 전투 당시 군대를 지휘하는 응오꾸옌)

 

남한이 침략하자 응오꾸엔은 대담한 작전으로 침략군을 각개격파에 나섰다응오꾸옌이 이끄는 군대는 빠른 속도로 북진해 다이라에 주둔하고 있던 끼에우꽁디엔의 군대를 기습하여 궤멸시켰다그런 다음 그는 군대를 박당강 기슭에 매복시키고 남한군이 강으로 거슬러 올라오기를 기다렸다물론 침략군에 맞서 준비도 철저히 했다그는 먼저 강바닥에 끝을 쇠로 덮은 나무기둥 수천 개를 박아놓았다남한의 수군이 나타나자 응오꾸옌은 전투를 벌였다그러다가 패해 달아났는데이것은 위장전술이었고 남한군을 강 상류로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박당강 전투 상상화)

 

남한군이 강을 거슬러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조수가 밀물에서 썰물로 바뀌자 거짓 도망하던 베트남 수군이 반격했다이와 동시에 강가 풀숲에 염초와 건초더미를 준비하고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화공으로 남한군을 공격했다강바닥 기둥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게 된 남한의 함선 수백 척이 불에 탔고남한의 병사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이로써 당나라의 후신 남한의 베트남 정벌은 실패로 끝났다대월사기전서에는 응오꾸옌이 박당강에서 거둔 승리를 칭송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응오왕께서 군사를 모아 유홍조의 수십만 군사를 물리치고 개국하시어 북방인들로 더 이상 남진을 못하게 하셨다화를 내심은 민을 안위함이요뛰어난 지략은 적을 단번에 물리치기 위함이시라왕이라 칭한 채 비록 칭제를 안 하시고 연호를 바꾸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 대월의 정통을 확연히 재연하지 않으셨는가.”

(박물관에 전시된 박당강 전투 모델)

 

박닥강 전투에서 승리하고 난 이후 베트남은 쯩 자매가 대중항쟁을 벌인지 1,000년 만에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이에 따라 응오꾸옌은 박당강 전투 승리 이후 독립국가를 선포하고 939년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이렇게 해서 베트남은 최초의 독립왕조인 응오왕조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박당강 전투는 베트남 역사에 있어 상징적인 전투다무엇보다 1,000년간 지속되었던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국가와 자주적인 왕조를 세웠기 때문이다비록 응오왕조는 불과 몇 십 년 만에 무너졌지만독립투쟁을 통해서 자주적인 국가를 세웠다는 점에서 베트남 역사에 상징적인 의미를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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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당시 맥아더, 제1차 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한 맥아더는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다. 이후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개입하자 만주의 핵공격을 주장했다가 트루먼에 의해 해임됐다.)

 

인천상륙작전(Operation Chromite)은 한국전쟁에 있어 전세의 전환점을 마련해준 작전이었다이 작전으로 한국전쟁의 전세는 인민군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으로 역전되었고, “미군의 군사개입이 강해지기 전 전쟁을 끝내버리겠다는 북한 측의 목적을 말 그대로 이루지 못하게 만들었다이러한 군사작전이었기에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인천상륙작전은 역사교육에서 빠지지 않는 주제였다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인기는 지금도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아직도 인천에는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했던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동상이 버젓이 서있는가 하면박근혜 정권 말기에는 고증이 엉터리인 반공영화 인천상륙작전(2016)’이 개봉하여 정부의 대대적인 홍보와 지원을 받으며 인기를 끌기도 했다.(물론 태극기 부대 아저씨들의 단체관람 같은 주작질과 반공홍보질이 있었지만.....)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다이승만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자 전국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은 민중들의 손으로 부서지거나 철거됐다그러나 이상하게도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에는 헌화가 대대적으로 바쳐졌다. 4.19 혁명 이후 한국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듯이맥아더와 그가 전개한 인천상륙작전은 그만큼 한국인들에게 각인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비록 반공주의적 교육의 효과이긴 했지만 말이다따라서 이번엔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설명해보고자 한다.

(낙동강 전선, 당시 인민군은 남한 땅 90%를 접수했다.)

 

한국전쟁은 1950년에 일어났다. 38선 전역에서 진격을 개시한 북한의 인민군은 불과 2개월 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갔다낙동강 전선까지의 인민군의 진격은 말 그대로 연전연승이었다심지어 7월 초에 투입된 미군 제24 사단의 1개대대도 남하하는 인민군과 교전을 벌였다가 참패를 당하고 패주했었다분명히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즉각적이었음에도 미군은 인민군에게 낙동강 전선으로 후퇴할 때까지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1950년 8월부터 미군과 한국군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이른바 워커라인(Walker Line)을 형성했는데8군 사령관(조지 패튼 장군의 충실한 수하이기도 했던)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부르는 낙동강 전선이었다. 1950년 8월부터 형성된 낙동강 전선은 말 그대로 전선 전역이 피바다였지만전세는 점차 인민군에게 불리해져 갔다특히나 9월에 있던 총 공세에서 인민군의 전력은 현저하게 감소되었다더욱이 식량 보급은 정량의 절반 또는 1/3 이하로 줄어들었다거기다 제공권과 제해권은 미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며낙동강 전선에 있던 미8군 또한 반격 여건이 조성되었다또한 한국군과 유엔군측은 임시수도 부산을 통해서 병력과 물자를 지속적으로 지원받고 있었다.

 

그러나 지형 상으로 보기엔 인민군이 유리한 것처럼 보였다인민군의 거의 모든 전력은 낙동강 전선에 있었다그리고 이미 인민군은 남한 땅의 90%를 접수한 상태였다지형 상의 형식과는 달리 인민군의 사정은 힘들었다무엇보다 미군이 유엔군이라는 이름으로 16개국을 전쟁에 끌어들였고네이팜 폭탄을 비롯한 각종 대량살상을 기반으로 한 폭탄을 자신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쏟아 붓고 있었기 때문이다거기다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 중의 하나인 포항의 경우 미 해군의 함포사격 때문에 인민군의 진격이 어려웠다.

(인천상륙작전 상륙 전개도,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엄청난 화력을 부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피비릿내 나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던 사이 유엔군 총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사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한 것은 전쟁 발발시점 4일인 6월 29일이었다고 한다그가 판단하기에 북한군의 진격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은 상대편 배후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선택하는 데 대하여 미합동참모본부와 해군 및 해병대 측은 강력하게 반대했다인천의 자연적 조건이 대규모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부적절한 곳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무엇보다 한국의 서해는 갯벌도 있고 수심도 얕아서 해상작전을 하기에는 부적합 했다.

(상륙작전 당시 동원된 미군 전투기, 아마도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전투기로 추정된다.)

 

일단 인천지역은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컸고인천 앞바다에 있는 월미도를 비록한 섬들이 장애물이 될 수 있었다상륙을 위한 LST정이 정상적으로 가동하려면 수심이 50m 이상이 되어야 하지만썰물 때는 불가능했다따라서 상륙작전을 성공시키려면 3~4시간 정도의 밀물 때를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7월 초 맥아더는 미 극동사령부 작전부장 라이트(Edwin K. Wright) 준장을 합동전략작전기획단장으로 임명했고유엔군 사령부는 7월 23일에 상륙작전계획을 암호명 크로마이트로 명명했고, 7월 말부터 인천항 일대의 해양 상태와 경계태세를 조사하는 등 상륙작전 준비를 서둘러 시작했다이렇게 8월과 9월을 거치며 유엔군은 인천에 상륙할 준비를 마무리 하기에 이르렀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김일성을 포함한 북한측 지도부가 아예 손을 놓고 지켜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그들 또한 인천항에 2000여 명의 병력을 투입했다하지만 기뢰를 부설하는 데는 실패했다아무튼 그들 또한 미군의 반격을 예상했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인천에 상륙한 한국군)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지휘를 받은 유엔군과 한국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이 작전에 총 270척의 함대와 8만 명의 병력이 투입되었다맥아더는 상륙작전부대로서 해병과 보병 각각 1개 사단을 편성하고 한국군을 각각 1개 연대씩 배속시켰다미 제7보병사단은 약 8,600명의 카투사 벙력을 포함하고 있었고상륙작전에 참가한 한국군 총 병력은 13,000명에 달했다당시 상륙작전을 지휘한 인물은 아서 듀이 스트러블 제독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필리핀 레이테만 상륙작전에서 해군지휘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유엔군에게 항복한 인민군)

 

이렇게 시작된 인천상륙작전은 그 다음날인 16일 유엔군이 인천을 탈환하며 성공으로 끝났다인천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던 인민군 2천 명은 거의 전멸했고이것은 인민군에게 위기로 다가왔다방어가 워낙 미약했기 때문에 유엔군은 거의 사상자 없이 인천 시가지를 탈환할 수 있었다상륙작전과 인천 탈환까지 전사한 유엔군은 222명 정도였다인천에 상륙한 부대들은 수도 서울을 향해 전투를 전개해 나갔고얼마 안지나 낙동강 전선에 있던 워커 미8군 사령관은 유엔군에게 총반격 명령을 내렸다총반격에 나선 유엔군은 대구와 김천대전수원 라인을 통해 북상했다인천에 상륙한지 13일 뒤인 9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을 접수하면서 한국전쟁은 다시 38선을 마주보게 된다.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면서 낙동강 전선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의 반격을 받게 된 인민군 중 몇 만 명은 전라도 지리산 지역에 들어가서 유격전을 벌였다그게 바로 우리가 많이 들어본 빨치산이었다물론 이 빨치산에는 1948년 여순항쟁 당시부터 싸워온 이현상 부대도 있었다이들은 낙동강 전선에서 미군을 상대로 교란작전을 전개하다가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결국 이들은 엄청난 악조건 속에서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체게바라와 그의 혁명군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 2016년 박근혜 정부 말기에 개봉한 이 영화는 관객수 704만 명을 동원했다. 물론 이것은 어버이 연합과 같은 그쪽 분들의 개때관람의 영향력도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을 얘기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또한 반공주의가 강했던 시절 국가적으로 기억되고 홍보되던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다그러나 그 이면엔 또 다른 진실도 있었다그것은 바로 월미도 포격같은 민간인 학살이 바로 그것이다한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5일전인 9월 10일 미국 항공기들은 월미도를 폭격했다항공모함에서 이륙한 미군항공기들은 95개 네이팜 폭탄을 월미도 동쪽지역에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비판하는 월미도 폭격 희생자 유족들)

 

이 집중폭격으로 월미도 동쪽지역의 건물숲 등과 함께 민간인 거주지도 완전히 파괴되었으며그로 인해 최소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또한 여기서 희생된 이들은 미라이 학살이나 노근리 학살처럼 여성과 아이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물론 이런 무고한 희생은 한국전쟁 전반에 걸쳐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일어났다따라서 인천상륙작전 이전의 월미도 폭격 또한 그 일부였다따라서 2016년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개봉했을 당시유족들은 영화의 역사왜곡을 규탄하는 집회를 벌이기도 했었다이것은 아마도 역사의 일부분만을 기억해온 결과의 산물일 것이다.

 

참고자료

 

미국의 6.25 전쟁사정길현북코리아, 2015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브루스 커밍스조행복현실문화, 2017

 

세계 전쟁사 다이제스트 100정토웅가람기획, 2010

 

한국전쟁박태균책과함께, 2005

 

월미도에서 사라진 마을... 미군은 왜 다 죽였나오마이뉴스, 2020년 3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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