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때 중소논쟁이 격렬해지고 있었다. 북한은 처음에는 중국 측으로 기울었다. 1962년 10월의 중인(중국과 인도)분쟁에서는 네루정부를 ‘침략자’로 비난했다. 소련이 쿠바에 핵무기를 배치하려 했다가 이를 알게 된 미국이 최후통첩을 던졌던 쿠바 미사일 위기 때에는 북한은 흐루쇼프의 미사일 철거 결정에 불만을 표시했다. 1962년 12월 북한은 전인민의 무장화, 전국토의 요새화, 전군대의 현대화, 전군인의 간부화 등 4대군사노선을 채택했다.


1963년 6월 최용건은 베이징을 방문하여 류샤오치(유소기)와 함께 사회주의 국가의 외교정책을 평화공존정책에 가둬놓으려는 소련의 처사에 대해 비난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7월 25일에는 미영소 공동으로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에 조인했는데 북한은 중국과 함께 이에 반대했다. 가장 공공연한 소련 비판은 가을에 나왔다. 김석형 등 3인의 역사가가 소련 과학아카데미판 『세계사』의 조선사 기술에 대해 비난하는 소책자를 제작 발표한 것이다.


여기에는 ‘맑스-레닌주의 사학의 기본적 요구에 배치되는 중대한 오류’ ‘조선사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부터 오는 왜곡, 위조와 날조’ 등의 표현이 실렸다. 1964년이 되자 북한은 더욱 공공연히 소련을 비난했다. 『로동신문』의 1월 27일자 사설은 ‘현대 수정주의자’와 ‘모종의 사람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인민에게 반제투쟁을 그만두게 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6월에 평양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 경제 세미나는 소련을 비난하는 장이 되었고, 자력갱생의 자주경제 건설과 평등호혜, 주권존중의 경제협력 등을 주창하는 평양선언이 채택되었다. 7월 27일자 『로동신문』은 일본공산당의 내부분열을 기도하는 소련 당의 행위가 ‘대외배외주의’에서 나오는 것이라 비난했다.


그러나 소련과 대립함으로써 소련으로부터의 원조가 삭감 되었고 그 때문에 1961년부터 개시된 7개년 계획 수행이 난항을 겪었다. 1964년에 흐루쇼프를 대신해서 등장한 브레즈네프 정권이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자, 북한은 이에 즉각 응했다. 1965년 2월에는 코시긴과 셸레핀을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3월에는 북한 대표단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석유를 제공받기 위한 교섭을 벌였다.


출처: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p.152~1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