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오왕조 시대 베트남 영토)

 

베트남의 역사는 중국의 지배에 맞서 저항해온 역사다대략 2천 년 동안 중국의 지배에 맞서 저항을 해왔는데이러한 역사를 생각해보았을 때 전투민족이라는 표현이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다.(축구를 좋아하는 것도 이런 역사와 관련 있을지도전투민족일수록 축구를 좋아한다는 말이 있으니베트남의 고중세사를 보면 칭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의 군대 그러니까 몽고의 침략을 막아낸 적이 있다. 1288년 제3차 원정을 단행한 몽고군대가 박당강에서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가 이끄는 군대에게 말 그대로 박살이 났는데이것이 몽고군의 마지막 침략이었다이로써 베트남은 세계 제패를 이룩했던 몽고의 침략을 무찌른(그것도 3번씩이나나라가 되었다.

(응오꾸옌 그림)

 

그러나 몽고군을 무찌르기 정확히 350년 전 베트남은 똑같은 장소에서 독립을 쟁취한 역사가 있었다당시 응오꾸옌(Ngô Quyền, 한자로는 오권)은 그 곳에서 독립을 쟁취했다그 독립을 이루게 한 전투가 바로 938년에 있던 박당강 전투다그 이전의 베트남 역사는 사실상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그로부터 1,000년 전 쯩 자매가 코끼리를 타며 한나라에 맞서 저항을 하기도 했지만중국의 지배는 강력했다응오꾸옌이 중국에 맞서 대항하던 시기는 당나라가 분열된 이후였다.

(하노이 썬떠이 시사에 있는 응오꾸옌 상)

 

900년대 당나라가 분열된 이후 중국 남부 지역에 나타난 남한은 베트남을 침략했었다남한의 침략을 받던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권 안에 머무르려는 세력과 중국을 몰아내고 독립을 이루려는 세력으로 나뉘었다이 중 33살의 응오꾸옌은 독립운동의 열렬한 후원자였다당시 그는 남한군을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었다이후 그는 봉기를 일으켜 남한에 대항하고자 했다이러자 중국의 지배권에 머무르려 했던 끼에우꽁디엔은 매국적인 행동과 더불어 남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이리하여 당나라의 후신인 남한은 바다와 육지 두 갈래로 나누어 침략에 나섰다.

(박당강 전투 당시 군대를 지휘하는 응오꾸옌)

 

남한이 침략하자 응오꾸엔은 대담한 작전으로 침략군을 각개격파에 나섰다응오꾸옌이 이끄는 군대는 빠른 속도로 북진해 다이라에 주둔하고 있던 끼에우꽁디엔의 군대를 기습하여 궤멸시켰다그런 다음 그는 군대를 박당강 기슭에 매복시키고 남한군이 강으로 거슬러 올라오기를 기다렸다물론 침략군에 맞서 준비도 철저히 했다그는 먼저 강바닥에 끝을 쇠로 덮은 나무기둥 수천 개를 박아놓았다남한의 수군이 나타나자 응오꾸옌은 전투를 벌였다그러다가 패해 달아났는데이것은 위장전술이었고 남한군을 강 상류로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박당강 전투 상상화)

 

남한군이 강을 거슬러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조수가 밀물에서 썰물로 바뀌자 거짓 도망하던 베트남 수군이 반격했다이와 동시에 강가 풀숲에 염초와 건초더미를 준비하고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화공으로 남한군을 공격했다강바닥 기둥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게 된 남한의 함선 수백 척이 불에 탔고남한의 병사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이로써 당나라의 후신 남한의 베트남 정벌은 실패로 끝났다대월사기전서에는 응오꾸옌이 박당강에서 거둔 승리를 칭송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응오왕께서 군사를 모아 유홍조의 수십만 군사를 물리치고 개국하시어 북방인들로 더 이상 남진을 못하게 하셨다화를 내심은 민을 안위함이요뛰어난 지략은 적을 단번에 물리치기 위함이시라왕이라 칭한 채 비록 칭제를 안 하시고 연호를 바꾸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 대월의 정통을 확연히 재연하지 않으셨는가.”

(박물관에 전시된 박당강 전투 모델)

 

박닥강 전투에서 승리하고 난 이후 베트남은 쯩 자매가 대중항쟁을 벌인지 1,000년 만에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이에 따라 응오꾸옌은 박당강 전투 승리 이후 독립국가를 선포하고 939년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이렇게 해서 베트남은 최초의 독립왕조인 응오왕조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박당강 전투는 베트남 역사에 있어 상징적인 전투다무엇보다 1,000년간 지속되었던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국가와 자주적인 왕조를 세웠기 때문이다비록 응오왕조는 불과 몇 십 년 만에 무너졌지만독립투쟁을 통해서 자주적인 국가를 세웠다는 점에서 베트남 역사에 상징적인 의미를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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