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51127일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첫 번째 십자군 원정을 개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실한 자들에 맞서 방자하게 개인적인 전쟁을 발이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이여! 이교됴들을 향해 진격하자... 오랫동안 약탈자였던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병사가 되게 하자. 한때 형제들과 친지에 맞서 싸우던 사람들을 이제 당당하게 야만인과 맞서 싸우게 하자. 몇 푼의 은 조각 때문에 용병이 됐던 사람들에게 이제 영원한 보상을 받게 하자.”

 

교회는 서유럽 전역에 영지를 보유한 거대한 봉건 기업이었다. 교회는 권력과 부를 놓고 속세의 봉건 군주와 경쟁했다. 봉건 지배자와 마찬가지로 주교들은 해외에 폭력을 수출함으로써 자국의 평화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십자군 원정을 요청하자 반응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수천 명이 즉각 부름에 응했다. 엄청난 봉건 군대가 1097년 시리아로 들어갔고 1098년 안티오크를 함락했으며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십자군은 어딜 가든 살육과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남자,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함락된 도시의 거리에서 학살됐다. 포로들은 수시로 처형당했다. 십자군은 이슬람 사원, 유대교 회당, ‘이단교회를 샅샅이 뒤졌다. 수레는 강탈한 물품들로 가득 찼다. 네 개의 십자군 국가가 세워졌다. 봉건시대의 중강기갑부대가 전술적으로 투입된 덕분이었다. 그러나 십자군은 작은 규모의 군사 엘리트로 유지됐다. 500명의 기사들이 안티오크 공국을 지켰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군사력에 투자해야만 했다. 그만큼 집중적인 잉여 축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아랍 소작농을 극단적으로 착취했고 무역 대상들을 약탈했으며 이웃한 이슬람 국가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십자군은 중동에 아주 쉽게 침입했다. 그곳은 민중의 신망을 잃은 왕궁의 독재자들이 지배하는 몇몇 개의 라이벌 국가로 이미 뿔뿔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민사회와는 결별한 상태였다. 이슬람 통치자들은 대부분 십자군들과 합의하려 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평화는 불가능했다. 두 가지 모순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첫째, 봉건 정착민 국가들의 체제는 취약하고 불안정했기 때문에 합병되길 원했다. 더 많은 기사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토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슬람 통치자들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됐다. 둘째, 십자군 국가 내부에서 군사적 축적이 더 필요해지자 원주민들에게 더 무거운 세금, 임대료, 노동 부역을 받아야만 했다. 그 결과 십자군들은 무슬림 속국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전쟁에서 자신들을 방어해 줄 원주민 군대를 키워낼 수 없었다.

 

첫 번째 십자군의 충격과 공포는 한 세대 동안 이슬람의 저항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 통치자에 대한 십자군의 위협이 다가오자 이슬람은 정치적으로 중앙집권화 과정을 밟았다. 북시리아와 북이라크는 1128년에 통합되었다. 그 후 근처의 십자군이 지배하던 에데사 카운티를 탈환, 1144년에 합병했다.

 

2차 십자군 전쟁(1146~1148)은 이슬람의 부활에 맞서 일으킨 전쟁이었지만 엄청난 실패로 끝났다. 무적의 십자군 신화는 무너졌다. 다마스쿠스와 남시리아는 이슬람 국가로 편입되었고 안티오크 십자군 공국의 영토는 작은 해안 지역으로 밀려났다. 마침내 1183년 살라딘의 영도 아래 이집트가 시리아와 합쳐졌다. 이슬람의 저항이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살라딘은 봉건 십자군에 대항해 인민의 성전 지하드를 소집했다. 바야흐로 이슬람 세력은 선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118774일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은 3만 명을 이끌고 예루살렘 십자군 왕국의 군대 전원을 무찔렀다. 곧 이어 예루살렘 도시 전체가 함락됐다. 몇 차례 원정이 더 있었지만 십자군 국가는 되찾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과정이 한 세기가 넘도록 이어졋지만 그들의 성과 영토는 하나둘씩 줄어가기만 했다.

 

심바군 왕국들은 중동 지역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통치자들은 힘과 공포에 의존하는 잔인한 착취자였을 뿐이다. 이슬람 통치계급이 분열하고 타락했던 시기에만 십자군 왕국들은 그곳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들의 폭압적인 침략은 오히려 이슬람인들에게 투쟁을 위한 단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웠고 정체성을 확립시켜줬으며 이슬람 부흥의 촉매제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은 또한 서구 봉건주의의 한계를 드러냈다. 기사와 성을 유지하는 비요ᅟᅧᆼ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만큼 엄청난 착취가 필요했다. 전사 계급의 폭력은 민중의 재산과 안전에 영구적인 위협이 됐다. 봉건제의 폭력으로 이런 모순들을 억누를 수는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봉건주의는 합의가 바탕이 되는 안정적인 사회질서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체제였다.

 

본국에서는 이런 모순을 틈타 새로운 사회세력이 구질서 안에서 생겨났다. 왕들은 봉건 영주 보다 높은 지위로 올라섰다. 각 계층별 세력들 역시 위세를 더 키워갔다. 젠트리(Gentry), 요먼(Yeoman, 자작농)은 귀족들의 무정부 상태에 맞설 왕실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모였다. 새로운 사회세력은 새로운 방식의 전쟁을 도입했다. 창과 활, 총으로 무장한 보통 남자들은 봉건시대 기사가 누린 전쟁터의 패권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출처: 좌파세계사 p.20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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