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2 세트 - 전2권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존 톨랜드 지음, 민국홍 옮김 / 페이퍼로드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악의 대명사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전 세계인들에게 악인으로 각인된 인물이다. 미국 헐리우드 영화에서 외계인, 악마, 좀비, 로봇과 더불어 5대악으로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대중매체에서 악의 대명사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가 일으키고 저지른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 즉 홀로코스트와 연관이 있다. 무엇보다 그가 1939년에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은 6500만 명 이상의 인명을 죽게 만들었고, 그의 편협한 인종적 사고관은 최소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원동력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보더라도 아돌프 히틀러가 많은 이들에게 강력한 비판을 받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악의 대명사 아돌프 히틀러는 다른 의미에서 얘기해보자면, 학술적으로 많이 연구가 된 인물이다. 일단 국내에 출판된 그의 두꺼운 연구서만 보더라도 존 톨랜드가 쓴 책까지 합쳐서 총3권이다. 그만큼 연구가 많이 된 인물이다. 그가 집권하던 나치 독일에 관한 연구는 말 그대로 정말 많다. 또 다른 의미에서의 아돌프 히틀러는 20세기 역사에서 이 많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매주 일요일마다 MBC에서 방영하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를 보면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독일에 대한 내용들이 음모론적인 차원에서 많이 소비가 된다. 나치의 UFO 제조설, 히틀러 여자설, 히틀러 고자설, 히틀러 생존설, 나치의 타임머신 프로젝트(어떤 타임머신 루트를 찾아 과거로 돌아가 전쟁을 다시 일으킨다는 얘기), 나치의 비밀 남극기지, 나치와 외계인 협력 그리고 나치의 달 기지와 같은 이야기도 나온다. 심지어 나치의 달기지 음모론은 2012년 영화 아이언 스카이(Iron Sky)’로 만들어져 패러디가 되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히틀러가 12년간 통치하던 나치 독일은 여러 부분에서 많은 기행(奇行)을 했었고, 기행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일들에 많은 자금을 투자하기도 했었다. 앞에서 서술한 음모론들이 나오게 된 이유는 히틀러 개인이 매우 독특한 인물이었다는 점도 있지만, 그의 나치 독일이 과학기술 분야에서 타국에 비해 상당히 앞서 있었던 것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이처럼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독일은 많은 분야에서 여러 가지의 학술적 연구와 더불어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후세대에게 양산해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나치 독일과 아돌프 히틀러를 공부해보는 일은 참으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다.

 

물론 현대에 들어서 대중매체의 의도와는 다르게 나치 독일과 히틀러라는 소재가 악용되는 사례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네오나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례는 2017년 당시 샬러츠빌 사태와 같은 아주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었다. 따라서 이런 점에 있어서 나치 독일과 히틀러에 대해 흥미를 가지는 것은 이데올로기 혹은 정치적으로 매우 조심해야할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내가 역사를 좋아하게 되고, 대학교 전공까지 역사학을 선택하게 된 계기에는 중학교 시절 감상했던 히틀러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한 몫 했다. 그 다큐멘터리를 감상한 내가 히틀러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왔었다. 그리고 철없던 시절의 나는 보았던 다큐멘터리나 대중매체의 의도와는 다르게 아돌프 히틀러라는 인물에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물론 그런 부분은 지적으로 성장하면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앞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나치 독일이나 히틀러를 다룬 연구나 서적들은 상당히 많다. 일단 국내에 출판된 책들도 무수히 많은 편이다. 하지만 나는 나치 독일이나 히틀러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히틀러를 다룬 전기를 지금까지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2019년 페이퍼 로드 출판사에서 출간한 존 톨랜드의 아돌프 히틀러 결장판을 읽게 되었고, 장기간에 걸쳐 완독했다. 2부작으로 구성된 책이라 분량이 워낙 많았기에 일부러 1,2권을 나눠서 읽었었다.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의 원서는 냉전이 끝나지 않았던 1976년 정확히는 베트남 전쟁 종결 1년 후에 출간된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존 톨랜드는 일본 제국 패망사‘6.25전쟁사등으로 국내에서 유명한 논픽션 작가로 자료조사 특히 인물 인터뷰라는 측면에선 방대한 자료를 통해 여러권의 책들을 집필한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며 수많은 인물의 인터뷰를 토대로 책을 집필했다. 비록 국내에 먼저 번역된 책들보단 과거의 책이긴 하지만, 상당히 많은 자료를 소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읽어볼 가치가 높은 책이었다.

 

나는 이 책을 작년 8월과 12월 그리고 올해 1월에 걸쳐, 1,2부를 나눠 읽었다. 1부는 작년 여름에 읽었고, 2부은 작년 12월과 올해 1월 초까지 읽었다. 아돌프 히틀러 전기를 읽어보지 못했기에 보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독서를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번역도 매끄러워서 원 저자의 매끄러운 문장이 눈에 잘 들어왔다. 비록 방대한 분량이지만 내용 자체가 마치 문학이나 소설책 읽듯이 술술 읽혔다. 이런 점은 학술적인 연구를 보다 바탕으로 한 책들보단 일반인들에게 진입장벽이 한 단계 낮아진다는 장점도 있는 것 같다.

 

저자는 최대한 아돌프 히틀러라는 인물을 과거의 인물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입장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했다. 즉 히틀러라는 인물이 가지는 정치성을 보다 배격하려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히틀러에 대한 반인륜적 범죄를 부정한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그는 히틀러의 생애 그러니까 독일 총통이 되기까지의 히틀러의 모습을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즉 히틀러라는 인물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나치 독일의 지도자가 되었고, 어떻게 해서 그런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정치적 판단을 배제하고 접근하려 했다. 또한 저자는 히틀러 측근들이 본 히틀러는 어떠했는지도 얘기하고자 했다. 따라서 상당히 많은 인터뷰 자료를 책에서 참고하고 인용했다.

 

비록 전부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인터넷상에 퍼져있는 히틀러에 대한 여러 가지 들도 제법 적잖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런 썰에 대한 저자의 해설과 해석 혹은 추측도 담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의 생애를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냉전 시기에 나온 책이라 사료적 한계도 돋보인다. 특히나 동부전선에 대한 내용은 상당히 빈약하다. 이 점에 있어서 톨랜드도 과거 나치 독일 군 장성들의 회고록이나 인터뷰에 의존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2부는 수정의 밤부터 히틀러의 자살까지를 다루는데, 당연하게도 동부전선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책에 있는 동부전선에 대한 내용들은 상당히 축소된 느낌을 받는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는 과정부터 스탈린그라드 전투까지는 제법 분량을 할애하지만, 그 이후는 전혀 그렇지 않다. 즉 이런 점은 시대상의 사료적 한계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재밌게 읽었다. 세계 최악의 반인륜적 학살자인 아돌프 히틀러의 생애을 생각보다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비록 분량이 많아서 시간이 좀 걸렸지만, 그만한 가치는 있었다. 히틀러에 대해 알고 싶은 이들 특히나 히틀러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쉽게 알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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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알라딘에 본격적으로 글을 올리게 된지도 3년이 넘었네. 여기에 글들 올리면서 내 스스로 배우기도 하고 다른 분들의 리뷰(자주 읽는 편은 아니지만)에서도 많은 걸 알아갔던 것 같다. 활동을 하다보니 여러사람들을 알라딘 친구로 맺었고, 이분들의 쓴 댓글들도 나름 유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글을 쓰면서 느끼는 거지만, 내가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라딘을 시작했던 공익시절에 깨닫게 됐다. 앞으로도 다 알찬 글들 올리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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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1-02-08 1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5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글 계속 써주세요^^

NamGiKim 2021-02-08 15:04   좋아요 1 | URL
네 그리고 앞으로도 좋은 인연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디엠이 처형당하고 3주 뒤에 케네디 자신도 암살당했고 린든 존슨 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디엠의 뒤를 이은 군 장성들도 민족해방전선을 억누르지 못했다. 이번에도 역시, 미국 지도자들은 민족해방전선의 대중성과 그 병사들의 높은 사기에 관해 당혹감을 표명했다. 국방부 역사가들의 기록 (국방부 문서(펜타곤 페이퍼)를 말한다)에 의하면, 19611월에 케네디 대통령 당선자를 만난 아이젠하워는 이런 식의 군사개입에서 왜 우리는 늘 공산당 군대의 사기가 민주주의 군대의 사기보다 높은 현실을 목도하게 되는지에 대해 큰소리로 의문을 표명했다.” 그리고 맥스웰 테일러(Maxwell Taylor) 장군은 1964년 말에 이렇게 보고했다.

 

끊임없이 부대를 재구축하고 인적·물적 손실을 보충할 수 있는 베트콩의 능력은 게릴라 전쟁의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이다. 베트콩 부대는 불사조와 같은 회복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기를 유지하는 놀라운 능력도 보유하고 있다. 베트콩 포로들이나 노획한 베트콩 문서에서 사기가 침체된 증거를 발견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19648월 초,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에서 전면전을 개시하기 위해 북베트남 해안의 통킹만(Gulf of Tonkin)에서 벌어진 일련의 은밀한 사태를 활용했다. 존슨과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는 미국 국민들에게 북베트남 어뢰정이 미국 구축함을 공격했다고 말했다. 맥나마라의 말이다. “미국 구축함 매독스(Madoox)호가 공해상에서 일상적인 정찰을 하던 중에 아무 이유도 없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훗날 통킹만 사건이 날조된 것이었음이(케네디 행정부하의 쿠바 침공 때 그랬던 것처럼), 미국의 최고위 관료들이 국민에게 거짓말을 했음이 밝혀졌다.

 

사실 중앙정보국은 북베트남 해안 군사시설을 공격하는 비밀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따라서 북베트남 측의 공격이 있었다 하더라도 아무 이유도 없는공격은 아니었을 것이다. 매독스 호 역시 일상적인 정찰이 아니라 특수 전자첩보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게다가 그곳은 공해상이 아니라 베트남 영해였다. 맥나마라의 말과 달리 매독스호가 어뢰공격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밝혀졌다. 존슨이 공해상에서 벌어진 공공연한 공격이라 명명한, 이틀 뒤 있었다고 보고된 또 다른 구축함에 대한 공격 역시 조작이었던 것 같다. 이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러스크 국무장관은 NBC 방송에 출연한 자리에서 이렇게 질문에 답했다.

 

기자: 그러면 장관께서는 이런 이유 없는 공격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실 수 있겠습니까?

 

러스크: 글쎄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완전히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 세계와 우리의 세계 사이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커다란 심연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현실 세계라고 생각하는 것을 아주 다른 각도로 바라봅니다. 그들의 논리전개 자체가 다르다는 거지요 따라서 그 커다란 이데올로기적인 심연을 가로질러 상대방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는 건 대단히 어렵습니다.

 

통킹만 공격은 의회의 결의안을 낳았는데 하원에서는 만장일치로, 상원에서는 단 2명의 반대표로 통과된 결의안은 존슨으로 하여금 동남아시아에서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군사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통킹만 사건이 있기 두 달 전, 미국 정부 지도자들은 호놀룰루에서 회동을 갖고 그런 결의안에 관해 논의했다. 국방부 문서(펜타곤 페이퍼)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러스크는 이렇게 말했다.

 

바로 지금 동남아시아 정책에 관한 미국의 국민 여론은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으며, 따라서 대통령에 대한 단호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통킹만 결의안(Tonkin Resolution)은 헌법에 규정된 의회의 선전포고 없이 전쟁 행위를 개시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했다. 베트남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수많은 청원자들이 헌법의 수호자라고 간주되는 대법원에 그 전쟁을 헌법에 위배되는 것으로 선고하라고 요구했다. 이번에도 역시, 대법원은 이 문제를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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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에서 국제회의가 열려 프랑스와 베트남독립동맹 사이에 평화협정을 주재했다. 제네바 회담에서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지역으로 일시적으로 철수할 것, 베트남독립동맹은 북부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 2년 이내에 통일 베트남에서 베트남인들이 자신들의 정부를 뽑기 위한 선거를 실시할 것 등이 합의됐다.

 

미국은 베트남의 통일을 저지하고 남베트남을 미국의 세력권으로 안정시키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미국은 얼마 전까지도 뉴저지에 살고 있던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라는 전직 베트남 관리를 국가수반으로 앉히고 예정된 통일선거를 실시하지 말라고 부추겼다. 1954년 초에 열린 미 합참회의 비망록은, 정보부의 평가에 따르면 자유선거에 기반을 둔 해결이 이루어지면 연합 3(Associated States로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을 공산주의의 수중에 빼앗기는 결과를 보게 될 것이 확실하다고 언급했다. 디엠은 베트남독립동맹이 요구하는 선거를 거듭해서 가로막았고, 미국의 자금과 무기 지원으로 디엠 정부의 기반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국방부 문서(펜타곤 페이퍼)에서 지적한 것처럼, “남베트남은 본질적으로 미국의 피조물이었다.”

 

디엠 정권은 점차 인기를 잃어갔다. 대다수 베트남인이 불교도인 데 반해 디엠은 가톨릭교도였고, 농민들의 나라인 베트남에서 디엠은 지주에 가까웠다. 겉치레뿐이었던 디엠의 토지개혁은 결국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았다. 디엠은 현지인들이 뽑은 성() 행정장관을 사이공에서 직접 임명한 휘하의 인물들로 대체했다. 1962년에 이르면 성 행정장관의 88%가 군인으로 교체됐다. 디엠은 정권의 부패와 개혁의 결여를 비판하는 베트남인들을 점점 더 투옥하게 됐다.

 

디엠의 국가기구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정권에 대한 반대가 급격하게 성장했고, 1958년경에는 정권에 맞서는 게릴라 활동이 시작됐다. 하노이의 공산당 정권은 남베트남의 반체제 운동을 원조, 장려했으며 게릴라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남부로 사람들(이들 대부분은 제네바 협정 뒤 북부로 간 남부인들이었다)을 보냈다. 1960년에 남부에서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이 결성됐다. 그들은 정권에 반대하는 다양한 세력을 결집시켰고, 그 힘은 민족해방전선을 자신들의 일상적인 삶을 바꿀 수 있는 희망으로 바라본 남베트남 농민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미국 정부 분석가인 더글러스 파이크(Douglas Pike)는 반란자들과 나눈 대담과 노획한 문서들에 기초해 저술한 베트콩(Viet Cong)에서 미국이 직면한 사태에 대해 현실적인 평가를 내리려고 노력했다.

 

대중조직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민족해방전선은 남베트남의 2,561개 촌락에 전국적인 규모의 정치·사회 조직을 만들어 냈다. 민족해방전선을 제외하고는 남베트남에는 실제로 대중에 기반을 둔 정당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파이크는 이렇게 썼다. “공산당원들은 남베트남 촌락들에 의미심장한 사회적 변화를 야기했으며, 그 대부분은 통신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그들은 전사라기보다는 조직가였다. “민족해방전선에 관해 무엇보다도 내가 놀란 점은 사회혁명을 첫 번째로, 전쟁을 두 번째로 삼은 그들의 완전성이었다.” 파이크는 이 운동에 농민들이 대규모로 참여한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베트남 농민들은 단지 권력투쟁의 볼모가 아니라 공격의 예봉으로 간주됐다. 그들은 최선봉에 서 있었다.” 파이크의 말을 들어보자.

 

이 광범위한 조직화 활동의 목표는 촌락의 사회적 질서를 개조하고 자치를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민족해방전선이 처음부터 줄곧 견지해 온 취지였다. 남베트남공화국군(ARVN) 병사들을 살해하는 것도, 부동산을 점거하는 것도, 어떤 대규모 총력전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라, 자치라는 수단을 통해 농촌 주민들 한가운데서 조직화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파이크는 1962년 초반 당시 민족해방전선의 성원이 약 30만을 헤아린다고 추산했다. 국방부 문서(펜타곤 페이퍼)는 이 시기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로지 베트콩만이 농촌지역에서 실질적인 지지를 얻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61년 초에 대통령직에 오른 케네디는 트루먼과 아이젠하워의 동남아시아 정책을 계속 추구했다. 국방부 문서(펜타곤 페이퍼)에 따르면, 케네디는 거의 취임과 동시에 파괴행위와 가벼운 공격을 수행하기 위해 북베트남에 요원을 파견하는등의 베트남과 라오스에 대한 다양한 비밀 군사행동 계획을 승인했다. 일찍이 1956년에 케네디는 디엠 대통령의 놀라운 성공을 거론하면서 디엠 치하의 베트남에 관해 이 나라의 정치적 자유는 일종의 영감을 준다고 언급한 바 있었다.

 

19636월 어느 날, 사이공의 광장에서 한 불교 승려가 앉은 채로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뒤이어 더 많은 불교 승려들이 디엠 정권에 대한 반대를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분신자살하기 시작했다. 디엠의 경찰은 불교 사원을 습격, 30명의 승려에게 부상을 입히고, 1,400명을 체포했으며 사원을 폐쇄시켰다. 사이공에서는 시위가 잇따랐다.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발포로 9명이 목숨을 잃었다. 고대의 수도였던 후에(Hue)에서는 1만 명이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제네바 협정에서 미국은 남베트남에 685명의 군사고문단을 파견할 수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비밀리에 수천 명을 파견했다. 케네디 행정부하에서는 그 숫자가 16,000명으로 늘어났고, 이들 가운데 일부가 전투작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디엠은 패배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민족해방전선이 조직한 현지 촌락민들이 남베트남 농촌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디엠은 성가신 존재이자 베트남에 대한 효과적인 지배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었다. 몇몇 베트남 장성들이 루시언 코네인(Lucien Conein)이라는 중앙정보국 요원과 접촉하면서 디엠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코네인은 쿠데타를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미국 대사 헨리 캐버트 로지와 비밀리에 회동을 가졌다. 국방부 문서(펜타곤 페이퍼)에 따르면 로지는 1025일에 케네디의 보좌관 맥조지 번디(McGeorge Bundy)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저는 각자 분명하게 제가 내린 명령을 실행에 옮긴 찬반돈(Tran Van Don) 장군과 코네인 사이의 만남을 이미 개인적으로 승인했습니다.” 케네디는 주저하는 듯했지만 디엠에게 경고하는 조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로지는 쿠데타 직전이자 코네인을 통해 쿠데타 음모자들과 접촉을 가진 직후에 한 해변 휴양지에서 디엠과 주말을 함께 보냈다. 1963111, 군 장성들이 대통령궁을 공격하자 디엠은 로지 대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아래와 같은 대화가 오갔다.

 

디엠: 일부 부대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미국의 입장이 무엇인지 알고 싶소

 

로지: 그런 말을 할 만큼 많은 정보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총소리를 듣긴 했지만, 저는 아직 사건의 전모를 알지 못합니다. 게다가 지금 워싱턴은 새벽 430분이고, 미국 정부 역시 어떤 견해를 제시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디엠: 그렇다고 해도 당신은 대체적인 생각은 있을 거 아니오.

 

로지는 자신이 그의 신변안전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이 생긴다면 다시 전화를 달라고 말했다. 그것이 디엠이 미국인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디엠은 대통령궁에서 도망쳤지만, 동생과 함께 쿠데타 세력에게 붙잡혔고, 트럭에 실려 끌려간 뒤 처형됐다. 그에 앞서 1963년 초에 케네디 행정부의 국무차관 U. 알렉시스 존슨U.(Alexis Johnson)은 디트로이트 경제인 클럽(Economic Club of Detroit)에서 연설을 했다.

 

수세기에 걸쳐 사방에서 공격을 가한 강대국들에게 동남아시아가 어떤 매력이 있었던 것일까요? 동남아시아가 탐나는 지역이자 중요한 지역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동남아시아는 기후가 좋고 토양이 비옥하며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진데다가 그 대부분 지역이 비교적 인구밀도가 희박하며 확장할 수 있는 여지도 많기 때문입니다. 동남아시아 각국은 쌀, 고무, 티크목재, 옥수수, 주석, 향신료, 석유 등 수출가능하면서도 풍부한 자원이 넘쳐납니다.”

 

이것은 케네디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설명할 때 구사하는 언어가 아니었다. 1962214일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케네디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지난 10여 년 동안 미국은 베트남 정부와 국민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도록 원조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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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에 있는 내용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973911일은 칠레에게 있어서 비극의 시작이었다. 1970년 민주적인 선거로 탄생한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은 시작 초기부터 미국으로부터 각종 경제제재와 억압 그리고 CIA가 주도한 노골적인 테러리즘에 휩싸였다. 그래도 아옌데 정권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도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중심으로 압도적이었고, 2019년 베네수엘라에서 민중들이 마두로 정권을 지지했듯이 칠레에서도 민중들이 아옌데 정권을 수호하고자 했다. 그래서 닉슨이 선택한 것이 바로 군부 쿠데타였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1973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그는 칠레 역사상 최악의 민간인 학살과 인권 탄압을 저질렀다.)

 

닉슨 대통령은 당시 CIA 국장 리처드 헬름스를 통해 칠레 쿠데타에 1,000만 달러를 지원했다. 당시 화폐 가치로 약 900억 원이나 되는 막대한 자금이었다. 즉 피노체트 세력은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비용으로 각종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했고, 궁극적으로 1973911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피노체트 휘하의 쿠데타군은 수도 산티아고에 있던 아옌데의 대통령궁을 전투기로 폭격하고 탱크로 포위시킨 뒤, 진압군대를 보냈다. 아옌데와 그의 동지들은 쿠데타 군대에 맞서 총격전을 벌였지만, 결국 아옌데는 칠레 만세! 노동자 만세!”를 외치며 자결은 선택했다.

(쿠데타 군대에게 포위당안 아옌데의 대통령궁)

 

아옌데가 죽고 나서 칠레 역사는 먹구름을 향해 달려 나갔다. 쿠데타를 성공시킨 피노체트와 군부 일당은 점령군 행세를 했다. 칠레 전역에 있는 축구 경기장과 군의 막사, 운동장 및 각종 시설들이 민중을 구금하는 시설로 전락했다. 쿠데타 이후 불과 몇 달 만에 수십만 명의 칠레인이 체포 및 구금됐다. 쿠데타를 성공시킨 당일부터 피노체트 정권은 최소 3,200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시작했다. 물론 이 수치는 공식적인 것이고 비공식적인 수치는 이것보다 더 높다.

(운동장에 집결한 피노체트의 군대, 피노체트 휘하의 쿠데타군은 정권을 잡은 이후 당일에 3200명을 학살하고 시작했다.)

 

이런 체포, 구금, 처형 과정에서 외국인 색출 작업이 기승을 부렸다. 아옌데 정부가 조직한 게릴라 부대에 외국인이 가담했다는 게 이유였고,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한 병사들도 총살됐다. 아옌데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장교들도 줄줄이 체포돼 고문당했고, 일부는 사살됐다. 아옌데 정부 시기 인민연합 정치를 펼쳤던 칠레 좌파정당이나 좌파정당의 평당원 그리고 노동조합 조합원들도 피노체트 정권에서 탄압받았다. 많은 이들이 살해되거나, 하루아침에 실종됐다. 피노체트가 다스린 군사독재 17년 동안 최소 3만 명에서 6만 명이 이런 식으로 군부 정권에 의해 죽어나갔다. 칠레 전역이 민중들과 좌파들의 피바다로 물들어졌다.

(인민들을 체포하는 피노체트의 군대)

 

이렇게 죽거나 고문당했었던 이들 중에는 어린이 수십 명도 포함됐다. 고문당하거나 수감되는 과정에서 부모가 실종된 수천 명의 아이들이 고스란히 방치됐다. 지방에서는 지주들이 농민들에게 폭력적인 보복을 가했다. 칠레의 마푸체 원주민들도 유린당했다. 수십만 명의 칠레인이 강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칠레의 유명한 좌파 시인 파블로 네루다도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도 피노체트 정권 하에서 목숨을 잃었다. 수감당했던 이들은 엠마 왓슨이 출연한 영화 콜로니아에 나온 것처럼 친나치 인사들이 만들어낸 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칠레의 역사 박물관에 있는 피노체트 정권 희생자들의 사진들, 사회운동을 거치며 투쟁해온 칠레는 피노체트 정권 시기 희생된 이들을 잊지 않고자 하고 있다.)

 

이처럼 피노체트 시대가 시작되면서 칠레의 역사는 암흑의 터널에 진입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잡은 피노체트는 서서히 권력을 공고히 해나갔다. 그는 칠레 사회에서 마르스크주의를 박명하기 위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교육계에서 좌파 성향의 인사들이 줄줄히 축출됐다. 그리고 그 자리는 군부가 파견한 장교가 메웠다. 반군부 진영을 단합시킬 만한 인물들도 죄다 암살당했다. 노동조합 활동이 극도로 위축됐다. 또한 아옌데가 국유화한 구리산업을 민영화했고, 여타 광업 부문을 외국계 업체에 개방했으며, 칠레의 여러 지하자원을 개인이 소유할 수 있게 됐다. 수입 관세는 낮아졌고, 이로 인해 수입 상품이 물밀 듯이 밀려오면서 칠레의 공장 대부분이 문을 닫게 됐다. 이로 인해 실업과 빈곤율이 급등했고, 임금도 급락했다. 칠레 좌파들이 수십 년에 걸쳐 이뤄낸 사회적 성과가 고스란히 무너져 내렸다. 칠레 노동자의 평균임금이 인민 연합 집권기인 1970년 수준을 회복한 것은 지난 2000년이 되어서였을 정도다.

(사회주의 포스터,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공부하면 반미주의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워낙 미국이 저지른 만행과 폭력이 심하기 때문이다. 피델 카스트로, 아옌데, 체게바라, 차베스 등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이유를 알기 위해선 미국의 제국주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박정희를 광신적으로 숭배하는 뉴라이트들은 신자유주의를 주장하며 칠레의 피노체트가 민생을 살렸다는 얘기를 종종 하고는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며, 피노체트의 경제성장은 부익부 빈익빈에 입각한 경제 지표의 상승이었을 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던 202010월 칠레에선 피노체트 헌법이 민중의 힘으로 전면적으로 폐지됐다. 피노체트 또한 1990년에 물러나게 됐다. 이것은 칠레인들이 아옌데 사후 목숨 걸고 민주화 운동을 전개해 나간 투쟁의 결과였다. 2006년 피노체트가 사망했을 당시, 적잖은 칠레인들이 그의 죽음을 환영했다. 영국에서 2012년 마가렛 대처가 죽었을 대처럼 말이다.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은 칠레 역사에 있어서 앞으로도 암흑의 시대로 평가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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