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에 있는 내용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973911일은 칠레에게 있어서 비극의 시작이었다. 1970년 민주적인 선거로 탄생한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은 시작 초기부터 미국으로부터 각종 경제제재와 억압 그리고 CIA가 주도한 노골적인 테러리즘에 휩싸였다. 그래도 아옌데 정권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도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중심으로 압도적이었고, 2019년 베네수엘라에서 민중들이 마두로 정권을 지지했듯이 칠레에서도 민중들이 아옌데 정권을 수호하고자 했다. 그래서 닉슨이 선택한 것이 바로 군부 쿠데타였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1973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그는 칠레 역사상 최악의 민간인 학살과 인권 탄압을 저질렀다.)

 

닉슨 대통령은 당시 CIA 국장 리처드 헬름스를 통해 칠레 쿠데타에 1,000만 달러를 지원했다. 당시 화폐 가치로 약 900억 원이나 되는 막대한 자금이었다. 즉 피노체트 세력은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비용으로 각종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했고, 궁극적으로 1973911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피노체트 휘하의 쿠데타군은 수도 산티아고에 있던 아옌데의 대통령궁을 전투기로 폭격하고 탱크로 포위시킨 뒤, 진압군대를 보냈다. 아옌데와 그의 동지들은 쿠데타 군대에 맞서 총격전을 벌였지만, 결국 아옌데는 칠레 만세! 노동자 만세!”를 외치며 자결은 선택했다.

(쿠데타 군대에게 포위당안 아옌데의 대통령궁)

 

아옌데가 죽고 나서 칠레 역사는 먹구름을 향해 달려 나갔다. 쿠데타를 성공시킨 피노체트와 군부 일당은 점령군 행세를 했다. 칠레 전역에 있는 축구 경기장과 군의 막사, 운동장 및 각종 시설들이 민중을 구금하는 시설로 전락했다. 쿠데타 이후 불과 몇 달 만에 수십만 명의 칠레인이 체포 및 구금됐다. 쿠데타를 성공시킨 당일부터 피노체트 정권은 최소 3,200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시작했다. 물론 이 수치는 공식적인 것이고 비공식적인 수치는 이것보다 더 높다.

(운동장에 집결한 피노체트의 군대, 피노체트 휘하의 쿠데타군은 정권을 잡은 이후 당일에 3200명을 학살하고 시작했다.)

 

이런 체포, 구금, 처형 과정에서 외국인 색출 작업이 기승을 부렸다. 아옌데 정부가 조직한 게릴라 부대에 외국인이 가담했다는 게 이유였고,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한 병사들도 총살됐다. 아옌데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장교들도 줄줄이 체포돼 고문당했고, 일부는 사살됐다. 아옌데 정부 시기 인민연합 정치를 펼쳤던 칠레 좌파정당이나 좌파정당의 평당원 그리고 노동조합 조합원들도 피노체트 정권에서 탄압받았다. 많은 이들이 살해되거나, 하루아침에 실종됐다. 피노체트가 다스린 군사독재 17년 동안 최소 3만 명에서 6만 명이 이런 식으로 군부 정권에 의해 죽어나갔다. 칠레 전역이 민중들과 좌파들의 피바다로 물들어졌다.

(인민들을 체포하는 피노체트의 군대)

 

이렇게 죽거나 고문당했었던 이들 중에는 어린이 수십 명도 포함됐다. 고문당하거나 수감되는 과정에서 부모가 실종된 수천 명의 아이들이 고스란히 방치됐다. 지방에서는 지주들이 농민들에게 폭력적인 보복을 가했다. 칠레의 마푸체 원주민들도 유린당했다. 수십만 명의 칠레인이 강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칠레의 유명한 좌파 시인 파블로 네루다도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도 피노체트 정권 하에서 목숨을 잃었다. 수감당했던 이들은 엠마 왓슨이 출연한 영화 콜로니아에 나온 것처럼 친나치 인사들이 만들어낸 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칠레의 역사 박물관에 있는 피노체트 정권 희생자들의 사진들, 사회운동을 거치며 투쟁해온 칠레는 피노체트 정권 시기 희생된 이들을 잊지 않고자 하고 있다.)

 

이처럼 피노체트 시대가 시작되면서 칠레의 역사는 암흑의 터널에 진입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잡은 피노체트는 서서히 권력을 공고히 해나갔다. 그는 칠레 사회에서 마르스크주의를 박명하기 위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교육계에서 좌파 성향의 인사들이 줄줄히 축출됐다. 그리고 그 자리는 군부가 파견한 장교가 메웠다. 반군부 진영을 단합시킬 만한 인물들도 죄다 암살당했다. 노동조합 활동이 극도로 위축됐다. 또한 아옌데가 국유화한 구리산업을 민영화했고, 여타 광업 부문을 외국계 업체에 개방했으며, 칠레의 여러 지하자원을 개인이 소유할 수 있게 됐다. 수입 관세는 낮아졌고, 이로 인해 수입 상품이 물밀 듯이 밀려오면서 칠레의 공장 대부분이 문을 닫게 됐다. 이로 인해 실업과 빈곤율이 급등했고, 임금도 급락했다. 칠레 좌파들이 수십 년에 걸쳐 이뤄낸 사회적 성과가 고스란히 무너져 내렸다. 칠레 노동자의 평균임금이 인민 연합 집권기인 1970년 수준을 회복한 것은 지난 2000년이 되어서였을 정도다.

(사회주의 포스터,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공부하면 반미주의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워낙 미국이 저지른 만행과 폭력이 심하기 때문이다. 피델 카스트로, 아옌데, 체게바라, 차베스 등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이유를 알기 위해선 미국의 제국주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박정희를 광신적으로 숭배하는 뉴라이트들은 신자유주의를 주장하며 칠레의 피노체트가 민생을 살렸다는 얘기를 종종 하고는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며, 피노체트의 경제성장은 부익부 빈익빈에 입각한 경제 지표의 상승이었을 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던 202010월 칠레에선 피노체트 헌법이 민중의 힘으로 전면적으로 폐지됐다. 피노체트 또한 1990년에 물러나게 됐다. 이것은 칠레인들이 아옌데 사후 목숨 걸고 민주화 운동을 전개해 나간 투쟁의 결과였다. 2006년 피노체트가 사망했을 당시, 적잖은 칠레인들이 그의 죽음을 환영했다. 영국에서 2012년 마가렛 대처가 죽었을 대처럼 말이다.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은 칠레 역사에 있어서 앞으로도 암흑의 시대로 평가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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