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미국 역사를 비판적으로 봐야 하는가?
1776년 독립선언을 통해 탄생하게 된 나라 미국은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세계 최강의 군사, 경제, 정치체제를 소유한 국가로 부상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냉전에서까지 승리를 장식한 미국은 현재 엄연히 전 세계의 국제정세를 이끌어가는 패권국가로 남아있다. 이러한 패권국가의 위치에 있는 미국의 입지를 잘 반영해주는 것처럼,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배워온 미국의 역사란 위대한 건국의 아버지들의 정신에 따라 그러한 가치를 실현하고 전 세계에 전파한 자랑스러운 역사 즉 위대한 역사다. 이처럼 미국인들에게 널리 대중화되고 다소 신화화된 미국사는 책 저자의 말대로 “미국의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교육에서 강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역사는 책의 저자 올리버 스톤(Oliver Stone)과 피터 커즈닉(Peter Kuznick)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진실의 극히 일부만을 반영한 역사일 뿐이다. 저명한 역사학자 EH카는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말했다. EH카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역사는 그러한 상호작용의 과정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다. 따라서 미국을 제대로 이해하고 알기 위해선 미국의 흑역사인 제국주의의 역사, 인종차별의 역사 그리고 자본가 계급의 착취와 빈부격차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많은 미국인들은 대체로 미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만 배워왔고, 현재도 배우고 있는 중이다. 그렇기에 네오콘과 같은 세력들이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이른바 ‘우파적 역사 수정주의’가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행은 미국 패권주의에 충실히 이행하는 대한민국 또한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미국을 광신적으로 숭배하는 이들은 “지금까지 미국은 단 한 번도 제국주의 국가인 적이 없다”는 역사적 사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이야기를 기사로 내보내기 까지 했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광화문에 나와 태극기 성조기를 같이 흔들며 미국 대통령을 향해 절을 하기도 하고, 북폭(北爆)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미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반증이다.
사실 이런 현상에 대해 엄밀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미국 역사에 대한 총제적인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즉 미국이 제국주의 국가로서 과거에 저질렀던 범죄와 현재 저지르고 있는 범죄행위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미국의 이면을 알아야 한다. 이번에 읽게 된 올리버 스톤의 다큐멘터리이자 저서인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The Untold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는 지금껏 우리가 얘기하지 않았거나 보려고 하지 않았던 미국의 이면을 가르쳐준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는 과연 무엇일까?
2. 21세기 헬게이트 이라크 전쟁과 오바마 제국
21세기는 시작부터 충격과 공포를 미국인들에게 맛보게 해주었다. 알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라덴이 감행한 9.11 테러는 21세기를 시작하는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다. 2001년 9월 11일 극단적 이슬람주의를 추구했던 빈라덴과 알카에다는 비행기를 납치하여 뉴욕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과 미국 펜타곤에 테러 공격을 가했다. 특히나 비행기 자폭테러로 인해 당시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고, 최소 3,000명 이상이 테러공격으로 희생됐다. 9.11테러가 일어나자 미국은 이에 분노했다. 당시 대통령이던 조지 부시는 곧바로 전쟁준비에 착수했고, 9.11테러로부터 한 달 뒤, 알카에다가 있다는 심증만 가지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전쟁 초기 ‘항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을 개시하며 아프가니스탄의 주요도시와 군사거점들을 접수했다. 물론 여기에는 최신식 무기가 동원되었고, 미군의 사상자를 최소화한 반면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의 사망률은 급증했다. 뉴햄프셔대학 마크 해롤드 교수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 전쟁 발발 두 달도 안 되는 기간에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이 4,000명 가까이 사망했는데, 이것은 9.11테러로 인한 미국 민간인 사망자 숫자를 상회했다. 전쟁 발발기간 몇 개월 후까지 기간을 늘려 잡으면 질병과 기아 등으로 죽은 사람까지 포함해 아프간 민간인 사망자는 2만 명 정도로 추정될 정도로 민간인 피해가 극심했다. 물론 시작만 좋았을 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전쟁의 수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이 계속되는 와중에 미국은 또 다른 희생양을 공략하고 있었다. 그 희생양이 바로 이라크였다. 당시 미국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포악한 독재정권이라는 비판과 주민들이 고통 받고 있다는 주장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이 신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지 부시와 부통령 딕 체니,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는 이런 조작극을 아주 치밀하게 계획했고, 결국 2003년 3월 이라크 침공을 감행했다. 수많은 나라들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했다. 많은 나라들이 이 전쟁을 규탄했고, 전쟁 전후로 해서 전 세계 800여 개 도시에서 시위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최소 수백만 명의 세계인이 이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를 진행했다. 심지어 중동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국가 이스라엘마저도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처럼 이라크 전쟁도 초기에는 미군이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개전 3주 만에 수도 바그다드에 진입했고, 이라크의 지도자 사담 후세인을 체포했다. 마치 1991년 걸프전쟁에서 미국이 이라크군을 상대로 보여줬던 것처럼 미국은 육·해·공군에서 이라크군을 압도했다. 미군이 일방적으로 압도하는 이 전쟁은 전 세계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또한 미국이 독재자라고 규탄했던 사담 후세인의 동상이 무너지는 것도 생중계가 되었다. 물론 이것은 이라크 전쟁을 계획한 미국이 심리전팀을 동원하여 연출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현장에 나와 있다가 무너진 동상을 짓밟으며 환호하는 이라크 주민들은 사전에 동원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은 전쟁 초기에만 승기를 잡았을 뿐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이 두 전쟁의 수렁 속에 빠져들었다. 이것은 전쟁을 일으킨 부시 정권이 끝나고 나서 등장한 오바마 정부에서도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미국 역사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는 진보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현실은 이와 정반대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미국의 대기업들과 자본가들에게 많은 양보를 했고,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구조를 더 극대화시켰다. 당시 미국 경제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는데, 이는 2011년 당시 독일 민간 비영리 기구에서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이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수치가 2011년 10월 독일 최대의 민간 비영리기구 ‘베르텔스만재단(Bertelsmann Stiftung)’이 발표한 보고서 “OECD 회원국의 사회정의 수준 비교(Social Justice in the OECD-How Do the Member States Compare)”에서 드러났다. 보고서는 미국을 31개 OECD 회원국 중 27위로 평가했다. 미국의 뒤를 잇는 나라는 그리스, 칠레, 터키 정도였다. 보고서는 빈곤 방지, 아동과 노인 빈곤율 소득 불평등, 영유아에 대한 교육비 지출, 건강보험 등을 포함한 여러 요인을 비교 고찰했다. 미국은 전반적인 빈곤율에서 29위, 아동 빈곤과 소득 불평등 항목에서 28위를 기록했다. 컬럼비아대학교 아동빈곤연구센터는 아동의 42%가 저소득 가구에서 살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 중 절반은 빈곤선 이하였다 AP통신은 2011년 12월 미국인의 거의 절반이 빈곤 상태이거나 저소득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통계청은 2010년 4,620만 명의 미국인이 빈곤선 이하라고 보고했다. 이는 52년 전 관련 통계를 집계한 이후로 최고치였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369~370
그뿐만 아니라 오바마는 전쟁을 지속했다. 이라크에서는 철수하려는 모습을 보인 반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오히려 병력을 증강했다. 이에 따라 2010년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병력은 역대 최대치인 10만 명을 돌파했다. 또한 오바마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드론 공격의 횟수를 늘렸다. <워싱턴 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오바마 재임 첫 3년간 드론 공격으로 1,350~2,250명이 사망했을 정도다. 거기다 오바마 정권 시기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이른바 킬팀(kill team) 사건이라 해서 젊은 미군 병사들이 민간인을 죽인 뒤 정당방위처럼 조작한 사건도 있었고, 특히나 드론 공격으로 인해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사망했다. 2011년 리비아 내전에 개입했을 때도 오바마가 보낸 NATO군의 공습으로 죽어나간 민간인들이 대량으로 속출했을 정도다.
오바마는 미국이라는 제국을 아주 굳건히 유지했고, 심지어 네오콘들한테 아낌없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어떤 네오콘 학자는 오바마의 대외정책이 네오콘 정권 때하고 달라진 게 없다며 소위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을 안심시키려고 했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게 부시였다면, 그 전쟁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던 것은 오바마였던 것이다. 어쨌든 오바마가 철수하고자 했던 이라크 전쟁에서 미군 4,500명이 사망하고, 이라크 민간인 60만 명이 사망했다. 2011년 5월 오바마는 9.11테러의 주범 오사마 빈라덴을 파키스탄에서 암살하는데 성공했지만, 이것은 파키스탄 정부의 주권을 무참히 짓밟는 행위였다. 이처럼 오바마 정부 또한 미국을 제국주의의 길로써 이끌었고 욕심 많은 자본가들과 결탁하는 길을 걸었으며, 결국 대외정책에서도 네오콘의 이익에 반대되지 않는 행보를 보였다. 따라서 오바마는 제국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3. 냉전사의 재인식
냉전(Cold War)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부터 1990년 소련이 붕괴직전까지 대략 45년간 지속되었던 시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은 파시즘에 맞서 형성했던 반파시즘 동맹에서 벗어나 서로가 모든 면에서 경쟁하는 체제에 돌입했고, 이것은 자칫하면 양측의 핵전쟁 위기로 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미국이 데프콘 2까지 발동하였고, 미국의 케네디와 소련의 흐루쇼프가 합의를 볼 때까지 전 세계는 핵전쟁의 공포에 휩싸였었다.
많은 사람들이 냉전시대에 대해 배울 때 보통의 경우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미국보다 더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것으로 배웠고, 또 그렇게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생각은 과연 역사적인 사실에 가까운 것일까? 이 것은 올리버 스톤의 책을 읽어보면 상당히 과장되고 왜곡된 절반의 역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정도로 소련보다 핵무기를 먼저 개발했다. 1946년 7월에는 태평양의 비키니 섬에서 핵실험을 하여 소련에 대한 위협의 강도를 높였다.
특히나 1947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를 발표하면서 그리스 내전에 노골적으로 개입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는 사회주의를 뿌리 뽑기 위해 그리스에서 전 나치 협력자와 우익들에게 무기와 장비 그리고 고문단을 지원했다. 이탈리아에서 공산당이 승기를 잡자, 이들을 분쇄하기 위해 전 무솔리니 정권 협력자들을 동원하여 정권 전복에 착수했다. 중국 국공내전에서도 인기가 없고 부정부패가 극심한 중국 국민당 정권을 지원했으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도 프랑스가 내세운 괴뢰 황제 바오다이를 위해 CIA는 1,000만 달러를 지원했다. 또한 일제로부터 35년 만에 독립한 한반도 이남에 분단정부를 수립했고, 민중에게 인기 없는 늙은 지도자 이승만을 지원했다.
소련의 경우 미국에 비하면 그런 노골적인 개입은 거의 하지 않은 편이었고, 오히려 미국이 소련을 위협했으며 실제로 커티스 르메이는 소련에 대한 핵폭격을 계획하기도 했었다. 미국과 소련의 핵전쟁으로 갈 뻔했던 한국전쟁의 경우, 북한의 김일성이 시작했다는 이유 한 가지 때문에 미군의 반인륜적 범죄는 매우 잊혀졌다. 특히나 미국이 남북한을 가릴 거 없이 투하한 폭탄과 네이팜탄은 최소 100만 이상의 민간인을 죽였다.
특히나 냉전에서 미국의 개입이 노골적이었던 것은 베트남 전쟁이었다. 이들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부터 베트남 문제에 개입했고,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에는 남베트남에 응오딘지엠이라는 반공주의자를 내세워 괴뢰정권을 만들었다. 민중의 80%가 항일 항불의 독립운동가 호치민을 지지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막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무차별 융단 폭격과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와 같은 고엽제 투하를 함으로써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을 죽였다. 로버트 맥나마라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이 죽인 베트남인은 380만 명이나 됐다. 즉 이들 대다수가 미군의 폭격과 고엽제 투하 그리고 미군의 군사작전에 의해 죽은 것이다. 심지어 1968년 미라이 마을에선 미군 30명이 504명이 민간인을 학살하기도 했다.
미국은 중남미에서 사회주의를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퍼부었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혁명을 성공시키자 피그스만 침공을 개시했었고,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쿠바 정권 전복 훈련을 개시했으며,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암살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미국이 이런 시도를 해서 피델 카스트로가 소련의 흐루쇼프와 협력하여 핵미사일을 배치했던 것이다. 이게 바로 쿠바 미사일 위기의 맥락이다. 또한 미국은 과테말라에 등장한 진보적인 아르벤스 정권을 CIA를 통해 전복시켰고, 1954년 아르벤스 정부가 사퇴하면서 성공했다.
미국이 중남미에서 제국주의적 정책을 매우 강력하게 추진했고, 민주주의적 법칙마저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은 1970년대 칠레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1970년 민주적 선거를 통해 당선된 살바도르 아옌데는 사회주의적 정책을 칠레에 적용했다. 그러자 미국은 경제제재를 하는 것은 물론, 사보타주를 통한 테러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아옌데 정권이 인기가 떨어지지 않자, 1973년 9월 11일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를 사살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피노체트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수천수만 명의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즉 미국의 지원으로 칠레는 피바다가 되었다.
미국에서 진보의 이상이라고 불리는 존F.케네디 대통령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상당히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추구했었다. 그는 남베트남의 부패한 응오딘지엠 독재정권을 지원하는데 열정적이었고, 쿠바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 또한 당시의 미국 흑인인권은 여전히 차별적이었으며, 민주주의와 개혁을 말하면서도 억압적인 독재자들을 지원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책에서는 케네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내용을 인용하고자 한다.
“케네디는 생의 마지막 몇 달간 놀라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심지어 잘못된 판단을 고집해 상황이 심각해진 카스트로의 쿠바에 대해서도 노선 선회를 고려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철군을 추진하면서도 승리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것처럼 쿠바 문제에서도 피델 카스트로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면서도 CIA 주도의 사보타주 공작을 다시금 재가했다. 카스트로에 대한 케네디의 이중적 태도는 결국 라틴아메리카를 대하는 이중적 태도와 다를 바 없었다. 케네디는 민주주의와 개혁을 말하면서도 억압적인 독재자들을 계속 지원했다. 심지어 1963년 3월에는 과테말라 군사 쿠데타를 지원했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526
4. 로널드 레이건의 실체
냉전시기 미국과 경쟁했던 나라 소련은 1970년대 중후반이 되면서 경제 사정이 점차 나빠졌다. 특히나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선 1947년에 폐지했던 배급제를 다시 실행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고전하며 경제적으로 위태로울 시기 미국에는 헐리우드 영화배우 출신인 정치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가 바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었다. 미국이나 한국 사람들 중에는 로널드 레이건을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으로 치켜세우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로널드 레이건은 과연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영웅적 전사였을까?
이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로널드 레이건은 전혀 그렇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의 전 정권인 지미 카터정부가 닉슨 정부에서 형성된 데탕트를 추구하며, 대외적인 지원을 제국주의적으로 했던 것에 반에 로널드 레이건은 보다 더 노골적이었다. 특히나 그의 극우 반공주의적 도그마는 중남미에서 잘 드러났다. 1979년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43년간 잔인하고 부패한 독재통치를 해온 아나스타시오 소모사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정권을 건설했다. 당연히 미국의 카터는 반공주의자들을 지원했고, 이런 지원은 로널드 레이건에 와서 더 심화되었다. 레이건이 이들을 타도하려 했던 이유는 산디니스타 정권은 토지, 교육, 의료 개혁 프로그램을 야심차게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레이건이 지원한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은 잔인무도한 학살을 저질렀다. 심지어 레이건은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이른바 이란-콘트라 스캔들까지 촉발했다. 즉 이란에 인질로 잡혀있는 사람들을 빌미로 무기 거래를 하고 그 자금을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에게 지원했던 것이다.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의 학살로 최소 3만 명이 희생됐다. 그 외에도 엘살바도르와 과테말라, 온두라스 등에서 극우세력들을 지원하여 이들이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했다. 당시 레이건은 중남미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들을 이른바 ‘자유투사’로 칭찬했는데 그들의 실체는 민주주의와 정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의 실체는 책에 나온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통해 알 수 있다.
“CIA의 정보 사이드가 완전히 찌그러든 상황에서 공작 사이드는 물을 만난 고기였다. 엘살바도르 미국 군사고문단 책임자 존 왜겔스타인 대령은 “진짜배기 게릴라 소탕작전 기술은 야만을 체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표현은 미국의 지원과 훈련을 받은 엘살바도르 정부군과 과테말라 정부군, 그리고 미국이 주도한 니카라과 반정부 게릴라 활동에 딱 들어맞는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들을 “자유의 전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들은 강간, 고문, 거세, 사지 절단, 참수, 시신 절단 같은 악행을 밥 먹듯이 저질렀다. 과테말라 정부군의 경우 1981~83년 마야문명의 후예인 아메리카 원주민 농민 약 10만 명을 살해했는데, 그런 잔학성을 키워주기 위해 훈련 단계부터 신병들을 구타하고 모욕하고 하수구에 처박는가 하면 똥통에 장시간 처넣기도 했다. 이런 훈련을 통해 인간성을 말살당한 정부군 병사들은 잔학 행위를 일삼았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164~165
“과테말라 정부 공식기관인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Histrorical Charification Commision)’는 1999년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과테말라 정부군이 다수의 마야 원주민 마을에서 저지른 626건의 대량학살사건을 상세히 설명하고, 이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다. 보고서는 CIA를 비롯한 미국 정부기관들이 정부군의 학살행위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으며, 학살행위로 인한 전체 사망자는 2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168~169
“얼마 후 놀라운 학살행위가 또 벌어졌다. 미군에게 훈련받고 미군 장비로 무장한 살바도르 정부군이 1981년 말 엘 모소테 마을 주민 767명 전원을 학살한 것이다. 군은 13세 미만 어린이 358명을 포함한 희생자들을 칼로 찌르고 목을 자르고 기관총을 난사해 죽였다. 소녀와 성인 여성들은 강간당했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173
로널드 레이건은 반공주의자로 베트남 전쟁을 열렬히 지지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당한 굴욕적인 패배를 극복하기 위해 직접 타국 침략에 나서기도 했었다. 바로 그레나다 침공이었다. 대략 7,000명의 미군이 그레나다에 상륙하여 작전을 전개했다. 명분은 쿠바의 지원을 받는 그레나다의 사회주의 정권을 타도하기 위함이었다. 침공 작전은 시작부터 엉망이었다. 미군 29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부상했으며 헬기 9대를 잃었다. 대부분의 병력은 작전 성공 후 바로 철수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레이건은 그레나다 침공을 통해 베트남 전쟁의 굴욕을 극복하고자 했고, 그 승리에 심취했었다.
또한 레이건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소련에 맞서 싸우던 이른바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그리고 그 당시 레이건은 스팅어 미사일을 포함한 온갖 무기와 장비를 지원했고, 이런 지원을 받았던 이들 중에는 이후 9.11 테러를 일으키게 되는 오사마 빈라덴도 포함됐다. 미국은 과거 자신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겪은 고통을 소련 또한 겪기를 바랬고, 이를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 부었다. 레이건은 냉전 말기 반공주의 정신을 강화하며 국방비 예산을 늘렸던 반면, 민중의 빈부격차와 복지를 위해선 예산을 삭감하는데 열정을 쏟아 부었다. 이에따라 미국의 빈부격차는 더 극대화됐다. 왜냐하면 그가 독점기업들을 위해 세금을 삭감해주고, 민중의 복지혜택을 줄였기 때문이다.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은 책에서 로널드 레이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과연 레이건이 남긴 진정한 유산은 무엇일까?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업무 관련 지식이 부족하고 구체적인 지시도 내리지 않는 행정부 수반이었지만 부활한 강경 반공 우파 인사들에게는 힘을 실어주었다. 이들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군사화하면서 냉전에 다시금 불을 붙였다. 레이건은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외쳤지만 억압적인 독재자들을 지원하고 무기를 대주었다. 또 중동과 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진 국지적, 지역적 분쟁을 냉전의 싸움터로 확대시키는 한편 공포정치가 민중의 운동을 억압하도록 방조했다. 그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군사 부문에 투입한 반면 빈곤층을 위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은 삭감했다. 부자들에 대한 세금을 대폭 삭감했고, 국가채무를 3배로 늘려놓았으며, 미국을 세계 최대의 채권국(취임한 첫해인 1981년)에서 세계 최대의 채무국(두 번째 임기가 시작된 1985년)으로 바꿔놓았다. 1987년 10월에는 대공황 이후 최악의 주식시장 붕괴를 맞아야 했다. 레이건은 전 세계적 차원에서 공격용 핵무기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어영부영하다가 날려버렸다. SDI라는 유치한 환상을 버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냉전 종식에서 레이건이 한 역할은 과대평가되고 있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217~218
5.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나라?
미국인들에게 있어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이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을 무찌르고 민주주의를 전파한 역사다. 미국인들의 이런 관점을 반영이라도 한 듯 서방에서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밴드 오브 브라더스’, ‘씬 레드 라인’, ‘아버지의 깃발’, ‘핵소고지’, ‘퓨리’ 등 미국과 서방 연합군의 중심이 된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이끈 주체는 미국과 서방연합군이 아니라, 바로 독일에 맞서 엄청난 희생을 감당해야 했던 이오시프 스탈린과 소련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됐다. 나치 독일은 단기간에 유럽전역을 점령했고,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을 전개하여 소련을 침공했다. 개전 초기 소련은 독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받았고, 수도 모스크바 외각까지 독일군이 진격하는 상황에 놓였었다. 경제 대공황 당시 나치 독일과 기업분야에서 협력했던 미국은 공식적인 차원에선 나치독일에 대해 비판을 했었다. 따라서 1941년 소련이 독일의 침공을 받자 소련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태도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이후 전쟁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소련에 대한 물자지원도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미국에선 소련을 칭찬하는 선전과 캠페인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에게 “나로서는 그건 참 부인하기 어려운, 분명한 사실이오. 러시아군은 유엔 25개 회원국 전부를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이, 추축국 병력을 살상하고 그 물질적 토대를 파괴했소. 따라서 1942년에는 당연히 최대한 모든 무기와 탄약을 그들에게 공급해줌으로써 사투를 벌이고 있는 러시아를 지원해야 할 것이오.”라는 얘기를 했었다.
1942년에는 미국의 영화사 헐리우드도 소련 찬양에 열을 올렸다. 1942년 7월이 되면 MGM, 컬럼비아, 유나이티드 아티스츠(United Artists), 20세기 폭스, 파라마운트 같은 주요 영화사들이 제작 중이거나 제작을 검토 중인 소련 관련 영화는 9편 이상이나 됐고, <모스크바 특명(Mission to Moscow)>, <북극성(North Stat)>, <러시아의 노래(Song of Russia)>, <러시아 소녀 삼총사(Three Russian Girls)>, <영광의 나날(Days of Glory)> 등 5편의 주요 작품이 나왔다.
미국내에서는 소련에 대한 지원과 칭찬을 아끼지 않는 행보가 이어졌지만, 1941년부터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그토록 원했던 제2전선을 형성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제2전선은 1944년 6월 영미 연합군이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면서 형성됐다. 즉 이 말은 제2전선을 형성하기 거의 3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소련은 동부전선 전역에서 독일군에 맞서 싸웠다는 얘기가 된다. 책에서는 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44년 6월 6일 오랫동안 기다리던 제2전선이 마침내 열렸다. 원래 약속보다 1년 반이나 늦었지만 10만 명이 넘는 연합군 병력과 각종 차량 3만 대가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한 것이다. 상륙 과정에서 9,000명이 전사했다. 그 시점에 소련은 재앙적인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중부유럽 상당 부분을 점령해가고 있었다. 이제 연합군은 동부와 서부 양쪽에서 독일로 밀고 들어가게 된다. 승리가 코앞이었다.
그 시점까지 소련은 거의 단독으로 독일군과 싸워왔다. 노르망디상륙작전 개시까지 소련군은 대개 200개 사단 이상의 적과 전투를 한 반면 미군과 영국군은 둘 다 합쳐도 10개 사단 이상과 교전한 경우가 드물었다. 처칠은 “독일 군사력의 내장을 뽑아낸 것은 러시아군”이라고 인정했다.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600만 이상, 서부전선과 지중해 일대에서는 100만 가까운 병력을 잃었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209
1945년 나치독일이 패망하는 시점까지 2,600만 명 이상의 소련사람이 사망했다. 그 중 1,000만 명이 소련군인이었고, 나머지는 나치독일군의 무차별 학살로 죽은 민간인이었다. 소련군은 동부전선 전역에서 진격을 개시하면서 아우슈비츠(Auschwitz)나 트레블링카(Treblinka)같은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수용소도 같이 해방시켰다. 즉 나치 독일의 광적인 유대인 학살을 끝낸 주체는 바로 소련이었고, 그런 나치독일을 무찌른 것도 소련이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체가 바로 소련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한 이유를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생각할 것이다. 물론 원자폭탄 자체가 일본의 항복을 앞당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한 이유는 원자폭탄 보단 소련군의 만주 진격이 가장 결정적이었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우선 일본의 대본영은 미국이 원자폭탄 1,2발을 도시에 사용하는 것과 B-29 폭격기를 대량으로 동원한 융단폭격이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일본의 지도부는 미국의 상륙에 맞선 결전을 진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소련이 만주에서 진격을 개시하면서 그러한 일본 지도부의 계획은 무산 됐다. 거기다 4년간 유럽전선에서 단련된 소련군은 만주에 있던 일본군 주력부대인 관동군을 붕괴시켰다. 그 붕괴속도도 빨라서 소련군의 작전은 불과 1주일 만에 성공적으로 종결되었을 정도였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소련은 몽골과 만주, 중국, 한반도 이북 그리고 쿠릴열도와 사할린까지 진격했다. 소련군의 진격에 일본이 절망에 빠졌던 것은 바로 일본의 산업기반이 만주에 있었던 것이다. 즉 일본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더라도 식민지 조선과 만주로부터 지원받음으로써 미국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희망을 소련군이 말 그대로 붕괴시켰다. 따라서 일본은 항복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을 패배시키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소련이었다. 이것은 미국이 외면하고자 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진실이다.
6. 미국 민중사와 차이점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의 공저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는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한 책이다. 사실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출판된 비슷한 책이 있다. 그 책이 바로 하워드 진(Howard Zinn)이 쓴 <미국 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는 1980년대 출판되어 100만 권 이상이나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그의 베스트셀러다. 그 책은 국내에도 1980년대에 번역된 적이 있고, 2000년대 개정판이 다시 번역되기도 했었다. 필자 또한 그 책을 몇 년 전에 읽었고, 아주 감명 깊게 읽었다. 특히나 억압받던 계급이나 피지배계층의 시각에서 서술한 아래로부터 역사쓰기는 참으로 훌륭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는 아주 훌륭한 책이다. 그러나 <미국 민중사>는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른바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시작하는 역사부터 2003년 이라크 전쟁 이전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고, 국내에 번역된 개정판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를 두 권으로 나누어 출간했다. 따라서 현대관련 부분은 좀 미약한 측면이 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책의 첫 판은 1980년대에 나온 것이고 개정판도 2000년대 초중반에 나온 것이라 상대적으로 미약할 수밖에 없다. 만약 콜럼버스 시대부터 시작한 미국의 추악한 범죄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미국 민중사>를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는 <미국 민중사>에서 심도 있게 다루지 못한 미국의 추악한 역사를 보다 깊이 다루고 있다. 특히나 <미국 민중사>에서 짧게 언급하는 9.11 테러 이후의 역사를 이 책은 아주 깊이 다루고 있다. 적어도 오바마 재선 이전까지 말이다. 확실히 이 부분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책에 대해 좀 더 추천하는 차원에서 얘기하자면,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를 읽고 난 다음에 이 책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미국 민중사>는 위에서 언급한 그런 한계가 있고, 또 소련에 대해 좀 부정적으로 접근한 측면이 있는 반면, 이 책은 소련에 대해 비판은 하더라도 적어도 소련의 업적에 대해 나름 균형 있게 평가하려는 모습을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미국 민중사>보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를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미국 민중사>를 읽지 않았다면, <미국 민중사>를 먼저 읽고 이 책을 읽어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의 또 다른 이면을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