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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화된 미국의 독립 혁명

 

1776년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과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을 비롯한 소위 미국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들은 영국 당국에 맞서 독립을 선포했다. 그전까지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은 독립을 선포했고, 영국에 맞선 독립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대략 150년간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프렌치-인디언 전쟁. 초반에는 프랑스 원주민 연합에게 영국이 밀렸지만, 나중가서 전세를 역전시킨 영국이 승리했다.)

 

17637년간 전개되었던 프랑스-인디언 전쟁(French-Indian War)은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다. 유럽에서도 영국과 라이벌 위치에 있던 프랑스는 식민지 개척 시기에도 북미 대륙에서 영국과 대립했는데, 그게 결국 프랑스 인디언 전쟁으로 확산된 것이다. 프랑스 인디언 전쟁 이후 프랑스는 더 이상 북미 대륙에서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프랑스 인디언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말이 좋아 승리한 것이지 대략 7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받았던 경제적인 타격이 적잖았다. 따라서 프랑스 인디언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북아메리카에 있는 식민지를 대상으로 보상을 요구했고, 노골적으로 식민지 문제에 직접적으로 간섭했다. 영국은 전쟁으로 인한 부채 탕감을 위해 식민지에 각종 세금을 부과했다. 대표적으로 외국산 설탕에 수입 관세를 부과했던 설탕법이나, 식민지에서 지폐 발행을 금지하는 통화법 영국산 수입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는 타운센드법 등이 있다. 특히나 타운센드 법은 식민지 미국인들로 하여금 대단히 많은 불만을 샀다.

(보스턴 학살 이 집회에서 영국군의 발포로 5명이 사망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영국 당국은 영국 정규군을 식민지에다 영구 주둔시켰고, 1765년에는 반란법을 만들어 식민지인들에게 군대 주둔에 필요한 숙식을 제공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밀수 업자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영국 함대가 아메리카 근해를 순항하도록 했으며 식민지에 임명된 관리가 대리인을 보내는 대신 직접 현지로 가서 근무하도록 강제했으며, 급속히 번창하는 영국 기업과 경쟁할 수 없도록 식민지의 제조업을 영국 당국이 규제했다.

(보스턴 차 사건은 1773년 영국 당국의 가혹한 조치에 반발하여 일어났다. 당시 배에 올라간 사람들은 원주민으로 분장하고 영국에서 가지고 온 차를 바다에 던졌다.)

 

그 결과 영국 당국의 가혹한 조치에 불만을 품은 식민지 사람들은 영국 정부에 맞서 저항했다. 1770년에는 항구도시 보스턴에서 항의 집회를 하던 5명이 영국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보스턴 학살(Boston Massacre)’이 일어났고, 1773년에는 영국 정부에 반대하는 차원에서 수입한 차를 던지는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 일어났다. 보스턴 차 사건 이후 영국은 더욱 엄격한 법을 새로 제정하고, 보스턴 항을 폐쇄했으며 식민 정부를 해체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벙커힐 전투 기념탑. 지난 11월 필자가 미국여행 갔을 때 보스턴에서 찍은 사진이다. 당시 미군은 후퇴하면서 전투에서 패했지만, 사상자는 영국측이 더 많이 나왔다.)

 

영국 정부의 가혹한 통치는 식민지인들의 저항의식을 고취시켰고, 토마스 페인이 썼다는 상식(Common Sense)은 이를 부추겼다. 1774년 식민지인들은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를 발족했고, 1775년 렉싱턴(Lexington)과 콩코드(Concord)에서 식민지 군대와 영국 군대 간에 최초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그 이후 대륙회의에서 소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로 결정하고 토마스 제프슨의 독립선언서를 채택하여 이틀 후에 공표했다. 그게 바로 177674일이었고, 이로써 소위 미국의 독립 혁명이라고 불리는 독립 전쟁(American Independence War)가 시작된 것이다.

(요크타운 전투는 미국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투다.)

 

영국이 전쟁에서 승산이 가장 컸던 때는 1776년부터 1778년 초까지 계속된 전쟁의 두 번째 국면에서였다. 하지만 영국군은 트렌턴(Trenton), 프린스턴(Princeton)등의 소규모 전투에서 패배했고, 1777년 뉴욕의 새라토가에서 벌어진 새라토가 전투(Battle of Saratoga)에서도 대패했다. 또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인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프랑스 군주정과 동맹을 협상했고, 궁극적으로 프랑스를 전쟁으로 끌어들였다. 남부로 옮겨간 전쟁에서 영국은 연전연승을 거뒀지만, 대규모 프랑스군의 도움을 받은 미국 측 대륙군은 프랑스 해군이 영국의 물자와 증원 부대를 차단하고 있는 틈을 타 1781년 버지니아의 요크타운 전투(Battle of Yorktown)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1783년 프랑스 파리에서 파리 조약을 체결한 이후 미국은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게 됨으로써, 명실상부 독립 국가가 되었다.

(미국 제1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

 

1776년 토마스 제퍼슨이 작성한 미국 독립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 같은 빼앗을 수 없는 권리들을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았다. 이러한 권리들을 보장하기 위하여 정부가 만들어진 것이며, 정부의 권력은 피통치자들의 동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언제 어떤 형태의 정부라도 이러한 목적들을 깨뜨린다면, 그 정부를 교체하거나 폐지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것이 민중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그러나 소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있어서 모든 사람의 개념에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 노예 그리고 여성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독립선언서의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태어났다.(All men are created equal)”라는 말에서 토마스 제퍼슨이 여성들을 무시하기 위해 일부러 ‘me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겠으나, 여성을 포함해야 한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선언서에 숨어 있는 진실은 식민지의 신흥 세력들에게 영국을 격퇴하기 위한 지지가 필요했다는 것과 동시에 재산과 권력에 관한 기존의 체제가 심하게 붕괴되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이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들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식민지 관리로서 영국을 위해 봉사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어떤 인물인지를 아주 명확히 보여주는 포스터. 이 이면을 들여다 보면 그들은 결국 부르주아 계급이자 지배 계급이었다는 결론에 도달 할 수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자신의 저서인 미국민중사에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다.

 

미국 건국의 아버즈들을 둘러싼 신화는 지속되고 있다. “한 역사가(버나드 베일린 Bernard Bailyn)”가 최근에 한 말대로 국가 지도자들에게 책임 있고 인도적인 권력 행사를 요구하는 정치체제의 창설과 특권의 파괴가 그들의 가장 숭고한 열망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살았던 아메리카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베일린은 이렇게 말한다.

 

모두가 헌명하고 공명정대한 정부를 위한 기본적 규범을 알고 있었다. 사회의 경쟁하는 세력 간에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 세력이 다른 세력을 압도해서는 안 되며, 아무 저지도 받지 않은 채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유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런 균형을 달성하기 위해 정부기관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훌륭한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한 현명하고 공명정대한 사람들이었을까? 실제로 그들은 현상을 유지하는 것, 즉 당시 지배세력 간의 균형을 제외하고는 다른 균형을 원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들은 노예와 주인, 무산자와 유산자, 인디언과 백인 간의 평등한 균형을 원하지 않았다.

 

베일린이 말하는 사회의 경쟁하는 세력과 마찬가지로 건국의 아버지들은 국민의 절반을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독립선언서에서도 언급되지 않았고 헌법에서도 부재했으며 새로운 정치적 민주주의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초기 미국 여성들이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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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의 반란과 식민지 미국의 빈부격차

 

미국의 독립 혁명이 일어나기 100년 전인 1676년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반란이 일어났었다. 분노한 정착민들은 수도인 제임스타운에 불을 질렀다. 총독은 불타는 도시에서 도망쳤고, 영국 당국은 정착민들을 제압하기 위해 대략 1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이게 바로 베이컨의 반란(Bacon’s Rebellion)’이다.

(베이컨의 반란 당시 들고 일어난 민중들)

  

베이컨의 반란에서 민중이 불만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자신들과 다른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부와 특권을 누리며 그들과 함께 살고 있었던 식민지 지배자들이었다. 따라서 베이컨의 반란은 하층계급을 중심으로 조직화되었다. 즉 아래서부터의 투쟁이라는 성질이 있었던 것이다. 이 반란에는 백인 하인들과 흑인 노예들고 가담했다고 하는데 그들 또한 버지니아 사회의 엄청난 빈부격차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당시 반란을 이끌었던 지도자 너새니얼 베이컨(Nathaniel Bacon)은 분명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빈민을 돕는 것보다는 원주민들과 싸움에 더 관심이 있었다. 베이컨은 군대를 조직하여 원주민들을 습격하기도 했지만, “인민선언(Declaration of the People)”이라 불린 문서에서 반란의 명분을 밝혔고, 불공정한 세금을 징수한 것과 인디언들로부터 서부의 개척자들을 지켜주지 않는 것을 포함한 버클리 행정부의 비행을 고발하기도 했다.

(너새니얼 베이컨)

  

하지만 베이컨이 병에 걸려 죽은 이후 반란은 지속되지 못했는데, 영국 당국에서 30문의 대포로 무장한 군함과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제압했기 때문이다. 반란에 참여했던 하인들과 노예들은 다시 주인들에게 돌려보내 줬고, 23명의 반란 지도자들은 교수형에 처했다.

 

베이컨의 반란은 버지니아에서 나타났던 연속적인 억압의 연결고리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다. 원주민들은 백인 개척자들에게 토지를 강탈당했고, 개척자들은 제임스타운의 부유한 상류층들에게 세금을 바치며 그들의 통치를 받았다. 이런 빈부의 격차 문제를 떠나서 이 사건의 핵심은 모든 식민지인들이 영국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버지니아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란을 지지했었다.

(베이컨 반란 당시 그림)

  

1760년대에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를 통치하던 부유한 엘리트 계급들에게는 세 가지의 두려움이 있었다. 적대적인 원주민들과 노예 반란의 위험성, 그리고 점점 커져만 가는 가난한 백인 계급의 분노였다. 남부의 대농장주들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흑인 노예들과 가난한 백인들이 베이컨의 반란 같은 대규모 봉기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식민지들이 성장할수록 지배계급은 통제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을 찾게 되었다. 최고의 부유층과 극빈층이 존재하는 사이에서 백인 중산층이 발전했다. 상층계급은 중상층 계급의 충성을 얻는 데 성공했고, 여기에는 분명 중산층에게 대가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과연 어떻게 자신들의 재산과 권력의 손실 없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했던 것일까? 1760년대와 1770년대의 지배계급은 최적의 방법을 찾아냈다. 다름 아닌 자유와 평등에 대한 말이었다. 자유와 평등에 관한 말은 영국에 대한 혁명을 일으킬 때만 필요했고, 노예제나 불평등을 없애는 데에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소위 미국 독립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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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7-16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경제 논리만 지배하면 정치는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정치와 경제가 예전처럼 어울려 하루바삐 정치경제학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

NamGiKim 2019-07-16 22:35   좋아요 0 | URL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과 흑인 노예의 탄생

(프란시스코 피사로)

 

지난번 콜럼버스 이야기를 다루면서 서구 지배자들이 원주민들에게 저지른 무차별 학살에 관해 얘기했었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의 북미 대륙과 쿠바, 아이티 그리고 바하마를 갔다 온 이후 스페인 정복자들이 가는 곳마다 콜럼버스와 아라와크족의 비극은 반복되었다.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와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는 멕시코 지역의 아스텍(Aztec) 문명과 남아메리카의 잉카 문명을 파괴했다. 그 결과 스페인 정복자들은 현재 멕시코 지역과 그와의 중남미 지역 그리고 현재 미국의 플로리다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해상 무역 및 정복에 점차 참여하기 시작한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가 바로 영국이었다. 16세기 영국인들은 신세계에 대한 뒤섞인 감정을 가졌었다. 이에 따라 영국은 스페인과 경쟁할 수밖에 없었는데, 1588년 칼레 해전(Naval Battle of Calais)에서 스페인의 무적 함대가 영국에게 격파당하면서, 이후 해상권은 영국에게로 넘어갔다. 이후 영국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렇게 해서 1607년 버지니아에 제임스 타운(Jamestown)이 건설되었다. 미국 버지니아 지역에 영국 최초의 식민지인 제임스 타운이 건설 된 이후 영국에서 미국 대륙으로 도망치거나, 출세를 위해 오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16209월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소위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들이 그러했다. 이후 현 매사추세츠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보스턴항이 그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매사추세츠 동부 지역에 찰스타운, 뉴타운, 록스베리, 콩코드 등의 새로운 타운들이 건설되었다.

(1637년 영국 원정대의 피쿼트족 마을을 공격하는 모습)

  

1607년에 건설된 영국의 제임스 타운에선 2, 3년 동안 식량난과 기아가 지속되었다. 워낙 심각했기에, 시체를 파먹는 일이 있을 정도였고, 제임스 타운에 거주하던 500명 중에서 6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가운데 몇 명이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원주민들에게 도망쳤다. 시간이 흐른 뒤 제임스타운의 지배자는 포와탄족들에게 그들을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했지만, 포와탄족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영국 이주자들은 원주민 마을을 파괴했고, 무차별 학살했다. 그로부터 12년 후 원주민들은 영국 이주자들이 증가하자 347명의 영국인들을 학살했으며, 그 이후에는 전면전을 벌였다. 결국, 영국 이주자들은 그들을 전멸시키기로 결정했고, 원주민들에게 무차별 보복을 감행하였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도착한 영국의 청교도들도 코네티컷 남부 지역과 로드아일랜드에 있는 피쿼트족(Pequots)과 전쟁을 벌여 대량학살을 벌였고, 원주민들을 보이는 데로 학살했다.

(당시 흑인들을 대량으로 실었던 노예선)

 

영국인들의 북미 대륙 정착이 시작되면서 17세기 중반에는 흑인 노예제도가 버지니아를 비롯한 미국 남부에서 확산됐다. 스페인이 대서양 해상권을 장악했을 시기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노예들을 자신딜이 만든 전초기지를 중심으로 이송했고, 이후에도 노예들을 착취했었다. 아프리카 흑인이 북미대륙에 처음 도착했던 것은 1619년에 대략 20명이 제임스 타운에 도착한 것부터 시작한다. 이때 끌려온 흑인들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 유럽에서 온 계약 하인들처럼 취급받았다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그들의 경우 일정 기간이 되면 자유를 부여하기도 했다지만, 흑인들이 하인으로 등록되었다 하더라도 백인 하인과 다른 존재로 간주됐고 다르게 대우받았을 것이며, 사실상 노예랑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북미 대륙 또한 흑인 노예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계약 하인들의 경우 일정 기간이 되면 자유를 부여해야 하는 제약이 있었고, 계약 하인들의 이주 숫자가 점차 줄었으며, 그에 따른 농업 생산력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또한, 1650년대와 1660년대부터는 남부 식민지에서 평생 노예들을 위한 법령을 제정했다. 그렇게 해서 노예의 수요는 계속해서 증가하여 1700년의 버지니아 식민지에는 총인구의 12분의 1에 달하는 6000명이 존재했고, 1763년에는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17만 명의 노예가 존재했다. 1637년 처음으로 아메리카의 노예선이 매사추세츠를 출항했는데, 그 배의 창고는 수감자들을 구속하기 위한 가로 0.6m, 세로 1.8m의 족쇄가 달린 선반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백인들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배에다 실어 대량으로 북미 대륙에 옮겼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은 1492년부터 1776년 미국이 독립을 선포할 때까지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 노예가 대략 500만 명이 된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 기간의 식민지 미국의 경제는 노예들을 착취하는 시스템을 기반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흑인 노예선를 표현한 그림. 흑인들은 움직이지 못한 상태에서 고향을 떠나야 했다.)

  

흑인 노예들이 남부에만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식민지 미국도 주로 남부에 흑인 인구가 몰려있고, 북부에는 상대적으로 적었으며, 북부는 상업 및 공업이 발달한 곳이었기에 상대적으로 흑인 노예들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북부 또한 자신들의 이윤 창출을 위해 흑인 노예무역에 가담했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이익을 창출했다

(북미대륙에 와서도 흑인들은 백인들에게 지배받고 착취당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렇다면 흑인들의 반란 및 저항은 없었을까? 물론 없진 않았다. 1687년에는 버지니아 식민지의 노선네크에서 노예들이 지역에 있는 백인을 모두 죽인 후 장례식을 이용해 탈출하려고 한 계획이 발각되기도 했었고, 1739년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스토노에서 노예 20명이 반란을 일으켜 창고지기 2명을 죽이고 총과 화약을 훔쳐 남쪽으로 달아나면서 도중에 사람들을 살해하고 건물에 불을 질렀다. 그 반란은 다른 노예들도 가담해 대략 80명 정도의 규모로 성장했는데, 민병대가 그들을 강경진압하여 50명의 흑인이 죽고 봉기가 분쇄되었다. 하지만 이런 류의 반란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도망치다 발각되면 백인들과 추격대에게 바로 사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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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초상화)

지금으로부터 520년 전인 1492년 8월 콜럼버스는 90명의 선원과 3척의 배 니냐호(Nina), 핀타호(pinta), 산타마리아호(Santa Maria)를 이끌고 스페인을 떠나 서쪽으로 항해를 하기 시작했다. 10주간의 항해 끝에 육지를 발견하게 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er Columbus)는 그 지역에 사는 원주민을 보고 아시아라 믿었고, 현재 쿠바인 곳을 발견했을 때도 그곳을 중국이라 믿었지만, 사실은 바하마 군도의 한 섬에 도착한 것이었다.

(신대륙을 발견했다 생각한 콜럼버스 탐험대)

당시 크리스토퍼를 비롯한 서양사람들을 발견한 아라와크족(Arawaks)은 마을에서 나와 해변으로 향했다. 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이상하게 생긴 커다란 배를 좀 더 가까이 보기 위해 헤엄쳐갔다. 칼을 찬 콜럼버스와 선언들이 지상에 상륙하자 아라와크족은 그들을 맞이하며 음식과 물, 선물을 가져다줬다. 그러나 콜럼버스를 비롯한 백인들이 그들에게 보여준 것은 무차별 폭력과 노예화 그리고 학살이었다. 도대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소위 신대륙을 발견하고 나서 무슨 일을 했던 것일까? 미국의 진보 역사학자인 하워드 진(Howard Zinn)의 저서 미국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에는 다음과 같은 콜럼버스의 항해일지의 내용이 나온다.

(콜럼버스 탐험대를 환영하는 아라와크족 원주민들)

“그들은 앵무새와 솜뭉치, 창 외에도 많은 물건을 가져와서 유리구슬이나 매종(사냥용 매의 다리에 묶는 종)과 바꿨다. 그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물건들을 기꺼이 교환했다. 그들은 탄탄한 체구에 잘생긴 외모를 지닌 건장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무기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내가 칼 한 자루를 보여주자 아무 생각 없이 칼낳을 쥐다가 손을 베이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철이 없다. 이들의 창은 막대기에 불과하다. 이들은 좋은 하인이 될 듯하다. 50명만 있으면 이들 모두를 정복해서 마음껏 부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처음 발견한 섬인 서인도 제도에 닿자마자 이곳에 대한 어떤 정보라도 얻기 위해 원주민 몇 명을 강제로 끌고 왔다.”

 

위에서 언급한 콜럼버스 탐험대의 배는 대략 3척이었다. 그중 한 척인 산타마리아호는 에스파뇰라에서 좌초되었는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좌초한 배의 목재를 떼어내 서반구에서 최초로 유럽의 군사기지가 된 보루를 세웠다. 콜럼버스는 수많은 원주민을 포로로 잡아 남아 있던 두 척의 배에 실었고, 두 척의 배인 니냐호와 핀타 호가 스페인을 향해 출발하자 항해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원주민 포로들이 죽어 나갔다. 이후 수도 마드리드로 돌아온 콜럼버스는 궁정에 터무니없이 과장된 내용을 보고했는데, 그 내용은 “자신과 탐험대가 아시아와 중국 연안의 한 섬에 도착했었다.”라는 허위보고였다.

(원주민의 손을 절단하는 콜럼버스의 탐험대)

그리고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이 직접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도 순진하고 재산 관념이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누군가가 달라고 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어느 누구와도 나누어 가지려고 합니다”라고 보고하며 “필요한 만큼의 황금과 노예를 가지고 오겠다.”라고 약속했다. 그런 과장되고 허구가 가미된 보고 덕분에 콜럼버스는 17척의 배와 200명의 탐험대를 이끌고 두 번째 원정에 나설 수 있었고, 카리브해 섬들을 차례대로 돌며 원주민 포로들을 생포했다. 아이티에 근거지를 마련한 콜럼버스는 금광을 찾지는 못했지만,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왜냐하면, 원주민 노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495년 콜럼버스 일행은 대규모 노예사냥에 나섰다. 그들은 아라와크족의 남자, 여자, 어린이 1500명을 스페인인들과 개들이 지키고 있는 우리 안으로 몰아넣은 뒤,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500명을 골라 배에 실었다. 그중 200명은 항해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노예들은 경매에 부쳐졌다.

 

금을 찾기를 원했던 콜럼버스와 선원들은 거대한 금광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 아이티의 시카오 지방에서, 14세 이상의 원주민 모두에게 석 달마다 일정한 양의 금을 모아오라고 명령했다. 금을 발견하면 구리표식을 달아줬지만, 그게 없는 원주민들은 발견되는 즉시 두 발이 잘린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그곳에도 황금 덩어리는 없었고, 결국 원주민들은 도망쳤으며, 그 과정에서 사냥개를 대동한 선원들에게 붙잡혀 죽어갔다.

이에 분노한 아라와크족은 저항군을 모아 머스킷 총으로 무장한 스페인인들에 맞섰는데, 스페인인들은 사로잡은 포로의 목을 매달거나 불태워 죽였다. 2년 동안 학살과 수족 절단, 자살로 인해 아이티의 원주민 25만 명 가운데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비난하는 미국인들)

콜럼버스가 대서양의 북미대륙을 다녀온 이후로부터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는 아메리카 대륙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많은 원주민들이 서양인들에 의해 탄압받고 학살당했고, 지배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이미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삼았으며, 스페인 왕실에 거짓 보고까지 해간 인물이었다. 이제는 콜럼버스의 진실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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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국주의 역사(History of American Imperialism)

 

1. 왜 미제국의 역사인가?

 

필자가 페이스북과 같은 SNS를 통해서 미제국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써온 것은 재작년부터였다. 미국에 대해 비판 의식을 기르던 중 하워드 진과 노엄 촘스키가 쓴 책들을 몇 권 읽게 되었고, 기회가 된다면 미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미국 역사를 정리해볼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나서 대략 1달 이상 미국 여행을 갔다 왔던 필자는 미국에 대해 더욱 비판적인 시각을 갖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미국여행 또한 필자의 시각에 영향을 주었다.

 

지난 학기 필자가 들었던 대학의 미국사 강의에선 첫시간에 교수님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미국은 어떤 나라인지 한 단어로도 좋으니 한번 아무거나 써보세요라고 했는데, 필자는 당연히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된 제국주의 국가라고 썼다. 그러나 대략 40명이 넘게 있던 그 수업에선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유’, ‘기회의 땅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 즉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라고 비판한 건 40명의 학생 중 필자 혼자였고, 나머지는 미국을 자유 혹은 민주주의의 이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미국은 자국에서는 여러 면에서 민주주의 체제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른 군사 독재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비록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많은 문제가 존재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부와 권력을 지닌 소수의 남성들이 미국 헌법을 만들어 낸 초창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부는 줄곧 소수 부유층의 이익을 옹호했고, 보통사람들이 아닌 대기업의 편을 드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특히나 이런 부의 불평등의 문제 인종갈등의 문제 그리고 극우세력들의 결집 및 확장은 미국의 문제점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준다.

 

미국에 대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흔히 민주주의라는 단순한 표현으로 묘사되는, 지구상 여느 곳과도 다르게, 아니 어느 곳보다도 우월하게 자유와 정의를 추구한다는 미국의 장점에 대한 과장된 시각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특히 8.15 해방 후 친미정권이 들어섰던 대한민국의 경우 수구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이와 같은 시각에 매몰되어 있다.

 

앞으로 필자가 SNS에 올리게 될 미제국주의 역사 시리즈는 미국이라는 국가를 제국주의 국가라는 관점에서 놓고 역사를 볼 것이다. 글의 내용 대부분은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하워드 진의 살아 있는 미국역사>,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 <전쟁국가의 탄생>, <아무도 말하지 않은 미국 현대사> 등의 책에 있는 것을 바탕으로 집필할 것이다.(물론 인터넷에 있는 몇몇 사회주의 단체 사이트들도 참고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페이스북과 같은 SNS에 올리는 글이기에 별다른 각주 표기나 참고문헌 표기는 없다. 이제 다루는 역사 범위를 얘기하자면 1492년 콜럼버스가 북미대륙을 보게 되는 시점부터 현재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정권까지의 미국사를 포괄하는 내용일 것이다. 필자가 쓰는 이 글이 미국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 의식을 읽는 독자들에게 갖게 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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