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컨의 반란과 식민지 미국의 빈부격차

 

미국의 독립 혁명이 일어나기 100년 전인 1676년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반란이 일어났었다. 분노한 정착민들은 수도인 제임스타운에 불을 질렀다. 총독은 불타는 도시에서 도망쳤고, 영국 당국은 정착민들을 제압하기 위해 대략 1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이게 바로 베이컨의 반란(Bacon’s Rebellion)’이다.

(베이컨의 반란 당시 들고 일어난 민중들)

  

베이컨의 반란에서 민중이 불만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자신들과 다른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부와 특권을 누리며 그들과 함께 살고 있었던 식민지 지배자들이었다. 따라서 베이컨의 반란은 하층계급을 중심으로 조직화되었다. 즉 아래서부터의 투쟁이라는 성질이 있었던 것이다. 이 반란에는 백인 하인들과 흑인 노예들고 가담했다고 하는데 그들 또한 버지니아 사회의 엄청난 빈부격차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당시 반란을 이끌었던 지도자 너새니얼 베이컨(Nathaniel Bacon)은 분명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빈민을 돕는 것보다는 원주민들과 싸움에 더 관심이 있었다. 베이컨은 군대를 조직하여 원주민들을 습격하기도 했지만, “인민선언(Declaration of the People)”이라 불린 문서에서 반란의 명분을 밝혔고, 불공정한 세금을 징수한 것과 인디언들로부터 서부의 개척자들을 지켜주지 않는 것을 포함한 버클리 행정부의 비행을 고발하기도 했다.

(너새니얼 베이컨)

  

하지만 베이컨이 병에 걸려 죽은 이후 반란은 지속되지 못했는데, 영국 당국에서 30문의 대포로 무장한 군함과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제압했기 때문이다. 반란에 참여했던 하인들과 노예들은 다시 주인들에게 돌려보내 줬고, 23명의 반란 지도자들은 교수형에 처했다.

 

베이컨의 반란은 버지니아에서 나타났던 연속적인 억압의 연결고리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다. 원주민들은 백인 개척자들에게 토지를 강탈당했고, 개척자들은 제임스타운의 부유한 상류층들에게 세금을 바치며 그들의 통치를 받았다. 이런 빈부의 격차 문제를 떠나서 이 사건의 핵심은 모든 식민지인들이 영국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버지니아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란을 지지했었다.

(베이컨 반란 당시 그림)

  

1760년대에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를 통치하던 부유한 엘리트 계급들에게는 세 가지의 두려움이 있었다. 적대적인 원주민들과 노예 반란의 위험성, 그리고 점점 커져만 가는 가난한 백인 계급의 분노였다. 남부의 대농장주들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흑인 노예들과 가난한 백인들이 베이컨의 반란 같은 대규모 봉기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식민지들이 성장할수록 지배계급은 통제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을 찾게 되었다. 최고의 부유층과 극빈층이 존재하는 사이에서 백인 중산층이 발전했다. 상층계급은 중상층 계급의 충성을 얻는 데 성공했고, 여기에는 분명 중산층에게 대가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과연 어떻게 자신들의 재산과 권력의 손실 없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했던 것일까? 1760년대와 1770년대의 지배계급은 최적의 방법을 찾아냈다. 다름 아닌 자유와 평등에 대한 말이었다. 자유와 평등에 관한 말은 영국에 대한 혁명을 일으킬 때만 필요했고, 노예제나 불평등을 없애는 데에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소위 미국 독립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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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7-16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경제 논리만 지배하면 정치는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정치와 경제가 예전처럼 어울려 하루바삐 정치경제학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

NamGiKim 2019-07-16 22:35   좋아요 0 | URL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