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초상화)
지금으로부터 520년 전인 1492년 8월 콜럼버스는 90명의 선원과 3척의 배 니냐호(Nina), 핀타호(pinta), 산타마리아호(Santa Maria)를 이끌고 스페인을 떠나 서쪽으로 항해를 하기 시작했다. 10주간의 항해 끝에 육지를 발견하게 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er Columbus)는 그 지역에 사는 원주민을 보고 아시아라 믿었고, 현재 쿠바인 곳을 발견했을 때도 그곳을 중국이라 믿었지만, 사실은 바하마 군도의 한 섬에 도착한 것이었다.
(신대륙을 발견했다 생각한 콜럼버스 탐험대)
당시 크리스토퍼를 비롯한 서양사람들을 발견한 아라와크족(Arawaks)은 마을에서 나와 해변으로 향했다. 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이상하게 생긴 커다란 배를 좀 더 가까이 보기 위해 헤엄쳐갔다. 칼을 찬 콜럼버스와 선언들이 지상에 상륙하자 아라와크족은 그들을 맞이하며 음식과 물, 선물을 가져다줬다. 그러나 콜럼버스를 비롯한 백인들이 그들에게 보여준 것은 무차별 폭력과 노예화 그리고 학살이었다. 도대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소위 신대륙을 발견하고 나서 무슨 일을 했던 것일까? 미국의 진보 역사학자인 하워드 진(Howard Zinn)의 저서 미국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에는 다음과 같은 콜럼버스의 항해일지의 내용이 나온다.
(콜럼버스 탐험대를 환영하는 아라와크족 원주민들)
“그들은 앵무새와 솜뭉치, 창 외에도 많은 물건을 가져와서 유리구슬이나 매종(사냥용 매의 다리에 묶는 종)과 바꿨다. 그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물건들을 기꺼이 교환했다. 그들은 탄탄한 체구에 잘생긴 외모를 지닌 건장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무기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내가 칼 한 자루를 보여주자 아무 생각 없이 칼낳을 쥐다가 손을 베이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철이 없다. 이들의 창은 막대기에 불과하다. 이들은 좋은 하인이 될 듯하다. 50명만 있으면 이들 모두를 정복해서 마음껏 부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처음 발견한 섬인 서인도 제도에 닿자마자 이곳에 대한 어떤 정보라도 얻기 위해 원주민 몇 명을 강제로 끌고 왔다.”
위에서 언급한 콜럼버스 탐험대의 배는 대략 3척이었다. 그중 한 척인 산타마리아호는 에스파뇰라에서 좌초되었는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좌초한 배의 목재를 떼어내 서반구에서 최초로 유럽의 군사기지가 된 보루를 세웠다. 콜럼버스는 수많은 원주민을 포로로 잡아 남아 있던 두 척의 배에 실었고, 두 척의 배인 니냐호와 핀타 호가 스페인을 향해 출발하자 항해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원주민 포로들이 죽어 나갔다. 이후 수도 마드리드로 돌아온 콜럼버스는 궁정에 터무니없이 과장된 내용을 보고했는데, 그 내용은 “자신과 탐험대가 아시아와 중국 연안의 한 섬에 도착했었다.”라는 허위보고였다.
(원주민의 손을 절단하는 콜럼버스의 탐험대)
그리고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이 직접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도 순진하고 재산 관념이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누군가가 달라고 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어느 누구와도 나누어 가지려고 합니다”라고 보고하며 “필요한 만큼의 황금과 노예를 가지고 오겠다.”라고 약속했다. 그런 과장되고 허구가 가미된 보고 덕분에 콜럼버스는 17척의 배와 200명의 탐험대를 이끌고 두 번째 원정에 나설 수 있었고, 카리브해 섬들을 차례대로 돌며 원주민 포로들을 생포했다. 아이티에 근거지를 마련한 콜럼버스는 금광을 찾지는 못했지만,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왜냐하면, 원주민 노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495년 콜럼버스 일행은 대규모 노예사냥에 나섰다. 그들은 아라와크족의 남자, 여자, 어린이 1500명을 스페인인들과 개들이 지키고 있는 우리 안으로 몰아넣은 뒤,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500명을 골라 배에 실었다. 그중 200명은 항해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노예들은 경매에 부쳐졌다.
금을 찾기를 원했던 콜럼버스와 선원들은 거대한 금광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 아이티의 시카오 지방에서, 14세 이상의 원주민 모두에게 석 달마다 일정한 양의 금을 모아오라고 명령했다. 금을 발견하면 구리표식을 달아줬지만, 그게 없는 원주민들은 발견되는 즉시 두 발이 잘린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그곳에도 황금 덩어리는 없었고, 결국 원주민들은 도망쳤으며, 그 과정에서 사냥개를 대동한 선원들에게 붙잡혀 죽어갔다.
이에 분노한 아라와크족은 저항군을 모아 머스킷 총으로 무장한 스페인인들에 맞섰는데, 스페인인들은 사로잡은 포로의 목을 매달거나 불태워 죽였다. 2년 동안 학살과 수족 절단, 자살로 인해 아이티의 원주민 25만 명 가운데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비난하는 미국인들)
콜럼버스가 대서양의 북미대륙을 다녀온 이후로부터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는 아메리카 대륙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많은 원주민들이 서양인들에 의해 탄압받고 학살당했고, 지배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이미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삼았으며, 스페인 왕실에 거짓 보고까지 해간 인물이었다. 이제는 콜럼버스의 진실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