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들어 러우전쟁이 격화되면서, 과거 서방 사회가 진행하던 홀로도모르 제노사이드 사기극 운운이 더 심화되고 있고, 심지어 독일 정부까지도 지들이 2,700만 명의 소련인들을 학살한 사실은 망각한 채, 홀로도모르가 러시아의 학살이라는 말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나는 예전부터도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학살이 아니라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젤렌스키 정부가 서방의 지원을 받아가며 그런 네오나치식 사기극을 퍼뜨리는 것이 얼마나 말 안되는 소리인지 반박할 필요가 있어 이렇게 긴 글을 정리해 보았다.


“기근에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첫째, 뱟까(現 키로프 일대 - 주) 북부에서도 마주쳤던 여름의 반(半)건조성 기후대는 1932년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남부 지역 전역에 걸쳐 흉작을 야기했다. 둘째, 집산화를 둘러싼 투쟁은 작황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집산화는 관료적 규범에 바탕을 둔 질서정연한 과정이 아니었다. 집산화는 당의 지원으로 빈농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빈농들은 "쿨락"의 토지를 몰수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집단농장에 기초한 경제를 운영하는 데에 있어서는 별다른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당은 1930년 무렵부터 일찍이 실수를 밝혀내고 과오를 정정하기 위해 당원들을 파견했다. (...) 1933년의 강우량은 시의적절했다. 당은 꼴호즈의 운영을 돕기 위해 엄격한 기준을 바탕으로 선별된 당원들을 농촌에 파견했다. 당원들은 성공했다. 1933년의 풍작 이후 농촌의 상황은 경이로운 속도로 급격하게 개선됐다.“


Tottle, Douglas. Fraud, Famine, and Fascism. Toronto: Progress Books, 1987, p. 102


사실 러우전쟁 전부터 우크라이나 대기근에 대해선 볼셰비키의 학살이네, 소련의 학살이네, 스탈린의 학살이네 하는 주장들이 즐비했다. 이 주장의 핵심은 잔혹한 소련 공산당이 우크라이나인들을 의도적으로 말살하기 위해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이고, 실제로 수백만 명이 스탈린과 소련에 의해 굶어 죽었으며, 현재 러시아는 이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의도적으로 반소 및 반러 감정을 부추기기 위해 만들어 놓은 레파토리다. 사실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공산당이나 스탈린의 학살이라고 하기에 무리가 많은 점이 있다. 그것이 뭔지 알아보고자 한다.


홀로도모르가 조직적인 학살이 아니라고 보는 입장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기근이 일어날 당시 우크라이나측의 기후를 보면 생산력에 영향이 생길 정도로 좋지 않았다는 점

2. 부농과 소작농의 계급투쟁이었다는 점

3. 이 기근이 비단 우크라이나에서만 일어나는 기근이 아니었다는 점


무엇보다 세간에 잘못알려진 사실이 있다면, 소련 공산당과 스탈린이 구제정책을 하지 않았다는 것과 곡물 징발을 기근 도중에도 강도를 높였다는 식의 주장이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 소련 정부가 기근 도중에도 곡물징발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스탈린의 지도부는 기근에 대응하고 곡물 수출을 줄이고 모자라는 곡물을 수입해서 기근 지역에 보내는 등 기근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최소한 소련 공산당은 기근을 의식했으며,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 처럼 의도적으로 학살하려고 벌이지는 않았다. 홀로도모르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역사학자이자 농업 학자인 마크 타우거(Mark Tauger)는 소련 정부는 소량의 곡물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식량을 끊임없이 배포했으며, 소련 전역이 식량 부족에 실질적으로 직면했고, 곡물 수매량과 배분량에 대한 정보가 의심의 여지 없이 정확했다는 사실에 미루어볼 때, 당대의 소련이 명실상부하게도 극심한 식량 부족에 부딪혔기 때문에, 기근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1931년과 1932년의 흉작에 있었다.고 논문에서 밝혔다.(Mark Tauger. 「Natural Disaster and Human Actions in the Soviet Famine of 1931-1933 Pittsburgh: University of Pittsburgh」, 2001, p. 5)


그 외에도 타우거 교수는 2017년에 출간된 앤 애플바움(Anne Applebaum)의 저서 『붉은 기근: 스탈린의 우크라이나 전쟁 1921~1933(Red Famine: Stalin's War On Ukraine, 1921~1933)』에 대한 반박 서평을 실은 적이 있다. 타우거 교수는 애플바움은 1930년대 초반의 식량부족 사태가 "이전보다 많은 곡물을 생산하려는 농민들의 동기를 총체적으로 무너뜨린" 식량 부족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이 정부의 곡물 수매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하지만 이후에는 1930년의 수확량이 1929년의 숫자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도 말했지만, 애플바움의 말대로, 농민들의 동기가 "완전히 일소"됐다면 이와 같은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겠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애플바움은 또한 1929~1930년 당시 소련의 기근 구제책에 대해서도 논하지만, 흉년과 기근에 대한 구제가 농민들에게 동기를 마련해준 경위를 염두에 두지 않았으며, 단지 1928~29년 곡물 위기 도중에 소련 지도부의 상당수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위험요소로 지목했고,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계열 조직들에 대한 약식재판을 열며, 농민들의 저항이 민족주의와 연계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만 의도적으로 강조했음을 지적했다.(Mark Tauger, 「Review of Anne Applebaum's "Red Famine: Stalin's War on Ukraine」, 2018.07.01)


또한 타우거 교수는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소련의 집산화로 굶주렸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이런 연구들은 낮은 수확에 영향을 준 환경적 요인과, 기근과 흉작의 지속적 회복, 1930년대 당시의 대규모 수확, 이 시기의 소련 농장의 기계화, 소련인구 증가, 소련 시대의 식량생산과 소비의 장기간 증가 등을 축소하거나 실제 수확자료를 무시한다.(홀로도모르 사기: 일어나지도 않았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범죄(번역) http://mlkorea.org/v3/?p=10477&fbclid=IwAR299Mw4JN5PBVU_faYy2_W1tSvsJQkz9zlUtW6T-fnTrery0_2tbNDqhqE%7C )


서방에 알려진 홀로도모르의 자료들은 조작된 것들도 상당히 많다. 캐나다 역사학자인 더글라스 토틀은 『사기, 기근 그리고 파시즘: 우크라이나 학살 신화 히틀러에서 하버드까지(Fraud, Famine, and Fascism: The Ukrainian Genocide Myth from Hitler to Harvard)』라는 책에서 1987년에 나온 우크라이나 대기근 관련 영화인 <절망의 추수>에서 사용된 사진들이 1921년에서 1922년 볼가 기근(Volga Famine) 당시의 사진이라는 사실과 사진이 1932년에서 1933년 기근을 보여주기 위해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밝혔으며, 더글라스 토틀에 따르면 억만장자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1934년 여름에 나치 독일의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독일이 허스트 소유의 인터내셔널 뉴스 서비스(International News Service)사의 국제 뉴스를 구매하겠다는 계약을 맺었으며, 당시 나치 출판물은 우크라이나 대기근에 대한 흑색선전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기근에 대한 다른 비슷한 기사가 허스트사에 의도적으로 실렸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에서 600만 혹은 700만 명이 아사했다는 서구의 주장 및 수치는 사실 1차 출처가 나치들이다. 마리오 소사가 쓴 『진실이 밝혀지다』라는 책을 보면, 600만 명이 소련에서 아사했다고 주장한 1차 출처는 나치독일의 선전장관인 요제프 괴벨스였다. 나치는 기본적으로 반볼셰비즘과 반공주의를 바탕으로 한 인물로, 우크라이나 대기근에 대해 악의적인 선전을 했는데, 그 주장이 미국이나 영국에서 아무런 비판없이 사용되었다는 것이 마리오 소사의 주장이다. 아래 마리오 소사의 책 서평을 썼던 국내 프레시안 기사를 한번 보도록 하자.


나치가 찾아낸 협력자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였다. 허스트는 황색저널리즘을 마케팅전략으로 이용해 25개의 일간신문, 24개의 주간신문, 12개의 라디오방송국, 2개의 국제뉴스 통신사 등을 소유하게 된 언론계의 거물이었다. 허스트가 발행하는 신문의 구독자는 미국에서만 4000만 명에 달했다. 미국 성인의 3분의 1이 허스트의 신문을 읽고 있었다. 1934년 극렬한 보수반공주의자였던 그는 독일로 가서 히틀러를 만나게 된다. 이후 허스트는 자신의 언론을 통해 친독일성 향의 선전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독일로부터 받은 뉴스기사는 소련에서의 대량학살, 살육 등으로 채워진 기사들 일색이었다. 이때 만들어진 괴담이 우크라이나 괴담이었다. 1935년 2월 18일 <시카고 아메리칸(Chicago American)>지 1면 머리기사로 소련에서 600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후 허스트는 독일이 요구하는 선전물을 자신의 언론 제국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퍼뜨린다.(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45981?fbclid=IwAR0qXXXS4_ua8l2p9Wp99BU4eSXvPQ7P8N-HEqF0o9q-G7gGrX88hM4Jovo)



또한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700만 명이 사망했다는 주장의 출처도 니콜라스 프리초드코(Nicolas Prychodko)라는 인물인데, 독소전쟁 당시 나치가 키예프를 점령하자 임명한 문화 교육 장관이었다. 1933년 미국인 기자 프레드릭 비첼(Frederick Birchall)은 400만 명 이상 죽었다고 했는데, 그는 그 당시 베를린에 있었고 히틀러 정권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최초의 미국인 기자이기도 했으며, 몇년 전에 개봉한 영화 <미스터 존스>의 주인공 가레스 존스 또한 히틀러와 괴벨스하고 각별한 사이었던 친나치 성향의 기자였다.


우크라이나에서 기근이 발생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에는 쿨락들의 의도적인 사보타주도 컸다. 루도 마르텐스가 쓴 스딸린 바로 보기의 내용을 한번 보도록 하자.


1932―1933년의 우끄라이나 기근은 네 가지 원인이 있었다.


‘그들의 반대파(꿀락)는 그들의 소와 말들을 집단소유로 하기보다는 차라리 도살하는 방식을 초기에 취했다. 그 결과 쏘비에뜨 농업은 통탄할 만한 타격을 받았는데, 왜냐하면 대다수의 소와 말들을 꿀락들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28년과 1933년 사이에, 쏘련에서 말의 수가 거의 3,000만 두에서 1,500만 두 이하로, 뿔 달린 소의 숫자는 7,000만 두(젖소 3,100만 두 포함)에서 3,800만 두(젖소 2,000만 두 포함)로; 양과 염소는 1억 4,700만 두에서 5,000만 두로, 돼지는 2,000만 두에서 1,200만 두로 감소했다. 쏘비에트의 농촌 경제는 1941년 무렵까지 이러한 치명적인 손실에서 회복되지 못했다.’


‘... 몇몇은[꿀락들은] 관리를 살해했고, 집단농장의 재산에 불을 질렀으며, 심지어 그들 자신의 수확물과 종자까지 불태웠다. 보다 많은 이들이 파종과 수확을 거부했는데, 이들은 아마도 당국이 양보를 하거나 어차피 그들을 먹여 살릴 것이라는 가정 아래 이런 행동을 하였다.’


‘그 여파로 1932-1933년에 “우끄라이나 기근”이 닥쳤다.... 독일에서는 나찌 출판물에 그리고 미국에서는 허스트 출판물에 등장한, 대부분 허구인 무시무시한 서술에는, 1921년 볼가 지방에서 촬영된 것으로 밝혀진 사진이 종종 예시된다. .... 일본에서의 전쟁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명백하게 야기된, 1932년 봄의 특별 징발로 인해 종자와 수확물의 급격한 감소에도 불구하고, “기근”은 그 후반기에는 식량 부족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자신들의 농장에 파종을 거부하거나 자신들의 수확물을 불태운 꿀락들이었다.’


이러한 목격자의 진술이, 우끄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이자, 1918년 뻬뜨리우라(Petliura) 하에서 수상을 지냈던 이삭 마제파(Issac Mazepa)가 쓴 1934년 기사에서 증명되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는 우끄라이나에서 우익이 1930-1932년 동안 농업 분야에서 광범위한 파괴행위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떠벌렸다.


‘처음에는, 꼴호즈들에 대한 방해공작이 자행되었고 공산당 관리들이나 그들의 대리자들이 살해당했으나, 나중에는 볼셰비끼의 파종과 수확 계획을 조직적으로 좌절시키는 데 목표를 두는 소극적인 저항 방식이 선호되었다.... 1932년의 대재앙은 쏘비에뜨 우끄라이나가 1921-1922년의 기근 이래로 직면해야 했던 가장 혹독한 재난이었다. 가을과 봄의 파종 운동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전체 농지에 파종이 안 되었고, 게다가 농작물을 수확할 때, ... 많은 지역에서 특히 남부지방에서 20%, 40%, 심지어 50%가 토지에 그대로 방치되었고, 그리고 전혀 수집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탈곡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두 번째 기근의 이유는, 1930년, 1931년, 1932년에 우끄라이나 특정 지방에 닥친 가뭄 때문이었다. 하버드에서 우끄라이나의 우익 노선을 옹호하는 제임스 E. 메이스 교수에게는 그것은 쏘련 정권이 꾸며낸 이야기였다. 그러나 민족주의자들 스스로가 ‘우끄라이나의 선구적인 역사가’로서 묘사한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Mykhailo Hrushevsky)는, 그의 책 ≪우크라이나의 역사≫에서 1932년 상황을 서술하면서, ‘혼란스러운 농업 상황에 또 다시 가뭄까지 겹쳤다.’라고 말했다. 하버드의 러시아 연구소에서 강의를 했던 니콜라스 리아스노프스키(Nicholas Riasnovsky) 교수는 1931년과 1932년에 가뭄이 있었다고 썼다. 내전기간 동안 볼셰비끼에 대항해 싸웠던 미카엘 플로린스키(Michael Florinsky) 교수는 이렇게 적었다. ‘1930년 1931년의, 특히 우끄라이나에서 심각한 가뭄은 농업상태를 악화시켰고 기근에 가까운 환경을 만들었다.’


기근의 세 번째 요인은, 우끄라이나와 북 코카서스를 황폐화시킨 장티푸스 전염병이었다. 세계적 명성의 도시 계획가이자 캐나다 훈장을 받은 한스 블루멘펠드 박사(Dr. Hans Blumenfeld)는 기근 시기에 우끄라이나 마카예프카(Makayevka)에서 건축가로 일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기근으로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에게는 그들의 숫자를 추정할 방법은 없다.... 아마도 1933년의 대부분의 죽음은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이질 등의 전염병 때문이었다. 마카예프카에서 수인성 질병은 흔한 것이었다: 나는 티푸스 열병에 걸려 간신히 살아남았다.’


기근 동안 1500만 명의 말도 안 되는 수치 ― 1932년 2,500만 명의 우끄라이나인구 중 60% ― 를 제시했던 인물인 호슬리 그랜트(Horsley Grant)는 그와 동시에 이렇게 적었다. ‘발진티푸스 전염병의 절정은 기근과 일치했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죽음을 야기하는 더 큰 원인이 되었는지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 번째 기근의 원인은, 농업의 재편성 과정과, 경제적 및 사회적 관계에서의 근본적인 대격변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무질서였다: 빈곤한 농민들과 일부 관리들의 경험부족, 즉흥적이고 혼란스러운 지시들, 준비부족, 좌익 급진주의.(http://www.lodong.org/board/board.html?mtype=view&page=3&bid=3&num=290&seq=1436&replynum=290&shownum=288&key=&searchword=&fbclid=IwAR1eYeERWLGlxeb7cLnMtGmlRnU892yps60an9m28vpKW-hV-TpdtzAZuGU%7C)


따라서 1932년에서 1933년에 일어난 기근은 소련이나 스탈린의 의도적인 학살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복합적인 이유들이 작용했으며,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우크라이나측 쿨락이 의도적으로 사보타주 및 테러 행위를 광범위하게 한 탓이 크다. 기근이 일어나자,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스탈린 정부는 자신들 나름의 구제정책을 펼쳤으며,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의 숫자는 나치와 우크라이나 나치 협력자들에 의해 부풀려졌다. 소련 연방 해체 이후 소위 분리된 우크라이나에서는 자칭 반데라주의자들이 이러한 홀로도모르 신화 및 사기극을 퍼뜨렸으며, 현재까지도 우크라이나에서는 이것이 마치 소련과 스탈린 그리고 러시아에 의한 의도적인 우크라이나인 학살로 포장하고 있는 중이며, 캐나다를 포함한 서방 국가들도 홀로도모르가 학살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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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책을 소개하는 기사가 국내 언론에 없다는 사실...!
 

다시 돌아보는 러우전쟁

2022년이 끝나고 2023년이 됐다. 그러나 2월에 시작된 전쟁은 지금도 끝나질 않고 있다. 애초에 이번 전쟁의 가장 큰 이유는 2013년 유로마이단 폭동으로 미국이 포로셴코 네오나치 정부를 세운 것과 NATO의 동진정책에 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고문단을 파견했고, 아조프 민병대와 같은 네오나치 군대를 훈련시켰으며, 이들을 정규군화했다.

네오나치 조직을 정규군화하고, 기존에 군사력이 약했던 우크라이나에게 온갖 최신식 무기와 국제법적으로 금지된 무기들을 대폭 지원해주었으며, 우크라이나 정부는 복지 예산을 탕감해가며 군사력을 키웠다. 2019년에 탄생한 젤렌스키 정부는 잠시나마 통합적인 지도자인 것 처럼 포장되었으나, 현실은 정 반대였다.

젤렌스키도 마찬가지로 돈바스에 대한 탄압과 학살을 자행했으며, NATO의 동진정책에 협력하여 러시아를 자극하는 짓거리를 벌여왔다. 그 결과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국내의 언론들은 경향ㆍ오마이ㆍ한겨레ㆍ조선일보ㆍ동아일보ㆍ중앙일보 할 것 없이 미국 CNN이나 영국 BBC가 쓰는 언론을 완전 그대로 복사하는 수준의 찌라시 내용들을 살포했고, 서방의 세뇌선동은 먹혀들어갔다.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에 대한 비정상적인 동정여론이 급증했고, 언론에는 아조프 대대가 찍은 영상들이 무비판적으로 보도되며 자유투사 운운하기 바빴다. 온갖 가짜뉴스들이 판을 쳤으며, 이에 대한 정정보도는 국내에서 눈씻고 찾아보기 힘든 수준이다.

예를들어 마리우폴 공습에서 임산부가 테러를 당했다느니 부차학살 당시 강간당한 여성의 시신이 있다느니 등 얘기들이 이후 가짜임이 밝혀저도 국내 언론은 정정보도 따위 1도 안했다.

나는 이번 전쟁을 겪으며 언론의 자유ㆍ표현의 자유ㆍ세계 언론자유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서방의 언론 검열 수준이 이번 전쟁을 통해 최고조에 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일각에서는 위성사진이 있기에 우크라이나 측이 사건을 조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말이 안되는 소리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 침공 당시 신무기가 있다는 공장을 위성사진으로 공개했는데, 이것이 조작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조작은 충분히 가능하다.

또한 이번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의 사이버전의 효과도 가히 파급적이다. 현재 서방과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측 얘기는 본론적으로 원천차단하면서,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 입맛에 맞는 얘기들을 무한히 찍어내도록 유도하고 있다. 하이브리드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와 서방의 전술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전쟁 초기 언론이 우크라이나를 선전하는 동안, 러시아는 동부 남쪽을 차츰 점령했고, 결과적으로 합병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지만 우크라이나가 이 곳을 죄다 회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애초에 그걸 되찾을 힘이 우크라이나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나 이 전쟁이 얼마나 장기화 될지 모르겠다. 우크라이나-대만-한반도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이제는 서방 일변도의 세계관이 아닌, 우리들 중심적으로 외교를 보는 사고를 할 때이다. 그래야 생존과 공존 평화가 있을 것이다.

<참고로 나는 러우전쟁 관련 자료는 외신 자료도 보고 한신대 이해영 교수나 한설 장군의 페북도 자주 보지만, 국내 유튜브로는 러시아 학당과 박상후의 문명개화를 주로 본다. 특히나 박상후의 경우 예전에는 싫어했으나, 러우전쟁에 대해 제법 공정한 보도를 하고 있으며 우크라 네오나치들의 홀로도모르 학살 운운에 반론을 잘 제시해서 생각이 좀 바꼈다. 러시아 학당의 경우 러시아어를 원어민급으로 하고 관련 정세분석도 좋아서 자주 애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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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일기 - 우크라이나의 눈물
올가 그레벤니크 지음, 정소은 옮김 / 이야기장수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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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를 옹호할 이유를 못 느끼겠습니다. 네오나치 아조프가 학살한 것에 대해 눈을 감고 있다가, 전쟁 터지고 나서 혐러주의를 퍼뜨리는게 옳은 일인가요? 전 이 책 논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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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7-16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군더나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이 오데사에서 노동자들을 집단학살하고,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이 노동법을 개악시켜(노동조합 권리 축소 및 박탈 + 노동자의 임금 지불 및 해고 여부를 고용주가 마음대로 결정) 노동자들을 비국민 취급하는 것을 보면...!
 
호찌민 시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호찌민 지음, 안경환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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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의 시를 읽으며

대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구경하던 중, 안경환이 번역한 <호찌민 시집>을 찾았다. 몇년 전 같은 저자가 번역한 <옥중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옥중일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2년 8월부터 1943년 9월까지 호치민이 중국 감옥에서 옥중생활을 하며, 4행시 형태로 남긴 문학작품이다.

감옥생활을 하며, 호치민이 겪은 열악한 감옥사정과 대우 그리고 부당함 등이 시안에 들어가 있다. 시를 읽으며, 일제시대 당시 재판받고 복역하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이나, 해방 이후 국가보안법으로 장기수로써 인생을 감옥에서 보낸 억울한이들이 유난히 생각나게 한달까. <옥중일기>의 한 구절을 보자.

˝4개월간 배불리 못먹고,
4개월간 잠 한 번 제대로 못자고,
4개월간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4개월간 씻지도 못했기 때문이라.˝

이 4행시에는 감옥생활의 열악함이 그대로 담겨있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활동을 했던 분들을 만나서 옥살이 얘기를 들어보면, 이러한 경험을 들을 수 있다. 나 또한 그분들을 만나본적이 있으며,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알고 있다. 호치민의 <옥중일기>는 혁명투사의 고된 옥살이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번에 읽은 책은 같은 저자가 번역한 <호찌민 시집>이다. 안경환씨가 2018년에 번역한 <호찌민 시집>은 <옥중일기>에다가 이후 호치민이 쓴 시와, 글, 편지, 그리고 연설을 추가했다.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국부인 호치민이 애국애족 정신이 담겨 있으며, 자유와 독립을 향한 그의 의지가 시 안에 잘 담겨있다.

한국에서 호치민하면 20세기 공산권 지도자인 스탈린이나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 등과 비교했을때 제법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몇안되는 인물일 것이다. 한국과 베트남의 외교관계에 따른 그 영향이 있는 것도 한몫할 것이다. 물론 호치민에 대한 해외에서의 평가도 다른 공산권 지도자들보다 좋은 편이다. 아무튼 호치민은 세계가 인정하는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다.

그러나 한국에서 호치민에 대한 인식은 베트남의 정치인 정도에서 못 벗어났다고 본다. 미국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한 지도자 정도에서 평가가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호치민에 대해서 깊게 공부해보면, 그가 한 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조선의 독립운동가들 못지않게 투쟁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베트남 혁명을 성공시킨 인물이다. 미국에 맞서 승리하기 이전에, 일본과 프랑스 제국주의를 무찌른 인물이며, 그것도 혁명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호치민을 포함한 지도부는 이미 1945년에 일본을 무찔렀고, 1954년에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프랑스를 무찔렀다. 그런 점에서 베트남 전쟁은 참전용사 출신인 미 정치인 콜린 파월도 인정하듯이, 미국에 명분이 너무나도 없는 전쟁이었다.

안경환씨가 번역한 <호찌민 시집> 내용 중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관련 시와 베트남 전쟁 당시 새해 연설들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베트남 사람들이 그를 아직도 존경하는 데에는 그가 진심으로 베트남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호치민은 자유와 독립의 소중함을 알았고, 진심으로 인민을 사랑했던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그의 모습이 연기된 것이라 말하지만. 연기라고 하기엔 그가 실천적으로 보인 모습에서 근거가 부족하다. 따라서 나는 베트남 인민에 대한 호치민의 사랑은 거짓됨이 없다고 보며, 현재 베트남 사람들이 보이는 호치민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안경환씨가 번역한 <호찌민 시집>은 인간 호치민의 인간적인 감정과 인민에 대한 사랑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호치민의 말과 행동에는 적어도 진심이 담겨있다. 그런 점에서 <호찌민 시집>은 인간 호치민의 진심을 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문학작품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호치민이 서거하기 전, 발표했던 1969년 신년 연설을 인용하겠다.

˝작년의 승리는 찬란했으니,
금년에도 갈수록 전선에서 분명히 대승을 거두리라.
독립을 위해, 자유를 위해,
미국을 깨끗이 몰아내자, 꼭두각시를 쳐부수자.
진군하자!
전사, 동포들이여!
남북이 함께 모여, 새해마다 더 즐겁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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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우크라 헤르손철수 평가>

논자마다 그 숫자는 조금씩 다르지만 약 3만 러군이 2-3일사이에 드네프르강 서안에서 동안으로 깜쪽같이 이동했다. 장비도 다들고 말이다. 알려지기로 고철이 된 헬기 한 대와 파괴된 T90전차 한 대만 남겼다 한다. 실로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철군하면서 강의 동서를 연결하던 교량 2개도 마치 가위로 오려 내듯 파괴해 마지막 마무리도 왼벽했다.

작전상 철수와 패전후 후퇴는 추격이 있는 지 여부가 결정적 차이가 아닐 까 싶다. 왜냐하면 대개 전투에서 최대의 병력 손실은 등을 보인 적에 대한 추격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추격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군사적 관점이다. 예상했던 그대로 우크와 미는 대대적인 선전전을 개시했다. 이를 역사적 승리라고 했다. 아마 제2의 부차 연출도 예상된다. 프로파만 가지고 전쟁이 결정된다면 나는 우크가 이긴다고 본다. 우크의 네오나치는 아주 숙련된 프로파 기술자들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헤르손이 어딘지도 모르는 한국언론도 따라 붙는다. 그렇다. 이게 한국언론의 사명이다.

종합적인 평가는 여전히 다른 문제다. 전쟁에서 정치적 관점과 군사적 괸점은 무엇이 우선되는가? 참으로 난제 중 난제다. 이번 헤르손철수는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 군사적 합리성을 선택한 것이다. 푸틴도 당연히 동의했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 이번 철수의 정치적 부담이 이번 전쟁의 정치적 목표달성에 그 어떤 치명적인 장애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동의했을 거로 본다.

전쟁은 자신의 문법Grammar은 가져도,자신의 논리Logik를 갖는 것은 아니다.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말이다. 그렇다. 이번 철수는 전쟁의 ˝문법˝에 충실한 결정이었다. 그렇다면 그 ˝논리˝는? 그 논리는 전쟁의 목표에서 나온다. 우크라 중립, 돈바스, 무장해제, 나치제거... 동남4주의 러연방가입으로 돈바스문제의 정치적 해결은 가닥은 잡았지만 아직 군사적으론 아니다. 나머지도 여전히 아니다. 갈 길이 한참 멀다. 평화는 아직 요원하다.

미국군사평론가 빅서지big serge의 평가인데 읽어 볼 만하다. 헤르손철수에 대한 네개 가설을 따져 본다. 1.러 패배설 2.러의 함정설 3.미러 밀약설 4.러 작전상 선택설 이 네가지다.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pfbid0KBugo6e9ARqgSNpN2LLZgACzAo8JPSR6ewWhNyeeqpH1WBT7TVnwUnTECdTFJDuyl&id=100080442895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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