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 내전은 20세기 역사에 있어 최악의 내전이자국제분쟁이었다서로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와 혐오민간인 학살인종청소부녀자들과 아이들에 대한 인권 유린 등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나치들이 저질렀던 만행들이 이 내전이 지속되는 와중에 일어났다유고슬라비아의 영웅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사망한 이후 국가가 사분오열된 유고슬라비아는 종족분쟁과 소수민족 대립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사태였다.

(유고슬라비아의 해체 과정)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과 인종청소는 참으로 추악하고도 잔인했다그러나 이 추악하고 잔혹한 내전에 이른바 NATO군의 이름으로 군대와 대규모의 항공력을 투입했던 나라가 있다그 나라가 바로 미국이었다이 글을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그것은 이 추악한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생각보다 안 알려졌다는 점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이라크 전쟁 이전에 미국이 개입했던 또 다른 전쟁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도데체 미국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어떤 일을 했는가따라서 이 글에서 필자는 유고슬라비아 내전 그 자체 보단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미군의 개입을 중심으로 보고자 한다.

(1990년대 당시 한국 언론에도 보도되었던 유고슬라비아의 상황)

 

지금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 유고슬라비아는 현재의 세르비아크로아티아마케도니아몬테네그로슬로베니아보스니아를 합친 6개의 연방으로 이루어진 국가였다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았던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공산주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가 4년간의 파르티잔(빨치산투쟁을 전개했었다동쪽에서 진격하던 소련군과 연합하여 유고슬라비아를 해방시킨 티토는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가 되었다냉전 초기 스탈린과 대립하던 티토는 동유럽 국가 중에 유일하게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가 되었고이른바 자주노선을 택하면서 미국과 소련 그리고 제3세계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했었다심지어 사회주의권에서 해외여행의 자율화를 최초로 성공시킨 나라였다.

 

그러나 1980년 티토가 사망한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점차 힘을 잃게 되었고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연방이 해체가 되었고티토 사후 표출된 민족갈등 그리고 종족 갈등은 내전으로 이어졌다물론 이것이 내전으로 이어지고 연방국가로 나뉘게 된 것은 유고슬라비아의 인구 구성이 중국의 한족(중국 인구의 94% 이상)이나 베트남의 비엣족(킨족베트남 인구의 87%이상)과는 달리 가장 많은 종족이 40% 안팎이었던 점도 많이 작용했다.(이는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소수민족과 다수종족의 인구 비율과 비슷하다.) 


1992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이던 보스니아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3년 동안 지속되었던 이 보스니아 내전에서 세르비아측은 차마 입으로 표현하기도 힘든 학살과 범죄 그리고 인종청소를 자행했다당시 미국은 평화유지군(사실상 NATO)의 일원으로 대략 2만 명이 넘는 병력을 파병했다이것은 평화유지군으로 들어갔던 미지상군을 뜻한다. 1993년 4월 미국과 NATO 소속의 항공기들은 이른바 작전명 디나이플라이트(Deny Flight)로 알려지게 되는 작전에서 보스니아에 비행금지구역을 강제로 적용했다그리고 그해 8월엔 사라예보(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된 그 도시가 맞다.)를 포위한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들을 응징하기 위해 공중폭격을 실시하겠다는 위협을 가했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평화 유지군으로 파견된 미군)

 

1994년 4월 미군 항공기들은 세르비아측의 목표물들에 산발적인 항공기 타격을 가했지만큰 효과를 보진 못했다. 1995년 8월 28일 세르비아측에서 사라예보 시장에 박격포 공격을 가하자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이른바 딜리버럿포스 작전(Operation Deliberate Force)을 나섰다이 작전은 17일간 전개되었다. 400대 이상의 나토군 항공기가 항시 대기했고, 5개국 18개 비행장과 최대 3척의 항공모함에서 3,500회 이상의 비행이 이루어졌으며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NATO(사실상 미군이라 봐야함항공기는 1,026발의 폭탄과 미사일을 48개의 표적에 발사했다.

(코소보 내전 당시 투입된 미군)


(F-15 전투기,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군에게 맹폭을 가했던 항공기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보스니아에 개입하면서 RQ-1 프레데테 무인 항공기(UAV)도 실전에 투입했다알바니아의 자데르에 있는 부대가 보스니아로 날아가는 프레데테를 조종했고총 15회나 출격시켰다물론 이것이 효과가 크기 않았기에 미국은 공습을 지속하는 쪽으로 나아갔다당시 미군의 교전 방식은 단순했다세르비아측을 섬멸하기 위해 들어간 미군은 세르비아측 저격수가 사격을 가하면 바로 공군기를 출동시켜 저격수가 있는 건물 자체를 무너뜨려 버렸다특히나 F-16혹은 F-18 공군기가 세르비아군 거점에다 무차별 맹폭을 가했었다아무튼 내전은 전황이 불리해진 세르비아가 협상 테이블로 나오면서 종결되었다.

(B-2B 스텔스 폭격기, 한 대당 약 2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자랑하는 이 스텔스기는 코소보 내전 당시 미국이 투입했던 최강의 전력이었다. 심지어 이 기종은 유럽 인근이 아닌 미국 본토에서 출격하여 유고를 폭격하고 다시 미국 본토로 복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인 1998내전이 다시 발발했다그 전쟁이 바로 코소보 내전이었다코소보 지역에서 내전이 발발하자 미국은 1999년 3월 24일부터 6월 10일까지 작전을 전개했다이 작전은 78일간 전개되었고총 829대의 항공기가 동원되었으며, 3만 8,000회 이상의 비행을 실시했었다코소보 내전 동안 미군을 위시한 NATO군은 세르비아의 목표물에 2만 3,600발 이상의 폭탄을 사용했다미군의 첫 공격에만 미국 수상함 4척과 미국 잠수함 2영국 잠수함 1척이 나섰고, 214대의 미국 항공기와 130대의 연합군 항공기(밀리터리 전문가 이세환에 따르면 총 400대의 NATO 항공기)가 100여 발의 레이저 유도 폭탄을 투하했었다.

 

당시 미군이 투입한 항공기 종류는 다음과 같다전투기 F-16, 전투기 F-15, F-117, B-52, B-1B 그리고 B-2A였다특히나 스텔스 폭격기인 B-2A의 경우 폭격 작전에서 미국 본토에 있는 공군기지에서 발진했다중간에 급유기로부터 기름을 지원받으며 유고슬라비아까지 가서 폭격임무를 마친 뒤 미국 본토로 귀국하는 기록을 보여주었다말 그대로 미국은 코소보 내전에서 매우 비싼 항공기를 투입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코소보 내전도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던 밀로셰비치가 협상 테이블에 나오면서 끝이났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약 3년간 진행된 보스니아 내전과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진행된 코소보 내전에서 벌어진 인종청소와 전쟁범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벌어진 전쟁보다 추악하고도 잔인했다물론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나 신유고연방의 밀로셰비치 등이 저지른 악행들은 차마 입으로 표현하기 힘든 전쟁범죄였다그러나 미국의 민중사학자 하워드 진이 주장하듯이인종청소를 자행한 이들과는 별개로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미국이 진행한 폭격 또한 무수히 많은 민간인 사망자를 만들었다.

(코소보 내전 당시 미군의 맹폭격을 받은 베오그라드)

 

이러한 점에서 미국의 공중폭격 또한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군 폭격처럼 진보적인 지식인들이나 사학자들에 의해 비판받고 있다또한 코소보 내전 당시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은 미국을 강력히 비판했었다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폭격에 대해 러시아인의 96%가 반인륜 범죄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 조사에서는 81%거 미국의 정책을 반러시아적이라고 응답했을 정도였다대부분의 응답자들은 미국이 러시아 국경지역에 역으로 철의 장막을” 치고 있다고 인식하기도 했다따라서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벌어진 참상과 더불어 NATO군 형태로 개입하여 마찬가지로 무수히 많은 인명피해를 초래한 미국 또한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참고문헌

 

궁극의 군대토머스 G. 맨켄김수빈(), 미지북스, 2018

 

미국 민중사 II하워드 진유강은(), 이후, 2008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이광일(역)들녘, 2015

 

좌파 세계사닐 포크너이윤정(), 엑스오북스, 2016

 

하워드 진아거인물과사상사, 2020

 

유고 내전 총합본샤를TV, 2020년 7월 21일자 유튜브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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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립 쇼트의 저작 마오쩌둥에 나오는 내용을 퍼온 겁니다. 읽던 도중 흥미롭게 읽어서 올려봅니다.)

 

“1968820일 밤, 소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해 프라하의 봄을 압살하고 체코의 개혁파 공산 정부를 무너뜨렸다.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어디서든 사회주의 체제가 위협당할 때는 소비에트 블록의 모든 국가들에게 이를 방어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이라고 불렸는데 공식적으로 유럽 지역에 한정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오가 보기에 이것은 소련이 중국을 침공할 수 있는 근거였다. 이듬해 봄, 마오는 선수를 치기로 마음먹었다.

 

지난 수년 동안 중국과 소련 국경선 부근에서 우발적으로 작은 충돌이 계속 일어났다. 하지만 196932일에 발생한 무력 충돌은 사전에 철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300명의 중국 병사가 흰색 위장복을 입고 어둠을 틈타 얼어붙은 우수리강을 건너 전바오섬에 도착했다. 이 섬의 러시아 이름은 다민스키섬이었다. 이 섬은 소련의 시베리아 지역 주요 도시인 하바롭스크에서 남쪽으로 240km 지점에 있었으며, 소련과 중국 간에 소유권 분쟁이 있었다. 중국 병사들은 각자 눈 속에 개인 참호를 파고 들어가 매복 공격을 준비했다.

 

다음 날 아침 중국은 이 섬을 향해 약간의 병사를 이동시켰다. 소련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였다. 중국군의 이동을 확인한 소련군은 정찰대를 보내 중국 병사들의 이동을 저지하게 했고, 그러자 잠복해 있던 중국 병사들이 일제히 발포했다. 소련은 보충 부대를 투입했고 중국 병사들은 결국 퇴각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 측은 죽거나 부상당한 병력이 30명이 넘었다. 같은 장소에서 2주 뒤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이번에는 규모가 더 컸고 소련은 60, 중국은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세 번째 충돌은 317일에 발생했는데, 이 충돌은 당시에는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다. 이 충돌에서 소련은 전차와 대포까지 동원했다.

 

마오의 계획은 놀랄 만큼 단순했다. 만일 소련이 중국의 주적이 된다면, “나의 적은 적은 친구라는 원칙에 따라 미국이 중국의 잠재적 동맹이 될 것이다. 비록 현재 미국이 중국의 또 다른 동맹인 베트남과 중국 남부 국경선 근처에서 잔인하고 파괴적인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지만, 어쨌든 마오의 계획은 그러했다.

 

전바오섬 충돌은 새로 당선된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에게 중국의 외교 정책 우선순위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납득시키려는 중국의 장기적 노력의 첫걸음이었다. 마오의 의도를 몰랐던 소련은 군사적 압력을 강화하여 중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오히려 마오가 노리는 바대로 소련과 중국의 충돌이 더 격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해 봄과 여름에 걸쳐 중소 국경 분쟁은 몇 배로 크게 증가했다. 모스크바는 바르샤바조약군의 개입할 수 있으며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강력하게 암시했다(이는 1958년 타이완 해협 사건 때 미국이 핵무기 공격을 내세워 위협했던 것과 똑같은 행동이었다). 소련 정부는 몽골 지역에서 대규모로 군비 증강을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국방 예산을 30% 늘렸다. 8월에는 민간 방위 계획이 베이징과 다른 주요 도시에서 시작되었고 수백만 명의 주민이 동원되어 방공호를 팠다. 핵 공격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치적 의도를 충분히 드러낸 마오는 그리 내키지 않는다는 태도를 적절히 보인 다음, 9월에 저우언라이와 소련 총리 알렉세이 코시긴(Aleksei Kosygin)이 회담을 여는 데 동의했다. 이 회담은 마치 과거 중국이 오랑캐들을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시절을 상기시키듯, 베이징 공항에서 진행되었다. 두 사람은 국경선을 현 상태로 유지하기로 하고, 국경 협상을 속개하며 더는 군사충돌이 없도록 하자는 데 합의했다. 이리하여 위기가 종식되었다.”

 

출처 : 마오쩌둥 2 p.418~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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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베트남 전쟁이 공산주의 세력의 통일로 끝난 이후 당연히 베트남은 전후처리 과정을 거쳤다. 남베트남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난 이후 통일을 이룬 북베트남 정부는 과거 남베트남에 협력했던 이들에 대한 재교육 및 청산 작업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고, 학살당했다는 주장들이 과거 대한민국에서 정훈교육이나 반공교육 차원에서 많이 강조되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이러한 인권도 없고, 자유도 없다는 식으로 선전하는 차원에서 이용된 것이다. 물론 그 시기 대한민국 사회가 인식하는 현실 사회주의권은 말 그대로 1978년에 나온 똘이장군 수준의 상상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걸러야할 점이 있지만 말이다.

(보트피플들, 베트남 전쟁 이후 남베트남에 협력하던 이들은 이렇게 도망쳤다. 마치 쿠바혁명 이후 카스트로를 피해서 미국으로 망명한 공화당 지지자들 처럼 말이다.)

 

이러한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베트남 전쟁 이후 전후처리 과정에서 수백만 즉 200만 혹은 그 이상으로 죽었다는 일종의 유언비어가 퍼졌고, 과거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으로 참전하거나 남베트남에서 반독재운동 혹은 학생운동을 했던 이들이 토사구팽 당했다는 식의 주장들이 많이 퍼졌었다. 이러한 주장들은 정말 사실인 것일까?

 

우선 수백만이 학살당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이러한 루머의 출처의 근원을 찾는 건 많이 힘든 일이지만, 확실한건 현재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루머가 일부 티비 조선을 포함한 곳에서 각본대로 읽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는 것처럼 베트남 전쟁 이후 통일 베트남의 재교육 수용소에 대한 얘기 또한 상당히 과장되고 부풀려져서 알려졌다. 대표적으로 소련 시절 굴라그에 대한 얘기가 그러하다. 냉전시기 소련의 굴라그에 대해 엄청난 루머를 퍼뜨렸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최소 10배 이상의 수감자 수치를 과장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1980년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문서고가 개방이 되면서 그것이 매우 과장되었음이 드러났다.

(1918년부터 1953년까지 소련에서 선고된 사형선고와 감옥에 수감된 정치범의 숫자. 출처는 정정진 교수의 저서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p.200쪽이다.)

 

솔제니친이 쓴 <수용소 군도>라는 책에 따르면 수천 만 명의 죄수가 수감되었던 것처럼, 주장을 하지만 실제로 수감되었던 이의 숫자는 그것보다 한참 아래였다. 또한 영국의 반공주의 성향의 학자 로버트 콘퀘스트는 1937~1939년 사이 900만 명의 정치범이 감금되었고 이중 300만 명이 죽었다고 주장했었다. 물론 콘퀘스트의 자료에 따르면 그 이후에 거친 수감자는 그러나 더 많은 셈이다. 소련의 젬스코프 같은 학자가 문서고를 토대로 연구를 진행하면서 그 당시 반()혁명활동 판결을 받은 사람이나 살인, 강간 등의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이가 보내지는 노동수용소는 53, 규율이 느슨했던 노동이주지는 425개가 있었고, 여기에 토지가 몰수된 부농이 보내진 개방 특별지역이 있었다. 이곳 전부를 합해서 약 200만 명이 수용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물론 이 굴라그라는 곳이 단순히 감옥이 아닌 인근마을과 굴라그 수용소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말이다.

 

더 와 닿지 않는다면, 이걸 예시로 들어볼 수도 있다. 마리오 소사는 "1996년 역사상 가장 많은 550만 명이 미국의 형벌체계 하에 있다"1997AP 통신의 기사를 인용하며 전쟁 직전의 소련과 평화 시기의 미국을 비교한다. 이 숫자는 미국 성인 인구의 2.8%에 상당하는 규모다. 형벌체계 하에 있다는 것은 교도소 수감자와는 다소 다른 의미다. 여기에는 보호관찰까지 포함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2007년 말 기준 미국 법무부 통계는 730만 명이 교도소 수감, 보호관찰 등의 형태로 교정기관의 관리대상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2007년 말 기준 미국 성인의 3.2%가 수감되어 있거나 지역 공권력의 감시 하에 있다.

 

자세한 자료는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45981?no=245981#0DKU

 

지금까지 소련에 존재했던 굴라그에 대한 자료를 길게 이야기 했다. 소련의 사례를 예시로 든 이유는 일각에서 공산주의 정권의 학살 혹은 인권유린으로 알려진 사건들을 지나치게 부풀리거나 과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 이후 통일 베트남 정권이 단행했던 재교육 수용소 같은 경우에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많이 부풀려지거나 과장되는 이유는 확실하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상당한 옹호력을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서 폴포트의 학살을 다뤘던 영화 킬링필드가 강조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재교육 과정을 거치고 있는 사람들)

 

베트남 전쟁 이후 재교육 수용소에 대한 내용은 생각보다 자세하게 연구된 주제는 아닌 것 같다. 미국의 영화 혹은 다큐멘터리 감독은 켄 번즈(Ken Burns)2017년 거의 20시간 가까이나 되는 러닝타임의 베트남 전쟁 10부작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거의 몇 년 동안 모은 많은 이들의 인터뷰와 자료를 토대로 제작되었고, 북베트남군, 남베트남군, 미군, 반전운동가 그 외의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만들어졌기에 상당히 신빙성 있는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화인 10화에서는 잠시나마 재교육 수용소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결국 많은 이가 두려워하던 피의 대학살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남베트남의 시골에서는 수백 명 혹은 수천 명의 사람이 개인적인 혹은 정치적인 보복차원에서 살해되기도 했습니다. 응우옌반티에우 정권에 가담했던 장군부터 평범한 직원들까지 모두 재교육을 받았습니다. 남베트남군에 입대했던 사람은 3일간만 교육받는다고 했습니다. 장교들은 1달만 출석하라고 했죠.” (PBS 베트남 전쟁 10화중에)

 

남베트남 군장교로 참전했던 한 사람의 증언이 이어진다. 다큐멘터리에서 그가 한 증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어떤 이들은 짧은 기간 동안 캠핑을 간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저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7년 반 동안이나 재교육 캠프에 갇혔습니다. 마지막으로 풀려난 100명 중 하나였죠.” (PBS 베트남 전쟁 10화중에)

 

베트남 전쟁 이후 재교육 캠프에 수감된 이들은 짧게는 3일에서 1주일 혹은 1달 길게는 1년에서 3년 아주 길게는 10년 혹은 15년을 갇혔던 이들도 있었다. 최병욱 교수의 <베트남 근현대사>라는 책에는 재교육 수용소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남베트남 군인 전직 관료 등 잠재적 적대 세력으로 간주되던 100만 명 중 90%나 되는 사람들을 새 조국 건설에 동참시킨 아량은 높이 평가되나, 나머지 10만 명(재교육 대상자)에의 가혹한 처사는 통일 베트남 전권을 두고두고 괴롭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베트남 근현대사(2016년 개정판) p.173쪽을 참고함)

 

캐나다 출신 종군기자로서 호치민의 장례식과 닉슨의 크리스마스 폭격 등을 직접 목격했던 마이클 매클리어는 1980년대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원래는 다큐멘터리로 만들었지만, 1980년대 초에 책으로 출간 됐다. 마이클 매클리어는 자신의 책 저자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재교육 수용소에 대해 쓰고 있다.

 

이 서글픈 전쟁의 성격과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전쟁의 원인은 여전히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종전 후 남아 있던 미국의 전쟁 물자는 도시와 공장 건설에 사용되었고, 구정권은 철저히 숙청되었다. 그러나 피를 흘렸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150만 명이 노력봉사장에 배치되었으며, 20만 명에 이르는 고위 공무원과 중견 장교들은 재교육장(Re-education Camp)’으로 보내졌다. 즈엉반민(사이공 함락당시 항복문서에 서명한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615 저자 후기)

 

2002년 당시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를 집필한 베트남사 전공 교수인 유인선 교수는 2018년에 책 개정판을 내놓았다. 개정판에선 1986년의 도이모이 정책까지의 내용을 보다 확장했는데, 책에서 그는 재교육 수용소에 대해 언급했다.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과거 사이공 정부의 공무원·군인·사업가 등 최소한 수만 명은 각지에 설치된 재교육수용소에 억류되어 지위에 따라 몇 주일 내지 몇 년을 보내야 했다. 남부의 통합 후 10년이 경과한 1985년에도 수용소의 억류자 수는 수천 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트남의 역사(2018년 개정판) p.427을 참고함)

 

일단 이 책에서 나온 재교육 수용소의 수감자에 대한 수치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하게 판단해볼 수 있는 것은 일각에서 얘기하는 수십만이 죽었다거나 수백만이 재교육 수용소에서 죽었다는 루머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일부 억울한 사례가 없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몇몇 루머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많다. 거기다 당시 베트남의 인구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986년 도이머이를 하기 이전까지 베트남의 인구는 남북을 아울러 4,000만 명 안팎이었다. 그런데 통일 이후 공산당 정부가 수백만 명을 처형한 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손해 보는 일이고, 또한 그럴만한 행정체계가 갖추어진 것도 아니었다.

(베트남의 주석이었던 쯔엉던상, 그는 남베트남에서 학생운동을 했고 베트콩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베트콩이나 학생운동이 대량으로 토사구팽당했다는 루머가 있다. 물론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이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다. 물론 일부 처형된 사례가 있다고는 한다. 그러나 학생운동가들이나 반정부 종교인들 그리고 베트콩 출신들이 무조건적으로 토사구팽당한 것은 아니다. 2016년 당시 베트남 주석이었던 쯔엉던상의 경우 남베트남에서 학생운동하다가 베트콩이 된 케이스였고, 당시 베트콩의 지도급 위치에 있던 응우옌흐윽토나 호앙반타이 등의 인물들도 공산당 내에서 당적과 지휘를 계속 유지했었다. 이 루머에 대해 정리해보자면 극히 일부의 사례를 확대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베트남 재교육 수용소와 수백만 처형에 대한 루머를 다소 길게 정리했다. 이 글의 핵심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남베트남 패망 후 수백만이 처형당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2. 남베트남 패망 이후 베트콩이나 학생운동가들이 토사구팽 당했다는 것 역시 근거가 없다.

3. 일각에 알려진 재교육 수용소에 대한 루머는 한국의 탈북자들이 티비조선에서 퍼뜨린 것처럼 말 그대로 루머에 가까운 것들이 많다.

4. 남베트남 패망 이후 대규모의 학살을 공산당이 주도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일부 개인적인 보복에서 일어난 사례들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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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은 참으로 논란이 많은 인물입니다. 중국 사회내에서도 ''''에 대한 평가가 존재할 정도죠. 1893년에 태어나 1976년에 세상을 떠난 '위대한 조타수'는 많은 것을 파괴하기도 했지만, 또 많은 것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1958년에 진행한 대약진 운동에서의 아사자는 최소 2,000만 이상이었고, 1960년대의 문화대혁명은 최소 150만 가까이 되는 희생자가 나왔죠. 특히 문화대혁명의 경우 마오 개인 권력욕에의한 광기였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당시 사회주의 국가였던 중국은 한편으로 제3세계 지도자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기도 했고,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의 반전운동 속에서 서구좌파들의 우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마오쩌둥은 베트남의 호치민이나 쿠바의 체게바라와 더불어 68혁명의 우상이기도 했죠. 따라서 마오쩌둥이 당시 좌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자본주의 보다 더 나은 세상의 꿈을 품게 했던 것도 사실이라 봅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과오들도 분명히 존재했던 사실입니다. 대약진 운동은 중국 공산당 관료들의 과장 보도와 잘못된 농업 정책 등이 한 몫 한것도 있지만, 정책 자체를 오류있게 잡은 마오쩌둥의 책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스탈린의 우크라이나 대기근과 마찬가지로 학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근은 처참했고 1960년 이후에 마오쩌둥이 권좌에서 잠시 물러나야 하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 처참한 기근은 많게는 4,500만 명이 희생당했다고 알려졌지만, 최근 들어 이것이 다소 과장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죠.


 

마오쩌둥의 가장 결정적인 잘못은 문화대혁명에 있었습니다. 물론 사회주의 국가 중국의 현실 상황에서 소위 주자파라는 세력과 투쟁해야 하는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 지나친 개인 보복이나 문화재 파괴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억울한 희생자를 냈죠. 그리고 이것은 마오 개인의 권력욕에서 이어진 점이 강했기에 변호하기 힘든 점도 큽니다.

 

마오쩌둥이 저지른 과오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라는 인물이 단순히 폭력적이고, 폄하되어야만 하는 인물일까요? 저는 이 부분에 대해 매우 회의적입니다. 또한 그는 냉전시기 서구좌파들의 우상이었고, 서구사회가 보다 진보적인 길로 갈 수 있는 희망을 어떤면에선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중국 혁명을 성공시켰고, 국민당을 축출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탄생시켰습니다. 과거 근현대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로 서구 열강에게 뜯기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공을 받아 갈기갈기 찢기는 형편이었습니다.

 

마오쩌둥이 만든 중국은 비록 정권기 과오가 있더라도 더 이상 열강의 침공을 받지 않고, 서구 자본에 이용당하지 않는 나라가 되었죠. 마오쩌둥 평전의 저자 알렉산더 판초프가 말했듯이 그는 사회관계를 변혁시킨 혁명가일 뿐만 아니라 쑨중산(孫文)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 모든 나라가 중국인을 존중하게 만든 위대한 반제국주의 혁명을 실현시킨 민족 영웅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과오가 적지않은 인물임에도 중국인들이 결코 위대한 조타수를 잊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이죠.

 

중국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관심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중국의 중화주의적인 모습에 반대하기도 하고, 고대 중국의 고전들이 많이 읽히고 강조되기도 하지만, 정작 현대 중국을 이해하고자 하는 일반인들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특히나 근현대 중국의 상황을 모르는 이들은 참으로 많죠.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마오쩌둥은 중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한국하고는 한국전쟁에서의 관계도 결코 적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고요. 따라서 현대 중국을 알고 이해하기 위해선 마오쩌둥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도 국내에는 제법 큼지막한 마오 전기들이 있는 편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제가 읽었던 마오쩌둥 전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사진에 나온 책들은 에드가 스노가 쓴 중국의 붉은 별, 알렉산더 판초프의 마오쩌둥 평전 그리고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 2부작입니다.

 

마오쩌둥은 공과 과가 매우 뚜렸한 인물입니다. 그는 위대한 혁명가였지만, 무자비한 파괴자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 파괴자의 면모는 문혁의 광기로 잘 드러났죠. 에드거 스노의 붉은 별은 읽는 이로 하여금 대장정에 나섰던 혁명가 마오쩌둥의 위대한 혁명적 생애를 알려줄 것입니다. 르포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문학적 감수성이 있는 분들이라면 분명 맞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알렉산더 판초프나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 전기는 스노의 책에 비하면 매우 학술적인 책입니다. 무엇보다 읽을 거리가 매우 많습니다. 따라서 완독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혁명가적 생애와 무자비한 파괴자의 생애를 같이 알 수도 있습니다. 판초프가 쓴 평전보단 필립 쇼트가 쓴 평전이 보다 마오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쪽입니다. 아무튼 이 책들은 마오쩌둥을 알기 위해 읽어야할 책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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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1-02-20 0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오쩌둥 참 복잡한 인물입니다.. 얼른 이 리스트에 있는 책들 읽어봐야 되는데, 쉽지 않습니다 ㅠㅠ

NamGiKim 2021-02-20 00:49   좋아요 1 | URL
네 복잡한 인물이죠. 필립 쇼트의 마오 전기를 1달 전 쯤에 읽기 시작했는데, 요즘 복학하고 이것저것 복잡다다한 일들이 많다보니 진도가 잘 안나가네요. 그래도 2부에서 대약진 운동까지 읽었으니 복학하기 전까지는 읽을 것 같습니다.

MSS 2021-02-23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쇼트 책 제대로 읽진 못했지만... 디쾨터의 악의적 왜곡을 비판하는 부분은 인상적으로 읽은 기억이 납니다

NamGiKim 2021-02-24 11:08   좋아요 0 | URL
그 내용이 개정판 후기에 나올겁니다. 그 대약진 운동 부분에 달린 주석들을 보면 거기서도, 디쾨터가 의도적으로 과장했다는 것이 나오죠.
 

(이 글은 존 톨랜드의 저서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2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작성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전개양상은 엄밀히 따지자면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중심이 된 추축국과 미국·영국·소련·중국·프랑스 등이 중심이 된 연합국의 전쟁이었다추축국 안에도 헝가리나 루마니아 그리고 불가리아 등에서 차출된 그 나라 병력들이 있었지만그래도 역사적인 맥락에서 독일의 동맹세력으로써 알려진 이는 바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일 것이다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추축국(Axis Power)은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중심적인 나라들이었다그러나 일본은 지구반대편에 있었고지정학적인 부분에서 나치독일의 동맹국은 사실상 이탈리아 밖에 없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파시스트 선배다. 물론 1930년대 히틀러의 독일이 성장하고 군사력을 발휘하면서 그 위치는 히틀러가 더 앞서게 됐다.)

 

그러나 독일의 동맹국인 이탈리아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매우 무능력한 군대였다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의 침략은 거의 다 실패를 맞보아서 독일군의 지원을 받아 유지하는 신세였다대표적으로 이탈리아의 알바니아와 그리스 침공은 이탈리아군의 무능력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또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군은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티토의 빨치산에게도 연전연패를 맞보았다북아프리카전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탈리아군은 영국군에게도 계속 패배를 맞보았다.

(오토 슈코르체니, 히틀러가 아끼던 군인으로 ss친위대 소속이었다. ss에 있으면서 여러 특수작전을 전개했었다.)

 

이처럼 이탈리아군은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서 독일군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독일군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던 형편이었다북아프리카 전투가 지속되고 있던 1942년과 1943년 이탈리아는 영미 연합군의 대대적인 폭격을 받고 있었다거기다 독일의 롬멜 장군이 투입됐던 북아프리카 전투도 1943년 5월에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그로부터 2개월 뒤인 7월 연합군은 이른바 허스키 작전(Operation Huskey)을 감행하여 시칠리아 섬에 상륙했다.

 

1943년 7월 24일 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에 위협을 가하자 이탈리아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포함한 국가 파시스트당 내부에서도 무솔리니를 축출하려고 했다결국 왕에게 사임 요청을 받은 무솔리니는 실각했고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를 행정수반으로 임명됐다이탈리아의 지도자가 된 바돌리오는 두 달 뒤인 1943년 9월 8일 연합국과 휴전협정을 맺었다.

(무솔리니를 구출하기 위해 투입된 특공대, 여기에는 독일 공수부대인 팔슈름 야거도 투입됐다.)

 

당연히 무솔리니는 체포되었다체포된 무솔리니는 로마에서 161km 떨어진 아펜니노 산맥의 높은 봉우리인 그란사소 꼭대기 부근의 한 호텔에 감금되어 있었다거기다 연합군은 이탈리아 수도 로마를 향해 진격해 나갔다따라서 히틀러는 비록 도움은 안 되는 인물 무솔리니를 구출하기로 결심한다이것은 아돌프 히틀러 입장에서도 이 선택지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고그렇게 해서라도 연합군의 진격을 막아야 했다.

(무솔리니가 감금되어 있던 호텔과 인근 지역 위치)

 

무솔리니 구출작전을 위해 히틀러는 SS친위대 대위인 오토 슈코르체니(Otto Skorzeny)를 불렀다그는 키 190cm인 인물로 특수작전에 매우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오토 슈코르체니 휘하의 특공대가 편성되었다이 특공대는 독일 공수부대인 팔슈름 야거 출신들이었다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오토 슈코르체니와 107명의 특공대는 9월 12일 일요일 오후 1시 글라이더에 오라 이륙했고무솔리니가 감금되어 있던 곳에 착륙했다글라이더에서 나온 독일 군인 4~5명이 기관총을 설치하였고슈코르체니의 글라이더는 호텔에서 18m도 안 되는 거리에 착륙했다슈코르체니의 부대원들은 저항하는 경비병력을 쓰러뜨리고 무솔리니가 있는 방문을 열고 그를 구출했다.

(호텔 근처에 착륙했던 독일 특공대의 글라이더)

 

무솔리니를 만난 오토 슈코르체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그것은 지도자가 나를 보냈다당신은 이제 자유다였다이를 들은 무솔리니는 슈코르체니를 껴안았다고 한다또한 무솔리니는 나의 친구 아돌프 히틀러가 나를 버리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서 특공대원들에게 엄청난 감사의 표시를 했다고 한다무솔리니를 구출한 특공대원들은 목초지 경사면에서 겨우 안전하게 착륙한 피젤러슈토르히 소형 비행기에 올랐고이륙 과정에서 불가피할 추락의 위험이 있었지만비행기는 이륙했다.

(교전을 치르며 호텔 진입을 시도하는 독일 특공대)

 

구출된 무솔리니는 9월 14일 아침 일찍 동프로이센으로 향하여 히틀러를 만났고매우 고맙다는 표시를 히틀러에게 했다이 작전을 성공시킨 오토 슈코르체니는 영원히 히틀러가 아끼는 군인이 되었다거기다 무솔리니가 구출되자 독일인의 사기가 올랐다물론 히틀러가 그를 구출한 것은 연합군의 진격을 막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따라서 구출된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북부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즉 살로 공화국을 수립했다.

(구출되어 비행기에 오른 무솔리니, 오토 슈코르체니와 함께 찍었다.)

 

그러나 살로 공화국은 군대가 그리 많지 않았다따라서 이탈리아 전선에서 연합군에 맞서 싸웠던 대부분의 군대는 독일군이었다거기다 1941년에 점령되었던 유고슬라비아에선 티토가 이끄는 빨치산이 무솔리니의 권력 공백기를 틈타서 유고슬라비아 내에 있던 이탈리아군 거점 지역들을 단숨에 접수해버렸다따라서 거기서도 나치 독일은 이탈리아군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놓였었다결국 살로 공화국은 제대로 된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독일 꼭두각시 노릇(그 이전부터도 사실상 꼭두각시였지만)을 하다가 1945년 4월 25일 공식적으로 사라졌다그리고 무솔리니도 이탈리아 빨치산 유격대에 체포되어 총살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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