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베트남 전쟁이 공산주의 세력의 통일로 끝난 이후 당연히 베트남은 전후처리 과정을 거쳤다. 남베트남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난 이후 통일을 이룬 북베트남 정부는 과거 남베트남에 협력했던 이들에 대한 재교육 및 청산 작업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고, 학살당했다는 주장들이 과거 대한민국에서 정훈교육이나 반공교육 차원에서 많이 강조되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이러한 인권도 없고, 자유도 없다는 식으로 선전하는 차원에서 이용된 것이다. 물론 그 시기 대한민국 사회가 인식하는 현실 사회주의권은 말 그대로 1978년에 나온 똘이장군 수준의 상상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걸러야할 점이 있지만 말이다.

(보트피플들, 베트남 전쟁 이후 남베트남에 협력하던 이들은 이렇게 도망쳤다. 마치 쿠바혁명 이후 카스트로를 피해서 미국으로 망명한 공화당 지지자들 처럼 말이다.)

 

이러한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베트남 전쟁 이후 전후처리 과정에서 수백만 즉 200만 혹은 그 이상으로 죽었다는 일종의 유언비어가 퍼졌고, 과거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으로 참전하거나 남베트남에서 반독재운동 혹은 학생운동을 했던 이들이 토사구팽 당했다는 식의 주장들이 많이 퍼졌었다. 이러한 주장들은 정말 사실인 것일까?

 

우선 수백만이 학살당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이러한 루머의 출처의 근원을 찾는 건 많이 힘든 일이지만, 확실한건 현재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루머가 일부 티비 조선을 포함한 곳에서 각본대로 읽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는 것처럼 베트남 전쟁 이후 통일 베트남의 재교육 수용소에 대한 얘기 또한 상당히 과장되고 부풀려져서 알려졌다. 대표적으로 소련 시절 굴라그에 대한 얘기가 그러하다. 냉전시기 소련의 굴라그에 대해 엄청난 루머를 퍼뜨렸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최소 10배 이상의 수감자 수치를 과장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1980년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문서고가 개방이 되면서 그것이 매우 과장되었음이 드러났다.

(1918년부터 1953년까지 소련에서 선고된 사형선고와 감옥에 수감된 정치범의 숫자. 출처는 정정진 교수의 저서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p.200쪽이다.)

 

솔제니친이 쓴 <수용소 군도>라는 책에 따르면 수천 만 명의 죄수가 수감되었던 것처럼, 주장을 하지만 실제로 수감되었던 이의 숫자는 그것보다 한참 아래였다. 또한 영국의 반공주의 성향의 학자 로버트 콘퀘스트는 1937~1939년 사이 900만 명의 정치범이 감금되었고 이중 300만 명이 죽었다고 주장했었다. 물론 콘퀘스트의 자료에 따르면 그 이후에 거친 수감자는 그러나 더 많은 셈이다. 소련의 젬스코프 같은 학자가 문서고를 토대로 연구를 진행하면서 그 당시 반()혁명활동 판결을 받은 사람이나 살인, 강간 등의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이가 보내지는 노동수용소는 53, 규율이 느슨했던 노동이주지는 425개가 있었고, 여기에 토지가 몰수된 부농이 보내진 개방 특별지역이 있었다. 이곳 전부를 합해서 약 200만 명이 수용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물론 이 굴라그라는 곳이 단순히 감옥이 아닌 인근마을과 굴라그 수용소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말이다.

 

더 와 닿지 않는다면, 이걸 예시로 들어볼 수도 있다. 마리오 소사는 "1996년 역사상 가장 많은 550만 명이 미국의 형벌체계 하에 있다"1997AP 통신의 기사를 인용하며 전쟁 직전의 소련과 평화 시기의 미국을 비교한다. 이 숫자는 미국 성인 인구의 2.8%에 상당하는 규모다. 형벌체계 하에 있다는 것은 교도소 수감자와는 다소 다른 의미다. 여기에는 보호관찰까지 포함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2007년 말 기준 미국 법무부 통계는 730만 명이 교도소 수감, 보호관찰 등의 형태로 교정기관의 관리대상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2007년 말 기준 미국 성인의 3.2%가 수감되어 있거나 지역 공권력의 감시 하에 있다.

 

자세한 자료는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45981?no=245981#0DKU

 

지금까지 소련에 존재했던 굴라그에 대한 자료를 길게 이야기 했다. 소련의 사례를 예시로 든 이유는 일각에서 공산주의 정권의 학살 혹은 인권유린으로 알려진 사건들을 지나치게 부풀리거나 과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 이후 통일 베트남 정권이 단행했던 재교육 수용소 같은 경우에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많이 부풀려지거나 과장되는 이유는 확실하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상당한 옹호력을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서 폴포트의 학살을 다뤘던 영화 킬링필드가 강조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재교육 과정을 거치고 있는 사람들)

 

베트남 전쟁 이후 재교육 수용소에 대한 내용은 생각보다 자세하게 연구된 주제는 아닌 것 같다. 미국의 영화 혹은 다큐멘터리 감독은 켄 번즈(Ken Burns)2017년 거의 20시간 가까이나 되는 러닝타임의 베트남 전쟁 10부작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거의 몇 년 동안 모은 많은 이들의 인터뷰와 자료를 토대로 제작되었고, 북베트남군, 남베트남군, 미군, 반전운동가 그 외의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만들어졌기에 상당히 신빙성 있는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화인 10화에서는 잠시나마 재교육 수용소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결국 많은 이가 두려워하던 피의 대학살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남베트남의 시골에서는 수백 명 혹은 수천 명의 사람이 개인적인 혹은 정치적인 보복차원에서 살해되기도 했습니다. 응우옌반티에우 정권에 가담했던 장군부터 평범한 직원들까지 모두 재교육을 받았습니다. 남베트남군에 입대했던 사람은 3일간만 교육받는다고 했습니다. 장교들은 1달만 출석하라고 했죠.” (PBS 베트남 전쟁 10화중에)

 

남베트남 군장교로 참전했던 한 사람의 증언이 이어진다. 다큐멘터리에서 그가 한 증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어떤 이들은 짧은 기간 동안 캠핑을 간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저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7년 반 동안이나 재교육 캠프에 갇혔습니다. 마지막으로 풀려난 100명 중 하나였죠.” (PBS 베트남 전쟁 10화중에)

 

베트남 전쟁 이후 재교육 캠프에 수감된 이들은 짧게는 3일에서 1주일 혹은 1달 길게는 1년에서 3년 아주 길게는 10년 혹은 15년을 갇혔던 이들도 있었다. 최병욱 교수의 <베트남 근현대사>라는 책에는 재교육 수용소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남베트남 군인 전직 관료 등 잠재적 적대 세력으로 간주되던 100만 명 중 90%나 되는 사람들을 새 조국 건설에 동참시킨 아량은 높이 평가되나, 나머지 10만 명(재교육 대상자)에의 가혹한 처사는 통일 베트남 전권을 두고두고 괴롭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베트남 근현대사(2016년 개정판) p.173쪽을 참고함)

 

캐나다 출신 종군기자로서 호치민의 장례식과 닉슨의 크리스마스 폭격 등을 직접 목격했던 마이클 매클리어는 1980년대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원래는 다큐멘터리로 만들었지만, 1980년대 초에 책으로 출간 됐다. 마이클 매클리어는 자신의 책 저자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재교육 수용소에 대해 쓰고 있다.

 

이 서글픈 전쟁의 성격과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전쟁의 원인은 여전히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종전 후 남아 있던 미국의 전쟁 물자는 도시와 공장 건설에 사용되었고, 구정권은 철저히 숙청되었다. 그러나 피를 흘렸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150만 명이 노력봉사장에 배치되었으며, 20만 명에 이르는 고위 공무원과 중견 장교들은 재교육장(Re-education Camp)’으로 보내졌다. 즈엉반민(사이공 함락당시 항복문서에 서명한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615 저자 후기)

 

2002년 당시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를 집필한 베트남사 전공 교수인 유인선 교수는 2018년에 책 개정판을 내놓았다. 개정판에선 1986년의 도이모이 정책까지의 내용을 보다 확장했는데, 책에서 그는 재교육 수용소에 대해 언급했다.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과거 사이공 정부의 공무원·군인·사업가 등 최소한 수만 명은 각지에 설치된 재교육수용소에 억류되어 지위에 따라 몇 주일 내지 몇 년을 보내야 했다. 남부의 통합 후 10년이 경과한 1985년에도 수용소의 억류자 수는 수천 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트남의 역사(2018년 개정판) p.427을 참고함)

 

일단 이 책에서 나온 재교육 수용소의 수감자에 대한 수치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하게 판단해볼 수 있는 것은 일각에서 얘기하는 수십만이 죽었다거나 수백만이 재교육 수용소에서 죽었다는 루머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일부 억울한 사례가 없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몇몇 루머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많다. 거기다 당시 베트남의 인구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986년 도이머이를 하기 이전까지 베트남의 인구는 남북을 아울러 4,000만 명 안팎이었다. 그런데 통일 이후 공산당 정부가 수백만 명을 처형한 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손해 보는 일이고, 또한 그럴만한 행정체계가 갖추어진 것도 아니었다.

(베트남의 주석이었던 쯔엉던상, 그는 남베트남에서 학생운동을 했고 베트콩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베트콩이나 학생운동이 대량으로 토사구팽당했다는 루머가 있다. 물론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이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다. 물론 일부 처형된 사례가 있다고는 한다. 그러나 학생운동가들이나 반정부 종교인들 그리고 베트콩 출신들이 무조건적으로 토사구팽당한 것은 아니다. 2016년 당시 베트남 주석이었던 쯔엉던상의 경우 남베트남에서 학생운동하다가 베트콩이 된 케이스였고, 당시 베트콩의 지도급 위치에 있던 응우옌흐윽토나 호앙반타이 등의 인물들도 공산당 내에서 당적과 지휘를 계속 유지했었다. 이 루머에 대해 정리해보자면 극히 일부의 사례를 확대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베트남 재교육 수용소와 수백만 처형에 대한 루머를 다소 길게 정리했다. 이 글의 핵심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남베트남 패망 후 수백만이 처형당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2. 남베트남 패망 이후 베트콩이나 학생운동가들이 토사구팽 당했다는 것 역시 근거가 없다.

3. 일각에 알려진 재교육 수용소에 대한 루머는 한국의 탈북자들이 티비조선에서 퍼뜨린 것처럼 말 그대로 루머에 가까운 것들이 많다.

4. 남베트남 패망 이후 대규모의 학살을 공산당이 주도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일부 개인적인 보복에서 일어난 사례들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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