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필립 쇼트의 저작 마오쩌둥에 나오는 내용을 퍼온 겁니다. 읽던 도중 흥미롭게 읽어서 올려봅니다.)

 

“1968820일 밤, 소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해 프라하의 봄을 압살하고 체코의 개혁파 공산 정부를 무너뜨렸다.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어디서든 사회주의 체제가 위협당할 때는 소비에트 블록의 모든 국가들에게 이를 방어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이라고 불렸는데 공식적으로 유럽 지역에 한정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오가 보기에 이것은 소련이 중국을 침공할 수 있는 근거였다. 이듬해 봄, 마오는 선수를 치기로 마음먹었다.

 

지난 수년 동안 중국과 소련 국경선 부근에서 우발적으로 작은 충돌이 계속 일어났다. 하지만 196932일에 발생한 무력 충돌은 사전에 철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300명의 중국 병사가 흰색 위장복을 입고 어둠을 틈타 얼어붙은 우수리강을 건너 전바오섬에 도착했다. 이 섬의 러시아 이름은 다민스키섬이었다. 이 섬은 소련의 시베리아 지역 주요 도시인 하바롭스크에서 남쪽으로 240km 지점에 있었으며, 소련과 중국 간에 소유권 분쟁이 있었다. 중국 병사들은 각자 눈 속에 개인 참호를 파고 들어가 매복 공격을 준비했다.

 

다음 날 아침 중국은 이 섬을 향해 약간의 병사를 이동시켰다. 소련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였다. 중국군의 이동을 확인한 소련군은 정찰대를 보내 중국 병사들의 이동을 저지하게 했고, 그러자 잠복해 있던 중국 병사들이 일제히 발포했다. 소련은 보충 부대를 투입했고 중국 병사들은 결국 퇴각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 측은 죽거나 부상당한 병력이 30명이 넘었다. 같은 장소에서 2주 뒤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이번에는 규모가 더 컸고 소련은 60, 중국은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세 번째 충돌은 317일에 발생했는데, 이 충돌은 당시에는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다. 이 충돌에서 소련은 전차와 대포까지 동원했다.

 

마오의 계획은 놀랄 만큼 단순했다. 만일 소련이 중국의 주적이 된다면, “나의 적은 적은 친구라는 원칙에 따라 미국이 중국의 잠재적 동맹이 될 것이다. 비록 현재 미국이 중국의 또 다른 동맹인 베트남과 중국 남부 국경선 근처에서 잔인하고 파괴적인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지만, 어쨌든 마오의 계획은 그러했다.

 

전바오섬 충돌은 새로 당선된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에게 중국의 외교 정책 우선순위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납득시키려는 중국의 장기적 노력의 첫걸음이었다. 마오의 의도를 몰랐던 소련은 군사적 압력을 강화하여 중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오히려 마오가 노리는 바대로 소련과 중국의 충돌이 더 격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해 봄과 여름에 걸쳐 중소 국경 분쟁은 몇 배로 크게 증가했다. 모스크바는 바르샤바조약군의 개입할 수 있으며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강력하게 암시했다(이는 1958년 타이완 해협 사건 때 미국이 핵무기 공격을 내세워 위협했던 것과 똑같은 행동이었다). 소련 정부는 몽골 지역에서 대규모로 군비 증강을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국방 예산을 30% 늘렸다. 8월에는 민간 방위 계획이 베이징과 다른 주요 도시에서 시작되었고 수백만 명의 주민이 동원되어 방공호를 팠다. 핵 공격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치적 의도를 충분히 드러낸 마오는 그리 내키지 않는다는 태도를 적절히 보인 다음, 9월에 저우언라이와 소련 총리 알렉세이 코시긴(Aleksei Kosygin)이 회담을 여는 데 동의했다. 이 회담은 마치 과거 중국이 오랑캐들을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시절을 상기시키듯, 베이징 공항에서 진행되었다. 두 사람은 국경선을 현 상태로 유지하기로 하고, 국경 협상을 속개하며 더는 군사충돌이 없도록 하자는 데 합의했다. 이리하여 위기가 종식되었다.”

 

출처 : 마오쩌둥 2 p.418~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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