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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탈환 이후 발견된 집단 매장지)
후에 학살(Massacre at Hue)는 베트남 전쟁 당시 구정공세(Tet Offensive) 기간 동안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수천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1968년 구정 공세 당시 옛 황궁의 도시 후에(Hue)는 대략 1달 동안 전투 지역으로 바뀌었다. 후에에서는 단기간에 점령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도시를 탈환하려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맞서 전투를 치렀는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적잖은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들 중 수천 명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연합군의 후에 탈환 이후 대량의 공동묘지가 발견되었다.
종군기자 마이클 매클리어(Michael Maclear)가 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따르면 미군 전투지원사령부가 게릴라 포로 한 사람으로부터 가지고 있던 서류뭉치를 발견했는데, 그 문서에 따르면 ‘행정 공무원 1,892명, 정치인 48명, 악덕 지주 790명을 처형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미군은 구정 공세가 끝난 뒤 공식 발표에서 “후에 전투에서 희생된 민간인 숫자의 절반 이상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처형당한 순수한 민간인들이었다.”고 밝혔다.
아무튼 미국이나 남베트남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후에 전투에서 적잖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구정 공세 이후 후에에서 최소 3,000명 이상이 뭍힌 민간인 공동묘지가 발견되었다. 또한 일설에 따르면 2,800명 이상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하며, 많게는 5,700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이후 후에 학살의 수치는 6,000명 그리고 어떤 이들은 7,000명에서 8,000명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거기에는 “봐라 빨갱이들은 사람의 목숨을 파리처럼 안다.”라는 식의 논리도 들어가 있다. 따라서 후에 학살은 특히 반공주의자들 즉 주로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해 지지하거나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이처럼 후에 학살은 반공주의자들이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의 적국이었던 북베트남과 적대세력이던 베트콩에 대한 악마화 내지는 비판 및 비난의 수단으로 사용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2010년에 나왔던 게임 콜 오브 듀티 블랙옵스(Call of Duty Black Ops)에서도 잘 드러난다. 냉전 시대 CIA 첩보전을 다룬 블랙옵스는 중간에 베트남 전쟁을 다루는 데, 여기서 게임 주인공은 후에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북베트남군이 후에 민간인들을 보이는 데로 학살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영웅적으로 싸운 뒤 무사히 미군의 화력지원을 부른 이후 PT 보트에 타고 탈출한다. 10대 시절 이 게임을 했던 나 또한 게임 주인공이 정당한 전쟁을 치르는 것으로 착각했을 정도로, 이 게임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이런 식으로 합리화 시킨 것이다.
후에 학살은 한국사회에서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대두가 될 때, 인터넷 뉴스 댓글에 자주 언급되는 소재인 것 같다. 2017년 대통령 문재인이 베트남 정부에게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을 때, 나는 어떤 이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빨갱이들은 미라이 학살에서 미군이 학살한 것 보다 20배나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라고 언급한 댓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댓글에 따르면 미라이 학살 희생자는 300명인데 후에 학살 희생자는 6,000명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또한 학살을 저질렀고, 미군보다 훨씬 더 잔인했다는 주장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보았을 때 후에 학살은 한국에서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에 대해 우파적인 시각에서 해석하려는 이들이 자주 언급하는 소재다. 그러나 이 후에 학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후에 학살에 대한 반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대표적으로 미국의 진보적인 정치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와 언론학자 에드워드 해르먼(Edward Herman) 그리고 미국의 역사학자인 가레스 포터(Gareth Porter) 등이 있다. 이들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당시 자신들이 조사하고 찾은 사료와 증거자료들을 바탕으로 후에 학살이 미국과 남베트남 측에 의해 상당히 과장되고 각색이 되었다는 사실을 밝혔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 글에서 나는 과연 후에 학살에 숨겨진 또 다른 이야기가 무엇인지 얘기하고자 한다.
후에 학살에 대한 반론을 쓰기 전 미리 언급할 것이 있다. 이 글은 후에 학살에서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에 의한 처형이 아예 없었다거나 그들에 의한 무고한 희생 자체가 없었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글이 아니다. 다만 세간에 알려진 내용들이 다소 과장되고 맥락과 핵심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며 그러한 증거가 명확하기 때문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는 가레스 포터와 에드워드 해르먼이 1975년에 작성한 기사인 ‘후에 학살의 신화(The Myth of the Hue Massacre)’에서도 밝히고 있다. 우선 노엄 촘스키가 집필한 저서 <미국 대외정책론>에 따르면 후에 학살 신화를 뒷받침하는 기초문서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1968년 4월 사이공 정부(남베트남)가 발행한 보고서, 두 번째는 1969년 11월 미국 사절단이 공개한 포획문서 그리고 세 번째는 1970년 USIS의 직원 더글라스 파이크(Douglas Pike)가 발간한 긴 분석자료 등이다.
촘스키와 해르먼에 따르면 이들 문서의 내용이 면밀히 살펴볼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1950년대 당시 반공주의자들이 악의적으로 과장하고 각색했던 호치민의 토지개혁의 처형자 수치처럼 후에 학살 또한 사망한 민간인의 공식추계 수치는 미국 내의 정치적 사건에 따라 급증하였는데, 이는 구정 공세 이후 확산된 반전운동과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의 폭로의 충격과 맥을 같이 했다. 존슨 정부 이후 등장한 미국의 닉슨 정부에서 1969년 11월 미라이 학살이 폭로되어 전국적으로 충격 및 반전여론이 격화되었는데, 같은 해 미국 사절단이 공개한 후에 학살 포획 문서의 공개는 미라이 사건의 충격을 완화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고 촘스키와 해르먼은 주장한다.
1968년 4월 말 사이공 정부의 선전부대에서 발행한 보고서에서는 대략 천 명이 처형되었고, 그 중 절반이 생매장되었다고 나와 있다. 이 얘기가 나왔을 무렵 서방 언론인 중 아무도 그 시체가 별견되었다는 무덤지역을 가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얘기에 대해서는 의문이 전혀 제기 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사진작가 마르크 리보(Marc Riboud)는 지방서장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300명의 정부측 민간 공무원이 처형되었다고 주장하는 장소 중의 한 곳을 보여 달라는 요청을 했는데 거듭 거절당했다. 또한 그가 헬리콥터를 타고 예정했던 장소로 가려는 도중 조종사가 “그 지역이 안전하지 못한 지역”이라고 주장하면서 착륙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9개월 뒤인 1969년 11월에 베트콩 포로로부터 얻은 포획문서(앞에서 마이클 매클리어 책에서 언급한 대목을 보라)를 발견했는데, 이 문서에 따르면 후에 전투 기간 동안 2,748명의 살해를 용인했다는 것이다. 즉 이 문서의 공개 된 이후 USIS에서 근무했던 더글라스 파이크는 이 문서를 토대로 이른바 후에 학살 신화를 구성했고, 여기서 지나친 과장 및 단어와 맥락의 왜곡이 있었다. 이 문서를 토대로 프란시스 피츠제럴드는 “1968년 후에에서 공포의 한 달 동안 베트콩과 북베트남군대가 대략 3,000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그는 파이크가 대략적으로 끼워맞춘 증거와 마찬가지로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사이공측 얘기를 모두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여기에 더 나아가 로버트 톰프슨(Robert Tompson)은 저서 ‘No Exit From Vietnam’에서 후에 학살의 수치를 5,700명으로 늘렸다. 물론 이러한 얘기 및 문서들은 전혀 확인되지 않았고, 이런 현상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나 근거가 제시되지도 않았다. 심지어 미국 상원의원인 윌리엄 색스비(William Saxbe) 상원의원은 더 부풀려 “북베트남인에 의해 살해된 사람은 7,000명이나 된다.”라고 주장했다. 이 수치는 후에 전투에서 사망한 민간인 숫자의 대부분이나 더 많은 수치이기도 하다. 문서의 내용을 각색한 더글라스 파이크 또한 더 나아가 5,800명의 시민이 후에에서 학살되었다고 주장했다.
더글라스 파이크를 포함하여 그들이 과장의 토대로 삼았던 문서의 진실은 무엇일까? 우선 1969년 11월에 공개된 문서를 토대로 얘기하자면, 후에 전투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1892명의 행정요원과 39명의 경찰관, 790명의 악덕지주, 남베트남군 대위 6명, 중위 2명 그리고 소위 20명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들이 확보한 이 포획문서에도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이 소위 민간인을 처형했다는 문장이나 그것을 암시하는 부분이 전혀 없다. 따라서 여기서부터 미국과 사이공 측의 해석을 확증하여 판단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문서의 주된 내용은 “후에라는 특정 지역에서 거둔 군사적 승리”를 설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포획문서를 언급하거나 인용한 신문사나 후에 학살측 강경론자들은 “베트콩의 잔인성을 재확인”하는 데 급급하여 이런 세세한 면모는 살피지도 않았다. 쉽게 말해 맥락무시를 저지른 것이다.
또한 위에서 확인한 이 문서의 2,748명의 명단에는 전투 중에 죽거나 다친 적군의 숫자를 포함하고 있었고, 문서상에서 등장하는 단어 행정요원의 원본의미는 베트남어의 ‘테(te)’를 잘못 번역한 것이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테’라는 단어는 ‘꼭두각시 인물’이라는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민간 행정관과 군인이 다 같이 포함된다. 또한 이 명단에서 즉시 처형되야할 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후에 시의 비밀경찰 간부들뿐이었으며, 그 밖의 명단은 정확히 말하자면 ‘재교육’시켜야 할 명단들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의 역사학자 게리스 포터는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민간인을 처형시킬 의도가 있음을 보여주는 어떠한 포획문서도 지금까지 나온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포터는 ‘US Political Warfare in Vietnam’에서 “문서상으로 살펴본 결과 베트콩의 전반적 전략은 일반대중, 조직화된 종교단체, 심지어 하급경찰관까지 동원하여 그 지지를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포터가 했던 주장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후에 사건의 참된 교훈은 평화적이고 정치적인 통제가 완벽한 상황하에서 사이공 정권과 협력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기본정책은 사이공측 탄압기구 핵심 인물이 아니라면 결코 보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핵심인물의 경우에도 그들이 혁명군에 대한 정항을 포기함에 의해 마지막 단계에서 구제될 수 있다.”
거기다 후에 학살에 대해 사실상 논외가 되어버린 사실도 있다. 그것은 바로 미군의 폭격 및 화력전으로 인한 대량살상 및 파괴다. 전투 기간에 후에는 초토화가 됐다. 미국의 폭격으로 도시의 65%에서 70%가 파괴되었다. 2만개의 가옥 중에서 1만 8천 개가 파괴되거나 손실을 입었다. 통계다마 조금씩은 다르지만 촘스키가 쓴 미국대외정책론에 따르면 후에의 17,134개의 가옥 중에서 9,776채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3,169채 이상이 크게 파손된 것으로 공식 집계되었다고 한다. 이런 유혈적 재탈환 과정에서 벌러진 전투에서 죽은 민간인 수는 남베트남 측 통계에 의하면 3,776명이다.
당시 공군차관 타운젠드 후프스(Townsend Hoopes)는 탈환작전에서 건물의 80%가 잿더미 화되었다고 하는데 그 부서진 폐허 속에 최소 2,000명 이상의 민간인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후프스는 후에 시가지에서 베트콩 측은 폭격으로 학살당한 2천 명의 시신을 무덤에 매장했다고 주장했다. 즉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후에 탈환 이후 발견된 시신들 중 대다수가 미군 폭격에 의한 희생자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이 절대 과장이나 선전선동이라고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미군의 폭격이 후에 시 전체를 초토화했기 때문이다. 촘스키의 저서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미국의 공격에 따른 민간인 사망자 중 일부는 베트콩측 요원에 의해 자신들의 사망자와 함께 공동무덤에 매장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민간인 대부분은 연합군에 의해 불도저로 공동무덤에 밀어 넣어진 것이다. 베트콩측은 폭격으로 죽은 2,000명의 희생자를 대규모 무덤에 매장했다고 주장했다. 오버도퍼는 점령의 희생자 2,800명이 공동무덤에서 발견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미국의 폭격으로 죽음 사람들이 아니라, 베트콩과 북베트남 측의 정치적 학살에 희생된 사람들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는 공보부의 주장을 전적으로 신뢰한 듯하다. 폭스 버터필드(Fox Butterfield)는 1975년 4월 11일자 뉴욕 타임즈지에서 심지어 무덤 하나에 3,000명씩이나 배당하고 있다! CIA의 전 정보분석가 사무엘 A. 아담스(Samuel A. Adams)는 1975년 3월 26일자 월스트리트 저널지에서, “남베트남측과 공산주의측의 사망자 추계는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사이공측은 자신들이 약 2,800명의 시체를 파묻었다고 말한다. 베트콩 경찰보고서는 그 숫자를 약 3,000으로 적고 있다”고 썼다. 그와 같은 말을 한 베트콩 경찰 보고서는 알려진 바 없다. 또한 아담스로서는 2,800이라는 숫자가 문서를 조작할 필요성에 의해 짜맞추어진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해보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이 공동 무렵 기사 중 흥미로운 것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독자적인 기자들이 그 발굴현장에 가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며, 또 거듭되는 그러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정확한 장소를 밝혀 내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한 기자는 최초로 공개된 무덤현장에 참석했던 한 미국 해병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해병은, 믿을 만한 사람들로서 신중하게 선별된 기자들만 그곳에 참석했으며 시체의 점검은 허용되지 않았고, 또 자신은 불도저가 동원됐음을 시사하는(당시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은 불도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바퀴자국과 밀어 낸 흔적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무덤을 조사한 유일한 서방측 의사인 캐나다의 알제 베네마(Alje Vennema)박사는 미국과 사이공측의 계산은 그가 조사한 무덤에 묻혀 있던 희생자 수보다 7배나 많게 공식주장된 477명이 아니라, 총 67명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 대부분은 상처자국이 있어서 전투의 희생자인 것 같았으며 또 그가 본 시체는 대부분 군복을 입고 있었다.“
출처: 미국 대외정책론 p.413~414
뿐만 아니라 후에 탈환 이후 남베트남 정부는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에 협력한 이들을 색출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고, 이 과정에서 자경단에게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일단 후에 탈환 이후 베트콩이나 북베트남측 지지자들은 당연히 사이공 정부의 보복에 의해 가장 희생되기 쉬운 입장에 처해 있었으며, 이후 사이공 군대나 자경단에 의해 대대적인 보복살해가 있었음을 밝혀주는 증거도 발견됐다. 그 대표적인 증언은 이탈리아의 저널리스트 오리아나 팔라치(Oriana Fallaci)의 증언인데 그는 후에에서 온 프랑스 신부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요컨대 사이공 군대에 의해 해방된 후 1,100명이 죽임을 당했다. 대부분이 학생, 대학교수, 성직자였다. 후에 시의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은 베트콩에 대해 그들이 동조한 사실을 결코 감추지 않았다.”
2,800명에서 3,000명 그리고 4,000명에서 5,700명이 학살당했다는 후에 학살에 대해 결론을 내리자면,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해 보았을 때, 미국이나 사이공 정부 측이 제시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한 수천 명의 민간인 학살’은 사실상 매우 근거가 희박한 증거에 입각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앞서 말했듯이 미군의 기계화된 화력에 죽은 이들이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에 의해 죽은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을 가능성이 더 높다. 또한 미국 역사학자 게리스 포터의 분석처럼 “미국과 사이공 측 선전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대대적인 정치적 살인이 후에의 혁명군 전략에서는 생각되지도 않았으며 또 그 전략과 일치하지도 않았음”을 보여준다. 즉 베트콩 포로로부터 얻은 2,784명의 명단이 적힌 문서는 대다수의 경찰관과 공무원 그리고 군인들은 처형자 리스트가 아닌 재교육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근거와 자료를 통해 보았을 때, 후에 학살은 1950년대 호치민의 토지개혁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에 의해 상당히 과장되고 각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의 처형으로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나오는 미군 참전용사 크리스마스 중령의 증언이 그렇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베트콩 몇 사람이 즉결 처분 기구를 결성한 후 정부조직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갔다.”는 증언이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중령은 또 다른 증언도 남겼는데, “북베트남 지휘관 한 사람이 이를 알아채고 곧바로 중지시키는 것을 봤다.”는 것이다. 어쨌든 후에 학살은 상당히 과장되거나 각색되어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점에서 후에 학살의 또 다른 이면을 들어봐야 할 때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미국이나 남베트남 정부가 만들어낸 신화, 왜곡, 과장 등은 당연히 비판적으로 봐야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미국대외정책론, 촘스키, 임채정, 일월서각, 1985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을유문화사, 2002
What Really Happened in Hue? It was the Americans themselves who made the victims, Kaspar Mengelberg Pages 372-381
The Myth of the Hue Massacre 1975년 기사, Volume 13, No.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