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after 4,000 years of struggling against nature and foreign invaders and the last 25 years, prior to the revolution, of struggle against French colonialism. I don’t think that the people of Vietnam are about to compromise in any way, shape, or form about the freedom and independence of their country, and I think Richard Nixon would do well to read Vietnamese history, particularly their poetry, written by Ho Chi Minh.(베트남 인민은 4천년 동안 자연과 외국 침략자들을 상대로 줄기차게 싸워왔습니다. 프랑스와 식민투쟁에서도 이겼습니다. 베트남의 완전한 자주 독립을 스스로 쟁취해나갈 것입니다. 리차드 닉슨이 베트남 역사와 베트남의 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호치민이 쓴 시를 잘 읽어 음미했으면 합니다.)”

 

위에 인용한 구절은 1972년 북베트남을 방문한 반전운동가이자 여배우인 제인 폰다(Jane Fonda)가 했던 연설이다. 베트남 전쟁이 사실상 미국의 패배로 끝나가던 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남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를 목표로 함과 동시에 이미 베트남 주변국인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침공하여 수십만에 달하는 동남아시아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는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자행했다. 이미 구정 공세를 통해 미국 내에서 격해진 반전운동은 미국의 수많은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을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도록 만들었고, 미녀배우로 유명했던 제인 폰다 또한 그 중 일부였다.

 

반전운동이 격해지는 과정에서 반전 시위대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또 다른 진실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현재도 국부로 평가받고 있는 지도자 호치민(Ho Chi Minh)이다. 반전운동 시위대들 중에는 적잖은 이들이 사회주의에 대해 다시 바라보게 되었고, 당시 미국에 맞서 반제국주의 투쟁을 벌이고 있던 호치민이라는 인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1971년 펜타곤 직원인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가 미국의 1급 기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를 세상에 폭로하면서 그 전쟁의 추악함은 더 극명하게 드러났다. 펜타곤 페이퍼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의 민중과 대중적인 독립운동 조직은 호치민과 그가 조직한 베트민(Viet Minh) 뿐이었다. 이처럼 미국은 베트남의 독립운동 세력을 방해하기 위해 부도덕한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적으로 규정되었던 호치민은 베트남의 상징과도 같은 위대한 독립운동가였다. 1890519일 응에안 성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부터 반프랑스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1911년 베트남을 떠나 전 세계를 떠돌아 다니며, 경험을 쌓았다. 1919년 그는 베르사유 회담 당시 베트남 인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호소하기 위해 파리 베르사유 궁전까지 가서 이를 청원했던 인물이었다. 이후 레닌의 러시아 혁명에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되었으며, 모스크바로가서 코민테른 요원으로 훈련받았다. 그리고 그 이후 중국에 가서 활동하며 1930년 홍콩에서 현재의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던 인물이다. 그는 30년간의 해외생활을 보냈고, 30년 동안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에 맞서 독립은 쟁취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는 국제정세를 읽고 이를 잘 이용하는 실용적이고 탁월한 지도자였으며, 무엇보다 30년 동안의 해외생활을 했던 인물이었기에, 1949년 스탈린을 만나러 소련을 방문한 것이 첫 해외방문이었던 마오쩌둥하고도 확연한 차이가 있는 인물이었다. 이번에 학교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빌려서 읽게 된 세계 지도자 열전 시리즈 중 하나인 호치민에서는 그가 미국에 있을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는데, 상당히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뉴욕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호치민은 주로 주방 요리사나 식당의 심부름꾼 노릇으로 연명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그가 받은 인상은, 미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서로 다른 계급들이 향유하는 자유의 정도가 각자의 부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출처: 호치민 p.31

 

194130년 만에 베트남에 돌아온 호치민은 자신의 해외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베트남을 침략한 일본에 맞서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며 무장투쟁에 나섰는데, 그 조직이 바로 베트남 독립 동맹 즉 줄여서 베트민이었다. 당시 호치민은 중월 국경지대인 까오방의 한 동굴에서 혁명투쟁을 시작했는데, 책에 나온 그 내용은 상당히 감동적이면서도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곳의 밤은 지독히 추웠다. 너무나 추워 잠조차 들 수 없는 밤이면 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은 장작불을 피워놓고 그 주위에 웅크리고 앉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 혁명의 과정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호치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밤을 지새웠다. 그는 또한 자기에게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나타내고자 인근의 산봉우리를 카를 마르크스 산정이라 이름 붙이고, 근처의 개울을 레닌 시냇물이라 명명했다.”

 

출처: 호치민 p.65

 

호치민은 젊은 시절부터 프랑스 식민주의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에 맞서 싸웠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다시 침략한 프랑스에 맞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는 온갖 화력과 병력을 동원하여 베트민을 공격했지만, 호치민과 그를 따르는 위대한 명장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은 게릴라전으로 맞서 싸웠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The Battle of Dien Bien Phu)에서 프랑스군의 최정예 병력 11,721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디엔비엔푸 전투가 베트남의 승리로 끝나면서, 프랑스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결국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제네바 회담 이후 남베트남에 들어선 국가는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었고, 1949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가 내세웠던 바오다이 황제(Bao Dai)의 베트남국(States of Vietnam)을 계승한 나라였다. 단순히 바오다이 황제에서 그가 수상으로 내세웠던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 대통령이 되었을 뿐이고, 프랑스 대신 미국이 그 나라를 지원했을 뿐이었다. 책 또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며, 결국 베트남 전쟁의 명분에서 당연히 호치민과 공산당에게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그러한 점에서 베트남 전쟁 또한 호치민의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책에는 베트남의 역사를 연구한 미국의 역사학자 윌리엄 J. 듀이커의 분석이 인용되어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실상 베트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3개월 전에 이미 두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북부의 공산주의 세력과 남부의 프랑스 세력이 그러했다. 이후의 대립 투쟁은 궁극적으로 거기에 기초하여 전개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처: 호치민 p.90

 

즉 미국이 치른 베트남 전쟁 또한 이런 맥락이 존재하는 것이며, 호치민이나 북베트남 공산당 그리고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The National Liberation Front of South Vietnam)은 프랑스에 이어 미국에 빌붙은 민족반역자들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바로 베트남 전쟁의 명백한 본질이다. 심지어 이 책은 미국에서 열전 시리즈로 만들어 진 것이며, 미국인의 시각에서 보아도 베트남 전쟁 자체가 결과적으로 명분이 호치민과 북베트남 공산당에게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자신들이 일으킨 침략전쟁에서 수백만이나 되는 베트남인들을 폭격과 고엽제 투하로 학살했다는 점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기에, 당연히 지금까지도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엄밀히 따지자면, 어린 시절 읽게 되는 위인전에서 벗어나 인물의 생애를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 중 하나다. 물론 미국에서 출판된 책이기에, 다소 미국 편향적인 시각이 투영되어 있다. 이번에 읽은 호치민의 경우에도 현재는 과장으로 드러난 토지개혁 10만 처형설이 그대로 언급되긴 하지만, 내용 자체는 대체로 객관적인 시각에서 서술됐다. 물론 북베트남 정권의 토지개혁은 호치민 스스로가 강도높은 자아비판을 했고, 여러 연구와 베트남측 문서가 공개되면서 희생자 수치가 10만 명이 아닌 3,000명에서 15,000명사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밝혀졌지만, 이 책이 나온 연도가 냉전이 끝나던 1990년이라는 점과 다소 미국 우파적 시각에서 서술된 점을 고려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호치민은 한 평생을 베트남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바친 위대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항일, 항불 그리고 항미투쟁을 전개한 구국의 80년 생애를 보냈으며, 미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1969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을 계승한 공산당 정치인들과 민중은 6년간의 항전끝에 베트남의 통일을 이룩했다. 이것은 그의 위대한 투쟁적 생애가 베트남 인민들로 하여금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음을 보여준다. 책 마지막 구절에 나온 내용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겠다.

 

호치민은 살아생전 전쟁의 끝맺음을 보지 못했다. 196993, 그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여하튼 그는 두 대륙에 걸쳐서 역사의 진로를 변화시킨 셈이다. 그는 1966년의 라디오 대담에서 스스로 말했듯이 자신의 전 생애를 조국의 자유화에 바쳤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Why? People : 케네디 Why? 인물탐구학습만화
박민정 지음, 이두원 그림, 윤재웅 감수 / 예림당 / 201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에 미국의 대통령 존 F. 케네디에 대해 제법 관심이 생겨 Why 시리즈에서 출간한 어린이 위인전을 읽었다. 물론 케네디에 대해 알기 위해선 푸른숲 출판사에서 출간한 케네디 평전 I,II권을 읽는게 맞지만, 그냥 입문하는 차원에서 읽어보게 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인들에게 지금까지도 인기가 많은 인물이다. 비록 그는 2년이라는 아주 짧은 재임 기간을 가진 대통령이지만, 그가 추구했던 뉴프론티어 정신은 현재 미국인들에게도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지금이야 코로나 바이러스로 항로가 차단되어 가기 힘들지만, 뉴욕의 국제공항 이름이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이다. 나 또한 3년전 미국여행을 여기서 시작하여 1달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처럼 케네디는 현재 미국에서도 인기가 많다.

우선 이 책에 대해 얘기하자면, 뭐 전형적인 스트레오타입의 위인전이라 할 수 있다. 성실함, 독서를 좋아하고 꾸준함, 배려심 깊음, 도전적 인물 그리고 공부잘하고 똑똑한 인물 등의 긍정적인 측면으로 그려지는 위인전이니 솔직히 전형적이다 못해 다소 지겨운 레파토리를 보는 느낌이었다. 위인전이니 당연히 부정적인 행적은 언급이 안되거나 각색되어 표시되는데, 특히 케네디에 대한 위인전은 그것이 더더욱 많이 느껴졌다.

우선 그의 가족에 대한 얘기가 그렇다. 위인전에선 성실한 리더십의 지도자형 생애를 각색하기 위해 케네디의 9남매 부모님이 엄청나게 자상하고 헌신적으로만 그려진다. 물론 똑똑한 케네디의 남매들에게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예전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나왔듯이, 이는 로즈마리 케네디의 이야기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케네디의 아버지는 그의 여동생 로즈마리 케네디를 지적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가문의 수치로 여겼다. 그리고 그를 정신병원에 강제로 가두어 버렸다. 심지어 가문의 수치로 여겨 학교도 안보냈고,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 1940년대 전두엽 절제술을 했다가 그나마 갖고 있던 지능과 언어능력을 모두 상실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계의 길을 걸었던 케네디를 위해 가족은 로즈마리를 정신병원에 보냈고,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가족에게도 버림받은 로즈마리는 2005년 1월에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책에서 0.1%도 언급되지 않으며, 여동생을 표현한 그림은 나와도 자세히 소개되지 않는다.

케네디의 아내 재클린 케네디에 대한 각색도 너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재클린 케네디는 화려한 미모와는 달리, 사치행각이 어마무시한 인물이었다. 그녀의 사치행각은 태생적으로 부유한 집안인 케네디마저도 경악을 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이야기는 ‘차트를 달리는 남자‘에서도 아주 상세히 소개된 바 있다. 그러나 이 위인전에선 화려한 패션감각과 문화예술의 확산으로 각색되어 나온다.

마지막으로 더 비판할 것을 뽑자면, 어린시절에 대한 필요이상의 내용 할애와 반공주의 미화를 들 수 있다. 우선 이 위인전은 필요이상의 어린시절 내용을 할애했다. 그냥 책의 절반이상이 어린시절 내용이다. 물론 위인전이니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각색되어 많이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케네디의 중요한 내용은 그가 정치를 하던 시절과 대통령이 된 시절이다. 대통령때 했던 행적과 정치인 당시 그의 내용은 너무 축약된 느낌이다. 즉 찬양하는 책을 만드려면 그의 정치행적을 보다 강화해야 했는데, 이 책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공주의에 대한 지적은 여기서 언급하자면, 그의 실책과 과오가 은근슬쩍 덮어진다. 대표적으로 쿠바 침공과 미사일 위기에 대한 내용이다. 1961년 피그스만 침공은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침략행위였다. 책에서 정상적인 집단으로 규정되는 쿠바 망명자들은 바티스타 정권 시기 미국에 부역하여 인민을 착취하던 압제자들이었다. 이들이 쿠바 혁명 이후 피델 카스트로가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자, 이들은 미국으로 도망쳐 CIA로부터 훈련을 받아 쿠바 전복을 위해 준비했었다.

케네디의 전임인 아이젠 하워는 실제로 쿠바 사회주의 정권 전복 훈련을 실행했고, 실제로 시도할 계획이었다. 이는 케네디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그 또한 미국의 자유주의를 숭배했고,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실질적인 군사적 위협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 보여줬다.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한건, 카스트로의 도움 요청도 있었지만 미국이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겨냥하기 위해 이탈리아와 터키에 핵미사일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이 쿠바 미사일 위기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위인전에선 이런사실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여러 인물들에 대해 위인전을 쓰는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인전에 나온 인물들이 과연 실질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인지는 객관적인 평가가 요구되는 작업이다. 나 자신은 사회주의자이지만, 한국에서 백범 김구나 안창호 혹은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김영옥과 같은 우익 계열 인물이 위인전이나 평전이 나오는거 자체엔 반대하지 않지만, 객관적인 시각에서 위인이라고 생각할지에 대한 문제는 별개라 생각한다.

즉 그러한 입장에서 미국의 대통령 케네디나 닉슨, 레이건, 클린턴, 부시 그리고 오바마와 같은 인물을 평가한다면, 나는 이들이 매우 잘못된 인물이고 비판받아 마땅한 제국주의자들이라 생각하며, 따라서 위인전에 등장하기에 너무나도 부끄러운 인물들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비판이 필연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책에서 미화되는 케네디의 정책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케네디는 미국 민주당 계열에게 부강한 미국과 약자를 위한 미국을 꿈꿨던 걸로 극찬받지만, 대외정책에 있어선 침략자였고 범죄자였다 생각한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 쿠바의 사태가 그렇고, 책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은 베트남 개입이 그렇다. 케네디는 베트남에서 반민중적인 친미정권인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원하다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온갖 반인륜적 전쟁범죄가 베트남 민중들을 대상으로 자행됐다.

이 응오딘지엠 정권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형하고 구금했으며, 조금이라도 자신의 정치견해와 맞지 않으면 탄압했다. 1963년 사이공에서 한 승려의 분신자살은 그 체제가 얼마나 타락하고 부패한 체제였는지를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다.

책에선 전혀 언급되지 않은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도 사실 케네디의 작품이었다. 일제시기에는 친일 해방 이후 남로당 경력이 있던 박정희의 경력을 알았던 케네디는 그를 의심했지만, 박정희의 신하적 충성을 보고 한국을 반공주의 국가의 보루로 만들었다. 그 악랄한 박정희를 이용해서 말이다. 그 결과 한국은 극단적 반공주의라는 후유증에서 못벗어난 사회가 되어 버렸으며, 공산주의의 ‘공‘자와 사회주의의 ‘사‘자만 나와도 탄압과 검열이 들어가는 매카시즘 국가가 되고 말았다.

이제 케네디에 대해 결론 내릴 차례다. 이러한 사실관계를 생각해보았을때, 전쟁범죄자이자 반공주의자인 케네디는 아이들에게 위인으로서 존경받기에는 너무나도 낯부끄러운 인물이다. 이 책은 그런 인물을 리더십이나 근면성실 그리고 인재인 정치인 및 대통령으로 미화한 책이다. 그렇다고 미화를 하면서 인물을 제대로 다룬 것도 아니라 부족한점도 많다. 이런 점을 생각했을때, 이 책은 그냥 입문서로도 부족한 삼류위인전일 뿐이다. 뉘른베르크법이 적용된다면 전범으로서 재판에 서야할 인물 미화는 그만하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361212일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Chiang Kai-shek)가 시안(Xian)에서 자신의 휘하 병력에게 체포되어 구금되는 일이 발생했다.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의 체포를 주도한 이는 바로 만주 지역 군벌의 아들이었던 장쉐량 즉 장학량이었다. 장제스를 구금한 장학량이 그에게 요구한 것의 핵심은 바로 이거였다. 바로 일본에 맞서 싸우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장학량은 장제스를 납치해서 대일전을 촉구한 것일까?

 

1920년대 중국은 손문의 주도아래 제1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었다. 그러나 제1차 국공합장은 1925년 손문의 사망과 더불어 장제스가 반공주의 노선으로 돌아서면서 결렬됐다. 당시 국민당은 좌파와 우파로 대립해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장제스를 주축으로 한 우파가 공산당의 출출과 소련 및 코민테른의 영향력 배제를 요구하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국민당이 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추구하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 19263월에 일어났다. 그 사건이 바로 중산함 사건이다. 장제스는 중산함의 회항을 공산당의 반란음모로 규정하고 광주(광저우)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지휘관 이지룡을 체포한 뒤 보로딘을 비롯한 18명이 소련 고문단 철수를 요구했었다. 중산함 사건을 시작으로 장제스는 국민당 정부 안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장제스 정권의 공산당 탄압은 1927년에 들어 극심해졌다. 217일 장제스 휘하의 국민당 군대는 저장성 성도인 항저우를 점령했고, 공산당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이러자 공산당의 지원을 받는 상하이 노동조합은 상하이 함락을 염두에 두고 총파업을 개시했는데, 이후 장제스는 4.12 쿠데타를 획책하여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 및 학살을 자행했다. 장제스의 4.12 쿠데타 이후 3주 동안 최소 1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는데, 이것은 마오쩌둥을 포함한 공산당원들이 홍군을 조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제1차 국공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마오쩌둥 휘하의 공산당은 농촌을 기반으로 홍군 근거지를 건설하고 정강산에서 무장투쟁을 이어나갔다. 이것이 정강산 투쟁이었다. 홍군은 농촌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나갔지만, 그만큼 국민당의 포위 및 전투도 격렬해졌다. 국민당군의 포위전은 제5차 초공전까지 진행되었다. 4차 초공전의 경우 장제스의 경우 최소 4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여 중화 소비에트에 대한 공세를 감행했다. 1933년에 있던 5차 초공전에선 장제스는 나치 독일의 저명한 군사전략가인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kt)를 군사고문으로 초빙하고, 미국으로부터 5,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 전쟁비용을 마련했으며, 10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이른바 토치카 작전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국민당군의 포위 믹 군사 작전으로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19341016일 강서성과 서금을 포기하고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은 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군사작전에 나서는데 그것이 바로 20세기 전쟁사에서 상징적인 작전인 대장정(Long March)이다. 마오쩌둥 휘하의 10만 군대는 1년간의 대장정을 거치며 군대가 8,000명에서 1만 명으로 급감했다. 당연히 수백대의 항공기를 동원한 국민당군의 공격과 추격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홍군은 다두허 도하 작전이라는 역사적인 기적을 창조해냈다. 이는 에드가 스노(Edgar Snow)의 저작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에 상세히 나와 있다. 이와같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중국 공산당은 민심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중국 공산당에 대한 국민당의 추격과 군사적 압박은 지속되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를 계기로 부르주아 계급을 포함한 광범위한 반파시스트 연합전선전략이 강조됨에 따라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항일투쟁의 목소리를 높였고, 국민당에게도 항일연합전선을 추진하자고 주장했다. 물론 국민당은 공산당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기에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런 과정 속에서 19361212일 이른바 시안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쿠데타는 신속히 진행되어 그날 아침 6시까지는 모든 일이 끝났다. 국민당 측의 동북군과 서북군은 시안을 완전히 장악했고, 자다가 기습을 당한 남의사 병력은 무장해제당한 뒤 체포되었으며, 참모부 요원 전원은 시안 영빈관 숙소에서 포위당해 사실상 구금 상태에 놓였다. 경찰국장 사오리쯔가 사로잡혔으며, 이에따라 시안 시 경찰은 모두 반란군에게 투항했다. 난징 정부의 폭격기 50대와 조종사들은 비행장에 억류당했다. 장제스를 체포하는 과정에선 양측간의 교전이 일어났다. 새벽 5시에 장제스를 체포하기 위한 작전이 전개되었고, 궁극적으로 장제스는 체포됐다. 시안 사건을 일으킨 이들이 장제스에게 요구한 것은 8개 항목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난징 정부를 개편하고 모든 정파를 참여시켜 구국의 공동책임을 분담케 할 것.

2. 내전을 즉각 전면 중지하고 무력항일 정책을 채택할 것.

3. 상하이의 애국운동 지도자들 7명을 석방할 것.

4. 모든 정치범을 사면할 것.

5. 인민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6. 애국적 단체를 조직할 인민의 권리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것.

7. 손문 박사의 유지를 이행할 것.

8. 전국구국회의를 즉각 소집할 것.

 

이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은 바로 만주 군벌의 아들이었던 장학량이었다. 장제스를 체포한 군인들은 장제스에게 각하를 쏠 생각은 없습니다. 저희들은 단지 각하께서 조국을 이끌고 일본과 싸우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장학량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쿠데타 이후 장학량은 중앙정부와 각 성의 지도자 그리고 중국인에게 짤막한 성명을 발표했으며, “총통이 각성하도록 당분간 서안에 체류하도록 요청했다. 즉 앞에서 언급한 8개 항목에 대한 발표인 것이다.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 얘기하자면, 그렇다면 왜 장학량은 장제스를 납치하여 대일전을 촉구한 것일까?

 

그 이유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중국 상황과 관련이 있다. 장제스가 제1차 국공합작을 와해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던 가운데, 그는 이른바 북벌도 진행했다. 쉽게 말해 중국 내에서 군벌전쟁도 벌인 것이다. 장제스 북벌에 대한 맞대응으로 일본은 중국 산동으로 출병하여 무력 대응을 하기도 했으며, 1928년에는 만주 군벌 장작림이 장제스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장작림 폭살 사건을 획책했다. 더 나아가 일본은 19319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국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을 수립했다.

 

그리고 1932년 만주 전역을 점령한 이후엔 이른바 상해 사변을 일으켜 전투를 치렀는데, 군함 80척과 항공기 300대를 투입했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물론 국민당군이 일본에 맞서 항일전을 안 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규모의 병력에도 불구하고 다소 무능하거나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마오쩌둥>전기 저자 필립 쇼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대대적인 침략을 개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는 침략자 일본을 저지하기 보단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을 축출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장제스가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 안한 것은 아니었다. 1932년부터 전쟁을 준비했지만, 그는 공산당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고 결정했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치욕적인 양보를 거듭했다. 즉 이런 부분에서 마오쩌둥은 국민당에 대해 부끄러운 무저항 정책을 추친하며 중국의 국가이익을 팔아넘기고 있다.”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시안사건에서 장제스를 구금했던 장학량은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장작림의 아들이었다. 장작림의 아들이었던 장학량은 1931년 만주사변 과정에서 굴욕적인 양보를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이행해야 했다. 따라서 그의 시각에선 합리적으로 장제스가 항일전은 안하고 공산당 토벌에만 앞장서고 있다.” 판달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 장제스는 장학량의 요구를 받아들여 중국 공산당과의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다. 물론 장학량은 대략 60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비슷한 시기 19377월 일본은 노구교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중국 대륙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쳐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했다. 중일전쟁이 격해지면서 일본은 중국에서 광란의 학살극을 벌였다. 대표적으로 난징에선 3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본군에 의해 무차별 학살당했다. 그러나 국공합작으로 단결한 중국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은 세월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중국 전선이라는 깊은 수렁에 빠졌다. 2차 국공합작은 형식적인 차원에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국민당과 공산당의 신뢰관계는 1941년 신사군 사건을 계기로 완벽히 무너졌다. 당연히 여기에서 가장 큰 책임은 국민당에게 있었다.

 

참고문헌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 아카데미, 1992

 

거꾸로 읽는 세계사, 유시민, 푸른나무, 1999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창비, 1999

 

-현대 중국사 (), 이매뉴얼 C. Y. , 서정희(), 까치, 2013

 

중국의 붉은 별, 에드거 스노, 홍수원 안양노 신흥범(), 두레, 2013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2015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심규호(), 민음사, 2017

 

마오쩌둥 1, 필립 쇼트, 양현수(), 교양인, 20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내가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를 가지게 된 것은 아마 메갈리아가 뜨면서 부터인데,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른다는 말로 일괄하게 되지만, 그래도 얘기하겠다.

 

페미니즘 운동이 확산되면서 거기에 대한 반대급부로 안티 페미니즘도 나타났는데, 이 두 진영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둘 다 어떠한 의제에서 양극단으로 빠지는 느낌이 강하다. 우선 내가 한국의 페미니즘 진영에 실망을 많이 느꼈던 점은 첫번째로는 친서방주의라 할 수 있고, 두번째로는 오바마나 힐러리식의 반공주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안티 페미니즘쪽 진영은 뭐 그냥 거의 폐급으로 쓰레기 같은 반공주의자들이 많아서, 일정부분 옳은 말을 해도 싫게 된다.

 

근데 아직도 나는 두쪽 얘기 들었을 때, 두 쪽의 의견에서 어 이거는 페미가 옳은 말했고, 이거는 안티페미가 옳은 말 했네. 이렇게 느끼는 경우가 적잖게 있다.

 

자 나만의 결론!

 

여윾시 쿠바가 훌륭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후에 탈환 이후 발견된 집단 매장지)

 

후에 학살(Massacre at Hue)는 베트남 전쟁 당시 구정공세(Tet Offensive) 기간 동안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수천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1968년 구정 공세 당시 옛 황궁의 도시 후에(Hue)는 대략 1달 동안 전투 지역으로 바뀌었다후에에서는 단기간에 점령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도시를 탈환하려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맞서 전투를 치렀는데이러한 과정 속에서 적잖은 민간인이 사망했다이들 중 수천 명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으며연합군의 후에 탈환 이후 대량의 공동묘지가 발견되었다.

 

종군기자 마이클 매클리어(Michael Maclear)가 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따르면 미군 전투지원사령부가 게릴라 포로 한 사람으로부터 가지고 있던 서류뭉치를 발견했는데그 문서에 따르면 행정 공무원 1,892정치인 48악덕 지주 790명을 처형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또한 미군은 구정 공세가 끝난 뒤 공식 발표에서 후에 전투에서 희생된 민간인 숫자의 절반 이상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처형당한 순수한 민간인들이었다.”고 밝혔다.

 

아무튼 미국이나 남베트남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후에 전투에서 적잖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고 한다구정 공세 이후 후에에서 최소 3,000명 이상이 뭍힌 민간인 공동묘지가 발견되었다또한 일설에 따르면 2,800명 이상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하며많게는 5,700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이후 후에 학살의 수치는 6,000명 그리고 어떤 이들은 7,000명에서 8,000명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거기에는 봐라 빨갱이들은 사람의 목숨을 파리처럼 안다.”라는 식의 논리도 들어가 있다따라서 후에 학살은 특히 반공주의자들 즉 주로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해 지지하거나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이처럼 후에 학살은 반공주의자들이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의 적국이었던 북베트남과 적대세력이던 베트콩에 대한 악마화 내지는 비판 및 비난의 수단으로 사용된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관점은 2010년에 나왔던 게임 콜 오브 듀티 블랙옵스(Call of Duty Black Ops)에서도 잘 드러난다냉전 시대 CIA 첩보전을 다룬 블랙옵스는 중간에 베트남 전쟁을 다루는 데여기서 게임 주인공은 후에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그러나 그 과정에서 북베트남군이 후에 민간인들을 보이는 데로 학살하는 장면을 목격하고영웅적으로 싸운 뒤 무사히 미군의 화력지원을 부른 이후 PT 보트에 타고 탈출한다. 10대 시절 이 게임을 했던 나 또한 게임 주인공이 정당한 전쟁을 치르는 것으로 착각했을 정도로이 게임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이런 식으로 합리화 시킨 것이다.

 

후에 학살은 한국사회에서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대두가 될 때인터넷 뉴스 댓글에 자주 언급되는 소재인 것 같다. 2017년 대통령 문재인이 베트남 정부에게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을 때나는 어떤 이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빨갱이들은 미라이 학살에서 미군이 학살한 것 보다 20배나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라고 언급한 댓글을 읽은 적이 있다그 댓글에 따르면 미라이 학살 희생자는 300명인데 후에 학살 희생자는 6,000명이라는 것이다따라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또한 학살을 저질렀고미군보다 훨씬 더 잔인했다는 주장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보았을 때 후에 학살은 한국에서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에 대해 우파적인 시각에서 해석하려는 이들이 자주 언급하는 소재다그러나 이 후에 학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후에 학살에 대한 반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대표적으로 미국의 진보적인 정치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와 언론학자 에드워드 해르먼(Edward Herman) 그리고 미국의 역사학자인 가레스 포터(Gareth Porter) 등이 있다이들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당시 자신들이 조사하고 찾은 사료와 증거자료들을 바탕으로 후에 학살이 미국과 남베트남 측에 의해 상당히 과장되고 각색이 되었다는 사실을 밝혔고주장했다따라서 이 글에서 나는 과연 후에 학살에 숨겨진 또 다른 이야기가 무엇인지 얘기하고자 한다.

 

후에 학살에 대한 반론을 쓰기 전 미리 언급할 것이 있다이 글은 후에 학살에서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에 의한 처형이 아예 없었다거나 그들에 의한 무고한 희생 자체가 없었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글이 아니다다만 세간에 알려진 내용들이 다소 과장되고 맥락과 핵심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며 그러한 증거가 명확하기 때문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다이는 가레스 포터와 에드워드 해르먼이 1975년에 작성한 기사인 후에 학살의 신화(The Myth of the Hue Massacre)’에서도 밝히고 있다우선 노엄 촘스키가 집필한 저서 <미국 대외정책론>에 따르면 후에 학살 신화를 뒷받침하는 기초문서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첫 번째는 1968년 4월 사이공 정부(남베트남)가 발행한 보고서두 번째는 1969년 11월 미국 사절단이 공개한 포획문서 그리고 세 번째는 1970년 USIS의 직원 더글라스 파이크(Douglas Pike)가 발간한 긴 분석자료 등이다.

 

촘스키와 해르먼에 따르면 이들 문서의 내용이 면밀히 살펴볼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무엇보다 1950년대 당시 반공주의자들이 악의적으로 과장하고 각색했던 호치민의 토지개혁의 처형자 수치처럼 후에 학살 또한 사망한 민간인의 공식추계 수치는 미국 내의 정치적 사건에 따라 급증하였는데이는 구정 공세 이후 확산된 반전운동과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의 폭로의 충격과 맥을 같이 했다존슨 정부 이후 등장한 미국의 닉슨 정부에서 1969년 11월 미라이 학살이 폭로되어 전국적으로 충격 및 반전여론이 격화되었는데같은 해 미국 사절단이 공개한 후에 학살 포획 문서의 공개는 미라이 사건의 충격을 완화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고 촘스키와 해르먼은 주장한다.

 

1968년 4월 말 사이공 정부의 선전부대에서 발행한 보고서에서는 대략 천 명이 처형되었고그 중 절반이 생매장되었다고 나와 있다이 얘기가 나왔을 무렵 서방 언론인 중 아무도 그 시체가 별견되었다는 무덤지역을 가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얘기에 대해서는 의문이 전혀 제기 되지 않았다프랑스의 사진작가 마르크 리보(Marc Riboud)는 지방서장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300명의 정부측 민간 공무원이 처형되었다고 주장하는 장소 중의 한 곳을 보여 달라는 요청을 했는데 거듭 거절당했다또한 그가 헬리콥터를 타고 예정했던 장소로 가려는 도중 조종사가 그 지역이 안전하지 못한 지역이라고 주장하면서 착륙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9개월 뒤인 1969년 11월에 베트콩 포로로부터 얻은 포획문서(앞에서 마이클 매클리어 책에서 언급한 대목을 보라)를 발견했는데이 문서에 따르면 후에 전투 기간 동안 2,748명의 살해를 용인했다는 것이다즉 이 문서의 공개 된 이후 USIS에서 근무했던 더글라스 파이크는 이 문서를 토대로 이른바 후에 학살 신화를 구성했고여기서 지나친 과장 및 단어와 맥락의 왜곡이 있었다이 문서를 토대로 프란시스 피츠제럴드는 “1968년 후에에서 공포의 한 달 동안 베트콩과 북베트남군대가 대략 3,000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했다당연히 그는 파이크가 대략적으로 끼워맞춘 증거와 마찬가지로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사이공측 얘기를 모두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여기에 더 나아가 로버트 톰프슨(Robert Tompson)은 저서 ‘No Exit From Vietnam’에서 후에 학살의 수치를 5,700명으로 늘렸다물론 이러한 얘기 및 문서들은 전혀 확인되지 않았고이런 현상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나 근거가 제시되지도 않았다심지어 미국 상원의원인 윌리엄 색스비(William Saxbe) 상원의원은 더 부풀려 북베트남인에 의해 살해된 사람은 7,000명이나 된다.”라고 주장했다이 수치는 후에 전투에서 사망한 민간인 숫자의 대부분이나 더 많은 수치이기도 하다문서의 내용을 각색한 더글라스 파이크 또한 더 나아가 5,800명의 시민이 후에에서 학살되었다고 주장했다.

 

더글라스 파이크를 포함하여 그들이 과장의 토대로 삼았던 문서의 진실은 무엇일까우선 1969년 11월에 공개된 문서를 토대로 얘기하자면후에 전투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1892명의 행정요원과 39명의 경찰관, 790명의 악덕지주남베트남군 대위 6중위 2명 그리고 소위 20명이 처형되었다고 한다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들이 확보한 이 포획문서에도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이 소위 민간인을 처형했다는 문장이나 그것을 암시하는 부분이 전혀 없다따라서 여기서부터 미국과 사이공 측의 해석을 확증하여 판단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왜냐하면 그 문서의 주된 내용은 후에라는 특정 지역에서 거둔 군사적 승리를 설명한 것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이 포획문서를 언급하거나 인용한 신문사나 후에 학살측 강경론자들은 베트콩의 잔인성을 재확인하는 데 급급하여 이런 세세한 면모는 살피지도 않았다쉽게 말해 맥락무시를 저지른 것이다.

 

또한 위에서 확인한 이 문서의 2,748명의 명단에는 전투 중에 죽거나 다친 적군의 숫자를 포함하고 있었고문서상에서 등장하는 단어 행정요원의 원본의미는 베트남어의 (te)’를 잘못 번역한 것이었다여기서 등장하는 라는 단어는 꼭두각시 인물이라는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민간 행정관과 군인이 다 같이 포함된다또한 이 명단에서 즉시 처형되야할 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후에 시의 비밀경찰 간부들뿐이었으며그 밖의 명단은 정확히 말하자면 재교육시켜야 할 명단들이었다이에 따라 미국의 역사학자 게리스 포터는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민간인을 처형시킬 의도가 있음을 보여주는 어떠한 포획문서도 지금까지 나온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더 나아가 포터는 ‘US Political Warfare in Vietnam’에서 문서상으로 살펴본 결과 베트콩의 전반적 전략은 일반대중조직화된 종교단체심지어 하급경찰관까지 동원하여 그 지지를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포터가 했던 주장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후에 사건의 참된 교훈은 평화적이고 정치적인 통제가 완벽한 상황하에서 사이공 정권과 협력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기본정책은 사이공측 탄압기구 핵심 인물이 아니라면 결코 보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리고 핵심인물의 경우에도 그들이 혁명군에 대한 정항을 포기함에 의해 마지막 단계에서 구제될 수 있다.”

 

거기다 후에 학살에 대해 사실상 논외가 되어버린 사실도 있다그것은 바로 미군의 폭격 및 화력전으로 인한 대량살상 및 파괴다전투 기간에 후에는 초토화가 됐다미국의 폭격으로 도시의 65%에서 70%가 파괴되었다. 2만개의 가옥 중에서 1만 8천 개가 파괴되거나 손실을 입었다통계다마 조금씩은 다르지만 촘스키가 쓴 미국대외정책론에 따르면 후에의 17,134개의 가옥 중에서 9,776채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3,169채 이상이 크게 파손된 것으로 공식 집계되었다고 한다이런 유혈적 재탈환 과정에서 벌러진 전투에서 죽은 민간인 수는 남베트남 측 통계에 의하면 3,776명이다.

 

당시 공군차관 타운젠드 후프스(Townsend Hoopes)는 탈환작전에서 건물의 80%가 잿더미 화되었다고 하는데 그 부서진 폐허 속에 최소 2,000명 이상의 민간인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고 주장했다또한 후프스는 후에 시가지에서 베트콩 측은 폭격으로 학살당한 2천 명의 시신을 무덤에 매장했다고 주장했다즉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후에 탈환 이후 발견된 시신들 중 대다수가 미군 폭격에 의한 희생자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 된다이것이 절대 과장이나 선전선동이라고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미군의 폭격이 후에 시 전체를 초토화했기 때문이다촘스키의 저서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미국의 공격에 따른 민간인 사망자 중 일부는 베트콩측 요원에 의해 자신들의 사망자와 함께 공동무덤에 매장되었다그리고 나머지 민간인 대부분은 연합군에 의해 불도저로 공동무덤에 밀어 넣어진 것이다베트콩측은 폭격으로 죽은 2,000명의 희생자를 대규모 무덤에 매장했다고 주장했다오버도퍼는 점령의 희생자 2,800명이 공동무덤에서 발견되었다고 말하고 있다그러나 그는 그들이 미국의 폭격으로 죽음 사람들이 아니라베트콩과 북베트남 측의 정치적 학살에 희생된 사람들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그는 공보부의 주장을 전적으로 신뢰한 듯하다폭스 버터필드(Fox Butterfield)는 1975년 4월 11일자 뉴욕 타임즈지에서 심지어 무덤 하나에 3,000명씩이나 배당하고 있다! CIA의 전 정보분석가 사무엘 A. 아담스(Samuel A. Adams)는 1975년 3월 26일자 월스트리트 저널지에서, “남베트남측과 공산주의측의 사망자 추계는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사이공측은 자신들이 약 2,800명의 시체를 파묻었다고 말한다베트콩 경찰보고서는 그 숫자를 약 3,000으로 적고 있다고 썼다그와 같은 말을 한 베트콩 경찰 보고서는 알려진 바 없다또한 아담스로서는 2,800이라는 숫자가 문서를 조작할 필요성에 의해 짜맞추어진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해보지 못했음이 분명하다이 공동 무렵 기사 중 흥미로운 것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독자적인 기자들이 그 발굴현장에 가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며또 거듭되는 그러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정확한 장소를 밝혀 내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한 기자는 최초로 공개된 무덤현장에 참석했던 한 미국 해병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그 해병은믿을 만한 사람들로서 신중하게 선별된 기자들만 그곳에 참석했으며 시체의 점검은 허용되지 않았고또 자신은 불도저가 동원됐음을 시사하는(당시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은 불도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바퀴자국과 밀어 낸 흔적을 보았다고 주장했다아마도 무덤을 조사한 유일한 서방측 의사인 캐나다의 알제 베네마(Alje Vennema)박사는 미국과 사이공측의 계산은 그가 조사한 무덤에 묻혀 있던 희생자 수보다 7배나 많게 공식주장된 477명이 아니라총 67명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들 대부분은 상처자국이 있어서 전투의 희생자인 것 같았으며 또 그가 본 시체는 대부분 군복을 입고 있었다.“

 

출처미국 대외정책론 p.413~414

 

뿐만 아니라 후에 탈환 이후 남베트남 정부는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에 협력한 이들을 색출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고이 과정에서 자경단에게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일단 후에 탈환 이후 베트콩이나 북베트남측 지지자들은 당연히 사이공 정부의 보복에 의해 가장 희생되기 쉬운 입장에 처해 있었으며이후 사이공 군대나 자경단에 의해 대대적인 보복살해가 있었음을 밝혀주는 증거도 발견됐다그 대표적인 증언은 이탈리아의 저널리스트 오리아나 팔라치(Oriana Fallaci)의 증언인데 그는 후에에서 온 프랑스 신부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요컨대 사이공 군대에 의해 해방된 후 1,100명이 죽임을 당했다대부분이 학생대학교수성직자였다후에 시의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은 베트콩에 대해 그들이 동조한 사실을 결코 감추지 않았다.”

 

2,800명에서 3,000명 그리고 4,000명에서 5,700명이 학살당했다는 후에 학살에 대해 결론을 내리자면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해 보았을 때미국이나 사이공 정부 측이 제시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한 수천 명의 민간인 학살은 사실상 매우 근거가 희박한 증거에 입각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또한 앞서 말했듯이 미군의 기계화된 화력에 죽은 이들이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에 의해 죽은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을 가능성이 더 높다또한 미국 역사학자 게리스 포터의 분석처럼 미국과 사이공 측 선전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대대적인 정치적 살인이 후에의 혁명군 전략에서는 생각되지도 않았으며 또 그 전략과 일치하지도 않았음을 보여준다즉 베트콩 포로로부터 얻은 2,784명의 명단이 적힌 문서는 대다수의 경찰관과 공무원 그리고 군인들은 처형자 리스트가 아닌 재교육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근거와 자료를 통해 보았을 때후에 학살은 1950년대 호치민의 토지개혁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에 의해 상당히 과장되고 각색되었음을 알 수 있다물론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의 처형으로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예를 들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나오는 미군 참전용사 크리스마스 중령의 증언이 그렇다그의 증언에 따르면, “베트콩 몇 사람이 즉결 처분 기구를 결성한 후 정부조직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갔다.”는 증언이다그러나 크리스마스 중령은 또 다른 증언도 남겼는데, “북베트남 지휘관 한 사람이 이를 알아채고 곧바로 중지시키는 것을 봤다.”는 것이다어쨌든 후에 학살은 상당히 과장되거나 각색되어 알려져 있다이러한 점에서 후에 학살의 또 다른 이면을 들어봐야 할 때라고 생각하며따라서 미국이나 남베트남 정부가 만들어낸 신화왜곡과장 등은 당연히 비판적으로 봐야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미국대외정책론촘스키임채정일월서각, 1985

 

베트남 10000일의 전쟁마이클 매클리어유경찬을유문화사, 2002

 

What Really Happened in Hue? It was the Americans themselves who made the victims, Kaspar Mengelberg Pages 372-381

 

The Myth of the Hue Massacre 1975년 기사, Volume 13, No. 8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레이스 2021-05-13 2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페이퍼네요!

NamGiKim 2021-05-13 23:51   좋아요 0 | URL
반공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필요한 자료가 참 많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구려.